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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5. 영예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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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7,004회 작성일 16-10-24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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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5. 영예군인
김련희 북녘동포 icon_mail.gif
기사입력: 2016/10/01 [15:58]  최종편집: ⓒ 자주시보
▲ 조선인민군 전차부대들의 고속기동전훈련에서 펼쳐진 진격장면이다. 사진에 나타난 전차는 1992년식 중땅크 <천마-92>들이다. 북은 이렇듯 멋따기 훈련이 아니라 실전과 같은 훈련을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다치는 병사들도 많은가 보다. 이것도 분단의 한 아픔이 아닐 수 없다.    ©자주시보

 

최고사령관 명령을 받들고 동기훈련을 진행하던 2005년 1월 부대에서는 기계화부대 이동 중에 차사고가 있었다.
거기에서 군의관으로 훈련을 따라갔던 남편이 그만 차 사고로 허리 부상을 입고 군의소로 후송되었다.

 

부대의 가족들이 나의 남편의 회복을 위해 걱정해주며 매일 병문안을 와주었고 나를 대신해 우리 집의 모든 일들을 도맡아 해주었다.
군의들과 간호원들의 지극한 정성으로 남편은 인츰 회복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2007년에 제대되어 영예군인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우리 가정은 군인생활을 마감하고 드디어 평양을 떠난 지 10년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지방에서의 다년간 군인가족생활을 통해 나는 모든 면에서 한 단계 성숙되고 발전한 것 같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조건이 좋을 때는 다 모르지만 제일 어렵고 힘들 때 그 사람의 인간됨을 검열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지방에서 10년간의 군인가족생활을 하면서 인민들과 군인들사이의 혈육으로 이어지는 끈끈한 인간애를 절실하게 느꼈고 군관과 병사간의 형제같은 친근함과 애병정신을 읽을 수 있었으며 군관가족들이 농사를 짓고 짐승을 길러 병사들에게 더 많은 고기를 먹일 수 있는 정책을 펼치는 당의 군인사랑을 심장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나는 평양에 돌아와 10년 전 지방에 내려가기 전에 다니던 김책공업종합대학 양복점에 들어갔고 남편은 같은 김책공업종합대학병원 의사로 배치를 받았다.

 

▲ 북 여성들의 태권도     ©

 

집은 대학 옆에 있는 중구역 교구동에 배정받았고 딸은 집 가까이에 있는 중구역 동안고등중학교로 전학하였다.
딸은 지방에서 배운 태권도 기술로 해서 학교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체력검정이나 체육경기 때마다 주석단에 나가 전교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주군 하였다.
딸은 성격이 밝아 금방 학급동무들과 친숙해 졌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 김련희 북녘동포의 딸 리연금 씨     ©자주시보

나는 딸을 키우면서 한 번도 아쉽거나 섭섭하거나 애를 태운 기억이 전혀 없었고 언제나 내 딸이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딸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고 특히 건강이 나쁜 엄마걱정으로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도맡아 하군하였다.

 

남편은 영예군인이여서 누구보다도 당의 배려와 국가적 혜택을 많이 받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여러 가지 보약들과 일반가정약들을 정기적으로 보장해 주었고 주마다 각종 수산물과 고기를 공급해주었고 청류관이나 옥류관, 향만루에 가서 식사할 수 있도록 표를 보내주었다.
명절이면 옥류관이나 여러 봉사단체들에서 이동봉사를 나왔고 준비하여온 노래공연도 해주군 하였으며 대학병원에서도 많은 관심을 돌려주었다.
식당이나 문화시설, 관광시설, 그 어디를 가도 “의사, 교원, 영예군인 우선 봉사합니다” 라는 글이 붙어있어 사회적으로 영예군인들을 우대하는 기풍이 서있다.
봄철에 한두 달 식량공급을 전량 해주지 못하고 보름배급을 줄때에도 의사, 교원, 영예군인만은 식량을 전부 공급하도록 하였다.

