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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국가’ 물꼬 튼 북의 자연흐름식 물길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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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670회 작성일 18-12-15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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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국가’ 물꼬 튼 북의 자연흐름식 물길공사


<민플러스에서 공유>
http://m.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6492&fbclid=IwAR3xOgWryhg1Cp6Q6xGbtYu1P2tezSVrVTE5WotGz2DL_RFavSLVuSEDCv0

- 김수복 선생의 ‘북의 자연 대개조사업’ - 자연흐름식 물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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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동포 통일운동가인 김수복 6.15뉴욕지역위원회 공동위원장이 지난 1990년대 말 서구 대북전문가들의 ‘붕괴’ 예상을 깨고 북이 ‘고난의 행군’을 통해 경제제재 등에 어떻게 대처해왔는지 북 현지에서 직접 보고 들은 바를 글로 보내왔다. 특히 김수복 위원장은 원유 공급 중단으로 조성된 전력난을 이겨낸 북 특유의 ‘자연흐름식 물길공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전쟁 이후 오늘까지 단 한 순간도 멈춘 적 없는 미국의 제재를 북이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독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고자 몇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

북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가깝고도 먼 나라’ 하면 일본을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더 가까운 나라가 있다. 유엔에도 가입했고 세상이 다 아는 나라인데 대한민국 사람에게만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있다. 2500만이 옹기종기 모여살고 있고 면적은 남한보다 약간 더 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그 나라이다.

북쪽에 관한 글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고 가끔 글이 올라오기는 하는데 춥고 배고프고 도덕이 땅에 떨어져서 사람 살 곳이 못되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몹쓸 나라여서 무시해도 된다는 그런 정도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 북에서 만드는 ‘대동강맥주’가 맛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악덕한 나라를 찬양한 것이 되어서 해외로 추방당한다.

잘도 나가는 ‘이만갑’의 유치한 호들갑과 반민족적이고 범죄적이기까지 한 언론들이 주류가 된 곳에서 이러한 가짜소설이 앞으로도 계속 잘 나갈 것으로 보인다.

사실 객관적인 조건으로 볼 때에 북은 망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충족하고도 남았다. 조선은 동구권과 구소련의 멸망으로 1990년대 초에 이미 교역의 80%를 잃었다. 1995년과 1997년에는 백년에 한 번 온다는 초대형 홍수가 온 나라를 덮쳤다. 도로, 철도, 주택이 유실되고 광산은 모두 물에 잠겼다.

원유를 정제하고 남는 부산물을 원료로 하는 화학비료는 1991년 구소련 붕괴와 더불어 소련산 원유 수입에 의존하던 승리화학공장의 가동이 중단되고 중국산 원유를 정제하는 봉화화학공장만 가동되어서 비료 생산량은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 아래 사진은 라선시 선봉구역에 있는 멈춰선 지 오래되어 녹슨 승리화학정유공장 정유탑이다. 엄혹한 고난의 행군 시절의 산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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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선시 선봉의 승리화학공장.[사진 : 김수복 6.15뉴욕지역위 공동위원장]

1995~1997년 큰물 피해로 발전용 석탄 채굴도 급감했다. 북은 이미 농촌 전기화를 완성하면서 양수시설을 전력으로 가동했다. 그러나 전력난의 심화는 양수기를 돌릴 수 없게 만들어서 논농사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1990년대 초반의 국제환경과 천재지변은 농사에 치명타를 입히며 국가경제 전반을 마비시켰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자료를 보면 1993년에 900만톤 이상을 생산하던 곡물이 1996~1997년에는 300만톤 이하로 떨어졌다(아래 유엔통계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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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식량기구 1990~2013까지의 북의 식량생산 통계

3분의 1 이하로 떨어진 식량으로 북의 인민들이 어떻게 식량문제를 극복했는지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식량 부족과 겹친 전력 부족은 기간산업 시설들의 가동까지를 중지시켰다. 이 간고한 세월을 일컬어 제2의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른다. 1993년부터 2008년까지 16년간이 해당된다.

원래 ‘고난의 행군’은 일제시기 만주대륙에서 용맹을 떨치던 항일빨치산부대인 동북항일연군이 1938년부터 1939년에 걸쳐 100여 일간 만주 몽강현 남패자에서 장백현 북대정자에 이르는 산악지대의 수천리 눈길을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잠도 못자고 몇 십 배 많은 일제 정규군의 추격을 격파하며 강행군으로 돌파한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사면초가에 빠졌던 북이 2008년에 들어서면서 “2012년은 강성대국 건설의 문을 열어제끼는 해”로 선포한다. 당시 그 기사를 읽으며 정말 그렇게 될 수 있을까하며 의아해했었다.

