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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시대 제3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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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814회 작성일 19-11-07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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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장

1

 

1947년도 인민경제발전계획수행을 위한 4. 4분기 최후돌격전으로 온 나라가 불도가니처럼 끓고있었다.

신문과 방송으로는 평양곡산공장을 비롯하여 년간계획을 완수한 공장, 기업소들과 모범로동자들이 연방 소개되고 대풍을 거둔 농촌마을들에서는 날마다 북, 꽹과리가 울리는 속에서 현물세달구지들이 줄지어 흘러갔다.

11월도 다 끝나가고있는 이날 오후 평양극장 관람실에는 평양시사회단체 선전부문 일군들과 각 기관 재정경리일군들이 빼곡이 앉아있었다.

극장, 영화관들에서 흔히 말하는 초만원이였다.

그러나 이들은 예술공연을 보러온 관람객들이 아니라 북조선인민위원회 재정국에서 조직한 경제강연에 초청된 청강자들이였다.

강연제목은 《리조말기에 있어서의 조선의 화페문제》이고 강연출연자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법학부장 김광진이였다. 청강자들은 누구라없이 강연제목에 저으기 호기심을 가지는것과 함께 상당한 의문들을 느끼고있었다.

강연제목이 온 나라가 인민경제계획수행의 마지막돌격전을 벌리고있는 오늘의 격동적인 분위기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기때문이였다.

재정경리일군들은 다소 참고가 되겠는지 모르겠지만 사상선전부문 일군들이 리조말기의 화페문제에 대하여 알아야 할 까닭이 무엇인가? 그에 대해서는 지금 극장응접실에서 출연시간을 기다리고있는 김광진자신도 딱히 알지 못하고있었다.

어제 아침 대학당에서 부른다고 하여 그는 아마도 여태 걸핏하면 불러내다 따지군 하던 유진오와의 관계요, 안해의 경력이요 하는 과거의 허깨비문서들에 대한 신원조사가 제기되지 않았는가 하는 예감에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 더구나 장군님께 사죄의 편지를 올린 이후 대학당에 찾아가서도 스스로 비판을 여러번 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몇달동안 장군님의 하회가 있기를 기다리며 은근히 마음을 조여온 그여서 대학당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긴장하지 않을수 없었다. 안해까지도 과거경력에 대한 일부 간부들의 시비가 아직도 그치지 않고있어 요즘은 저으기 기분이 처져있었다.

그래서 김광진은 사뭇 불안한 마음을 안고 대학당을 찾아갔는데 전혀 뜻밖의 말을 듣게 되였다.

《이제 선생은 1932년에 발표한 경제론문 리조말기에 있어서의 조선의 화페문제에 대한 군중강연에 출연해야 하겠습니다.》

김광진은 깜짝 놀랐다. 자기 귀를 의심하기까지 하였다.

더더구나 놀라운 일은 그 경제과학강연(엄밀한 의미에서는 강의라고 말할수 있었다.)이 김일성장군님의 특별지시에 의하여 조직되였다는것이였다. 청강대상자는 평양시 사회단체 선전부문 일군들과 각 기관 재정경리일군들이라고 하였다.

김광진의 가슴은 걷잡을수없이 뛰놀았다.

대학당 책임일군은 놀라고 어리둥절해하는 김광진에게 장군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달하였다.

《장군님께서는 선생부부의 과거경력을 놓고 시비질을 하는 일군들을 되게 꾸중하셨습니다. 그이께서는 일제시기 왜놈들의 탄압에 못이겨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창씨개명을 하였지만 그들부부는 창씨개명도 안했다, 리광수, 리태준, 모윤숙, 로천명들이 일본글로 시와 소설을 쓰고 적지 않은 가수들이 강요에 못이겨 일본노래를 부를 때 왕수복은 음악과 결별하고 집으로 들어갔다고 친히 보증해주셨습니다. 그러시고 화페에 대한 선생의 경제론문이 일제시기 집필한것이지만 글줄마다 애국의 넋이 맥맥히 흐르고있고 론리가 정연하여 오늘에 와서도 손색이 없는 가치있는 론문이라고 하시면서 오전, 오후 갈라서 약 4강의정도 시간을 배당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김광진은 눈물이 쏟아져나와 손수건을 꺼내였다. 이제는 15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러 경제전문가들의 머리속에서도 지워져버린 그 변변치 못한 론문을 장군님께서 생생히 기억하고계실뿐아니라 적지 않은 국가간부들로부터 의혹의 대상이 되여있는 자기를 믿고 내세워주고 평가해주시니 정말로 격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장군님께서 어찌하여 근대경제사의 한부분에 불과한 리조시기 화페에 대한 경제강연회에 사회단체 사상선전부문 일군들을 참가시키도록 하셨는지 알수 없었다.

