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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을 깊숙히 실천한 영조 (김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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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2,737회 작성일 17-02-10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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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역사시간에 백성을 이렇게 지극히 사랑한 임금을 배우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남한의 식민사관의 학자들이 지은 교과서를 통하여 사대주의 교육을 받아온 선생들로부터 배웠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학생들이 우리에게도 민중을 사랑한 훌륭한 임금들이 있었다고 배운 것과 세종대왕 외엔 그렇게 민중을 지극히 사랑한 임금이 없었고 대부분 나쁜 임금이었다고 배운 것은 너무도 다른 결과를 주게 될 것입니다.  후자는 정치인들은 모두가 그런 놈들이라는 논리로 되고 자신 또한 제멋대로 사는 것을 정당화하게 되겠지요.  김갑수 선생님의 귀중한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영조의 마음에서 무엇을 느끼게 되는지요?


애민정신의 정화, 영조의 청계천 준천 사업
[김갑수의 조선역사 에세이] - 117

조선조 초기 문신 이극배는 지도자가 실천해야 할 5가지 덕목으로 ‘마음과 행실을 닦는 수신(修身)’, ‘간쟁을 수용하는 납간(納諫)’, ‘어진 이를 널리 구하여 쓰는 구현(求賢)’, ‘절제하며 생활하는 절용(節用)’ 그리고 ‘애민(愛民)’을 들었다. 나는 애민을 맨 나중에 말한 것은 앞에 든 4가지가 전제되어야 궁극적으로 애민을 실천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읽는다.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애민'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영조실록>이다. 애민이란 무엇인가? 백성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렇게만 답하는 것은 문자풀이에 불과하다.

- 이때 여러 도의 유민(流民)이 날마다 서울로 몰려들었으므로, 임금이 선혜청에 명하여 죽을 쑤어 진휼하게 하였다. 이 날 임금이 유신을 불러 《어제훈서(御製訓書)》를 읽게 하였는데, 애민 편에 이르자 선혜청 당상 이후를 불러 하유하기를,

“그윽이 유민이 걸식하는 모습을 상상하건대, 지극히 처참하고 딱하여 실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이는 실로 나에게서 말미암는 것이니, 오히려 누구를 탓하랴?”(영조실록, 영조 32년, 11월 14일, 1756년)

영조는 서울로 몰려드는 유민들에게 죽을 쑤어 구휼하고, 백성들이 걸식하는 이유는 모두 자기 잘못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바꿔 말해서 백성들을 잘 먹여 살리는 것은 전적으로 임금의 책임이라는 뜻도 된다.

영조는 정치적인 탕평과 경제적인 균역을 이룬 후, 백성을 직접 구제하는 사업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청계천 준천 사업이었다. 우리가 알듯이 청계천은 서울 도심 복판을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17세기 이후 서울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서울 인구는 현종 13년(1672)에 19만 2,154명이었다.(당시 전국 인구는 469만 5,611명) 숙종 43년(1717)에는 23만 8,119명으로 늘어났다. 서울 인구가 증가된 것은 서울 도성에 상비군대를 신설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보다도 전국에 걸친 대기근으로 지방의 백성이 대거 무작정 상경했던 이유가 더 컸다.

이들은 이른바 도시 빈민층이라는 새로운 계층을 형성했다. 많은 빈민이 청계천변에 움집을 짓고 살았다. 좌의정 송인명이 한양으로 몰려드는 빈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영조는 군왕으로서 그들을 불쌍히 여겨 모두를 그대로 두어 진휼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홍수로 인해 청계천이 범람하자 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게 되었다. 영조는 더 이상 천변 백성에게 하천 관리를 맡겨서는 안 된다는 판단 하에 대대적인 청계천 준천 공사를 기획했다. 그것은 하천 바닥의 흙을 파내 깊이 만들고 수로를 직선으로 변경하며 하천 양안에는 석축을 쌓는 일대 공정이었다. 이처럼 ‘하천이 새로 열린다’고 해서 '개천'이란 말이 생긴 것이다.(태종 때부터)

‘개천’을 하려면 천변 민가를 헐어 내야 했고 양측 기슭에 석축을 쌓으려면 외부에서 엄청난 양의 모래를 가져와야 했다. 영조는 천변 주민을 추방하기보다는 그들의 거주공간을 안정시켜 주는 방법을 선택했다. 또한 공사에 천변 빈민을 고용하여 임금을 주면 그들의 생계 대책도 마련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이른바 공공근로사업 같은 것이었다.

