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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에서 온 농민들 (박 영 순) 항일빨찌산참가자들의 회상기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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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902회 작성일 19-09-30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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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에서 온 농민들

 

박 영 순

 

1938년 여름 몽강현일대에서 활동하고있던 우리 련대는 몽강현 사득촌에 대한 진공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각 구분대에서 40여명의 습격조가 선발되였다. 나도 그중의 한사람이였다.

우리는 련대정치위원 조정철동무로부터 이번 전투의 목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들었다.

일제는 이 지대에 10리 혹은 20리 간격을 두고 집단부락을 신설하였는데 우리가 진공하려던 사득촌도 이 집단부락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사득촌은 다른 부락들과는 달리 전라도에서 방금 동북으로 이주해온 농민들만으로 구성되여있었다.

이렇게 된데는 일정한 리유가 있었다.

원쑤들은 집단부락을 설치함으로써 유격대와 인민들과의 련계를 끊어보려고 했다. 그러나 집단부락을 둘러싼 높은 성벽이나 그곳에 배치한 자위단의 무장만으로써는 도저히 그런 기도를 달성할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놈들은 이에 대한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게 되였다.

즉 바빠난 놈들은 방금 전라도에서 동북으로 이주하여 아직 우리 유격대와 한번도 련계를 가져보지 못한 농민들로써 자기들의 말을 잘 듣는 《핵심부락》을 만들었던것이다.

우리 련대는 이와 같이 놈들의 음흉한 계획이 실행되고있는 지역에서 활동하게 되였다.

인민들의 지지와 원조가 없이는 적과의 싸움에서 결코 승리하기 어려운것이다. 그런데 이 지대 이주민들은 일시적이기는 하나 일제의 악의에 찬 허위선전에 넘어가서 우리 유격대를 《해롭고 위험한 무장단》으로 오해하고 우리를 경계하며 감시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그것도 그럴것이 일제는 그들을 만주에 이주시킨 첫날부터 기존주민들과의 접촉을 절대 금하였으며 성안에 가두어넣고 외부에 출입하는것까지 심하게 단속하면서 계속 우리 유격대에 대한 허위선전을 불어넣었던것이다.

이런 지대에서는 우리의 지하공작원들이 발을 붙이기 힘들었으며 우리 소부대들의 활동도 매우 곤난하였다. 련대앞에는 이 기만당한 군중들을 쟁취해야 할 과업이 제기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당면한 련대의 전투행동을 위하여서도 긴급히 해결해야만 될 문제였다.

그리하여 우리 습격조는 정치활동을 맹렬히 벌려 인민들을 계급적으로 각성시킬데 대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가르치심대로 사득촌에 배치된 악질자위단 30여명의 무장을 해제하며 그곳에 있는 80여호의 전라도 농민들에게 항일유격대는 진정한 조선인민의 혁명군이라는것을 선전하여 그들을 우리편으로 쟁취할 임무를 받고떠났다. 습격조는 조정철동무가 인솔하였다.

우리들은 어둠을 타서 사득촌에 접근하였는데 성문은 이미 닫겨있었다.

농민으로 가장한 우리의 척후를 자기편 사람으로만 안 자위단보초는 방심하고 성문을 열어주었다. 우리 척후는 곧 그놈을 생포한후 무장을 해제하였다.

우리는 모두 성문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들이 포로한 보초를 앞세우고 자위단실에 거의 당도했을무렵 성 남쪽포대에 있던 적보초가 우리를 발견하고 발사하였다.

우리는 되도록 전투를 피하고 적들을 몽땅 무장해제시킬 계획이였으나 사태는 부득이 놈들과 맞불질을 하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기관총수인 장복동무는 대항을 시도하는 놈들의 자위단실을 향하여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아군의 첫타격에 대부분의 자위단놈들이 쓰러지고 몇몇 남은놈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쳐버렸다.

그런데 놀라지 않을수 없는 사건이 벌어졌다.

