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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시대 제3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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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506회 작성일 19-11-07 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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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장

1

 

1948년 새해가 시작되였다.

털외투를 입고 분홍색목도리를 두른 리은실은 밝은 불빛이 흐르는 영제동거리를 걸어갔다.

그는 지금 업무부장 김춘선의 집으로 가고있었다. 저녁이면 가끔 찾아가는 집이였다.

은실은 요즘처럼 생활의 안정을 느껴본적은 없었다. 생활에서 걱정되는것이 하나도 없는데다 오랍동생은 대학생까지 되였으니 이제 비로소 자기네 오누이가 사람답게 살고있다는 긍지감을 받아안게 되는것이였다.

그는 지난해 12월 5일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 화페개혁법령을 발포한 그날에 있은 일들을 생각하며 걸어갔다. 그날부터 리은실은 김춘선에 대한 믿음이 더 커졌다.

그날 뜻밖에 화페개혁법령이 발포되여 모두가 놀라고 기뻐하고 희한해하고있을 때 김춘선이 은실에게 찾아와 오늘은 저녁 7시가 아니라 밤 9시경에 집에 와달라고 하였다. 《저녁출근시간》을 변동시키는 김춘선이한테서 은실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오전에 선참으로 화페교환소에 가서 돈을 바꿔가지고 돌아와 일을 보다가 약속대로 9시에 김춘선의 집을 찾아갔다.

그때 김춘선은 전에없이 침울한 기색을 하고 방안에 앉아있었다. 모두가 명절처럼 즐거운 기분에 싸여있는 화페개혁날에 기분이 처져 침울하게 앉아있는 그가 이상스러웠다.

《부장동지, 무슨 일이 있었나요? 기분이 좋지 않은것 같아요.》

《오, 그저 좀…》 하고 김춘선은 속마음을 터놓지 않고 천천히 일어서더니 은실에게 아무 노래나 좋으니 한곡조 타라고 하였다.

리은실은 활짝 웃음을 지으며 《예, 노래부르겠어요. 기딱막힌 노래예요. 아마 음악에 박식한 부장동지도 그런 노랜 들어보지 못했을거예요.》 하고 웃방으로 새처럼 날아올라가 풍금덮개를 열었다. 그는 거치장스러운 외투를 벗어버리고 풍금과 마주앉아 건반을 몇번 눌러본 다음 오늘은 화페개혁법령이 발포된 날이니 《돈노래》를 부르겠다고 하였다.

《돈노래? 거 정말 재미있겠군.

김춘선이 웃으면서 어서 부르라고 하였다.

은실은 일부러 눈을 치떴다감았다 익살과 아양을 떨면서 노래를 불렀다.

 

    갑오개혁 혁신파는

    상평통보(엽전)를 개신하렷다

    제일 작은 돈은 푼이요

    십푼은 1전, 10전은 1냥이네

    1푼은 황동으로 반짝

    5푼은 적동으로 번쩍

    2전 5푼은 백동광이요

    1냥, 5냥은 은광이라네

    번쩍번쩍 오호라 좋을시구

    상평통보개신 좋을시구

  

은실은 노래를 다 부르고나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거참, 멋있는 노래군. 그런데 그런 노랠 어디서 배웠소?》

《가무학교에 다닐 때 배웠어요. 그땐 아무 뜻두 모르구 불렀어요. 하지만 오늘은 새 돈을 받고보니 진정한 우리 조국이 있구 우리 나라의 돈이 있구나 하는 기쁨과 긍지가 생겨서 돈노랠 불렀어요.》

《옳소. 화페개혁은 경제적토대가 있고 나라의 주권이 당당할 때 할수 있는거요. 새로 나온 이 북조선중앙은행권은 공고성을 확고히 담보할수 있는 위력한 화페로서 조선의 자랑이요.》

김춘선은 새 지페 한장을 꺼내여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 지페에는 다른 나라 지페에서 볼수 없는 문장이 들어있다. 《본 은행권은 은행보유의 금, 귀금속 및 기타 재부로 그 가치를 확인한다》

이 문장이 화페개혁의 빛나는 전망을 시사해주고있었다.