1989년 동구권의 붕괴로부터 시작해 1991년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이 멸망하고 중국은 이미 자본주의의 품에 반쯤 안긴 상황에서 고립무원의 사회주의 국가 북이 외부의 도움은 고사하고 미국을 필두로 한 서방진영의 고립압살정책을 극복하고 어떻게 생존을 지켜나갔음은 물론 한 발 더 나아가서 정밀공작기계공업을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 세계의 일류 나라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올라섰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2008년이 지나면서 “최첨단을 돌파하라”는 구호와 함께 고난의 행군시기 멈췄던 2.8비날론섬유공장이 재가동되고 남흥청년화학에서는 북에 무진장한 무연탄에 의한 비료 생산체계를 완성하며 요소비료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희천련하기계에서 최첨단 CNC공작기계 대량생산에 성공했다. 축구장 크기 7배에 해당하는 대형 작업장을 지열에 의한 난방체계를 도입해서 쾌적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사진을 보도했다. 이어서 희천발전소가 완공되고 평양시에 40여 층짜리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올라갔다. 지방에서도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건축물 완성을 보도했다. 대동강과수농장, 초대형 대동강건재공장, 수도 없이 많은 중소형 및 대형 수력발전소도 속속 완성되었다. 원유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무동력관개체계인 자연흐름식 물길공사가 대대적으로 완성되고 있다. 2016년에 서울시 면적만한 유기농목장도 강원도 세포, 이천, 평강 3개 군에 걸쳐 5만 정보에 걸쳐 완성했다.

오늘도 초대형 단천발전소와 강원도에만도 이천, 평강, 고성, 세포, 고산군에 대형 수력발전소가 건설 중에 있다. 원산-갈마 해안관광지 개발과 더불어 백두산 아래 삼지연군을 온통 초현대적인 관광지로 건설하고 있다. 순천, 남흥, 함흥에 이미 2년째 건설 중인 탄소하나공업 대형 공장들이 있다. 조만간 완성되면 북의 화학공업과 에너지의 자립부문에서 새 국면을 돌파할 것이다.

대북전문가라는 세계적 학자들이 1990년대 이후 이구동성으로 동구권과 마찬가지로 북이 붕괴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물론 미국 정치권에서도 이런 엉성한 이론을 기정사실화했다. 특히 이해관계가 있는 군산복합체를 업은 반북 주류세력은 대북정책의 금과옥조로 삼았다. 이들은 북을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서 현실을 직시하면 알 수 있는 것들을 무시하고 자기 안경으로만 북을 재단했다. 북을 너무 모르고 있다.

오늘 현재 우리 눈앞에 나타난 현상은 그들이 예언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현실이 펼쳐지고 있다. 2008년에 계획했던 강성대국 건설의 문을 열어젖히는 2012년 목표가 하나하나 현실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제야 그 당시 북에서 한 말들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다 망했다고 했던 고난의 행군 시절에서 어떻게 강성대국의 건설로 나갈 수 있는가. 그 어떤 불가사의한 힘이 북에 있단 말인가.

그러한 의문을 품으며 북의 독특한 수력발전소와 간석지 건설, 대단위 개간사업 등 대자연개조사업들 중에서 특별히 자연흐름식 물길공사에 관해서 자세히 기술하겠다.

자연흐름식 물길공사

보통 농경지보다 더 낮은 위치로 강하천이 흐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을 7~8m 이상 퍼올려야 농경지에 물을 댈 수 있다. 보통 양수기로 물을 퍼서 관개를 한다. 북은 오래전에 전국에 걸쳐 전력에 의한 양수 관개수로 체계를 완성했기에 물 걱정을 모르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 시기 전력이 부족해서 양수할 수 없게 되고 전력 증산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조건에서 농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 공급 방안을 찾게 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무동력관개방식 자연흐름식 물길공사를 창안하고 2000년 1월부터 시작하게 된다. 거기에 따라 엄청난 노력과 자재를 동원하게 된다.

개천‧태성호 자연흐름식 물길공사

2000년 4월1일 공사를 시작하였다. 대동강 상류에 웅대한 대자연개조 구상의 첫 번째 공사로서 개천시 대각리에 대각청년언제(댐) 공사를 시작했다. 지상수로 160km이며 90개의 물길 굴을 뚫었고 주변에 총 21개 저수지를 건설해서 총 수만 정미의 물이 채워지게 되었다. 대동강 수위보다 더 높게 건설하였고 취수문으로 대동강 물이 흘러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대각청년언제를 높이 쌓았기에 큰 규모의 인공호수가 만들어졌다. 2002년 12월18일 자연흐름식 관개체계의 기념비적 창조물로서 첫 공사가 완공되었다.

대각리 높은 산악지대에 건설된 댐의 물은 산의 경사면을 따라서 건설된 새로운 물길을 따라서 흐르게 돼있다. 과학기술적으로 경사도가 정확하게 보장되어서 관개취수문을 열기만하면 물은 자연히 낮은 논밭으로 흘러내려온다. 긴 물길 중간 중간에 크고 작은 저수지를 만들어서 물을 채웠다. 물길은 산을 넘고 강도 건넌다. 물길 굴을 만들고 물 다리나 잠관 등을 통해서 160km의 물길을 연결했다. 방대하고 험난한 공사인데도 불구하고 물길 굴 건설자들은 원유 부족으로 굴착기와 착암기를 돌릴 수 없을 때에는 맨손으로, 추운 겨울에는 살을 에는 북방의 추위와 한여름에는 뙤약볕을 마다하지 않고 함마와 정대로 자력갱생의 기치 밑에 공사를 완공했다.

