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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시대 제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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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613회 작성일 19-11-03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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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7

 

평양곡산공장 업무부통계원 리은실은 깊은 생각에 잠겨 영제동의 밤거리를 걸어가고있었다.

불밝은 거리에는 이채로운 광고문들이 나붙어있었다.

《평양곡산공장 1947년 6일 9일 현재 상반년계획 초과완수!》

《6월 중순경 북남전기회담 예견!》

리은실은 방금 공장예술소조원들의 계획완수축하공연을 관람하고 돌아오는 길이였다. 공연의 모든 종목들이 감동적이였지만 특히 실화구연 《평양곡산공장 녀성들의 어제와 오늘》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어제와 오늘은 노예와 주인, 지옥과 천당의 차이를 보여주고있었다.

리은실은 그 실화구연에 자기의 인생길을 비쳐보게 되였다.

그는 여기 공장녀성들과는 다르게 살아온 녀인이였다.

아직 한번도 결혼을 해본 일이 없고 어느 한 남자와도 진실한 사랑을 해보지 못했었다. 그에겐 지금 혈육이라고는 오랍동생 하나가 있을뿐이였다.

그의 아버지는 평양에서 옹기장사를 하던 상인이였는데 1929년에 병사하고 이듬해에는 어머니마저 돌아갔다. 그해에 평양사립가무학교를 졸업한 리은실은 열네살 어린 나이로 료리점을 찾아다니며 노래와 웃음을 파는 기녀생활을 시작하게 되였다.

그는 왕수복이와 가무학교 동기동창생이였다. 왕수복은 졸업당시에도 특이한 재능을 보여주어 가무학교 조교원으로 떨어졌지만 그밖의 거의 모든 졸업생들은 기생, 술집아가씨, 지어는 창녀로 사회의 맨 밑바닥에 깔려들어갔다.

원래 평양가무학교는 량심적인 평양유지들이 일제통치시기 권번제도(기생을 두고 감독하며 료리점에 중개하여 돈을 받아 중간착취하는 영업)을 반대하여 세운것이였지만 사회제도앞에서 그들의 량심은 무력한것이였다.

은실이 권번자에게 매워 기녀생활을 하고있을 때 어린 남동생은 방랑고아로 되여 쓰레기통을 뒤져먹으며 세상을 떠돌아다니였다.

오랍동생은 왜놈들과 부자놈들의 발길에 채이는 막돌이였다면 은실은 그놈들에게 짓밟혀 상처입고 덞어지고 이지러진 한떨기 슬픈 락화였다.

해방후 북조선의 민주개혁은 리은실의 인생에서 극적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남녀평등귄법령은 실질적으로 녀성의 인권을 옹호하여 유곽과 권번제도를 철페시키였다. 그리하여 리은실은 10여년동안이나 지속해온 기녀생활과 리별하고 민주건국사업에 진출하게 되였는데 평양시인민위원회 로동과에서는 그를 평양곡산공장 생산직장인 당화직장 포장공으로 배치하였다.

소녀시절부터 10여년동안 료리집에서 노래와 웃음을 팔며 무절제하게 살아온 그에게는 규칙적인 로동생활이 몸에 붙지 않았다. 하여 그는 출근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자유주의적인 라태한 생활을 하였다.

이런 때 곡산공장 업무부 부장인 김춘선이 그를 찾아와서 나라에서는 사람답게 살라고 신성한 일터를 마련해주었는데 옛날습성 그대로 너절한 생활을 해서야 되겠는가, 물론 잡자기 육체로동을 하자니 몸에 붙지 않을수 있지만 로동의 땀으로 기녀생활의 치욕스러운 때를 깨끗이 씻어내야 한다고 친오빠처럼 따뜻하게 타일러주었다. 그리고는 본인이 반대가 없다면 지배인, 당위원장들과 토론을 해서 업무부 통계원으로 직종을 돌려줄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업무부 통계원이 된 그는 점차 생활하는 과정에 김춘선부장이야말로 인정이 깊고 남을 위하는 일에서 대단히 성실한 일군이라고 생각하게 되였다.