 

우리는 10년간의 군인가족생활에서 단련된 모습으로 각자 맡은 혁명과업수행에서 언제나 남들보다 앞장섰다.

 

남편은 대학병원에 제대군인들은 많지만 단 한 명뿐인 영예군인이여서 선생들의 거울이었고 본보기였다.
언제나 병원에서 제기되는 어렵고 힘든 일의 제일 앞에는 남편이 서 있었고 애를 먹고 있던 렌트겐 촬영기 문제도 남편이 솔선 나서 완벽하게 해결하여 보건신문과 대학신문에도 여러 번 실리게 되었다.

 

▲ 낙랑구역영예군인 수지일용품공장, 북은 영예군인들에게도 일을 통해 사회에 제 몫을 다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고 한다.

 

남편은 열정적이고 성실했으며 정이 많은 사람이여서 자기 것을 아끼지 않고 남들에게 모두 배려하는 성격이었다.
국가에서 영예군인을 위해 귀한 수산물을 보내오면 맛있는 매운탕을 끓여 대학병원에 입원해있는 지방학생환자들에게 나누어주군 하였다 
그리하여 대학기숙사생활을 하는 지방생들은 우리 남편을 친형처럼 좋아하고 따랐다.

 

부모님은 10년 동안 떨어져 있다가 다시 돌아온 맏딸이 너무 반가워 자주 우리 집에 오셨고 항상 함께 있고 싶어 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주말이면 부모님 집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내군 하였다.

 

남동생은 나보다 3살 아래인데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가다나니 군사복무를 하지 못해 군관인 매부를 많이 따랐다. 
대학졸업생들은 곧바로 직장 취직하는 것이 아니라 3년 동안 자기 전공부분의 로동현장에 가서 현실 체헙을 하게 된다.

 

남동생은 대학을 졸업하고 김책제철소에 가서 3년 동안 로동을 하였는데 처음으로 집을 떠나 지방에서 로동생활을 하는 것이 안쓰러워 부모님 몰래 동생에게 때때로 용채돈을 보내주군 하였다. 
지금은 중앙청년회관 약전지도교원으로 일하고 있고 금수산기념궁전의 주파수안정기술을 연구해 당의 배려를 많이 받은 능력 있는 직접회로 전문기술자이다.

 

성격이 쾌활하고 유모적이여서 사람들과의 돈독한 인간관계를 잘 맺는다.
그의 안해는 같은 대학동기로써 대동강텔레비죤수상기공장 기술과 기사로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시부모님을 온갖 정성을 다해 잘 모시고 큰 가정을 알뜰하게 꾸려나가고 있다.

 

딸이 한명 있는데 할머니의 기질을 닮았는지 소학교시절부터 노래를 잘 불러 큰 인기를 모았고 현재 금성고등중학교에 입학하여 전문 음악가로 자라나고 있다.

 

막내 여동생은 나보다 6살 아래인데 대학을 졸업하고 피복합영회사에서 일하고 있으며 시어머니를 모시고 모란봉구역에서 살고 있다.
여동생은 누가 막내가 아니랄까봐 40살이 된 지금도 부모님께 응석을 부리고 있고 어리광이 몸에 배어있다.

 

우리 가문에 가장 걱정거리가 여동생이 아직까지도 자식이 없는 것이다.
병원을 찾아다니며 여러 가지 치료도 해보았지만 아마 더는 자식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동생을 볼 때마다 그 점이 제일 안쓰럽고 측은해서 입양이라도 하라고 권고하였지만 동생은 그냥 남편과 단둘이서 살겠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동생의 남편이 참 이해심이 많은 것 같다.
그의 남편은 보안성에서 복무하는데 인정 많고 안해를 너무나 사랑해서 옆에서 놀림도 많이 받는데 안해가 생리적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면서 안해에게 꿈뻑 죽는다.