김춘선은 은실이의 어깨를 치며 입을 열었다.

《아까 그 돈노랠 가무학교에서 배웠다면 왕수복이도 알겠구만.

김광진선생이 강연을 한 그날 왕수복이가 무대에 올라와서 그 노래까지 불렀다면 구색이 맞았을걸. 그런데 그날 보니 왕수복인 울더구만.… 슬퍼서 우는것은 아니였소.… 아 아, 나도 오늘은 울고싶소.

김춘선은 주먹으로 이마를 두드리며 긴 한숨을 내쉬였다. 은실은 그 한숨소리에 어쩐지 가슴이 아릿해져 속삭이는 소리로 정답게 물었다.

《오늘은 기쁜 날인데 부장동진 왜 한숨을 지으세요?! 아까도 말했지만 왜 기분이?

《바로 돈때문이요. 돈이란 과연 무엇인가?》

김춘선은 머리를 내저으며 또다시 한숨을 짓고는 《내 오늘 가까운 친구한테서 아주 딱한 부탁을 받았소. 그 부탁을 들어줄수가 없어 속이 타서 그러오.》 하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무슨 부탁을 받았게요?》

《글쎄 그 친구가 나한테 구화페 100만원을 내놓으면서 당신은 낯이 넓은데 이 돈을 여러 사람한테 풍겨서 새돈과 바꿔달라고 하지 않겠소.》

《어마나, 100만원이나?!》

리은실은 눈이 동그래지며 놀란 소리를 질렀다.

당시 화페를 교환하는데는 한도량이 있었다. 그래야만 이전 《조선은행권》을 무데기로 가지고있던 반동적인 고리대금업자들에게 타격을 주고 말그대로 은행보유의 금, 귀금속 및 기타 국가재부로 그 가치를 담보하는 안정된 은행권을 보유할수 있기때문이였다. 남조선에서 숱한 돈을 찍어가지고와서 흥청망청 쓰던 간첩놈들과 고리대금업자들이 이제는 꼼짝을 못하게 되였다. 바로 이날 오전에 화페교환과 관련한 그런 정치강연이 있었으므로 은실은 100만원이라는 돈에 상당한 의심을 가지게 되였다.

《부장동지의 친구라는 그 사람은 무슨 돈이 그렇게 많아요? 나쁜놈이 아니예요?》

《허허허, 이젠 은실동무도 정치적각성이 대단히 높은걸. 옳소, 그래야 하오.》

김춘선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는 이번 화페개혁으로 해서 단지 고리대금업자나 간첩들뿐아니라 국가의 결정을 위반하고 비법적으로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있은 일부 국가기관, 기업소일군들의 위법행위도 폭로되였다고 하였다.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에 의하여 국가기관, 기업소들에서는 1만 5천원이상 보유하지 못하게 되여있었으나 나라의 법을 위반하고 엄청나게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있은 기관, 기업소들이 적지 않았다는것이였다. 재정국에서 화페개혁을 실시하면서 초보적으로 합산한데 의하면 기관, 기업소, 정당, 사회단체, 상업기관들에서 비법적으로 보유한 돈의 총액이 25억원이상에 달한다는것이다. 화페개혁을 통해 이것이 스스로 드러나게 되였다.

국가와 인민들이 써야 할 돈이 그렇게 개별기업소와 단체들에 잠겨있었다.

