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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72. 불굴의 혁명열사 리방휴동지를 회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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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2,070회 작성일 23-08-0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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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72

불굴의 혁명열사 리방휴동지를 회고해 본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리방휴동지는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서 출생했다.

리방휴동지는 구 빨찌로서 조국전쟁전에 당 군사간부로서 활동했다.

인민군대에 의한 해방세상을 맞이했을 때 전남도당부 로동부장을 했다.

1950년 9.28 일시적 후퇴를 맞이해서 북상하다가 추풍령에서 되돌아왔다.

그것은 위대한 조국해방 전쟁 시기에 생사를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나만은 북상할 수 없다는 결심을 갖고 단오하게 결단하여 전남도당으로 다시 내려 온 것이다.

이것을 안 박영발도당위원장 동지는 기특하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위원장 동지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되었다.

누구나 후퇴 때 북상하려고 하는데 사선에서 싸우겠다는 투철한 의지를 지녔던 리방휴 동지였다. 당시 사정을 이해한다면 그 많은 동지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고 있는데 촌각도 헛되이 보내지 않고 같이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철전지 원쑤인 미제국주의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싸우겠다는 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세속에서 아무나 확고한 투쟁 결심을 가질 수 없었던 시대였었다.

그러나 리방휴동지는 전쟁의 불길속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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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방휴동지는 전남불갑산 전투지구당부가 결성되었을 때 도당 월구로서 불갑산 지구당부에 위원장인 김 용우 동지와 같이 있으면서 1951년 2월20일 불갑산 작전 때 당 지도부와 같이 땅굴 아지트에 있다가 살아 남았다.

불갑산 2.0작전 후 재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유치내산으로 이동했다.

그 후 1951년 4월 20일 기존의 전남장흥 유치내산 지구와 합쳐서 전남 도당 제 3지구당이 되었을 때 제 3지구당 위원장 김용우동지가 도당조직부장으로 소환당하여 백아산으로 갔을 때 그 후임으로 리방휴동지는 제3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이 때부터 나는 리방휴 위원장을 보위하게 되었다.

리방휴동지는 도당 부위원장이 되어 전남도당 서부지구를 맡게 되었다.

1951년 8월경 적들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서 제3 지구당이 유치내산 가마태고지 부근에 있을 때 적들이 다방면에서 포위 공격해 오는 과정에 무지개 재까지 후퇴했으나 더 이상 방어하지 못하고 영암 월출산으로 후퇴하는데 적들이 후퇴 길을 차단하여 일부는 빠저나갔으나 주력부대는 남아 무지개재의 암태재 능선을 올라야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능선으로 오르는데 우리 동지들이 많은 희생을 당할 때 당시 완도군당위원장이 내 옆에 있다가 적들의 집중사격에 희생되는 겻을 보면서 능선을 무사히 올라 재어서 당시 지구사 총참모장과 단 둘이 만났었다.

능선넘어 골짝으로 후퇴하는 과정에 적들은 수색작전을 펼치면서 능선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숲속에서 총참모장 동지와 최후까지 싸우다 희생될 각오를 하고 있는데 옆에까지 왔으나 발각 소리만 나면 갈겨대기로 하고 초 긴장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 적들이 고지에서 퇴각 호르라기 소리가 나 후퇴해 올라가는 바람에 살아 남았다.

당시 지구당에서는 집합된 소수 인원들만 있었는데 위원장동지는 내가 희생되었다고 하는 중에 지구당트에 도착했었다

얼마나 반갑게 맞이하였는지 모른다.

그후 가마태고지는 적들이 올라왔다 하면 진을 치고 있어 지구사 14연대와 총사3연대가 매일 밤 기습작전을 펼쳤으나 동무들 희생만 낼 뿐 함락시키지 못했다.

유치내산에서 도당 연락선이 화학산을 거쳐 상부에 올라가는 선이 있다. 그 길목에 적들은 가마태고지에 도치가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화학산은 1951년 3월 18일에 이청송 남여단장이 희생된 곳이며 조국해방전쟁전에 전남 총사령관 최현동지가 희생된 산이며, 1951년 4월 20일 전투에서 수백명이 희생되고 생포당했던 처절한 산이다.

그 후 1951년 11월 28일에 리방휴위원장은 나에게 자기 밑에만 있으면 발전할 수 없으니 백운산에 민청학원이 있는데 가서 공부 열심히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추천해서 정들었던 유치내산 동무들의 곁을 떠나 백운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때 정들었던 동지들의 곁을 떠나게 되어 눈물을 흘리었다.

그후 리방휴동지는 1953년도에 비트에서 조발되어 최후까지 싸우다 자결로서 희생을 당하였다

위원장동지 희생으로 제3지구는 종막을 고하는 아픈 기록을 남기었다.


불굴의 혁명열사 리방휴동지시여!

동지의 일생은 일제로부터 미제국주의 침략을 받아 위대한 조국해방 전쟁 전 후 시기에 투철한 항일혁명 전통을 계승하는 처절한 투쟁에서 몸과 맘을 바친 불굴의 혁명렬사로서, 전남빨찌산 사에 일페이지를 남긴 투사로서 기록을 다른 동지들과 함께 남기셨습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후대에게 맡기고 자주통일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제가 비전향장기수의 한 사람으로서 2000년 9월2일에 63명이 신념의 고향으로 갈 때 올라가지 않은 것도 동지의 신념을 언제나 마음속에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023년 7월 26일 필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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