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녕현성전투 (오백룡)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1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동녕현성전투 (오백룡)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1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208회 작성일 19-08-23 09:00

본문


동녕현성전투

오백룡            

 

1933년 9월에 있은 동녕현성전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지휘밑에 우리 항일유격대가 구국군과 협동하여 진행한 최초의 큰 전투이다.

당시 왕청지방에서 활동하고있던 나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직접 지휘하신 이 전투에 참가하게 되였다.

동녕현성전투를 회상할 때마다 나는 당시의 환경에서 매우 어려운 문제로 제기되였던 구국군과의 반제공동전선을 능란하게 해결하고 실현하신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사업방법과 고상한 혁명가적품성에 대하여 감동을 새롭게 하게 된다.

이 시기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중국 동북을 완전히 강점한 때였다. 놈들은 만주강점에 뒤이어 만주괴뢰정부와 만주괴뢰군을 조직하여놓고는 《만주국》은 《왕도락토》이니 《동장철벽》이니 하는따위의 허위선전을 일삼으면서 중국인민들과 구국군들을 기만하려고 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중인민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구국군부대들은 일제가 떠벌이는 허위선전에 넘어가거나 놈들의 학살만행에 겁을 집어먹고 동요하게 되였다.

원래 구국군이란 《9.18사변》후 중국 동북이 일제에게 강점되자 이전 동북군(장학량소속 군대)내의 일부 장병들이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여 무장을 가지고 탈출해나와 구성한 반일부대이다.

그들의 하층병사들은 주로 로동자, 농민출신이였으므로 애국적인 량심과 항일구국의 뜻을 품고있었다. 그러나 구국군의 지도적상층은 지주, 부농, 토호, 자산계급출신들로 구성되여있었기때문에 그들은 처음부터 자기들의 옛 지위를 회복하려는 목적밑에 반일을 하게 되였다. 따라서 그들의 지도를 받는 구국군은 본질에 있어서 지주와 자본가의 리익을 대표하는 민족주의적군대였다. 그들의 반일사상은 불철저하였으며 약간한 곤난앞에서도 동요 또는 투항하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것을 본 일제침략자들은 동요하는 구국군내부를 와해하기 위하여 회유, 기만정책을 일층 강화하면서 《귀순해오면 살 길이 있고 우대도 해준다.》고 갖은 방법과 수단을 다하여 선전하였다. 일제는 반일전선에서 구국군을 떼여내여 자기들이 리용하려고 획책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구국군은 놈들의 술책에 넘어가서 적들앞에 투항하는 길로 들어섰다. 이렇게 되자 끝까지 반일을 하겠다고 장담하던 구국군부대 일부 상층부들까지도 차츰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만일 사태를 이대로 방임하여 둔다면 적들은 커다란 리익을 볼것이며 반일혁명력량은 적지 않은 손실을 입을것이 분명하였다.

조성된 정세를 정확하게 분석하신 김일성동지께서는 구국군들을 적들에게 빼앗길것이 아니라 우리가 쟁취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그들이 비록 지주와 자본가의 리익을 대표하는 민족주의적군대이기는 하지만 반일의 기치를 들고나선것만큼 그들과 공동투쟁을 전개하여 우리 유격대의 혁명적인 영향을 준다면 그들의 소극성이나 변절적경향도 차츰 고쳐질수 있고 우리의 반일력량은 더욱 확대강화할수 있다는 명백한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나는 당시 유격대에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김일성동지께서 항상 알기쉽게 말씀하여주셨기때문에 구국군과의 반제공동전선방침이 참으로 정당하다는것을 곧 깨닫게 되였다.

사실 강대한 일본침략군을 대항하여 싸우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의 무장력량을 확대강화하여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수량상으로도 많고 무장도 적지 않게 갖춘 반일부대들을 쟁취하는 문제가 우리들앞에 가장 중요한 과업의 하나로 제기되였다.

그런데 당시의 환경에서 구국군과 공동전선을 실현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일제가 조중인민간의 단결을 파괴하며 유격대와 구국군과의 통일전선을 방해하기 위하여 갖은 모략을 다하였기때문이다.

