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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련군의 항일투쟁 역사의 현장들 (민족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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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2,256회 작성일 18-09-12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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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련군의 항일투쟁 역사의 현장들목록

동북삼성지역의 중국인민들과 조선항일유격대의 투쟁역사는 서로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중국공산당의 지휘아래 용감하게 투쟁한 전적지들 곳곳에는 조선민족의 피어린 투쟁역사도 함께 존재하고 있다그 배경에는 김일성항일유격대의 투쟁역사가 한 기둥을 이루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중국인민들과 함께 투쟁한 조선항일혁명가들의 피자욱 어린 투쟁의 발자취들도 동북삼성지역의 항일투쟁 역사속에 찬란하게 아로 새겨져 있다. [민족통신 편집실]

 


https://youtu.be/LpoOmt3X-JQ

 

          

                               


 

[기획5]-중련군의 항일투쟁 역사의 현장들

 

 

(1)   통화항일영웅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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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통화 항일영웅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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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통화 항일영웅기념비 앞에서 기념촬영

 

(2)   광하향 치루산촌 – 하리항일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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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정우릉과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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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일성반일유격대 결성과  역사적 배경

 

 

[통화=민족통신 노길남/손세영/김백호 편집위원]집안(시안)지역 취재를 마치고 2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다시 <통화>로 이동했다그리고 통화에서 1시간 가량 북쪽에 있는 광하향 치루산에 소재한 <통화항일영웅비>와 근처에 있는 <하리 항일근거지>를 둘러보고다시 통화시내로 나와서 <양정우릉>과 기념관을 참관했다.

 

이 지역즉 동북삼성지역의 중국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지휘아래 용감하게 투쟁한 전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한편 중국인민들과 함께 투쟁한 조선항일혁명가들의 피자욱 어린 투쟁의 발자취들도 동북삼성지역의 항일투쟁 역사속에 찬란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31년 이른바 <9.18>침략전쟁을 통해 중국 동북3성을 함략시키고 14년 동안 만주 땅을 식민지로 전변시켰다그 당시 국민당 장개석의 무저항주의는 일본으로 하여금 동북3성을 빠른시간에 함락시키는 계기를 던져 주었다.

 

다시 말하면 일제의 침략정책은 중국 동북3성에서의 중국 공산당 세력과 조선 김일성항일유격대 세력의 저항과 반격에 의해  좌절되었다.

 

일제에 맞서 항일투쟁을 전개할 때 중국의 내부사정은 복잡했다중국 공산당혁명세력과 장개석을 중심으로 한 국민당 세력간에 갈등과 알력이 극심하던 시기였다이러한 사정으로 조선의 민족주의 계열은 주로 국민당과 연계하여 반일투쟁에 참가하였으나 소극적이고 무저항주의에 영향을 받아 이른바 한국의 독립군이라고 하는 세력은 장개석군의 입장때문에 제대로 항일투쟁에 참가하지 못했다.

 

한편 김일성 항일유격대는 그 입장과 지향이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을 중심에 놓고 전개하여 왔기 때문에 항일연군하면 주로 중국 공산당과 조선의 김일성항일유격대의 연합전선이라고 볼 수 있다 

 

장개석 계열의 뿌리인 중국 국민당(Kuomintang of China, 중국어 정체자中國國民黨병음: Zhōngguó Guómíndǎng 중궈 궈민당[*])은 중화민국의 정당으로, 1894년에 홍콩에서 결성된 '흥중회', 1905년에 결성된 '중국동맹회', 1914년 일본 도쿄에서 결성된 '중화혁명당'을 계승 발전하여 현재의 형태로 완성되었다신해혁명의 주요 인물이었던 쑨 원과 중화민국의 총통이었던 장제스가 이 당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대만(타이완정부는 중국의 국민당의 잔재로 오랜동안 반공국가로 존재해 왔으나 미국의 버림을 받고 홀로서기로 지탱해 왔다 한편 오늘의 중국은 모택동의 공산혁명의 성과물이다.  이것이 중국 본토의 현주소로 중화인민공화국이다.

 

통화항일영웅비

 

통화시내에서 한시간 정도 북쪽으로 가면 <광하향 치루산 촌>이 보인다이곳에는 <통화항일영웅비>가 우뚝서 있고그 양측 옆에는 1931년 9.18사변에 관한 일제침략의 이야기와 함께 일제강점 14년의 중국 공산당투쟁의 역사와 김일성항일유격대와 함께 일제를 향해 투쟁하였던 중-조련군 투쟁활동들이  펼쳐진다.