이미 쉰줄에 들어서기 시작한 김춘선은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젊은시절에 안해와 자식을 잃고 오랜 세월 독신생활을 해오면서도 녀성관계에서 단 한건의 오점도 남기지 않은 수정처럼 깨끗한 인간이라고 하였다. 지성도 있고 견문이 또한 넓은 사람이였다.

가무학교출신인 리은실의 마음을 류달리 잡아끈것은 그에게 음악에 대한 조예가 상당히 깊은것이였다.

김춘선은 동서고금의 음악과 음악가들에 대하여 많이 알고있을뿐아니라 풍금을 아주 멋지게 탔다. 그는 공장근처의 두칸짜리 수수한 기와집에서 독신생활을 하고있었는데 저녁 7시-8시사이엔 늘 그집 웃방에서 풍금소리가 울려나왔다.

어느날 리은실은 업무부장에게 통계자료를 넘겨주면서 《부장동진 풍금을 아주 잘 타십니다. 보통솜씨가 아니예요.》 하고 진심으로 감탄해마지 않았다.

《뭘 잘 타겠소. 막배운 풍금인데… 일하다가도 풍금을 한번씩 타면 머리가 거뜬해져서 엉터리풍금을 타군 하지. 허허허… 아마 전문가교육을 받은 은실동문 내가 타는 풍금소릴 듣고 속으로 웃을거야.

그러면서 춘선은 풍금을 타고싶으면 저녁 7시-8시사이에 와서 타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밖의 시간에는 사업에 지장이 되므로 풍금을 내줄수 없다고 하였다.

《정말 7시에 가도 괜찮겠어요?》

《어서 오라구.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한시간이상은 빌려줄수 없소. 린색하다고 욕해도 별수 없소. 나는 일할줄 모르는 사람이라 언제나 시간이 딸려서 쩔쩔 매거던. 허허허.》

김춘선은 실지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였다. 그는 집에 와서도 공장사무를 보았다.

그날 은실은 저녁을 일찍 먹고 약속대로 7시에 업무부장집을 찾아갔다.

아래방에서 사무를 보던 김춘선은 은실을 반가이 맞아주며 장지문을 열어주었다. 웃방에 조금 색이 날은 까만 풍금이 놓여있었다.

봉선화를 타보지. 어쩐지 오늘 저녁엔 그 노랠 듣고싶구만.》

풍금과 마주앉은 은실은 풍금덮개를 열고 춘선이 요구하는대로 흰 건반을 누르며 처량한 녀성중음으로 《봉선화》를 불렀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봉선화》의 1절을 부르고나자 은실은 어쩐지 가슴이 저려났다. 2절부터는 거의 울면서 건반을 눌렀다.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락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2절까지 탄 은실은 설음이 북받쳐 풍금건반우에 웃몸을 내동댕이쳤다. 덧없이 흘러간 인생의 무상함, 아니 치욕스럽게 흘러간 자신의 청춘시절에 대한 설음이였다.

1946년 10월 그때 은실의 나이는 서른살이였다. 아직도 꽃다운 나이라고 할수 있었다. 하지만 《락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라는 구절은 곧 인생의 락화로 된 자신의 처량한 모습에 대한 넉두리처럼 느껴졌던것이다.

김춘선은 몹시 당황해하였다.

《은실이, 울음을 그쳐! 민주건국시대에 감상주의에 빠지면 안돼! 내가 오늘 봉선화를 부르라고 한건 〈봉선화에 담겨있는 홍란파선생의 애국의 얼을 사랑하기때문이요. 이 노래에는 홍란파선생의 우국사상과 예술이 집약되여있소.》

리은실이도 《봉선화》의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그것은 나라잃은 인민의 설음이였다. 해방된 오늘에 와서까지 《봉선화》를 부르며 오열한다는것은 잘못된 일이였다.

《은실이,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진정한 음악가는 다 애국자였소. 우리 나라의 박연이나 우륵이 그랬고 서양의 쑈팡이나 파라테프스가 그랬지.… 은실동무, 어서 일어나오. 동무에게 힘을 주기 위해 내가 풍금을 타야겠소.》

은실이 자리를 내주자 김춘선이 풍금을 마주하고 앉아 《산업건국의 노래》를 부르며 건반을 눌렀다.