일제놈들은 1930년 5.30폭동 당시 종파분자들이 감행한 좌경적인 모험을 민족리간정책에 리용하였다.

5.30폭동에서 종파분자들은 제놈들의 종파적야욕을 달성할 목적으로 정확한 투쟁목표도 없이 그리고 대중의 준비정도도 고려함이 없이 조선농민들로 하여금 일률적으로 중국인지주집에 불을 지르도록 하였던것이다.

일제는 이것을 좋은 구실로 삼아 《만보산사건》을 도발하였다. 그리고는 《조선사람들이 만주를 빼앗으려 한다.》느니 《조선사람은 중국사람의 눈앞의 원쑤이다.》라는 터무니없는 악선전을 하면서 교활한 방법으로 조중인민간의 리간을 꾀하였다.

뿐만아니라 일제는 국내에서는 자기들의 주구인 천도교도 최린일파를 리용하여 《일본총독정치하에서의 조선사람의 자치》운동을 떠들게 하였고 특히 간도지방에서는 《민생단》을 조직하고 그자들로 하여금 《간도는 예로부터 조선사람의 땅이니 간도조선인들이 자치를 해야 한다.》고 부르짖게 함으로써 조중인민의 사이에 불화의 씨를 뿌리려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의 민족리간정책과 종파분자들의 책동에 의하여 구국군들은 조선사람과 조선혁명가들에 대하여 그릇된 인식을 갖게 되였으며 지어는 우리들을 반대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조선사람을 보면 《친일파》라고 하면서 죽이는 일이 빈번하였다.

당시 항일유격대의 우수한 간부였던 리광동지를 비롯한 적지 않은 혁명동지들이 구국군속에서 사업하다가 그들에 의하여 무참히 학살되였다.

구국군들과의 사업형편이 이러했던 까닭에 초기 일부 동무들은 구국군부대들을 반일공동투쟁에 이끌어들이려고 노력할대신에 그들과의 공동투쟁을 반대하였다. 그들은 말하기를 구국군은 원래 지주와 자본가의 리익을 대표하는 군대이므로 우리를 끝까지 반대할것이며 잡다한 반일부대는 일종 토비적성격을 띠고있으므로 인민에게 횡포한 행위를 할수 있으며 그때에는 그들과 함께 싸운 유격대가 도덕적책임을 져야 하니 결국 인민대중속에서 우리 유격대의 위신을 저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것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러한 견해가 협애하며 근시안적일뿐만아니라 일종 좌경기회주의적인 위험한 견해이라는것을 폭로규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일제는 동북을 강점한후 중국의 로동자, 농민들의 리익은 물론 중소 자본가와 중소 지주의 리익까지 침범하고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부 량심적인 중소 지주와 민족자본가들까지도 비록 소극적이고 동요성은 있으나 일제의 민족적압박과 경제적략탈로 인하여 항일하려는 의욕을 가지고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측면을 보지못하고 천편일률로 그들을 반동적인 지주나 예속자본가와 동일시하여서는 안됩니다.

일본침략자들과 완강히 싸우는 우리들이 항일하겠다고 나오는 그들과 손을 잡고 투쟁한다면 우리의 반일력량은 더욱 확대될것이며 일제에게는 그만큼 더 큰 타격으로 될것입니다.

그리고 항일구국군이 지주와 자본가의 리익을 대표한다고하여 그들의 반일적인 측면은 보지 않고 그들을 배척하며 그들과의 협동작전을 거절한다면 이는 일제가 바라는 즉 유격대와 구국군과의 통일전선을 실현할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것입니다. 현재 구국군은 정치적락후성때문에 우리의 정당한 반일투쟁을 리해하지 못하며 심지어 우리 공산주의자들을 살해까지 하고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들과 접촉하여 일제의 교활한 민족리간정책을 폭로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일제야말로 조중인민의 공동의 원쑤라는것을 잘 리해시켜야 합니다.

