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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회담 이후 (이범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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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166회 작성일 19-03-04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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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회담 이후

- 그날 나는 벗들과 승리를 축하하는 술을 흔쾌하게 마실 요량이었다. 그러나 합의서 서명은 없었고 트럼프는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갔다. 기분이 안 좋았다. 그래도 그냥 지나갈 수는 없을 터, “형님 한 잔 하입시다, 제가 함 쏘겠습니다.” 호기롭게 말하고는 금호강 가자고 택시를 탔다. 이런....지갑이 없었다. 사무실에 놓고 온 것이다. 호주머니 가벼운 박형님이 결국 닭백숙을 시켰다. 얻어먹는 술이 가장 맛이 좋은 법인데, 그날 술맛은 별로였다.

- 여러모로 해석 가능한 상황에서는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렵다.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려야한다. 그러면 흙탕물이 조금 지나면 맑아지듯이 상황이 좀 명징하게 보인다. 시간이 약이다.

- 내가 보기에 회담이 결렬되고 난 후 북이 보인 모습은 담담했다. 미국을 거칠게 비난하지도 않았다. 최선희 부부장과 리용호 부장은, 북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관대한 조건을 제시했으나, 미국이 사전 합의된 내용 넘어서는 무리한 요구를 해서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스스로 차버렸다, 그런 기회가 다시 미국에게 차례질지 알 수 없다, 이런 만남을 계속해야 할지 생각해봐야 하겠다, 최고 존엄께서는 미국과의 대화에 의욕이 다소 떨어진 느낌이다, 이런 식의 만남을 할 바에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등등의 말을 하고는 조용히 기차를 타고 귀환했다.

- 정작 시끄러운 것은 의아하게도 미국이었다. 사전에 합의된 문서에 서명을 거부하고 나서 트럼프는, 협상이 끝난 게 아니다, 김정은 위원장과 나는 아직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헤어질 때는 서로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헤어졌다....등의 말을 거듭거듭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트럼프는 문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북미간의 중재를 요청했다. 게다가 미국은 연례적으로 지속해오던 키 리졸브훈련과 독수리 훈련을 축소(혹은 중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전략적으로 승리하기 위해 전술적으로 포기한다는 게 이유였다.

- 미국에 돌아가서도 트럼프가 좋은 평가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북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세워 회담을 파탄낸 것, 중요한 협상을 개인화한 것 등은 명백한 외교적 실책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하는 ‘북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은 얼마 전만해도 미국입장에서는 당연한 요구로 생각되던 것들이었다.

- 이상하지 아니한가, 이는 마치 판을 뒤엎은 자가 파탄 난 거래를 향후 어떻게 수습할지 전전긍긍하고 혹시 대화 상대방의 마음이 상했을까봐 몹시 걱정하는 모양새 아니냐 말이다.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약한 상대, 특히 제3세계 약소국들에 대해서는 오만한 깡패로 군림해왔던 미국으로서는 이상하게 조심스럽고 위축되어 있는 모습이다.

- 게다가 미국으로서는 심히 불안해 할 만한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러시아가 개발한 최첨단 무기들, 즉, 핵추진력으로 기동하므로 사정거리 무제한이라는 대륙간 탄도탄 아방가르드, 수중드론 무기, 그 외 레이저 무기....등 최첨단 무기의 원천기술이 북의 것이라는 둥, 조만간 북의 핵무력이 세계 3위로 올라서게 될 거라는 둥....미국이 들으면 모골이 송연할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인터넷에 떠돌지 않냐 말이다. 이런 분위기 보면서 생각해보니 하노이 결렬 후 느긋한 쪽은 북이요, 불안에 떠는 쪽은 오히려 미국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 사실 지금까지 미국은, 매 정권 말기마다 북과의 평화협정 체결 등을 약속해놓고서는, 정권이 바뀌면 그 약속을 번복했고, 서로가 합의한 내용 지키기를 거부해왔다. 북이 핵을 개발, 보유하게 된 데는, 확실한 물리력을 확보하여 미국이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약속을 번복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도 한 몫 했던 걸로 안다. 그렇다면 결국, 겉으로 보이는 모양새와는 달리, 압박해온 쪽은 북, 모면 회피해온 쪽은 미국이 아닌가 싶다.

- 북이 핵을 갖추지 못했을 때도 미국은 북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이제 북은 양탄일성(兩彈一星)을 갖춘 자칭 전략국가로 솟구쳐 미국과 거의 대등한 관계에서 협상을 하는 정도로 성장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이 어떤 수를 선택할 수 있을까. 전쟁도 못한다. 제재도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빨리 협상하지 않으면 핵무기를 계열생산하는 북의 힘은 점점 더 커진다. 북중러 블록의 힘은 점점 커지고,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블록은 동요한다. 미국의 자체모순은 폭발직전이고 게다가 돈도 없다.

-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어찌할 것인가. 극단적인 제재로 북의 목을 조이는 미국이 과연 갑인가. 나폴레옹의 프랑스도 대륙봉쇄령으로 영국을 조이려고 했으나 내부 균열로 인해 봉쇄에 실패했고 이는 곧 나폴레옹과 프랑스의 몰락으로 직결됐다. 미국이라고 크게 다를까. 북이 여유를 잡는 반면 미국이 초조해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 난 마음이 편해졌다. 저류(底流)의 거대한 흐름이 이러할진대 불안해하고 애를 태워 에너지를 소모할 일이 뭐 있겠는가. 이 땅을 칭칭 동여매 민중에게 고통에 찬 삶을 강요해온 물리력의 핵심은 미국, 이제는 서산으로 몰락하여 저물어 가는 제국일 뿐이니 이 땅의 진정한 해방과 독립도 그리 먼 일이 아닐 것이다. 시기는 중요하지 않다. 필연의 흐름이 우리 민족의 편이니 그것으로 된 거 아닌가. 요 며칠간 술맛을 잊었는데 이제야 술맛이 제대로 좀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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