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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10. 간첩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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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046회 작성일 16-11-02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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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수기, 따뜻한 내나라] 10. 간첩이 되고 싶어요
김련희 북녘동포 icon_mail.gif
기사입력: 2016/11/03 [03:05]  최종편집: ⓒ 자주시보

 

▲ 김련희 북녘동포     © 자주시보, 이창기 기자

 

유일한 희망이었던 여권도 발급되지 않고 밀항과 위조여권도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나에게 차례진 것은 결국 경찰조사 뿐이었다. 경찰은 항시 우리집을 밀착감시하기 시작하였고 나를 오도가도 못하게 따라다녔다. 

 

한번은 저녁 10쯤 되어 혼자 너무 힘들어 아는 친구의 집에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아파트단지 정문을 나서기도 전에 형사가 달려와 어디 가느냐며 앞을 막는 것이었다. 나는 깜깜한 한 밤중에 갑작스러운 일이라 너무도 놀라 짜증을 내며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는데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냐고 쏘아 붙이고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차를 타고 내가 가는 길을 뒤에서 계속 따라오는 것이었다. 

 

이러한 숨막히는 밀착감시 속에서 아무리 몸부림쳐 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가족에게 돌아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은 행방불명된 나를 찾느라 하루하루 눈물 속에 안타까운 나날을 보낼 텐데 나는 여기서 살아서 숨쉬는 것 자체가 너무 죄송스러웠다. 

 

나는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덜 아프고 힘들 것 같아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강한 수면제 50알을 삼키고 그만 정신을 잃었다. 하루가 지나서 다음날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병원 응급실이었다. 옆에는 경찰들 4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말이 저녁에 집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기에 119를 불러 병원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입원실로 이동하였는데 다리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걸을 수가 없었다.  

 

약물증독으로 일시적 하반신마비가 왔으며 중증 우울증,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 진단도 받게 되어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게 되었다. 나 혼자 힘으로는 한발작도 걸을 수 없어 간병인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타고 화장실도 다녔다. 집에 돌아온 나는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원망스럽고 한스러웠다. 

 

나는 가족이 없는 나의 삶을 생각할 수가 없어 퇴원한 다음날 칼로 손목동맥을 끊어 또다시 쓰러졌지만 이번에도 나는 죽지 않고 경찰차를 타고 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실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2주만에 완쾌되어 다시 퇴원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생각했다.

 

“아/ 나는 아직 죽을 운명이 아닌가 부다.
꼭 살아야 할 이유가 있지 않을가... 그렇다면 부모남과 가족앞에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서 돌아가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가 아닐가...그럼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혹시 있지 않을까...”

 

그런 과정에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내가 북의 간첩이라고 한다면 감옥살이 몇 년하고 북으로 강제 추방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었다.

 

이전에 내가 경찰들에게 “북의 공작금을 받았다, 서울에 공작원을 만나려 간다,”고 말한 것들은 내 말뿐이고 증거가 없어 기소하지 못했으니 진짜 간첩이 되려면 확실한 증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간첩이 될 수 있는지 인터넷을 보니 유우성, 원정화 간첩조작사건이라는 기사가 있었다. 거기에 탈북자명단을 북에 넘겼다는 조항을 보면서 그래도 이것이 내가 해낼 수 있는 조건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17명 탈북자들의 이름과 주소를 나의 휴대폰에 입력하고 2014년 6월 2일 경찰청보안수사대에 전화하였다.

 

“제가 지금 북에 전달할 정보를 수집했어요. 빨리 와서 저를 막아주세요”

 

내가 간첩이라고 신고를 했는데도 10일이 지나도 경찰이 잡으러 오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10일이 지나 다시 보안수사대에 전화를 하여 이번에는 좀 만나자고 하였다. 대구의 어느 식당에서 만난 형사2명에게 나는 휴대폰을 펼쳐보이면서,

 

“자, 보세요 이게 바로 내가 북에 보내려고 수집한 탈북자들의 명단이에요. 진짜로 정보를 수집했어요.” 라고 말해주었다. 