 

여동생은 아기가 없어서인지 우리 딸을 무쳑 고와했는데 좋은 음식이 생기거나 이쁜 옷이 생기면 우리 딸에게 먼저 가져다 주군하였다.
아마 내가 자주 아파서 병원입원생활을 하니 나의 딸이 안쓰러워 더욱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병이 심해져 입원치료를 받으면서 동생에게 딸이 걱정되어 내가 죽을 수가 없다고 하자 나보고 련금이는 자기가 잘 키울테니 언니는 마음을 놓고 가도 된다고 농담을 하군하였다.

 

 

▲ 북의 백세잔치, 북은 부모형제 유대감이 강하다. 특히 노인들은 자녀들이 손주들을 데리고 찾아오는 것을 그렇게 기뻐한다. 남녘과 똑 같다.     © 통일부

 

▲ 무슨 나라의 경사스런 일이 있었던 지 북의 가족들이 뉴스보도를 함께 보며 박수를 함께 치고 있다. 가족들이 함게 tv를 즐겨보는 것도 남녘과 같다.     ©

 

주말마다 우리 3형제가 부모님 집에 다 모이면 10명의 인원이 북적거려 사람사는 집 같다.
대동강맥주는 아버지의 담당이여서 10ℓ 받아놓고 기다리고 계시고 어머니가 명태와 낙지를 준비해 놓으신다.
우리 형제들은 몸만 가는 것도 부모님에겐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 류경안과병원 조감도, 눈 모양의 유리창만 봐도 안과병원임이 한 눈에 알린다. 북녘도 요즘 병원을 새롭게 개건하거나 새로 건설하는 열풍이 불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특히 사회주의의 장점인 무상보건제도의 강화를 위해 최근 주사기 공장까지 현지지도했다. 하지만 예방의학 중심이어 병이 많지 않보니 치료술과 제약 기술에서는 부족점이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전엔 정신질환자가 없었는데 요즘은 좀 생겨나고 있어 치료를 해야하는데 정신질환 관련 약이 부족하다고 한다. 간염 치료제도 자본주의에 비해 뒤져있는지 간염에 의한 사망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김련희 씨도 간염에 의한 여러 합병증으로 고생을 했다고 한다.    ©자주시보


하지만 우리 집에 항상 기쁨만 있은 것도 아니다.

 

그날도 주말이여서 형제들이 부모님 집에서 돼지고기 전골을 맛있게 먹으며 즐겁게 놀고 저녁에 서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남편이 병원 근무일이여서 딸과 함께 왔던 나도 저녁에 집으로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속이 메슥거리며 온몸이 떨리고 힘들어졌다.
나는 집까지 가지 못하고 도중에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에서 전부 토하고 겨우 집으로 가는데 그렇게 가깝던 집이 천리 길처럼 멀어보여 혼자 힘으로 도무지 갈수 없을 것 같았다.

 

딸의 부축을 받으며 여러 번 화장실을 들리며 집이 아니라 곧바로 대학병원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보더니 육중독이 왔다면서 입원수속을 하고 링겔을 달았다.

 

저녘 11시 링겔을 달았는데 좀처럼 차도가 없이 헛소리를 치며 고열이 나더니 다음날 낮이 되어서야 서서히 열이 내리고 병세가 가라앉기 시작하였다.

 

어머니는 병원에 와서 자신이 해준 전골을 먹고 쓰러졌다며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온가족이 다 꼭 같이 먹었는데 제일 약골인 내가 육중독에 걸린 것이다.

 

나는 일주일동안 치료를 받고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병도 나았고 이제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번 일이 나를 완전히 쓰러뜨리는 첫 시작이었다는 것을 알수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중국에 려행을 갔던 시누이가 온다고 하여 평양역전에 마중나갔다.
시아버지가 중국에서 오랜 세월 계시다가 조선에 넘어오신 분이여서 중국에 맏시형이 살고 있다.

 

중국에 사는 오빠를 만나고 돌아오는 시누이를 보면서 나도 우리 아버지가 더 늙으시기 전에 중국의 조카들을 만날 수 있게 해드려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없어지지 않았다.
나는 주말에 아버지에게 내가 중국에 가서 형제들을 만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도록 조선에 초청해야겠다고 의향을 말씀드렸다.
아버지도 흔쾌히 승인하셔서 그길로 중국의 사촌언니에게 편지를 하였다.