일부 동무들은 패주하는 적패잔병들을 추격하여갔고 남은 우리들이 자위단실안팎을 수색하고있는데 삽, 괭이, 낫 등을 쥔 10여명의 부락농민들이 노기등등하여 우리 있는곳을 향해 달려오고있지 않는가. 그들은 우리와 싸우려는것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모두가 조용히 그들을 맞이하기로 했다. 만일 그들이 그 괭이나 삽으로 우리를 치는 경우에도 우리는 보신방어만 하기로 했다. 우리는 일제히 총을 내리고 접근하는 그들을 바라보고있었다. 참말 그때 우리의 심정은 복잡하였다.

우리들은 차마 그들이 괭이까지 쳐들고 덤벼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것이다.

그들은 우리앞에까지 와서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버렸다. 우리들의 침묵이 그들에게 의혹과 어찌할수 없는 위엄을 주었던것 같았다.

우리와 그들은 아무 말이 없이 잠시 서로 바라보고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땅바닥에 죽어넘어진 자위단놈들의 시체를 힐끔힐끔 곁눈질해보다가 공포에 질려 슬금슬금 달아날 차비를 하였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련대정치위원인 조정철동무가 꽁무니를 빼려는 사람들을 제지하며 그들의 앞에 나섰다.

《당신들은 무슨 까닭으로 우리와 싸우려고 합니까?》 하고 그는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응대도 안하고 선자리에 못박혀있었다.

《우리 유격대는 우리 조선사람을 못살게구는 왜놈들이나 자기 나라를 배반하는 반역자들과 싸울뿐이지 당신들의 미움을 살 일은 조금도 한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어서 말씀해보십시오.》하고 조정철동무는 정중하고 공손한 태도로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응대도 안하고 서있었다.

옆에 섰던 우리의 한 동무는 그들에게 삽과 괭이따위로는 도저히 총쥔 사람을 당해낼수 없을텐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대항하게 되였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여전히 잠자코있었다. 그때까지도 그들의 표정과 태도에는 의혹과 공포의 빛이 가시지 않고있었다.

그때 나는 노여움보다도 안타깝고 가슴아픈 심정이 앞섰다.

물론 그들의 모습은 쪼들리여 살아온 가난한 조선농민들로서 그 인상은 나의 아버지나 형님들과 별로 다름이 없었다.

그들을 몽매하다고 탓할수는 없는 일이다. 설령 그들이 그 괭이로 우리를 호되게 때렸다하더라도 우리는 한동안 참아야 하였다.

만일 이런 경우에 그들이 우리를 리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조급하게 욕하거나 《락후》한 군중이라고 시비를 걸고든다면 그들은 우리를 따라오지 않을것이다.

농민들이 일시 우리를 오해하고있을따름인것만큼 우리는 더 인내성있게 그들을 설복하며 해설하여 그들이 우리를 따라오도록 도와주어야 했다. 혁명임무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아량과 인내성을 요구하였다.

조정철동무는 대답없이 서있는 인민들에게 일제와 그 주구들의 죄악에 대하여 그리고 조선인민들의 처지, 특히 오늘 조선농민들이 왜 정든 고향을 버리고 낯선 이국땅으로 살길을 찾아와야 했으며 또 계속 굶주림에 허덕이여야 하는가를 차근차근 해설하여주었다. 그리고 유격대는 일제와 그 주구들을 때려부시고 조국을 광복하며 인민을 도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온갖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싸우는 진정한 혁명군이라는것을 해설하면서 유격대에 대한 원쑤들의 악선전이 완전히 거짓이라는것을 일깨워주었다.

해설을 듣고있던 그들의 손에서는 쥐였던 괭이와 삽들이 하나둘 땅바닥에 떨어졌다.

조정철동무는 그들에게 그 괭이와 삽들을 다시 잡으라고 권고하면서 《여러분, 괭이와 삽을 드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우리와 함께 조선사람을 못살게구는 원쑤놈들을 때려없앱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서먹거리고만 있었다. 이윽고 그들은 처음 우리에게 달려들던 때와는 전혀 딴 표정으로 《우리는 잘못 생각했습니다.》라고 자기들의 행동을 사과하면서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왜놈들과 그 주구들은 이 마을에서 우리 유격대를 《공산비적》이라고 하면서 사람을 보면 눈을 뽑고 코와 귀를 베며 부녀자들을 강간살해한다는 등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악선전을 해왔던것이다. 그뿐이 아니였다. 놈들은 그들에게 유격대의 총은 나무로 만든것이기에 소리만 날뿐이지 맞아도 죽지않는다고 터무니없는 선전을 하면서 그들에게 유격대를 대항하게끔 추동하여왔었다.