 

<통일항일영웅비>가 있는 안쪽 숲으로 들어가면 항일투쟁 근거지들이 있다동북3성 항일련군투쟁 역사의 단면들을 형상화한 조각물들이 있어 항일투쟁시기에 반일세력들이 어떻게 투쟁하였는지에 대한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조직된 중-조련군은 1933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공산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각 유격구별로 항일적위대와 유격대를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9월에 중국인 양정우(楊靖宇)를 총사령조선인 이홍광(李紅光)을 사장(師將)으로 하여 제1군 제1독립사가 조직된 이래 34 3월에 제2군 독립사가 조직되었고이어 제3, 4군 독립사가 조직되었다동북인민혁명군은 1935 9월 동북항일련군(東北抗日聯軍)으로 흡수개편되었다

 

 

1935년 중국공산당 중앙의8·1선언에 따라 만주지방의 동북인민혁명군과 그밖의 모든 반일무장대를 반일구국의 기치 아래 연합하여 만든 부대로서 1931 9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 중앙은 10 12일 만주성위원회에 항일유격대의 창설을 계획했다이 반일통일전선 인민정부수립 인민혁명군이 오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군의 모체가 되었다.

 

<민족통신>취재진은 이곳 사적지들을 참관하고 통화시내로 나와 <양정우 릉원>과 함께 <양정우 기념관>을 참관했다사진촬영이 허용되지 않아 릉원과 기념관의 모습들은 카메라에 담지 못했다  

 

김일성항일유격대 결성 과정과 그 배경

 

한편 김일성항일유격대가 어떻게 결성되었으며 이른바 <조중련군 투쟁사>에서 조선의 항일유격대가 어떤 과정과 배경에 기초하여 중국항일혁명 세력과 연대연합하여 일제에 맞서 싸웠는가에 대한 역사를 간략하게 나마 되돌아 본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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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조선의 항일유격대가 어떤 과정과 배경에 기초하여 중국항일혁명 세력과 연대연합하여 일제에 맞서 싸웠는가에 대한 역사를 간략하게 나마 되돌아 본다. 


 

동북3성의 중국항일투쟁은 주로 중국항일투쟁의 영웅인 양정우 장군의 지휘로 전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중련군에 참가한 조선혁명 무력은 주로 김일성항일유격대 지휘관들로 이뤄져 있다. 조선항일유격대는 조선초기 공산당 세력이나 민족주의 계열의 세력이 아니라 대부분 김일성장군에 의해 새롭게 결집된 조선청년공산당 세력이었다.


 

이들 조선청년공산당 세력이 바로 오늘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한 핵심동력으로 그 중심에 김일성장군이 있었다. 김일성청년은 이미 부친 김형직선생에 의해 중국 무송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잠시 민족주의 계열의 군사학교인 <화성의식>에서 반년가량 공부하다가 한계성을 느끼고 길림의 육문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이곳 진보적 인물인 상월선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김일성주석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 소년은 이미 10대 중반인 1926년 10월17일에 <ㅌㄷ제국주의 동맹>을 결성하여 참다운 항일투쟁의 기초를 만들어 조선혁명의 시원을 열어 놓았다. 그는 1927년 1월에 육문중학교에 재학하던 시절 길림지역에 혁명기지를 만들어 비밀독서조직을 비롯하여 1928년 여름 길림육문중학교 동맹휴학, 10월에 일제철도부설 반대투쟁을 위해 길림, 하얼빈에서 활동했고, 1929년 8월27일 ㅌㄷ조직을 재조직하여 <반제청년동맹>을 결성하여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공청)을 조직하여 이것을 혁명의 기관차로 다져 나갔다.


 

그 당시 김일성지도자 주변에는 차광수, 김혁, 최창걸 등과 같은 목숨 건 혁명동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김일성 지도자는 투쟁과정에서 반동경찰에 체포되어 길림감옥에 투옥되었지만 옥중에서는 옥중투쟁으로 일제에 맞서기도 했다. 그는 1930년 5월 길림감옥문을 나왔지만 정세는 엄혹하였다. 게다가 간도지방에는 종파분자들이 득실거렸고, 이들이 자행한 원산폭력투쟁은 과격모험주의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 정세는 한층 더 험악해 졌다.


 

그는 돈화, 카륜, 고유수, 오가자, 화룡 등 일대지역에 항일혁명 근거지들을 만들어 항일투쟁을 벌이면서 조선혁명의 진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 분기점이 바로 카륜회의(1930년 6월3일~7월2일)를 통해 6월30일 발표된 <조선혁명의 진로>였다. 다시말하면 조선혁명이 주체적 노선이 정립된 것이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바탕이며 그 뿌리가 된다.


 

이 시기에 김일성장군이 쓴 <꽃파는 처녀>가 나와 공연되었고, 1931년 9.18사변으로 일제가 중국 봉천(지금의 심양)을 침략해 중국사회 전체가 긴장의 도가니속으로 들어갔다.


 

김일성항일유격대는 그동안 다진 조직역량으로 무장투쟁의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강반석 어머니로부터 항일유격대 대원들을 위한 첫 군복을 받아 안고 감동했다. 이때가 바로 1932년 4월25일 안도 들판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결성한 날이었고, 1933년과 1934년 왕청 산악지역에 반일인민유격대 총사령부를 건설하여 항일투쟁을 조직적으로 본격화하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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