《선생님, 시간이 됐습니다.》

행사조직에 동원된 재정국의 젊은 부원이 드디여 응접실문을 열었다.

일제시기부터 수십수백번 강의와 강연에 출연한 김광진이지만 이날처럼 흥분하고 긴장해본적은 없었다.

그는 분장실을 거쳐 무대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연탁앞으로 걸어갔다.

수백명 청강자들의 시선이 김광진의 얼굴에 집중되였다. 광진은 강의원고를 연탁에 올려놓고 청강자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였다. 얼핏 내리다보니 초대석에서 허가이의 넓은 이마가 번뜩거리고 리문도, 정준택, 박창옥, 정렬수, 장시우 등 경제에 대해서 제노라 하는 만만찮은 사람들의 눈빛들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여러분!》

김광진은 자기의 목소리가 떨리고있음을 감촉하고 잠간 숨을 모두었다.

《저는 먼저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이 미거한 사람을 강연탁에 내세워주신데 대하여 심심한 감사를 드리는바입니다.》

그는 박수소리가 가라앉은 다음 계속하였다.

《이제 제가 강연하게 되는 리조말기에 있어서의 조선의 화페문제는 암담한 일제시기 피눈물을 머금고 집필했던 저의 15년전의 미숙한 론문입니다. 다 아시는바와 같이 지식이 빈곤하고 재능이 박약한 제가 그때 감히 그런 론문을 집필하게 된것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에 대한 경제학적인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 시작으로서 화페관계를 통해 일제의 침략성을 폭로하여야 된다는 자각을 가지게 되였기때문이였습니다.

하지만 자질을 갖추지 못한 저로서는 그 문제에 대하여 충분히 해명할만 한 능력이 없는데다 일제의 검열과 단속이 심한 까닭에 론문은 온전한 모양을 못 갖춘 불구로 되였습니다. 해서 오늘 강연에서는 현대의 시점에서 본인의 견해를 더 보충하고 부연하고저 합니다.》

김광진은 머리말과 8개의 장으로 구성된 본론문에 대한 특강을 오전, 오후로 나누어 총 4강의를 하도록 계획하였음을 알려주고 이렇게 덧붙이였다.

《첫 강의에서는 머리말과 제1장 《리조시대 화페개관》에 대하여 취급하려고 합니다. 머리말강의에서는 기쁨과 슬픔도 있었고 영예와 수치도 있었으며 공적과 과오도 있은 저의 과거에 대한 솔직한 인생총화도 하여 화페와 국가, 화페와 개인의 운명관계에 대한 제나름의 분석도 해보고저 합니다.》

장내가 수선거리였다. 강의를 통해 자신의 인생총화를 하겠다는 출연자의 발언에 어지간히 흥미를 느끼는것 같았다.

장시우가 웃몸을 뒤로 젖히고 박창옥이쪽에 얼굴을 돌리며 무슨 의미에서인지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청강석에는 경상동 녀맹위원장들인 왕수북, 최윤옥이도 있고 곡산공장 업무부 부장 김춘선이와 통계원 리은실이도 있었다.

동양발전소건설을 끝내고 돌아온 오천행은 요즘도 짬이 생길 때마다 김광진의 집에 찾아가 경제학을 배우군 하는데 이 강연회에 참가증도 없이 떼를 써서 겨우 끼여들어왔었다. 김광진은 이같이 서론을 간단히 하고 본론에 들어갔다.

《저는 론문 머리말에서 먼저 화페 즉 돈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론술하였습니다. 저는 국가의 사회관계망을 하나의 직조품으로 본다면 화페를 무수한 날실과 씨실로 짠 그 직조품의 매듭에 비유하였습니다. 즉 교환행위로 직조된 상품생산사회의 사회관계망에 있어서 하나의 매듭이 곧 화페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하나의 실매듭이 풀리기 시작하면 직조품이 흐트러지기 십상이므로 화페의 문란이 조성되면 사회관계망이 흐트러져 나라의 안정을 유지할수 없게 됩니다.》

김광진은 일본, 미국 등 외래자본의 침투로부터 리조시기 통화의 문란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고 력설하고 외국자본주의침습의 위험성을 간파한 대원군이 조선에 와있는 카톨릭교도 3천명을 학살하고 척화비를 세웠지만 세계자본주의는 락후한 조선의 문호를 힘들이지 않고 열어놓았다고 하였다. 맨 선참으로 조선에 군림한것은 신흥일본이였다. 《조일수호조규》(1876년 2월 3일)가 체결되여 대원군쇄국정책의 《만리장성》이 크게 흔들리게 된것이다.