 

이렇게 되어 내가 준비한 휴대폰자료가 간첩증거가 되어 2014년 7월 19일부터 대구구치소에 구속, 국가보안법위반(간첩) 죄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상상해 본적도 없는 남녘땅에서의 감옥생활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구치소에 들어온 순간부터 내 이름이 아닌 51번이라는 수번으로 불렸으며 무더운 여름날 한 평짜리 숨막히는 독감방에서 더위와 고독과, 세상의 가장 낮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있다는 자존심과의 싸움이 나를 너무 힘들게 했다. 

 

독감방의 작은 철창은 밖에 해가 떴는지,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고 오직 주루룩, 주루룩, 들려오는 소리만이 밖의 세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TV에서나 보았던 연 하늘색의 죄수복을 걸쳐 입고 양쪽 가슴에는 402ㅡ11과 51 을 새긴 흰 천 조각을 달고 두 팔을 다 펼 수도 없을 만큼 좁은 독감방에서 사람과 철저히 차단되어 나는 하루 종일 누구와 말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감옥은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수많은 규칙들과 아주 사소한 기쁨과 요구도 허용되지 않으며 매 순간순간 간신히 붙잡고 있는 실오리 같은 자존심을 무참히 짓밟아버리고 철저한 반성의 강요가 이루어진다. 

 

나는 내가 강제추방을 당하기 위해 간첩이 되고 싶었지만 설마 진짜 간첩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은근히 걱정이 많았는데 이렇게 쉽게 간첩이 되고 보니 이 법이라는 것이 너무 허무해보여 수사관에게 이 나라는 내가 살인자요 하면 살인자가 되어 법정에 설수 있는가, 살인자가 되려면 죽은 피해자와 살인동기, 과정, 증거가 있어야 살인자로 될 수 있지 않냐고 물어보았다.

 

내가 사회에 나온 2012년부터 2년 동안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오던 경찰들이나 수사관들도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북에 보낼 정보라며 17명의 탈북자명단을 자랑하며 간첩행세를 하는 내가 언제 자백을 번복할지 믿음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대구 구치소에 수감된 지 45일 만에 수사관 5명이 와서 조사를 시작하였다.

 

수사관은 수감 중인 대구 구치소에서 나를 조사하기에 앞서 먼저 하는 말이 “당신이 제대로 진술하면 공소보류를 받게 해줄 것이며 제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십년을 넘게 징역살이를 해야 한다”고 압박을 하였다. 그리고 국정원과도 의논이 있었는데 이제 여기 감옥에서 나가면 새집도 주고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며 회유하였다. 

 

수사관은 처음부터 나에게 우리 정부는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인 칼기폭파범 김현희도 다 용서해주고 잘 먹고 잘살게 해주지 않았냐, 당신은 희생자다. 진정으로 당신을 도와줄 사람들은 다름 아닌 수사관들이라며 자신들만 믿으라고 얼렸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관심이 없었고 오직 북의 간첩으로 인정받아 강제추방되어서라도 가족이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나는 조사과정에 내가 북의 지령을 받은 간첩이며 북에 보낼 정보를 수집한 것이 맞다고 무조건 자백했다.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하루종일 5명의 수사관들 앞에서 조사를 받고 독방으로 돌아온 나는 내 가족에게 가고 싶다는 나 하나의 욕심으로 국가의 이름을 팔아 간첩행세를 하는 치졸하고 배은망덕한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과 원망으로 생기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과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자제할 수가 없어 벽에 머리를 연방 짓찧고 또 짓찧어 피가 터지고 만신창이가 되었다. 