 

20일정도 되었을까, 중국의 사촌언니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너무 보고 싶다며 지금은 바빠서 자리를 비울수가 없으니 가능하면 련희가 중국에 왔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구역 외사과에 여권을 신청하였다.

 

중국에는 두분의 큰아버지는 모두 돌아가시고 사촌형제들만 8명 있는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조카들이여서 무척이나 그리워하셨다.

 

그런데 나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았다

 

점점 몸이 무거워져 움직이기가 힘들어졌고 속이 받지 않아 음식을 전혀 먹을 수 없어졌고 아침에 일어나면 눈이 퉁퉁 부어있어 출근하면 친구들이 밤새 울었냐고 의아해 했고 저녁에 퇴근할 때면 손과 다리가 너무 부어 신발을 신기가 어려웠다.

 

거기에 계절이 바뀌면서 감기에 걸려 앓게 되었다.
기침이 멎지 않고 깊어져 며칠 후에 대학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니 뜻밖의 청천벽력같은 말을 듣게 된 것이다.

 

전신 간 복수라는 것이다

 

남편은 믿겨지지가 않아 다음날 펑양의학대학병원에 나를 데리고 가서 다시 종합검사를 하였지만 결과는 꼭 같았다.

 

병원에서는 나의 경력을 들어보더니 한 달 전의 육중독으로 설사를 하고 심한 탈수 온 것이 첫 시작이 되어 간복수를 촉진시켰고 감기로 열이 오랜 시간 지속된 것 도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완전 환자가 되어 김책공업종합대학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남편과 병원선생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부모님에게는 절대로 알리지 말아달라고 하였다.
간복수로 침대에 누워있는 딸의 모습을 보며 가슴아파하실 부모님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최선을 다해 치료해주었지만 리뇨제를 써서 물이 빠진 것만큼 계속 또다시 배에 물이 차군하였다.
혈소판이 많이 떨어져있고 알부민이 위험단계에 들어서 있는데 알부민을 맞으면 그때뿐이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나의 병이 부모님에게 감추고 빠른 시일 내에 치료받고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남편은 우리 부모님에게 전화하여 사실을 알려드렸다.
가뜩이나 눈물이 많으신 어머니는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눈물을 흘리시며 자신 때문에 딸이 아파한다며 내손을 잡고 가슴아파하셨다.
내 걱정을 하시는 부모님보다 늙으신 부모님 앞에 자식으로써 아파 누워있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 내가 더욱 힘들고 죄스러웠다.

 

부모님은 나의 입맛을 돌려 세우느라고 내가 좋아하던 음식들을 해오시고 간 복수에 좋다는 민간료법들을 알아보셨다.
직장동료들도 모두가 안타까워했고 오죽했으면 아침 조회 때 어떻게 하면 련희를 살려낼 수 있겠는지 토의에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 출근하면 나의 병실에 들려서 힘을 주고서야 하루 일과를 시작하군 하였다.

 

이렇게 대학병원 의료진의 정성과 부모님, 동료들의 념려과 관심에 떠받들려 어느덧 나의 병도 차도가 있어 점차 나아졌다.

 

▲ 김련희 북녘동포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있을 때 마침내 여권이 나왔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그토록 만나보고 싶던 형제들인데 이렇게 쓰러지다보니 정말 안타까웠다.
부모님은 절대 안 된다며 중국방문을 단념하라고 못 박았다.

 

나도 지금형편으로 먼 길을 떠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하고 계속 치료를 받았는데 간복수가 처음이여서인지 건강이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그렇게 되어 입원한지 6개월만에 건강을 되찾고 퇴원할 수 있었다.

 

퇴원하고 직장에 출근하면서도 여권을 그냥 묵이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내년이면 아버지의 칠순잔치인데 중국에 있는 사촌형제들이 조선에 나올 수 있으면 아버지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맏딸로써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나는 부모님을 설복시켜 중국에 갔다오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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