이와 함께 우리자신의 행동과 실지투쟁을 통하여 그들에게 산 모범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우리를 따라올것이며 우리의 투쟁을 본받아 일제와 잘 싸우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인민에 대한 관계에서도 그들이 옳은 태도를 가지고 행동하도록 우리가 인내성있게 설복교양한다면 그들의 횡포한 략탈적인 경향도 고쳐지게 될것입니다.

구국군과의 통일전선은 능히 가능하며 또 해야할 혁명과업인데 곤난이 있다고하여 손을 뗀다면 이것은 진정 혁명가의 태도가 아닙니다.

김일성동지의 이 확고한 신념과 정확한 방침은 당시 누구도 감히 해결하지 못하던 구국군과의 반제공동전선을 정확히 실현할수 있게 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구국군과의 대규모적련합작전을 대담하게 전개하기 위하여 구국군의 거두들을 직접 만나시여 해설설복할 목적으로 미리 항일유격대가 라자구로 들어간다는 성명을 발표하신 다음 1933년 6월에 위험을 무릅쓰고 100여명의 대원들을 친솔하시고 대낮에 행군해가셨다. 그이께서는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시여 일부 대원들을 태평구에 대기시키시고 50명의 대원들만 데리고 백마를 타시고 위엄있게 오의성부대에 찾아들어가시였다. 이때 우리는 선두에 붉은기를 휘날리며 나팔을 불면서 당당하게 구국군부대에 갔다. 구국군은 감히 우리들을 건드리지 못하였다. 그것은 당시 김일성동지에 대한 명성이 조선인민들속에서뿐만아니라 중국인민과 구국군에까지 널리 알려져있었기때문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 구국군두령들에게 반일공동투쟁의 거대한 의의와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해설하시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머리를 가로젓기도 하였으나 김일성동지의 높은 사상과 넓은 포옹력, 명철하고 론리정연한 옳은 주장에 탄복하여 마침내 그이의 제안을 접수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구국군들을 우리 편으로 인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들과의 련합작전의 첫 공격대상으로 동녕현성을 정하시였다.

동녕현성은 중국 동북 동쪽에 있는 쏘중국경지대의 정치, 군사상 중요지점이였다. 일제는 쏘련에 대한 침략을 목적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 대병력을 주둔시켰으며 각종 군사시설들을 축성하여놓았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동녕현성에 있는 적을 격파함으로써 일제침략자들에게 심대한 군사정치적타격을 줄뿐만아니라 구국군들에게 우리 유격대의 용감성, 대담성의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북돋아주며 반일공동투쟁의 위력이 얼마나 거대한가를 똑똑히 인식시킬 목적으로 이해 9월 이 성시를 공격하기로 결심하시였던것이다.

동녕현성진공의 주력은 왕청과 훈춘에 있는 유격대에서 선발된 동무들로 조직된 우리 유격대가 되였고 구국군들인 사려장, 리삼협, 채사령, 오의성부대 등 동만일대에 널려있는 많은 부대들이 이에 동원되였다.

이에 대한 총지휘는 김일성동지께서 직접 하시였다.

적군의 력량은 일제침략군 약 5백명과 위만군 한개련대 약 2천명이 기본력량이였으며 그 외에도 다수의 일만경찰놈들과 자위단놈들이 현성안에 배치되여있었다.

적군은 포, 땅크 등의 현대적무장을 갖춘 정규군대였으므로 아군보다 무력장비에 있어서 우세하였다. 그러나 우리 유격대는 정의적인 목적과 필승의 신념을 가진 혁명군대이며 더우기 김일성동지의 직접적인 지휘에 의하여 행동하게 되는것만큼 그 사기는 비할바없이 높았다.

우리 유격대들은 이미 휴식하던 왕청지대에서 출발하여 동녕현성 서남쪽 7~8리 계선에 집결하였고 거기에서 전투준비를 더욱 빈틈없이 갖추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집결지점에서 정확한 정찰자료에 근거하여 지휘관들과 구체적인 전투계획을 토의하신후 각 부대에 전투임무를 제시하시였다.