 

보안과 남자교도관 6명이 달려와 나에게 수갑을 채우려하자 나는 억제할 수 없는 감정분출로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그 좁은 독방에서 6명의 남교도관들은 나 하나를 가운데 놓고 구두발로 다리를 차고 내리박고 주먹으로 머리를 내려치고 머리채를 잡아 흔들면서 나의 몸을 방바닥에 엎어놓고 한사람은 구두발로 내 머리를 내리밟아 누르고, 또 두 사람은 구두발로 뒤 잔등과 허리골반을 내리밟고 양손을 잡고 있고, 또 두사 람은 나의 양다리를 밟고, 온몸을 비틀어 양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그 수갑 채운 손을 허리에 붙혀 쇠사슬로 허리와 손을 꽁꽁 묶고 발목에도 쇠고랑을 채웠고 머리에는 눈과 코만 내놓은 헬멧을 강제로 씌워놓았다. 마지막에는 뼈를 부시는 것 같은 힘센 장정들의 압력에 아찔해져 내가 방바닥에 쓰러지자 밖으로 나가던 한 사람이 나의 코에 손을 대보더니 “숨은 붙어 있네” 라고 말하고는 나가버렸다. 

 

때는 삼복더위라 가만히 앉아 있어도 너무 무더운데 심한 타박으로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데다 무거운 모자까지 머리를 압박하니 땀이 비오듯 흘러내려 물을 뿌려놓은 듯 머리카락을 흠뻑 적셔놓았다. 손 하나 움직일 힘도 없이 꼼짝 못하고 쓰러져있는데 여교도관 두 명이 들어오더니 나를 질질 끌고 가 넘어지지 않게 벽모서리에 앉혀 기대놓는 것이다.  

 

내가 있는 독감방에는 24시 CCTV가 지켜보고 있는데 손과 발, 허리가 한데 꽁꽁 묶여 내 힘으로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벽모서리에 기대여 앉아 있다가 지쳐서 쓰러지면 어느새 여교도관들이 달려들어와 나를 다시 일으켜 앉혀 놓았다. 쇠사슬에 꽁꽁 묶인 손이 퉁퉁 붓고 온몸이 성한 곳 없이 시퍼렇게 피멍이 들고 부어올라 쑤시고 그토록 아파도 잠시 누워 쓰러져있을 자유조차도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한번은 허리에 꽁꽁 묶은 쇠사슬과 손목수갑을 풀어주고 아래층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어느 방에 들어서니 나를 위로하려 왔다는 기독교 여자목사가 앉아있었는데 그 목사는 나를 보자마자 입을 딱 벌리며 혹시 거울을 보았냐고, 당신의 지금 모습은 미친 괴물의 모습이라며 나를 꼭 안고 한참을 우셨다.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내방으로 올라와 교도관에게 거울이 있으면 좀 보여달라고 부탁하였다. 오랜만에 거울 속에 비낀 내 모습을 보며 나 자신도 깜짝 놀라 교도관에게 이게 내가 맞냐고 되묻고 말았다. 

 

독방에 들어와 나는 남자 교도관들의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 또다시 쇠사슬에 묶여야 했다. 나는 묶이지 않겠다고 발버둥치고 4~5명의 남자들은 내 머리채를 다시 잡아흔들고 구두발로 나의 다리 관절을 꺾으며 바닥에 엎어놓고 구두발로 머리를 내리밟고 잔등을 짓밟으며 온몸을 쇠사슬로 묶고는 다시 일으켜 벽에다 기대 앉혀놓았다,

 

일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방을 나가던 한 교도관은 꽁꽁 묶여 꼼짝 못하고 앉아있는 나에게로 다시 오더니 남자의 그 체격으로 힘껏 뛰어올라 나의 다리위에 구두를 신은 두발로 내리꽂는 것이었다. 순간 아픔보다도 그가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야만인으로 보였다. 

 

나는 종교가 뭔지도 모르고 한 번도 생각해 본적도 없지만 갑자기 손바닥만한 철창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안타깝게 말했다.

 

“하늘에 진정 하나님이 있다면 나는 당신을 원망할 것입니다. 당신은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아픔을 준다고 했는데 한 인간에게 너무나도 지독한 아픔을 주고 있습니다. 정녕 당신을 믿으라고 말한다면 부디 나를 가족의 품으로 갈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매 맞은 어혈로 제대로 운신하기 어려워 재소자 봉사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목욕을 하다가 한번은 옆방에 있는 죄수들과 함께 목욕을 하게 되었는데 자기 피부색을 찾아볼 수 없이 온몸이 시퍼렇게 피멍들어 있는 나를 쳐다보며 감히 입을 열지를 못했다. 

