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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100년 전에 나온 민중혁명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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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191회 작성일 23-03-10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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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의 정치탐사 제41화

100년 전에 나온 민중혁명사상

2023년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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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리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이 격동적인 문장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3년 1월에 발표된 '조선혁명선언'의 맨 마지막에 나온다. 항일투사 신채호(1880~1936)가 집필한 '조선혁명선언'은 항일투사 김원봉(1898~1959)이 이끌었던 조선의열단 명의로 발표되었다. 신채호는 1922년 12월 항일투사 김원봉의 간곡한 청을 받고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김원봉은 신채호에게 당시 중국 상하이에 있는 조선의열단 폭탄제조소를 돌아보고, 조선의열단 선언문을 작성해달라고 요청했었다. 조선의열단 폭탄제조소를 돌아본 극적인 체험을 통해 신채호는 일제의 간악한 식민통치에서 조선민족이 해방되는 길이 '의열투쟁'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열단을 위해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던 것이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혁명투쟁목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일제의 식민통치를 파괴할 것

2) 특권계급을 파괴할 것

3) 경제약탈제도를 파괴할 것

4) 사회적 불평균을 파괴할 것

5) 노예적 문화사상을 파괴할 것

그가 제시한 5대 혁명투쟁목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신채호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파괴하는 민족해방의 앞길을 내다본 선각자였으며, 특권계급과 경제약탈제도와 사회적 불평등과 사상적 노예상태를 파괴하는 계급해방의 앞길을 내다본 선각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선각자였다.

이처럼 신채호는 남보다 먼저 혁명의 진리를 깨달은 선각자로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할 수 있었지만, 과학적인 혁명사상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신채호가 살며 투쟁했던 192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고 있었던 1922년 12월 30일 쏘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련합(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이 창건되었으므로, 당시 사회주의혁명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초창기에 머물러 있었다. 1923년 레닌(1870~1924)의 병세는 악화되고 있었다. 그는 과학적인 혁명사상을 체계화하지 못한 채 1924년 1월 21일 서거하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은 신채호에게 맑스주의를 만날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1922년 12월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고 있었던 신채호에게 사상적 영향을 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가 바로 무정부주의자(anarchist) 류자명(1894~1985)이다. 류자명은 중국 베이징에서 조직된 조선무정부주의자련맹에서 활동했고,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열단에도 가입하였다. 김원봉은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겠다고 하자 류자명을 신채호에게 보내 그의 집필을 방조케 하였다. 그래서 신채호와 류자명은 근 한 달 동안 숙식을 함께 하면서 '조선혁명선언'을 사실상 공동으로 집필했다. 이런 점에서, '조선혁명선언'의 사상적 기초가 무정부주의(anarchism)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신채호는 1927년 중국 텐진에서 결성된 무정부동맹 동방련맹에 조선대표로 참가하였고, 1928년 4월 중국 베이징에서 그 자신이 무정부주의 동방련맹 베이징 지부를 조직했다. 우익민족주의자들은 신채호가 조선민족사를 깊이 연구하였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면서 그를 민족주의자로 묘사하지만, 그는 무정부주의자였다. 신채호는 1929년 5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뤼순감옥에 수감된 뒤 고문후유증, 동상, 영양실조로 혹심한 고통을 겪다가 1936년 2월 21일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로서 생을 마쳤다.

혁명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진리를 깨달은 선각자라면, 당연히 전민항쟁을 혁명전략으로 제시했어야 하는데, 신채호는 전민항쟁과는 거리가 먼 "폭력, 암살, 파괴, 폭동" 같은 의열투쟁을 혁명전략으로 제시했다. 그는 전민항쟁사상을 알지 못했다. 원래 무정부주의는 혁명적 당(revolutionary party)에 관한 사상을 부정하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자인 신채호도 전민항쟁사상을 알지 못했다. 전민항쟁사상은 혁명적 당에 관한 사상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므로, 혁명적 당에 관한 사상을 부정하면 전민항쟁사상도 부정하게 된다.

사상적, 정치적, 조직적 '진공상태'에 있는 민중은 혁명의 주체로 될 수 없으며, 반드시 혁명적 당의 사상적, 정치적, 조직적 지도에 의해서만 혁명의 주체로 일어설 수 있다는 진리를 신채호는 알지 못했다. 혁명적 당의 지도에 의해 의식화, 조직화된 민중이 혁명적 당과 생사운명을 함께하는 사상적 주체, 정치적 단결체, 조직적 통일체로 일어설 때, 바로 그럴 때 혁명이 일어난다는 혁명의 진리가 새로운 혁명사상으로 체계화되고 정립되기까지 진보적 인류는 근 6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한 때로부터 59년이 지난 1982년 3월 새로운 혁명사상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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