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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5-8. 유일한 이슬람핵무기보유국 파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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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7,039회 작성일 23-06-04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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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이슬람핵무기보유국 파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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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고 류태영 박사 


파키스탄은 우리 나라 남과 북을 합친 땅의 3. 6배가량 되는 80만 3 943㎢의 크기를 가진 나라이며 인구 약 1억 6 400여만명중 95%가 이슬람교도로서 세계에서 두번째로 이슬람교도가 많은 나라이다.

또한 파키스탄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후인 1947년 8월 14일에 인디아에서 분리되여 생겨난 신생국이기도 하다.

 

고대파키스탄의 력사

 

지리적으로 볼 때 인디아대륙의 북서쪽에 있는 히말라야산맥의 빙하로 이루어진 인다스강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농사를 짓기 시작한 펜쟈브평원이 바로 오늘의 파키스탄지역이다.

B.C. 1500년경에 인디아북쪽에 있던 유목종족인 아리아족이 인디아대륙을 향하여 이동해왔으며 이들은 반유목민으로서 힌두교의 문화와 예술, 언어와 종교의 력사를 그대로 체험하였다.

그후 기원초기에 이르러 쿠샨왕국이 등장했고 쿠샨왕조는 불교를 받아들여 수천개에 달하는 불교사원을 지었으며 불교의 성지로는 순례자행렬이 이어졌다. 그때 쿠샨왕국의 지방명칭을 《간다라》라고 하였다.

320년-540년에는 굽타왕조가 인다스강류역을 포함한 인디아북부전역을 통치하면서 힌두교와 힌두문화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였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처음으로 이슬람정복자들이 인디아에 들어와 이 나라를 지배하였다. 그후 16세기초에 이 지역에는 무갈제국이 출현하였으며 16세기 후반기에는 전체 북부인디아가 무갈제국의 세력권안에 들어갔다.

16세기말~17세기초 인디아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여 다른 서유럽의 침략자들을 밀어낸 영국은 1858년에 인디아 전지역을 식민지로 삼고 근 200년동안 통치하였다.

식민지통치기간 영국은 이슬람교지역과 힌두교지역으로 갈라 분리정책을 실시하여 두 종교간의 갈등과 적대감을 조장시켰다.

이러한 력사를 가진 파키스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47년 8월 인디아가 영국의 식민지통치에서 벗어나는것과 동시에 인디아에서 분리되여 이슬람국가로 독립하였다.

독립할 당시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슈를 포함한 상태였으나 1971년에 동쪽지역인 방글라데슈가 떨어져나감으로써 본래령토의 서쪽부분만을 소유하게 되였다.

 

량면성을 유지하는 파키스탄력사

 

신생국 파키스탄은 독립후 지금까지 지속되고있는 분쟁과 정치와 종교를 비롯한 여러 사회적문제들, 동서 량진영속에서 복잡다단한 길을 걸어왔다.

독립후 파키스탄의 정치행정만 보아도 그렇다.

1958년 당시 계엄사령관이였던 아유브 한은 정권을 잡은 다음 13년동안 이 나라를 통치하였으나 내전으로 인한 책임을 지고 정권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였다.

한정권의 퇴임후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사회주의와 국유화정책을 주장하면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였다. 하지만 1977년에 군부에 의한 친서방쿠데타에 의해 부토정권은 붕괴되였다.

파키스탄의 군부정권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이전 쏘련의 영향력을 막으려는 미국에 적극 협력하면서 자국령토에 미국의 군사기지를 제공해주는 등 아프가니스탄의 무쟈헤딘들을 후원했다.

이러한 가운데 1989년 이전 수상 부토의 딸 베나지르 부토가 의회선거에서 파키스탄인민당의 승리로 하여 이슬람권력사상 처음으로 녀성수상으로 집권했다.

1996년에 정권의 자리에서 물러난 부토는 여러해동안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1999년 10월 12일 당시 륙군참모총장이였던 무샤라프는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미국은 제재와 《원조》라는 량면카드를 이중자대로 교묘하게 사용하면서 무샤라프정권을 통제하였다.

그러던 미국은 9. 11사태가 발생하자 무샤라프정권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해주면서 무샤라프를 미국이 벌리고있는 테로와의 전쟁에서 일등공신으로 만들었다.

무샤라프는 IMF의 구제금융과 외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원조를 가지고 국민에게 개혁을 약속했으나 이는 완전히 물건너갔고 부패한 정부관리들과 군장성들의 배만 채웠다.