 

    반만년 처음보는 우리의 자랑

    밭가는 농민에게 토지를 주고

    빛나는 로동법령 갈길을 밝혀

    새조선 굳은 반석 마련되였다

    아 이 감격을 생산돌격 산업부흥에

    모든 힘을 한데 뭉쳐 산업부흥에

 

김춘선은 노래의 마지막 4절까지 다 불렀다. 그의 성대는 그리 좋지는 못하였으나 정서가 있고 음정이 정확하여 듣기가 좋았다.

아닌게아니라 은실은 그 노래를 듣고나니 기분이 전환되였다.

이때부터 은실은 거의 매일 저녁 7시가 되면 김춘선이네 집에 찾아가 풍금을 탔다. 단지 풍금만을 탄것이 아니라 김춘선이한테서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김춘선은 세계명인들로부터 조선의 현대, 근대의 정계, 학계, 종교계인물들의 리력, 습관, 성격, 기질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잘 알고있었다.

정말로 김춘선은 모르는것이 없고 한점 흠집도 보이지 않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김춘선부장은 결함이 없는 그자체가 크고 무서운 결함이라고 하였다.

은실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미워했다. 그는 어느덧 김춘선을 성인처럼 우러러보게 되였다. 김춘선은 은실이보다 열아홉해나 장물을 더 먹은 남자였다.

김춘선이가 박식하고 견문이 넓고 사상이 견고한 인격자라는데 대해서는 곡산공장의 거의 모든 간부들과 종업원들이 인정하고있었다.

리은실은 집앞에 이르러서야 생각에서 깨여났다.

마당에 들어서니 뜻밖에 한 젊은이가 서있었다. 곤색양복을 입은 얼굴이 우둘투둘한 젊은이는 리은실을 띠여보고 반색을 지으며 소리쳤다.

《누님!》

《아니 이게 누구냐? 네가 기별도 없이 어찌된 일이냐?》

리은실은 오랍동생의 손을 붙잡고 반가와서 소녀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은실의 눈에는 대번에 말간 미음이 돌았다.

《누님, 나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게 됐어요.》

리은철은 벙글벙글 웃으며 역시 소년처럼 뻐기듯이 말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아니 그게 정말이냐?》

리은실은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남동생이 대학에서 공부하게 됐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아 눈을 깜박거리였다.

《정말 아니면 거짓말을 하겠어요?》

《모를 일이다.… 밖에서 이러지 말고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 내 제꺽 밥을 지을게.》

그러자 리은철은 《지금이 어느땐데 밥을 지어요. 기차칸에서 배불리 먹었어요. 그리구 이 트렁크안에 온통 익은 음식들인데요. 내가 대학에 간다니까 동무들이 저저마다 한꾸레미씩 안겨주어서 처치하기 곤난할 지경이였지요.》 하고 토방에 놓여있는 가죽트렁크를 가리켰다.

리은철은 제 손으로 아래방 지게문을 열고 들어갔다. 은실이 전기불을 켜자 은철은 화려하게 장식된 아담하고 깨끗한 방을 둘러보며 탄성을 올리였다.

아래웃방에 장생화를 원색으로 새긴 새노란 장판을 했는데 벽마다에 족자와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아래방에는 반신을 비쳐볼수 있는 커다란 고급경대와 라지오를 얹어놓은 살색앉은책상, 진주자개를 박고 백동자물쇠를 채운 구식의농이 눈맛이 돌도록 조화롭게 배치되여있었다. 의농우에는 대나무껍집로 결은 일종의 공예품같은 황, 청, 록의 3색 반짇고리가 얹혀있었다. 웃방에는 고급양복장과 이불장이 한쪽벽을 채우고 뒤벽에는 《평양곡산공장생산품》들을 진렬한 3단진렬대가 이불장과 직각이 되게 놓여있었다.