 

그 분들은 다음날 내가 너무 불쌍했는지 교도관에게 자신들에게 있는 사탕과 먹을 것들을 나에게 좀 전달해달라고 부탁하자 교도관은 안 된다며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운동시간에 혹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가지고 왔다며 주머니에 몰래 숨겨가지고 온 사탕을 한줌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한줌의 사탕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가장 맛있게 느껴졌던 것 같다.

 

구치소에서의 하루하루는 정말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고 지독한 고독의 압박이었지만 그 속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것은 역시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었다. 나를 딸이라고 부르며 운동시간마다 주머니에 사탕도 넣어주고 그 짧은 30분이란 시간동안 나의 손을 꼭 잡아주고 안아주며 어머니의 사랑을 주시던 10년형을 받은 80세의 한 어머니가 계셨다. 

 

추운 겨울에는 친인척 한명 없는 나에게 자신의 돈으로 내의를 구매하여 교도관에게 간절히 부탁을 하여 몰래 나의 방에 넣어주기도 하셨고 내가 남교도관들에게 묶이며 실갱이를 할 때면 어머니는 밤새껏 내 걱정으로 잠을 못자고 다음날 운동시간에 나를 꼭 안아 위로해주며 멍이든 내 몸에 연고를 발라주군 하셨다. 그때 그 어머니의 손은 틀림없는 나의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었다. 

 

독감방에서 맞는 생일은 참으로 서글프다. 11월 21일 아침식사시간에 밥을 앞에 놓고 보니 “이 아침 부모님은 돌아오지 못하는 딸을 생각하며 얼마나 눈물을 흘리시며 가슴아파 하실까, 그리고 딸자식은 오늘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을까, 어른인 나도 딸이 너무 보고 싶어 이토록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이 고통스러운데 어린 딸은 얼마나 아플까” 하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려 도저히 밥술을 뜰 수가 없었다. 가슴이 꽉 막히고 주먹으로 아무리 탕탕 쳐도 도무지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흔히 가슴이 미여진다는 말을 책에서 여러 번 보아왔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정말 몰랐던 것 같다. 이 순간 비로소 나는 “아 이럴 때 가슴이 미여진다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교도관들이 출근하여 들어왔는데 구치소에서의 몇 개월 동안 복도를 순시할 때마다 한마디라도 나에게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어하며 관심을 가져주던 한 교도관이 나의 방 앞에 오더니 “51번, 오늘 생일이죠? 밖의 신선한 공기를 담은 꽃이에요.”하며 철창사이로 꽃 한송이를 넣어주었다.

 

아... 감동이었다. 한참동안을 꽃의 향기를 맡아보았다. 

 

일상생활 속에서 거리를 다니면서도 무심히 지나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꺾어버리던 그 한 송이의 꽃이 이토록 아름답고 향기로운 줄 나는 미처 모르고 살았다는 것을 이때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래, 사소한 하나하나들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로구나.” 
물컵에 담아놓은 꽃은 사그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깡그리 바쳐 일주일 동안 내방에 향기를 뿜어주었다. 

 

7월 19일에 구속되어 시작된 경찰조사 3차, 검찰조사 6차, 재판심리 4차에 걸친 1심 재판이 12월 5일 드디어 징역 2년이라는 선고로 끝을 보고 만 5개월만에 대구구치소를 떠나 대구교도소로 이감되는 날이었다.

 

12월 17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8시가 넘었는데 갑자기 교도관이 이감소식을 알려주며 당장 준비하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교도소로 간다는 마음의 준비가 없이 갑자기 닥친 일이라 갑자기 가슴이 떨리고 이 험난하고 힘든 구치소의 5개월에 이어 또다시 겪어야할 교도소의 철창이 기다리는 나의 앞길에 눈물이 와락 나왔다. 복도에 나와 그 어머니가 계시는 감방을 지나는데 어머니가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사과를 한 알 주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것이다.