한편 파키스탄내부에서는 무샤라프대통령이 미국에 협조하고있는데 대한 이슬람세력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나고있었다.

높아가는 반정부기운을 의식한 무샤라프는 이슬람세력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친미로선을 재검토하여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가진다.》라는 모호한 발언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떨어진 정권의 인기를 어떻게 해서나 올려세우려는데로부터 출발한것이였다.

정권유지를 위해 무샤라프는 임기를 더 연장하도록 하는 법안도 통과시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샤라프정권은 태생적으로 친미정권, 군사독재정권으로서의 한계점을 넘어설수 없었다.

뿐만아니라 정치적기반인 퓨슈툰족의 지지를 송두리채 상실하게 된것은 무샤라프에게 치명적상처로 되였다.

설상가상으로 파키스탄의 혼란된 정국을 틈타 영국에서 망명중에 있던 부토 전 수상부부가 귀국한것을 계기로 부활한 파키스탄인민당은 무샤라프대통령의 퇴진을 재촉하고있었다.

이렇게 되자 무샤라프대통령에 대하여 용도페기처분을 내릴 때가 되였다고 판단한 미국은 그에 대한 사임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파키스탄인민당의 대통령후보로 나섰던 전 수상 부토가 암살당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결국 무샤라프는 2008년 8월 18일에 퇴임하고 9년동안의 독재와 모호한 어용정권은 종말을 고하였으며 암살당한 전 수상 부토의 남편 자르다리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였다.

미국으로서는 무샤라프 전 대통령을 버렸지만 친미, 친서방적인 대통령이 반드시 필요하였기때문에 자르다리를 대통령으로 등장시키는 연극을 연출하였던것이다.

순진한 민중들은 암살당한 부토에 대한 동정표를 그의 남편인 자르다리에게 몰아주었는바 이는 미국의 선거전략의 결과로 분석되였다.

외신들은 파키스탄에서 부토암살범추적은 모래밭에서 바늘찾기라고 하고있는데 그것은 부토암살사건의 배후에 미국의 2중, 3중, 4중의 음모가 도사리고있었기때문일것이다.

 

파키스탄 《핵위협》에 잠 못 이루는 미국

 

파키스탄이 핵보유국이 된 력사는 1974년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그때 파키스탄의 젊은 과학자 카디르 칸박사는 네데를란드 우라니움농축회사의 말단회사원이였다.

어느날 인디아가 처음으로 핵시험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칸박사는 당시 대통령이였던 줄피카르 알리 부토에게 핵개발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였다.

한 무명의 젊은 과학자의 편지를 받은 알리 부토대통령은 즉시 칸 박사를 귀국시켜 핵개발에 전념하도록 국가적인 지원을 제공하였다.

핵개발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부토대통령이후에 존재한 력대 정권들에서도 계속되였다.

놀라운것은 1970~1980년대부터 특수자석 등 핵무기개발에 필요한 기자재들을 일본의 기업들로부터 대량 입수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의 한 관계자가 밝힌데 의하면 일본은 1980년대에 적어도 6 000개의 특수자석을 파키스탄에 수출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일본이 파키스탄의 핵개발에 협력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였다.

그런가 하면 미국은 파키스탄의 핵개발에 대하여 이미 알고있었으나 핵무기전파방지조약에 대한 원론적인 립장만 밝히였을뿐 파키스탄의 핵개발을 묵인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의 일부 언론들은 《미국의 묵인하에서 파키스탄은 핵개발을 계속하여 성공했다.》라고 지적하였다.

미국의 묵인에 대한 언론들의 비판내용들을 요약해보면 대체로 이렇다.

우선 1970년대 미국은 파키스탄을 《친미벨트》에 꽁꽁 묶어두기 위해 되도록이면 파키스탄의 핵의혹에 대하여 너그럽게 못 본척 하였다.

또한 1980년대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이전 쏘련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서는 파키스탄을 반드시 리용해야겠다고 판단하고 파키스탄의 핵의혹을 모르는척 했다.

또한 미국이 초기부터 칸박사의 핵개발활동과 핵거래를 알면서도 외면하였다.

현재 파키스탄은 적지 않은 량의 핵무기와 고농축우라니움, 무기급플루토니움을 보유 및 생산하고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이 의도적으로 외면했던 이 핵무기들이 오늘에 와서 커다란 위협으로 되게 되였다.