그에 의하면 아군주력인 유격대는 김일성동지의 직접 지휘하에 적들의 완강한 저항이 예견되는 서산포대(현성 서문밖에 있는 릉선에 축성된 포대인바 여기에는 여러개의 중기관총 및 경기관총들이 배치되여있었고 포대와 성안에 있는 일제침략군부대 본부사이에는 깊은 교통호와 지하비밀통로가 굴설되여서 예비력량을 계속 증강할수 있는 조건이 조성되여있었다.)를 점령하며 서문으로 시내에 돌입하여 일제침략군병실을 점령하거나 제압봉쇄함으로써 적의 주력을 소멸하며 구국군부대들이 동문과 남문으로 진입하여 자기들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는것이였다.

그리고 위만군부대에 대하여서는 그자들을 투항시킨 다음 그들도 우리 편에 인입할것이 예견되였었다.

9월 6일 김일성동지의 명령에 따라 아군부대들은 저녁식사를 한후에 집결구역에서 출발하였다. 밤 9시경에 유격대의 파괴조는 서산포대에 은밀히 접근하여 불의의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동녕현성밖에 높이 솟아있는 서산포대는 유리한 지형에 자리잡고있는데다가 돌로 쌓은 포대라 매우 견고하였다. 적들은 서산포대와 성안과의 교통호 및 지하비밀통로를 통하여 계속 력량을 증강하면서 완강히 저항하였다. 이리하여 아군 유격대와 적수비대사이에는 치렬한 화력전이 전개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서산포대에 대한 공격과 때를 같이하여 서문으로 현성안에 돌입한 유격대로 하여금 적병영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게 하시면서 일부 유격대원들을 포대북쪽으로 우회시켜 적들의 화력을 분산시킨후 유격대 주력의 결정적인 돌격으로 마침내 포대를 점령하게 하시였다.

서산포대를 점령한 다음 일부 유격대원들은 서북쪽포대를 향해 돌격하였으며 주력부대는 김일성동지의 친솔하에 서문안으로 돌입하여 일제침략군병실을 완전히 봉쇄하여 한놈도 나오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때에 편의대로 차리고 성안에 들어가있던 구국군부대들과 동문과 남문으로 들어간 구국군부대들도 자기의 위치들을 성과있게 차지하였다. 위만군부대는 미처 손쓸사이도 없었다.

질겁한 위만군부대 본영에서는 아군의 요구대로 대표를 파견하여 담판에 응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때 우리측에서는 김일성동지께서 몸소 담판에 림하시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담판석상에서 우리는 조중인민의 해방을 위하여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싸우는 정의의 혁명군대라는것을 밝히시고 위만군장병들도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일제의 총마개가 되여 무모한 죽음을 당할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조중인민의 공동의 원쑤 일제를 반대하는 싸움에 대담하게 나서야 한다는것을 설복하시였다.

듣고있던 위만군대표는 김일성동지의 정당하고도 강경한 주장을 감히 거절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위만군은 마침내 우리와 협동하여 일제침략군을 공격하는데 동의하였다.

그런데 이때 현성내에 돌입한 일부 구국군부대 병사들은 위만군가족들과 또 그들과 관계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략탈적행동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동기가 되여 훌륭히 성숙되여가던 위만군의 반변은 파탄되였고 위만군들은 아군을 대항해나서게 되였다. 이제는 오직 원쑤를 철저히 박멸하는수밖에 없었다.

적아간에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지게 되였다. 적들이 떼를 지어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일부 구국군병사들은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자 겁을 먹고 도망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우리 유격대원들은 전투직전에 하신 김일성동지의 말씀을 명심하고 영용하게 싸웠다.

공산주의자들인 우리들에게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있을수 없습니다. 용감한 투쟁으로 현성을 점령하여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영웅적인 기개를 시위하며 구국군병사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김일성동지의 이 가르치심은 우리들의 심장을 파고들어 위대한 힘으로 되였다.

우리 유격대원들은 전투에서 선봉이 되여 도처에서 적을 무찌르고 용감히 희생적으로 싸웠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곡식 낟가리를 보고도 적이라고 도망치군 하던 일부 구국군병사들도 영웅적으로 싸우는 우리 유격대원들을 보자 용기를 내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적의 병기공장을 비롯하여 많은 군수품창고들을 습격하였다.