 

혈육 한 점 없는 이 낮선 타향에서, 그것도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차가운 감방 안에서 나의 눈물을 닦아주고 추위를 막아주며 친어머니의 사랑으로 포근하게 나를 감싸주었던 이 어머니와의 이별의 순간이 너무나 큰 아픔으로 나의 가슴을 찢었다.

 

어머니가 주시는 사과 한 알을 받아들고 함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 그 짧은 2분간의 순간은 아마 일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호송차를 타고 손에 수갑을 차고 징역보따리를 안고 대구 교도소로 가는 동안 구치소의 5개월간의 기억 속에 내가 얻은 것은 세상에는 남의 행복 앞에서 자신의 불행을 느끼는가 하면 남의 불행 앞에서 자신을 위로 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10년형을 받은 80세의 장기수 그 어머니의 너무나 밝고 당당하고 열정적인 모습에서 나의 아픔이 세상의 큰 아픔인양 쉽게 무너져 내리던 나 자신의 마음을 다잡게 되었고 그 어머니의 높은 정신력에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되었으며 나의 슬픔이 타인들의 수많은 비참함의 한 조각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호송차를 타고 가면서 어느 한교도관은 나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는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조국이라는 것이 대체 뭐냐, 난 지금이라도 미국에서 누가 한국에서 보다 더 잘살게 해주겠으니 오라고 한다면 당장 이 나라 국적을 버리고 미국으로 가겠다. 조국이 뭔데 이런 고생을 사서 하냐” 나는 그 말을 들고 한참 머리가 뻥 해졌다.

 

“그처럼 소중하고 귀중한 조국이라는 말이 과연 먹다 버리는 빵부스러기 같이 그렇게 쉬운 말이었나... 이 분이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있다는 조국을 위해 얼마나 많은 애국자들과 청년들이 자신의 청춘과 목숨을 바쳐 싸워왔던기..”

 

너무나 충격적이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나에게 조국이란 참으로 성스럽고 위대하며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

 

대구 교도소에 도착하여 또다시 24시간 CCTV가 나를 째려보는 독감방에 들어와 보니 화장실에 내 키만큼의 높이에 자그마한 철창문이 있어 다행히도 바깥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발뒤꿈치를 들고 목을 뽑아 창밖을 내다보니 반 년만에 눈앞에 펼쳐진 겨울풍경이 황홀하게 느껴졌고 처음으로 느껴보는 바깥세상의 상쾌한 아침공기가 나의 폐부를 정화시키듯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제일 기대되는 것은 올해 들어와 아직 한 번도 본적 없는 눈 내리는 모습을 직접 바라볼 수 있다는 설레임과 밤하늘의 별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감옥에서 새해 첫 아침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어느 한순간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새해를 하루 앞둔 나의 마음은 너무도 쓰리고 아파 몇 자 적어보았다.

... ... ...

어머니. 잠시 후면 2015년 새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고향을 떠나 여기 남녘땅에서 4번째로 맞는 새해입니다. 지금 이 순간 너무도 그립고 보고 싶은 간절함에 가슴이 꽉 미어져 많이 아픕니다. 예로부터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는데 제가 이토록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데 못난 이 딸을 손꼽아 기다리며 하루하루 까만 재만 채우고 계실 부모님은 지금 얼마나 힘드실지, 그 모습을 생각하니 면목이 없습니다.

 

어머니란 말을 떠올리기만 해도 왠지 모를 멍멍함, 가슴이 꽉 메이고 숨을 쉴 수 없을 벅찬 감정으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먼저 흐르군 합니다. 엄마라는 말은 너무나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어머니,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 미안합니다.