《그런걸 본위주의라고 하오. 그러니 화페개혁은 간부들을 교양하는데서도 큰 의의가 있소. 우리 기관 하나가 비법자금을 끼고있다고 해서 나라에 무얼 그리 큰 해를 입힐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합산된 25억원이라는 액수를 보고는 깜짝 놀랄게 아니요. 조금이라도 량심이 있는 일군이라면 크게 반성을 하고 다시는 그런짓을 하지 않을거란 말이요. 아마 그래서 장군님께서 이번 화페개혁은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화페혁명이라고 하셨을거요.》

김춘선은 지친듯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런데 100만원을 바꿔달라는 그 사람은 뭔가 말이예요?》

《제 개인돈은 아니고 비법적으로 축적한 기관돈 같은데…》 하고 김춘선은 구슬프게 중얼거리고 왼손의 손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그전에 그 사람한테 많은 신세를 졌소. 100만원이야 어떻게 바꿔주겠소. 그러나 여러 친구들한테 돈을 좀 풍기면 신세갚음을 할상싶지만 량심이 허락치 않고… 두루 그래서 오늘 기분이 좀 좋지 않소.》

리은실은 괴로와하는 그를 보자 도와주고싶었다. 문득 그의 머리에 떠오른것은 오랍동생이였다. 대학생들에게 풍기면 적지 않은 돈을 바꿀수 있을것 같았다.

《부장동지가 안타까와하시는걸 보니 저도 괴롭습니다. 제가 도와보겠어요. 우리 은철이한테 동무가 많지 않나요. 그 애도 부장동지의 일이라면 힘껏 도와드릴거예요.》

《오오 고맙소, 고마와. 그러나 구화페 100만원을 사람들에게 풍겨서 바꾸는 그따위 비법행위는 그만둡시다. 어쨌든 희생적으로 나를 도와주려는 은실의 그 마음에 감동됐소. 나는 은실을 친녀동생처럼 혹은 친딸처럼 사랑하겠소. 일찍 장가를 들었더라면 내게도 은실이만 한 딸이 있을수 있지, 허허허.》

김춘선은 웃으면서 웃방구석으로 가더니 들가방모양으로 생긴 철궤 하나를 가지고와서 뚜껑을 열었다. 그안에 구화페가 가득 차있었다. 물론 이것은 어느 친구의 돈이 아니라 김춘선이 쓰고있던 남조선에서 건너온 돈이였다. 춘선은 말간 액체가 들어있는 목이 긴 병을 철궤안에 기울이고나서 주머니안에서 성냥을 꺼내여 드윽 그어댔다.

철궤안에서 새파란 불이 뱀의 혀바닥처럼 날름거리며 타올랐다.

《은실이, 이것이 바로 지페요! 지페란 국가권력에 의하여 금화대신에 강제로 류통되는 화페기호요. 지페는 그자체로서는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않소. 지페에는 정치가 담겨있소, 허허허.》

리은실은 김춘선의 말뜻을 리해할수 없었다. 그는 다만 100만원의 구화페가 한줌의 재로 변해버리는 모양을 놀랍게 지켜보고있었다.

《은실이, 나와 은실의 관계는 이런 지페가 아니라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정치와 경제의 어떤 파동에도 변함없이 자기의 가치를 잃지 않는 화페 즉 금과 같이 어떤 파동에도 변치 않는 관계로 되여야 하오.》

《저는 변함없이 부장동지를 오빠처럼, 아버지처럼 믿고 존경할거예요.》

이날을 계기로 김춘선에 대한 리은실의 존경심은 더 커졌다. 이날 김춘선이가 괴로와한것은 백만원의 지페를 불에 태워버리게 된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상전으로부터 전기처장 리문도를 《공산주의 붉은칼》에 맞게 하여 북조선에서 정치적지진이 일어나게 하라는 고통스러운 지령을 받았기때문이였다.

이것을 리은실이가 어찌 알수 있겠는가.

따뜻하고도 감미로운 추억에 잠겨 걸어가던 리은실은 우뚝 멎어섰다. 김춘선의 집이 눈앞에 보인것이다.

이맘때면 풍금소리가 울려나오던 집이 웬일인지 조용하고 방문도 불빛없이 캄캄하였다. 더듬어보니 출입문에 원통형의 자물쇠가 걸려있었다. 복잡한 수자로 된 번호를 맞추어 왼쪽, 바른쪽으로 한번씩 돌리고 열쇠를 꽂아야 하는 특수한 자물쇠였다.