그것은 탈리반반군과 알 카에다가 핵무기를 탈취할 위험이 충분히 있기때문이다.

미국은 지금 파키스탄군지휘관들에게 핵관리능력을 높이고 탈리반의 고삐를 단단히 쥐라고 력설하고있지만 파키스탄군부의 동향과 능력을 도저히 확신할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미국이 아무리 강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미국이 파키스탄의 핵문제로 잠 못 이루는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 빠진 파키스탄딜레마

 

미국은 파키스탄의 격란속에 빠져서 한치앞을 내다보기 힘든 딜레마에 처해있다.

9. 11사건을 구실로 강경보수주의자로 유명한 부쉬는 이라크전쟁, 아프가니스탄전쟁을 전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런데 웬 일인지 이 전쟁들에서 미국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하는 일마다 헤여날수 없는 난처한 딜레마에 빠져있다.

오바마는 파키스탄문제를 《아프팍》(Afpak)이라고 했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아프팍은 《오바마-윁남》을 뜻한다고 했다. 미국이 윁남전에 빠져 허덕인것처럼 오늘 오바마정권은 제2의 윁남전에 빠져있다는 뜻이다.

오바마가 말한 《아프팍》은 아프팍-오바마딜레마를 뜻한다고 생각된다.

아프팍-오바마딜레마의 원인과 리유를 추적해보면 대략 이렇게 전개할수 있다.

9. 11사건후 알 카에다를 소탕하기 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는데 오히려 그곳에서 알 카에다와 탈리반세력을 재생산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무샤라프에게 막대한 원조를 주어 탈리반을 제압하고 눈가림의 민주화전략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여 딜레마에 빠지고말았다.

미국이 중국을 인식하여 인디아편을 들어줌으로써 파키스탄은 쉽게 반미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 그에 따른 딜레마가 기다리고있다.

탈리반-지하드-알 카에다의 기원은 오직 미국이다. 이전 쏘련을 제압하기 위하여 이슬람무장세력을 양성하고 키운것이 바로 미국의 전략이였다. 알리 부토대통령을 암살하게 하고 독재정치를 하도록 한것도 다름아닌 미국이다. 파키스탄 핵개발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칸박사를 통하여 핵무기의 련결고리가 이란 등 중동의 여러 나라들과 접촉하게 된것 등을 총체적으로 볼 때 역시 핵문제는 미국의 딜레마이다.

파키스탄 탈리반이 출현하게 된것은 미국이 앞세운 파키스탄군대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숨어들어온 알 카에다를 색출한다는 리유로 력사적으로 특이한 퓨슈툰족의 밀집지역인 밀림에서 소탕작전을 개시한데서 비롯되였다. 이에 반항하여 이곳에 존재하고있던 13개의 무장세력들이 총집결하여 창설한것이 바로 파키스탄 탈리반이다.

파키스탄 탈리반은 미국이 장악하고있는 파키스탄정규군의 통제를 벗어난 강력한 무장세력이며 파키스탄전역에서 귀신처럼 출몰하여 위협적기세를 과시하고있다.

2008년 2월에 파키스탄군과 형식상 평화협정을 맺었으나 사실상 투쟁은 계속되고있으며 특히 핵무기보호에 관한 미국의 경고가 고조되면서 오바마-파키스탄의 큰 딜레마로 작용하고있다.

자르다리정권은 미국의 지원으로 세워졌기때문에 미국의 요구대로 탈리반을 제압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여야 하나 싸울수록 민중의 반정부감정과 반미감정이 고조되고있으니 딜레마에 빠진다. 또 미국은 미국대로 무고한 민간인살해사건 등으로 날이 갈수록 반미감정이 고조되고있어 딜레마에 빠져 고민하고있다.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에 미군 3만명 증파를 발표하면서 이것이 파키스탄에 부정적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으나 많은 탈리반들이 파키스탄으로 자유롭게 국경선을 넘어 왕래하고있음으로 하여 자르다리정권이나 미군이 딜레마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것이다.

이와 같이 오바마의 《아프팍》제스츄어는 오히려 《오바마의 윁남》으로 만들어 더욱더 불안한 미국-파키스탄딜레마속으로 깊숙이 빠져들고있다.

이제 파키스탄의 정치정세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겠는지는 두고보아야 하겠지만 한가지 명백한것은 미국이 핵보유국인 파키스탄의 반미감정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해야 할것이라는것이다.

이슬람세계의 유일한 핵무기보유국인 파키스탄이 자주와 번영의 길로 나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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