 

아버지, 정말 아버지가 못 견디게 그립습니다. 정말 미치도록 가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너무나 존경스러운 아버지였고 훌륭하신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저는 잠시라도 나약해지던 마음을 다잡게 되고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언제나 떳떳하게, 당당하게, 부끄럼 없이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며 마음이 정화되어 안정을 찾게 됩니다. 부모, 자식 사이의 연은 하늘이 주는 천륜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세상에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열두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부모님의 그 따스하고 인자하고, 너그럽고, 웅심깊은 그 세계를 따라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참으로 못난 자식이여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좋은 토양에서 좋은 자양분으로 높은 정신세계를 이어 받은 제가 달리는 살 수 없지 않겠습니까? 끝까지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시리라 믿기에 저도 타향멀리 여기 철창 속에서도 언제나 나를 키워주고 내세워 준 고마운 조국과 사랑하는 가족을 잊지 않고 굳은 마음을 다잡아 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 언제면 만날 수 있을까요?

 

... ... ...

 

수감되어 재판받던 10개월간의 감옥 생활에서, 또 지금까지의 남쪽에서 제일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아마 국선변호사인 것 같다. “51번, 변호사접견” 교도관의 소리가 들리더니 육중한 철문이 철컥 하고 열렸다. 교도관을 따라 변호사 면접실에 들어가니 50대 중반의 한 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겨 맞는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제가 김련희씨를 담당한 국선변호인 성명호입니다.” 이것이 나의 사건을 맞은 변호사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국선변호인에게 아무런 미련도 없고 그 어떤 도움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간첩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국선변호인은 매주 월요일마다 어김없이 구치소에 찾아와 나를 만나주군 하였다. 한번은 추운 겨울이었는데 감기에 걸려 기침을 하면서 변호인이 접견을 와주었다. 내가 특별히 할 말도 없는데 왜 건강도 나쁜데 추운 날에 찾아왔냐고 묻자 변호사는 “내가 찾아오지 않으면 련희씨는 일주일동안 바깥구경을 한 번도 하지 못하지 않냐, 아는 사람도 한명 없는데 내가 안 오면 얼마나 외롭겠냐”고 하는것이었다.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찡해왔다. 수개월간의 감옥 생활에서 다른 수감자들이 면회실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부럽지 않고 외로움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변호사가 면회 오는 월요일을 기다리는 희망 때문이었다.

 

변호사는 수감되어 있는 10개월 동안 단 한번도 빠지지 않고 매주 월요일마다 꼭꼭 나를 찾아주었다. 다른 수감자들의 말을 들어보니 국선변호인들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한두번 밖에 만나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매주 변호인 접견을 나가는 나를 보며 교도관들도 그 국선변호인은 참으로 대단하다고, 자신들은 십년 넘게 교도소에서 근무하면서 저렇게 국선변호인이 매주 마다 접견 오는 일은 처음이라고 하였다. 

 

6개월간에 걸친 1심 재판이 징역 4년 구형에서 징역 2년 선고로 끝나자 검사측은 항소를 포기했지만 성변호사와 나는 항소했다. 2심 재판에는 다른 국선변호인이 지정되었으나 성명호 변호사님은 여기서 자신이 돌아선다면 평생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다며 자진하여 돈 한푼 받지 않고 사선변호사로 2심재판 변호를 맡아주셨다. 나는 이 변호사를 10개월간을 지켜보며 ‘아/ 이런 변호사들이 있어서 양육강식의 이 차디찬 세상에서 나처럼 힘없는 사람, 억울한 사람도 함께 어울러 살아갈 수 있는 것이로구나’는 생각으로 더더욱 따뜻하게 안겨왔다. 

 

2015년 4월 21일. 나는 징역 2년, 집행유해 3년을 선고를 받고 만 9개월 만에 감옥문을 나설 수 있었다. 7월에 짧은 소매 옷을 입고 들어갔다가 아직 추위가 남아있는 4월에 세상 밖으로 나오자니 입고 나설 옷이 없었다. 교도소에서는 난감하여 남자 옷을 한 벌 가져다 주었는데 얼마나 큰지 소매를 여러 번 걷어 올리고 바지 가랑이를 몇 번 접어 올리고서야 나의 몸에 겨우 맞출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 감옥문을 나설 때 가족이나 친구들이 마중하고 두부를 입에 넣어주는 장면을 본 것 같은데 나는 석방되어 세상밖에 나선다는 소식을 알려줄 그 누구도 없어 오직 혼자서 그 암흑의 골방, 압박과 두려움의 15척 담장을 나서게 되었다. 