《그렇습니다. 일제는 화페를 침략의 도구로 리용하였습니다. 〈조일수호조규〉이후 일본상인들이 일본은화를 지배적인 교환수단으로 리용하여 일제는 점차 조선에서 통화의 주도권을 쥐게 되였습니다. 이에 국가존망의 위기를 인식한 혁신관료들은 〈갑오개혁〉을 시도하면서 화페를 개혁할 조치를 취했습니다.》

김광진은 리조시기의 엽전 한잎과 일본《천황》이 그려있는 지페를 들어보이며 설명을 계속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 통용되고있던 이 엽전은 가치가 확고히 담보되지 못한데다 〈당오전〉(한푼이 엽전 5푼의 가치를 가지는 돈)이니 《당백전〉(한푼이 엽전 백푼의 가치를 가지는 돈)이니 하는 질이 나쁜 화페가 람발되여 통화의 문란이 조성되였으며 그래서 청나라돈까지 들어와 쓰이고있었습니다.》

혁신관료들은 이러한 페단을 없애기 위해 은본위제의 《신식화페 발행》을 실시하기로 하였으나 일제는 이들의 화페개혁안을 반대하고 저들의 《개혁안》을 내리먹이는 내정간섭을 무력적으로 감행함으로써 혁신파들의 화페개혁은 실패되고말았다. 설사 화페개혁을 실시하였다 하여도 생산관계의 안정성을 보장하지 못한 조건에서는 조선으로 밀려드는 일본자본의 격류에 의해 개혁된 그 화페가 공기에 접촉된 미이라와 같은 와해와 붕괴의 운명을 면치 못했을것이다.

《보다싶이 일제는 화페를 통해 이 땅에 저들의 자본을 구축하고 그 자본으로써 이 나라를 삼켜버렸습니다. 이것은 보편성을 가진 제국주의자들의 침략방식입니다.

오쥬에가 말한바와 같이 만약 화페가 한쪽볼따귀에 피자국을 띠고 이 세상에 나타난것이라면 자본은 머리꼭대기에서 발끝에 이르는 모든 털구멍으로부터 피와 오물을 질질 흘리며 이 세상에 도래한것이였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저는 이 론문을 집필할 때 붕괴와 몰락의 슬픈 길을 걸어온 근대조선의 경제사만이 아니라 돈때문에 수난의 길을 걸어온 우리 가문의 래력에 대해서도 뼈아프게 심심히 돌이켜보았습니다.

저는 리조시기 관청의 종살이를 한 종집안의 후손입니다.》

김광진은 가문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방향을 돌리였다.

그는 자기네 가문이 언제부터 관청에 잡혀가 종살이를 하였는지 족보가 없기때문에 모른다고 하였다.(종들에게는 족보가 없었다.)

다만 명백히 알고있는것은 리조시기 할아버지가 돈 3전을 훔쳤다는 억울한 죄를 쓰게 되자 관청을 뛰쳐나와 도망을 쳐서 심심삼골인 희천땅에 숨어서 살게 되였다는것이다.

화페 즉 돈 3전이 인간을 이렇게 괴롭히고 희롱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곳에 가서도 돈이 없어 어느 지주집에 들어가 머슴살이를 하여야 하였다. 그러다가 평양에 나와 나무장사, 옹기장사를 하였다. 이것은 지게에 나무단이나 옹기, 버치같은것을 싣고다니며 팔아야 하는 고된 로동이였다.

아버지대에 와서 장사밑천이 조금 생겨 보부행상이 아니라 옹기도매업을 할수 있게 되였다.

김광진은 이런 소상인가정에서 1903년 8대 외동자로 태여났다. 세상에 외아들이 많지만 8대나 내려오면서 외아들을 기른 집은 흔치 않을것이다.

광진은 8대 외동자로 태여난 덕에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고 살림이 넉넉치 못한 형편에서도 소학교와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다닐수 있었다.

김광진은 학교에서 공부는 언제나 첫자리였다.

머리가 총명해서 선생들과 마을사람들은 그를 신동이라고 하였다.

그는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때 평양시학생들과 함께 3. 1인민봉기시위에 참가하였다가 놈들에게 체포되여 처음으로 감옥맛을 보게 되였다. 할머니는 경찰서 마당앞에 돗자리를 깔고앉아 버티기를 하면서 손자를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통할리 없었다. 그러나 돈이 있는 집들에서는 경찰서에 돈을 먹여서 자식들을 빼냈다.

순진한 소년이였던 김광진은 여기서 돈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게 되였다.