관개취수문을 열기만하면 초당 수십입방미터의 물이 자연흐름식으로 취수구를 통해서 빠져나가서 물길로 흘러나가게 된다. 평안남도 내 10만 정보의 경작지에 물 걱정 없는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문덕군, 숙천군, 미남벌, 순천시, 내남벌, 평원군, 평양시 순안구역, 대동군, 증산군, 온천군, 남포시 등 15개 시군이 혜택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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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태성호 자연흐름식 물길 일부 구간. 왼쪽 농지보다 높은 산 언덕을 타고 물길을 건설했다.

양수를 할 필요가 없기에 385개소의 양수장과 536대의 양수기, 그리고 많은 전동기, 변압기도 쓰지 않게 되어 6만kw의 전기를 절약하게 되었다.

남포시에 필요한 공업용수와 평양시의 식수 해결에 도움을 준다. 대동강 수위를 맘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어서 장마철에 평양시는 물론 인접 황해남북도와 남포시의 고인 물 피해를 미리 막을 수 있게 되었다. 개천에 있는 연풍호의 물이 마르지 않게 되었고 태성호에도 물이 그득해서 아름다운 호반의 풍치가 아름답게 펼쳐지게 되었다. 물길 곳곳에 중소형발전소를 건설하여 대형발전소 규모의 전력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 당의 현명한 령도 아래 애국의 열정에 불타는 우리 군대와 인민의 무궁무진한 힘이 가져온 자랑스런 결실이며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투쟁에서 인민이 이룩한 빛나는 승리이다. 후대들에 물려줄 또 하나의 만년재부를 마련한 인민군인들과 건설자들의 위훈을 조국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장군님의 령도 밑에 선군시대가 낳은 위대한 창조물로서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한번 완공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2007년 10월 잠진-대보 간 지선 수로공사를 착공해 강서군, 천리마군, 대동군 안의 수많은 농장들에게 개천‧태성호 물길을 이용할 수 있는 자연흐름식 물길로 바꾸는 큰규모 관개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이렇게 기본 물길을 완성한 뒤에 다시 가지치기 물길 공사를 계속 내오고 있어서 자연흐름식 물길이 확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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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태성호 물길공사 기념비(평안남도 안주 남쪽) 앞에서 사진을 찍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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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란색이 자연흐름식 물길 공사로 관개를 해결한 지역

■ 필자의 본인 소개 

1950년 7월말 논산읍에 대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발바닥에 기관총 총상입음.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던 시기여서 어머니 혼자, 나와 함께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3살, 9살짜리 두 누이까지 3명을 손수레에 실어서 인민군야전병원에 달려갔으나 치료약이 없어서 상처부위 소독만하고 돌아왔다. 구사일생 목숨만은 모두 부지했다. 그 사이에 작은아버지 큰아버지와 사촌형은 이유도 잘 모르게 전쟁 와중에서 희생되었고 어린 사촌누나 하나는 과속 미군트럭에 깔려 즉사했는데 항의 한 번 못하고 묻혔다. 남자가 없는 집들에서 사촌들은 학교도 못가고 일을 해야만 했던 세월이었다.

1967년 연세대학 재학 중 육군입대. 1968년 1월 김신조 사건 터지고 미첩보선 푸에블로호가 원산에서 북에 나포되어 미국이 언제 북을 공격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순간들을 경험했고 1969년 4월 다시 미해군첩보기 EC121가 북에 의해 동해에 격추되어 탑승해군 31명 전원이 즉사한 사건도 있었다. 같은 내기 동료들은 월남전에 많이 나갔고 1970년 5월 제대할 때까지 언제 다시 전쟁의 포화가 다시 머리 위로 날아들지 모르는 군대생활이었다. 당시 평화를 말하는 사람은 북에 대한 동조자로 보던 그런 세월이었다.

1971/ 1972년 일본에 세미나와 한 학기 교환학생으로 수학. 처음으로 평화를 보았으며 7.4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자연스럽게 총련을 접하면서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1973년 연세대학교 상경대 졸 

1976년 대전피혁공업주식회사 뉴욕지점 발령 

1980년 수출입업 회사 설립 

1989년 뉴저지교회 창립1주년 기념음악회에 남북유엔대사 초대 

1995/ 1997년 평양방문 합작공장 설립 협상

2012/ 2013/ 2015년 평양국제상품전람회 참여

2017년 미국의 대북 여행금지로 방북 취소 

현재 북의 의식주와 에너지에 관해 비전문가로 연구하고 있다. 참여하고 있는 Veterans For Peace와 6.15공동선언실천 뉴욕위원회에서 미국인 상대로 ‘북맹타파’ 사업과 남북조국의 평화 정착에 노력하고 있으며 특히 퀘이커들과 함께 상하 의원들을 방문하면서 정기적인 Peace in Korea 로비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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