놈들은 자기들의 패전을 인민들앞에 숨기기 위하여 갖은 허위날조를 다했다. 이 부락앞으로도 《토벌대》들의 시체가 많이 운반되여갔으나 놈들은 그것을 유격대의 시체라고 거짓선전을 하였으며 이제는 산속에 유격대가 얼마남지 않았다고 떠벌였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이 몽매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까지 된 연유를 가히 알만 하였다.

우리들은 부대를 여러조로 나누어 부락민들속에 들어가서 해설선전사업을 진행하였다.

우리는 그 마을에 장시간 머물러 있을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밤으로 부락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들이 적들의 자위단실에서 로획한 무기와 기타 물자들을 모아 짐을 꾸리고있을 때 20여명의 농민들이 짐을 운반해주겠다고 자청하여나섰다. 그중에는 처음에 우리들에게 대항하려던 농민들도 몇명 섞여있었다.

짐은 능히 우리자체의 힘으로 운반할수 있었으나 우리는 그들의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것은 잠시라도 우리와 함께 생활하는것이 그들에게 우리 유격대를 리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적절한 기회였기때문이다.

우리가 그들과 함께 부락을 떠날 때 마을사람들과 그의 가족들은 매우 불안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있었다. 어쩐지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상 싶었다.

길을 떠난 우리들은 동행하는 농민들을 한명씩 책임지기로 되였다. 나도 그중 한사람을 맡아 사흘동안 함께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는사이에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였다. 그는 자기가 만주로 이주하여오게 된 경위를 말해주었다.

소작살이에 암만 애써 일하여도 빚만 늘어가고 굶주리며 살아오던차에 만주에는 땅이 많고 돈벌이가 좋으니 바가지와 지게만 가지고가면 잘 살수있다고 《관청》에 있는 왜놈들이 선전하는통에 그만 이사짐을 꾸려가지고 떠나왔다는것이다.

나는 그에게 이주해온후 살림살이형편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는 한참동안 입을 꾹 다문채 응대없이 걷고있다가 무겁게 대꾸하였다.

《어떻겠소? 죽지 못해 살지요. 그건 그렇구, 글쎄 그놈들이 산에 있는 〈공산비적〉들을 없애고난 다음에 잘살게 해준다고 날마다 지껄였지요. 글쎄 당신들을 비적이라고 했으니 … 우리는 놈들의 간교한 속임수에 넘어갔지요.》하며 그는 저으기 미안한 기색으로 나를 돌아보는것이였다.

나는 그에게 우리 가정의 래력을 말해주었다.

정든 고향땅에서 더 살길이 없어서 간도로 이사해왔다는것, 그러나 헐벗고 굶주리는 가난한 조선농민들의 처지는 조선이나 만주나 마찬가지였다는것, 침략자인 강도왜놈들이 세력을 펴고있는 천지에서는 가난한 조선사람은 어디가나 살수 없다는것, 조선땅에서 왜놈들을 몰아내지 않고서는 살아나갈수 없기때문에 굶주리는 부모처자를 집에 두고 유격대에 찾아들어오게 되였다는 나의 입대동기까지 자세히 말했다.

이야기를 듣고있던 그는 나의 처지에 대해서 진심으로 동정하였다. 그러면서 특히 우리 부모처자들의 신변에 대해서 자기 일처럼 걱정하면서 여러가지로 다시 질문하였다.

길이 멀어지면서 그는 차츰 짐을 무거워하였다. 나는 그의 짐을 덜어서 더 지였다. 물론 그는 자기의 짐을 덜려고하지 않았으나 결국 나에게 빼앗기고말았다. 다음날도 행군은 계속되였다. 아침에 20여명의 농민들과 고루 나누어진 등짐은 해가 질무렵에 가서는 거의다 우리들의 등으로 옮겨왔었다.