진렬대에는 물엿, 킹그슈사탕, 과자, 흰가락엿, 까만판대기엿, 전분, 단백, 아미노산, 고급기름, 간장, 된장, 포도당 각종 주사약 등 30여종의 공장생산품들이 진렬되여있었다.

《야, 이제보니 누님은 정말 방안을 멋있게 꾸렸군요. 눈이 희뜩 뒤집혀지겠어요.》

《너 김춘선부장 알지? 이게 다 그분이 도와서 꾸려준게다. 혼자 사는 녀자라구 날 친딸처럼 위해준다. 그렇게 인정깊은 사람 처음 본다. 그런데 네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게 됐다는게 사실이냐? 이 누날 놀리느라 그러지?》

리은실은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오랍동생의 얼굴을 보며 반신반의하는 웃음을 지었다.

《누님이 믿지 않으니 내 털어놓고 말해야겠군요. 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하고싶다고 장군님께 편지를 올렸어요. 그래 추천을 받았어요.》

《뭐라구?!》

경악한 은실은 눈동자가 굳어진채 한동안 말도 못하고 오랍동생을 빤히 지켜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요? 아버지같은 장군님이신데 왜 편질 못해요. 장군님께서 우리 공장에 여러번 오셨댔는데 우리 로동자들에게 뭣이든 애로가 있으면 아무때도 좋으니 편지를 하라고 하셨거던요. 그래 편지를 올렸지요뭐.

일제시기 일찌기 부모를 잃고 돈이 없어 학교문전에도 못 가봤다고… 공부하고싶어 공장에 내려온 김책동지한테까지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에 추천해달라고 졸라댔다고 속마음을 다 터놓았지요뭐… 일은 그렇게 됐어요.

리은실은 말을 못하고 앉아있었다. 활랑거리는 가슴에 가져다댄 그의 희고 가느다란 손이 바들바들 떨리였다.

《네가 정말 어벌뚝지도 크다. 속이 다 떨리누나. 감히 장군님께 그런 불손한 편지를 올리다니…》

《불손하긴 왜 불손하다구 그래요. 장군님께선 어렸을 때부터 부모없이 고생도 많이 하고 학구욕이 높은 청년같은데 김일성종합대학 예비과에 추천해주자고 당위원회에 친히 전화까지 걸어주셨대요.》

옷고름을 들어 눈굽을 찍는 은실의 손이 더욱 크게 떨리였다. 마침내 은실의 눈에서 한방울 눈물이 구슬알처림 굴러내렸다.

《은철아! 장군님의 은덕을 잊지 말자! 네 학비는 내가 대줄테니 열심히 열심히 공부해서 박사가 되거라!》

리은실은 방랑고아로 막돌처럼 굴러다니던 오랍동생의 쓰라린 과거가 가슴미여지게 되새겨져 흐느낄듯 울먹이였다.

《누님은 깜깜이군요. 학비는 필요없어요. 나같은 무의무탁생은 돈을 받으며 공부를 해요. 그리구 그동안 저금한 공장로임이 약차해요. 이번에 창의고안 상금과 루진도급로임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 알아요?》

《하긴 우리 공장에두 상반년도계획을 초과에서 상금을 받은 동무들이 많아! 참 고마운 인민정권이지. 이게 다 우리 장군님의 덕이지. 부모님들이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가?》

은실은 자꾸만 눈물이 나와 옷고름을 눈가에 가져갔다.

리은철이도 흰저고리에 파란치마를 받쳐입은 시내가의 물망초처럼 청초한 누이의 모습을 보며 눈을 슴뻑이였다.

청춘을 짓밟혀온 누이, 아직도 꽃같이 젊은 누이가 이렇듯 큰집에서 홀로 외로이 살고있는것이 가슴아팠다.

부엉 부엉

웃방에서 부엉이(괘종)가 울어대는 서슬에 은실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쳐들었다. 밤 열한시를 알리는 부엉이울음이였다. 불현듯 은실의 새까만 눈동자에서 불꽃이 반짝이였다.