아군은 한편으로 로획한 군수물자를 인민들과 함께 운반하였다.

3~4시간에 걸치는 시가전이 계속되였다. 우리는 정예한 장비를 가진 적을 공격하여 놈들에게 무리죽음을 주면서 점령구역을 계속 확장하였다. 유격대의 결정적인 역할에 의하여 적은 현성 일각에 압축당하고 시가는 거의 점령되였다.

가렬한 시가전이 계속되고있을 때 한편에서는 우리 정치공작원들이 《조중 량국 인민의 공동의 원쑤는 일본제국주의다. 일제를 내몰며 괴뢰만주국을 타도하자!》등의 구호를 웨치면서 인민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인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적극 원조하여주었다.

어느덧 날이 훤히 밝아오기 시작하였다. 적들은 보병외에 기병대와 함께 포, 땅크 등 중무장까지 동원하여 최후발악적으로 반공격을 하여왔다.

그러나 아군은 정면과 익측에서 적을 강력히 타격하여 놈들의 기도를 분쇄하고 시가를 일각에 압축해버렸다. 정황을 살피고계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미 아군부대들이 진공작전의 목적을 달성하였으므로 철수명령을 내리시였다.

유격대는 적을 계속 소멸하면서 질서정연하게 시내에서 주동적으로 철수하였다. 시외의 높은 고지에 방어대로 배치된 왕청현 유격대 제3중대 동무들은 전호에 의지하여 완강하게 싸우면서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이 전투에서 구국군의 한 부대장인 사려장이 중상을 당하였다. 그런데 그의 부대 병사들은 물론 20명이나 되는 그의 련락병, 부관들도 누구 하나 그를 돌보지 않고 제가끔 퇴각하였으므로 그는 적들에게 생포될 위급한 순간에 놓여있었다.

바로 이때에 김일성동지의 지시에 의하여 우리 유격대동무들이 위험속을 뚫고 들어가 그를 업어내여 구원하였다.

김일성동지의 극진한 보살핌이 아니였더라면 사려장은 적군에게 포로되여 희생되였을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후 사려장은 《김일성사령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고 항일유격대는 우리 구국군의 첫째가는 형제들이다.》고 하면서 김일성동지께 깊은 신뢰와 경모의 정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우리 유격대와 함께 끝까지 항일할것을 약속하였으며 김일성동지의 지시에 항상 충실하였다.

동녕현성전투의 승리는 항일무장투쟁사에서 거대한 정치군사적의의를 가지였다.

이 전투는 유격대가 창건된 이래 반제공동전선의 기치하에 전개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성시공격전투였다.

아군은 200여명의 일제침략군과 300여명의 위만군을 살상하였으며 많은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항일유격대는 이 전투에서 김일성동지의 탁월한 전략전술과 현명한 지휘하에 무비의 영웅성과 용감성을 발휘하여 주공방향의 어려운 임무를 훌륭히 담당수행함으로써 그의 전투적위력을 남김없이 시위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실제투쟁을 통하여 구국군들에게 일제를 반대하여 목숨바쳐 싸우는것은 혁명적무장대오인 항일유격대라는것을 보여주었으며 동시에 모든 반일력량이 단결하여 투쟁하면 반드시 승리할수 있다는 신심을 확고히 가지게 하였다.

그 결과 구국군들은 조선혁명가들에 대한 지난날의 그릇된 인식을 고치고 진심으로부터 우리를 존경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구국군과의 통일전선운동은 그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였으며 유격대의 주위에 그들을 집결시킴으로써 반일무장력량을 일층 확대강화할수 있게 되였다.

이와 같이 동녕현성전투는 구국군과의 반일공동투쟁의 첫 실현이였으며 그 모범이였다.

또한 동녕현성전투는 일제가 떠벌이는 소위 《무적황군》의 신화를 깨뜨림으로써 놈들에게 군사적으로뿐만아니라 정치도덕적으로도 큰 타격을 주었다.

실로 이 모든 성과들은 오직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와 탁월한 전략전술에 의하여 이루어진것이다.

동녕현성전투 이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명성과 우리 유격대의 위신은 더욱 높아졌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