이제는 리은실이도 이 집 열쇠를 가지고있어 마음대로 드나들수 있었다. 김춘선이가 리은실에게 집열쇠를 준것은 은실을 친딸, 친동생처럼 사랑하겠다고 한것이 빈말이 아니라는것을 확인해주는것이였다.

은실은 돌아서 가려다가 쇠를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캄캄한 방안이 시치근한 술내로 가득차있었다. 그는 전기스위치가 있는 장지문 벽쪽으로 가다가 그만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웃방에서 무언가 푸푸거리는 사람의 숨소리가 들려왔기때문이였다. 급히 벽을 더듬어 전기스위치를 돌리는 순간 은실은 또 한번 초풍하도록 놀랐다. 웃방 침대에 전혀 낯선 사람이 네활개를 펴고 누워있었던것이다. 두툼한 입술과 뭉툭한 주먹코가 유난히 눈에 띄는 몸집이 큰 중년사나이였다.

쇠를 잠근 방안에 어떻게 술에 만취된 사나이가 곯아떨어져있는지 은실은 겁이 나서 사시나무떨듯 하였다. 그가 오도가도 못하고 아래방에서 안절부절하고있는데 김춘선이 인기척을 내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부장동지! 저 저 사람 뭐예요?》

《허허허.…》

김춘선은 새파랗게 얼굴이 질려있는 은실을 보며 크게 소리내여 웃었다. 《몹시 놀랐겠소. 저 사람은 취해누워있는데 공장지배인이 갑자기 불러서 할수없이 쇠를 잠그고 갔댔소, 허허허.…》

《저 사람은 무슨 사람인데요?》

《성흥광산 업무원인데 오늘 볼 일이 있어 은양려관에 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요. 내가 곡산공장 업무부에 있다니까 대뜸 우리 광산 영양제식당을 잘 운영하자면 형님하구 친해야 되겠구만 하고 여기까지 따라와서 마조라 한톤만 떼달라구  조르지 않겠소.》

그래서 김춘선이 계약된 공장외에는 기름을 주지 못한다고 하자 뭘 그리 딱딱하게 구느냐며 식당에 끌고가서 대접을 좀 하였는데 살아가다 저 사람같은 술고래는 처음 본다고 하였다. 술 한방구리를 다 마셨다는것이다. 춘선은 그를 그대로 돌려보내면 사고가 날것 같아 집에 데려다 눕혔다고 하였다.

《그랬군요. 전 어찌나 놀랐는지 까무리칠번 했어요.》

은실은 김춘선에게 할끗 정차게 눈을 흘기고 광산업무원의 모습을 마음놓고 더 자세히 지켜보았다. 머리가 크고 턱이 빨라서 얼굴모양이 깔때기모양인데 뭉툭한 주먹코에 귀까지 별스레 커서 어딘가 만화로 형상된 기형인간을 보는듯 했다.

《주량이자 도량이라구 이야길 해보니 사람이 서글서글하고 통이 큰게 쾌남아요. 저런 사람은 친구로 사귈만 해!》

《주량이자 도량이란 말을 전 모르겠어요.》

은실은 정색을 짓고 머리를 저었다. 10여년동안 기녀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술군들의 시달림을 받아온 은실이였으나 술과 사나이들에 대해서는 김춘선이보다 오히려 그가 더잘 알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저렇게 절제없는 술미치광이들하고는 사귀지 않는게 좋아요. 술좌석에서 친구를 사귀지 말라는 말도 있지 않아요, 조심하세요.》

《아니, 저 사람은 결코 술미치광이가 아니요. 광산로동자들을 위해 뛰여다니는것만 보아도 알수 있소. 리문도전기처장과도 잘아는 사이더군. 어저께 길가에서 그를 만났다고 하면서 그 사람이 한자리하더니 오래간만에 만난 옛친구를 아주 쌀쌀하게 대하더라면서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고 나무라는걸 봐도 도덕과 의리를 중히 여기는 사람이요.》

이때 방안의 전기불이 몇번 껌벅이더니 아래웃방이 새까매졌다.