《얘, 은철아. 우리 부장동지한테 인사하러 가지 않겠니? 그분이 너희네 흥남비료공장을 많이 도와주었지. 그분은 흥남에 갔다올 때마다 네 소식을 전해주군 했다.》

《김춘선아바이 말이예요? 그런데 이 밤중에요? 열한시나 됐는데…》

은철은 시간이 너무 늦어서 뜨아해하였다.

《일없다. 그분은 저녁 7시에서 8시사이와 밤 11시에서 12시사이가 휴식시간이다. 이 시간에 풍금을 타지. 그리구 새벽 두시, 세시까지 드레없이 일을 하신다. 그분은 정말 애국자야. 흥남비료공장을 잘 도와야 농사가 잘된다면서 너희 공장에 매달 기름을 차판에 실어서 가져가군 했지.》

은실은 오랍동생이 온 기회에 밤풍금을 타는 김춘선의 모습을 보고싶었다. 그는 춘선의 인격에 손상을 주는 좋지 않은 말이 돌수도 있지 않을가싶어 늦은 밤에 그의 집을 찾아다니는 일을 극력 삼가했었다.

《은철아, 너도 그 말 들었겠지. 이제 며칠 있으면 평양에서 북남전기회담을 한대. 그리구 6월 30일에는 서울에서 하던 쏘미공동위원회 사업을 평양에 와서 한다누나. 춘선부장은 그런 큰 행사들을 앞두고 일을 더 잘해야 한다면서 요즘은 밤을 패며 일하는것 같더라. 어서 가보자!》

리은실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은철이도 벗어놓았던 양복저고리를 도로 입고 트렁크안을 뒤적거리였다. 이윽고 그는 동무들이 꾸려준 음식꾸레미들중에서 함경남도특산물이 될수 있는 꾸레미를 몇개 꺼내들고 일어섰다.

다정한 두 남매는 꾸레미를 한개씩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사람들의 왕래가 뜸해졌으나 영제동 밤거리는 다채로운 장식등과 촘촘히 세워진 가로등으로 하여 밝고 화려하였다. 양각도너머 저편 불야성을 이룬 본평양은 마치도 수천개의 성좌가 들어앉은 광대하고 무변한 하늘같이 보이였다.

얼마후 김춘선의 집마당에 이르자 과연 풍금소리가 들려왔다.

《어마나, 화편(꽃에 대한 노래)을 타시누나!》

그것은 은실이가 가무학교에 다닐 때 많이 부른 전통민요의 하나였다.

《아바이가 풍금을 타는가요?》

《넌 왜 아바이, 아바이 하니? 부장동지라고 불러라.》

리은실은 동생을 나무랐다. 어쩐지 아바이라는 말이 싫어서였다.

《아바이가 아니, 부장동지가 왜 저런 봉건냄새가 나는 노랠 불러요?》

《봉건냄새가 난다는건 무슨 소리냐? 저건 아주 좋은 노래다. 일제시기 저 노랠 우국지사들이 많이 불렀다. 풍금을 다 타실 때까지 방해하지 말구 여기서 기다리자.》

풍금소리는 계속 울려나왔다. 그것은 모란꽃과 해바라기꽃 그리고 련꽃, 앵두꽃들을 의인화한 노래였다. 곡조는 은근하면서도 처량하였다.

은실은 멀리 흘러간 소녀시절로 추억을 달리면서 풍금소리에 맞추어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 처량한 풍금소리가 남조선의 미군정우두머리에게 보내는 무전이라는것을 알고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세사람밖에 없었다. 그것은 미군정장관 하지와 이제 북남전기회담차로 평양에 오게 될 미군정대표 후레 드리크소장 그리고 김춘선자신이였다.

김춘선이 《애용》하는 풍금안에는 당시 최신형의 미국제무전기가 들어있었다.

김춘선은 지금 북남전기회담과 관련된 자료들을 전파로 날리고있었다.

청년시절부터 미중앙정보부계통의 정규교육을 받은 김춘선은 그들로부터 최우수정탐가로 인정받고있는 미제의 고용간첩이였다. 1946년 11월 3일 민주선거를 파탄하기 위하여 이른바 《예수의 계시문》을 조작한자가 바로 김춘선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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