식사때에도 농민들은 자기들에게 먼저 더 많이 차례진 밥그릇을 앞에 놓고 더욱 황송해하며 사양하였으며 밤휴식때에도 그들의 신변을 주의깊이 보살피는 우리들의 손길에 그들은 당황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인민들을 육친과 같이 대하는 유격대의 본성적인 품성에서 우러나온 우리 매개 대원들의 례절이였으며 인사였다. 그것은 극히 자연스럽고 평범한 우리의 생활이였다.

그들과 동행함으로써 유격대의 진면모를 그들에게 보여주려는 우리의 목적은 초보적으로 이루어졌다.

비록 사흘이라는 짧은 기간이였으나 그들은 우리와의 생활에서 많은 자극을 받았던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의식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들은 우리와 헤여지게 되는날 이구동성으로 중도에서 돌아가기를 거절하였으며 끝까지 짐운반을 도와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중 몇몇 젊은 농민은 유격대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그들은 우리의 옷소매를 놓지 않고 작별을 아쉬워하였다. 우리도 그들을 보내는것이 매우 섭섭하였다.

사흘전에 낫과 괭이를 들고 우리를 때리려던 그들이 우리의 손목을 쉬이 놓지 못하게 된 사정을 리해하는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것이다. 우리의 부모들과 같은 처지에서 살고있는 그들의 원쑤가 누구며 인민을 위하여 싸우는것이 누구인가를 알았을 때 어찌 그들의 심장이 우리와 함께 고동치며 우리와 함께 숨쉬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돌아가면 잘 말하여 놈들의 행패를 면하도록 하라는 당부를 하고 식량보따리속에 그들이 모르게 적지 않은 금액까지 넣어보냈다.

그후 한달이 지나 우리의 한 소부대가 공작상 다시 사득촌근방에 머물게 되였을 때 그들의 그 이후 소식을 들을수 있었다.

우리와 헤여진 농민들은 《토벌대》들이 악선전을 계속하고 그 가족들과 마을사람들이 걱정하고있을 때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에 돌아간 그들은 때와 장소에 따라 유격대의 진실을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우리 유격대의 《선전원》이 되였다. 그리하여 사득촌 농민들의 마음속은 전과 달라지게 되였으며 우리 유격대는 그들에게 있어서 《올 때는 밉던 사람들이 가고나니 그리운 사람》들로 되였다.

이것은 사득촌범위에 머물지 않았다. 날이 감에 따라 사득촌사람들의 가슴에 스며든 물은 주위의 다른 《이민부락》들에도 퍼져갔던것이다. 그리하여 이 지대는 우리들이 활동하기 편리한 지대로 변하였다.

우리의 소부대 공작원들은 이모저모로 농민들의 보호를 받았으며 우리의 정찰조들은 김을 매는 사람이나 달구지를 몰고가는 사람들을 통하여서도 구체적인 적정을 알수 있었다.

하루는 우리와 련락을 맺고있는 한 농민이 (그는 전날에 짐을 지고왔던 농민이였다.) 마을에서 부리고있는 일본기관의 소를 끌고 우리 소부대의 숙영지를 찾아왔었다.

그는 마을에서 사람들의 공동토의에 의하여 그 소를 조국을 위하여 배를 곯으며 싸우는 유격대에 보내기로 하였다는것을 말하였다.

하루 세끼도 겨우 이어가는 그들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하다못해 짜낸 계획이였다.

소부대동무들은 그들의 성의를 무시할수 없어서 그 소를 받기는 했으나 만일의 경우에 그들이 대금을 지불할수 있게끔 소값으로 상당한 금액을 내주었다.

그런데 그 돈은 후에 다른 소부대 공작원들의 손을 거쳐서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었다.

이렇게 그 지대 농민들과 우리들의 련계는 날로 강화되여갔다.

놈들이 《핵심부락》으로 자랑하던 사득촌지대는 우리 유격대의 믿음직한 후방지대로 되였으며 침략자와 그 주구배들의 기만과 허위선전에 속아 방황하던 전라도에서 온 농민들은 우리 유격대와 호흡을 같이하는 혁명적인 군중으로 되였다.

우리는 이처럼 뒤떨어진 군중들에게 일일이 일깨워주고 행동에서 산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혁명의 편에 이끌었으며 그들과 함께 싸워 승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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