《정전이로군!》

김춘선이 어딘가 흥분한 어조로 소리치더니 뒤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자체의 화력발전기를 가지고있는 곡산공장만이 마치 등대처럼 강렬한 화광을 뿌리고있을뿐 동평양 전구역이 암흑의 바다에 묻혀버리였다.

《요즘 왜 자꾸 정전이 될가요?》

리은실이도 뒤창문으로 다가갔다.

《심상치 않은 일이요.》

김춘선은 머리를 저으며 중얼거리였다. 《요즘 정세가 긴장해! 미국놈들이 새해에 들어서자마자 남조선에 유엔림시조선위원단이라는걸 끌어들였는데 이게 아주 위험한거요. 10월혁명이후 세계자본주의렬강들이 련합하여 쏘련을 포위공격한것처럼 미국은 자기 졸개 나라들을 다 동원하여 우리 민주조선을 어째보자는것 같아. 조그마한 북조선이 너무도 크고 강한 적과 싸우고있소.》

김춘선은 뒤창문에 한걸음 더 바투 다가가며 사뭇 걱정스러운 어조로 그냥 중얼거리였다. 《그런데 민주수도 평양에서 이렇게 정전이 되면 어쩌는가? 수풍발전소에서 사고가 생겼는가? 아니면 평양변전소에서? 새년도 인민경제계획이 걱정이군. 전기이자 생산인데…》

김춘선은 예리한 눈초리로 리은실을 피끗 스쳐보고는 손전지를 켰다. 허연 전지불줄기가 웃방으로 뻗어가 침대우에서 여전히 푸푸거리며 누워있는 광산업무원의 얼굴을 비치였다.

《저 사람의 이름은 뭐예요?》

리은실은 무심히 물었다.

《리은철이요, 은실동무 오랍동생의 이름과 같소.》

《어마나!》

리은실은 놀란 소리를 지르며 환등에 비친 만화처럼 전지불속에 부각된 업무원의 못생긴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밤바람이 뒤창문을 두드렸다.

《날씨가 꽤 사납군. 풍금이나 좀 타볼가.

김춘선은 은실에게 전지를 넘겨주고 풍금과 마주앉았다.

이윽고 그는 은실이가 여태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곡을 타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들을 맛이 없는 따분하고 지루하고 선률이 고르롭지 못한 곡이였으나 김춘선은 긴장한 얼굴을 하고 두번이나 반복하여 탔다.

《부장동지, 다른 곡 타세요. 재미없어요.》

《가만, 좀 기다려주.》

김춘선은 풍금의 건반에 은실이의 손이 미치지 못하게 하며 그냥 긴장하게 풍금을 탔다.

은실은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으나 그 가느다란 의혹의 신경줄은 김춘선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심으로 하여 인차 녹아버리고말았다.

김춘선은 풍금을 다 타고나서 다시 뒤창문으로 걸어가 정전이 된 어두운 밤거리를 내다보며 비통하게 중얼거리였다.

《래일이여! 너는 도대체 무엇이더냐? 너는 알수 없는 우주의 신비로다. 누구도 알지 못한다, 너의 생김새. 허나 너는 반드시 찾아오는 인생의 시간이다. 이제 찾아오는 나의 래일은 어떤것이겠는가.》

《부장동지! 락천적이던 부장동지가 오늘 밤은 왜 그리도 감상적이예요. 왜 마음을 진정 못해요.… 화페개혁을 한 그날부터 부장동진 점점 감상적인 인간으로 되여가는것 같아요. 이 좋은 세월에

리은실은 안타깝게 속삭이였다.

《이밤은 괴롭소. 전기불이 꺼진 평양을 보니…》

김춘선은 진정 괴로운듯 길게 한숨을 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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