공사 착수에 앞서 영조는 19번이나 공청회를 열었다. 왕은 친히 광통교로 나아가 백성들에게 청계천 준천 공사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았다.

영조 : 나는 민력(民力)을 거듭 지치게 할까 걱정했다. 그런데 막혀 있는 것이 이와 같고 또 성을 지키려면 시내를 파내는 것이 더더욱 급선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백성 : “신 등이 어렸을 적에는 기마가 다리 아래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만, 지금은 다리와 모래가 서로 맞닿게 되었습니다.”

영조 : 큰 다리가 이러하니 작은 다리가 어떠한지는 미루어 알 수 있다. 나는 다시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보건대 다리가 막힌 것이 이와 같으니 쳐내고 싶다. 그대들은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가?
백성 : 이는 모두 백성을 위하는 일이니,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영조 : 도랑을 파내는 것은 오직 백성을 위함이지만 그래도 만약 불편한 마음을 가졌다면 억지로 따르지 않도록 하라.
백성 : 어찌 불편한 마음이 있겠습니까? 기꺼이 자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조의 하교가 있은 지 한 달 만에 준천 공사에 자원한 사람이 무려 1만 명을 넘었다.영조는 이 공사가 백성을 위한 것이지만 백성들을 괴롭힐 수 없다 하여 노임을 주도록 하고 공사를 재촉하지 말라고 했다.

영조는 때때로 광통교나 오간수문 등에 직접 나가 공사 진척 상황을 살피고 일꾼들을 격려했다. 공사 범위는 하천에만 한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의 네 산(남산, 낙산, 인왕산, 북악산)과 연결되는 모든 물길이 공사 대상이었다. 하천 바닥을 긁어내고 하천의 다리를 하나하나 점검, 보수하면서 양안에 축대를 쌓아 하천 주민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했다.

영조는 동원된 역군들을 배불리 먹이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공사에는 연인원 21만 명이 참여했다. 청계천 주변 주민이 15만, 임금 고용원이 5만, 자원 봉사자가 1만이었다. 심지어 제주도에서 배를 타고 온 자원봉사자도 있었다.

준천공사 중에 영조와 관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강바닥에서 나오는 무수한 해골들이었다. 해골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쟁 통에 죽어간 백성들, 그리고 역병이 돌거나 기근이 들었을 때 유기된 백성들의 것이었다.

“준천(濬川)할 때에 오래 된 잔해(殘骸)가 더러 흙에 섞여 나오는 것이 있거든 베로 싸서 지대가 높고 깨끗한 곳에 묻어 주고 준천을 마친 뒤에 수문 밖에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하도록 하라. 다시 생각해 보니 굶주림 끝에 구렁텅이에 쓰러져 죽어서 거두어 묻지 못한 자야말로 어찌 견줄 수나 있겠는가? 그러한 해골을 생각할 때 나도 몰래 측은하여진다.”

영조는 준천은 전적으로 백성을 위하는 것이라는 신념 때문에 모든 면에서 백성을 최우선으로 대우했다. 수많은 백성들이 구경을 하러 몰려들었다. 질서를 잡던 병부 낭관이 통제에 따르지 않는 백성 몇을 체포했다. 영조는 이 보고를 듣고는 크게 노했다.

그래서 영조는 공사의 주빈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낭관을 처벌하는 것은 물론 감독 장관인 병조판서까지 잡아들여 가두도록 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백성을 함부로 잡아 가두었으니 너희도 한 번 잡혀 갇히는 맛을 보라는 뜻이었다.

다시 애민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실록에 나오는 다음의 문답으로 대신한다.

- 동궁이 강독(講讀)을 끝마치자 임금이 글의 뜻을 묻다가 애민(愛民) 조목에 이르러 임금이 사랑하는 도리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침해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영조실록, 영조 21년 6월 14일, 1745년)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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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님의 댓글

백마 작성일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조선 영정조 시대가 실제 그당시 현재의 미국이 처한 여건과 비기면
여러면에서 휠씬 앞서있는 상황이었다는데..어쩌다 지금처럼 되었는지 참..

이런 좋은 자료를 늘 정리해주는 김갑수씨는 지금도 빨갱이라 하여 이모저모
사회에서 항상 지탄을 받고 있으니.. 도대체 어찌되고 있는 상황인지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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