 

감방 안에서 가족을 그리며 지은 시를 소개한다.

 


                                                분단상처 이산의 아픔
                                                                                           김련희

 

 

 

독감방 철창속에 밤낮을 고독하게 홀로 누워 지샌 밤이 얼마이더냐 지친밤 하염없이 철창을 바라보며  눈물속에 고향하늘 그리워하네. 무더운 여름을 힘겹게 보내고 단풍이 붉게피는 가을을 맞았건만 계절의 풍요로움보다 궁핍이 다가오고 단풍경치의 아름다움보다 피눈물의 아픔이  사무쳐 온다. 철조망 너머 수백리 고향을 뒤에 두고 날개 부러진 새가 되어 감옥에 갇혔구나! 담이 높아서인가 벽이 두꺼워서인가 고향의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꿈속에조차 나를 찾아오지 못하는구나. 오갈 수 없는 이 마음 간절한 소원안고 깊은 밤 스치는 바람에게 속삭인다 바람아 너는 내 고향에 갈 수 있겠지 너는 우리 아빠. 엄마 만날 수 있겠지 나의 귀여운 딸을 안아볼 수 있겠지. 바람아. 바람아. 부디 너 혼자 가지 말고 나를 데려가 주렴 우리 부모님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게 우리 아가 너무 많이 아파하지 않게 내가 지쳐 쓰러지기 전에. 아~~~세상이 너무 야속하구나 하늘도 너무 무심하구나 가슴이 찢어지고 피눈물이 고인다 괴로운 이 마음 위로해 주련 듯 철창밖엔 힘없이 우는 풀벌레소리가 처량도 하구나.

 

  
                 고운 꿈 꾸렴
                                          김련희

 

사랑하는 나의 딸 소중한 딸아
어둠이 짙다고 무서워 마라
저 하늘의 별들이 밝은 빛뿌려
너를 지켜준단다 나의 아가야. 

 

빈집에서 외로이 창문가에 홀로앉아
엄마를 부르는 애절한 울음소리
바람타고 여기 철창 속에 날아와
이 어미의 가슴을 아프게 찢는구나. 

 

지쳐서 쓰러진 너의 잠든 모습
꿈속에서도 엄마를 만나지 못했는지
눈가엔 아직도 눈물이 흐르는데
언제면 우리 아가 고운 꿈 꾸려나. 

 

잘 자거라 나의 소중한 딸아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단다.
네 얼굴 스치며 다독이는 바람이 되어
너의 잠 지켜주는 밝은 별빛이 되어. 

 

 

 

          어머니의 사랑
                              김련희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가장 위대한 어머니가 
내 곁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고향떠나 타항에서 간절한 그리움 안고
북녘하늘 바라보며 외롭게 홀로 서있지만
어머니의 숨결은 
언제나 저의 곁에 있습니다. 

 

아,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당신은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십니다
저의 체온에, 피부에
모진 아픔과 고통의 갈피마다에
어머니는 언제나 
저와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지켜주고 계십니다
온기 한 점 없는 차디찬 독감방속에서
나약해질까봐, 쓰러질까봐,
너무 많이 아파할까봐
언제나 저를 다독이고 있습니다.
힘과 용기를 주고 계십니다. 

 

아, 사랑하는 어머니시여
당신이 있기에 힘을 내여 봅니다,
당신의 사랑있기에 
모진 아픔 이겨낼 수 있는 겁니다
당신의 간절한 기다림있기에
언젠가는 기어이 돌아가렵니다
죽어서라도 당신 품에 안기렵니다
당신의 크나큰 믿음있기에 
아름다운 내일을 힘있게 내딛습니다. 

 

강제추방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간첩이 되고 싶었던 나의 욕망과 간첩잡이에서 성과를 올리고 싶었던 보안수사대 형사들의 욕심이 낳은 결과는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한 녀성의 감옥생활로 망가진 모습>과 <경위, 경감으로 특별승진한 형사들의 모습>으로 나누어졌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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