1922년 고등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그길로 일본으로 떠났다. 그 시기는 한창 류학바람이 불고있을 때이고 뜻을 품은 사람들은 모두 류학의 길을 떠나던 때였다.

부모들은 8대 외독자를 멀고먼 이역땅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으나 그는 결연히 뿌리치고 도꾜에 가서 고학으로 대학을 다닐 결심을 하였다.

그는 도꾜상과대학 예비과에 입학하였다. 결코 부모의 대를 이어 장사를 하자고 상과대학을 지망한것이 아니였다.

그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 돈, 할아버지에게 억울하게도 도적의 루명을 씌운 돈 3전, 아버지를 장사에 미치게 한 그 돈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똑똑히 알고싶어 상과대학을 선택하게 되였다. 그는 고학을 하면서도 이를 악물고 공부에 전념하여 늘 수석, 차석을 다투는 성적으로 매 학기를 마치군 하여 대학에서 인차 두각을 나타냈다.

김광진은 대학 예과 2학년때 세계적인 참화를 기록한 간또대지진을 겪었다. 간또대지진은 너무도 명백한 자연재해였으나 일제살인귀들은 그것을 조선사람들에 의해 빚어진 재화로 조작하고 조선사람들을 학살할데 대한 일본 내무부대신의 지시문을 내려 지진의 피해보다도 더 무서운 참화를 조선사람들에게 들씌웠다.

김광진은 남의 집 고미다락에 숨어서 조선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광경을 말짱 내다보게 되였다. 놈들은 조선사람이라고 하면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칼로 찔러죽이고 총으로 쏴죽이고 참대창으로 죽탕쳐죽였다.

그때 목격한 간또대지진사건이 그로 하여금 일생을 두고 일본놈들에 대한 철천의 한을 품게 하였다.

이런속에서 그는 1928년에 상과대학 예과 3년, 본과 3년을 거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대학 1등 수석졸업생에게는 금메달과 학사학위칭호를 주게 되였으나 일제는 조선사람인 김광진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온 김광진은 성대에서 3년 조교수생활을 하다가 서울보성전문학교로 옮기여 경제학 경제사를 당당한 교수로 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구한국시대로부터 조선사람들만으로 경영하고있던 유일한 민족주의적사립전문학교였다.

김광진은 이 학교에서 10여년간 교수생활을 하면서 1930년대초부터 일제의 조선침략전쟁을 까밝히기 위한 저술에 전념하였다. 이리하여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학술론문집에 발표한것이 《리조말기의 화페류통과 화페정리》였는데 출판하면서 제목을 《리조말기에 있어서의 조선의 화페문제》로 바꾸었다. 련이어 1934년에 《고구려사회의 생활양식》을 학술잡지에 발표하였으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들에 30여편의 론문을 발표하였다. 그가운데는 쏘련의 대중적생산운동을 소개하는 《쏘련에서의 쓰따하노브운동에 대하여》 라는것도 있었다.

학계와 사회계에서 경제학자로서의 김광진의 머리가 우뚝 솟아오르게 되였다.

어느 한 문필가는 그를 경제학계의 고봉우에 빛나는 푸른 별, 고도 평양이 낳은 정계학의 거장이라고 격찬하는데 이르렀다. 이 시기 또 힌사람의 평양재사가 나왔으니 그가 바로 열일곱살의 녀가수 왕수복이였다.

김광진을 놀라게 한것은 어느 한 출판물에 난 《일조에 백만장자가 된 녀가수 왕수복》이라는 제목이였다. 화페와 국가, 화페와 인간의 호상관계에 대하여 깊이 사색하고 연구해온 김광진에게 있어서 그것은 대단히 충격적인것이였다.

김광진은 여기서 이야기를 잠간 끊고 청강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청강자들속에 앉아있는 안해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김광진의 마음은 복잡하였다. 과연 이 자리에서 안해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하여야 한단 말인가? 그 이야기에는 왕수복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불쾌한 비화도 있는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초의 결심대로 화페와 얽혀져있는 과거사에 대하여 털어놓고 이야기하였다.

왕수복에게 돈속에 독이 들어있으며 돈을 깨끗이 곱게 쓰라고 충고한데 대하여, 포리돌회사가 돈을 벌기 위하여 왕수복을 리용했으며 돈많은 자본가가 만능의 황금을 휘둘러 왕수복을 향락의 도구로 만들려고 한데 대하여, 자기가 돈많은 왕수복이가 아니라 일본에서 돈을 다 털리우고 빈 돈주머니를 가지고있는 왕수복이와 결혼한데 대하여, 왕수복이 도꾜에 가있을 때 일본영화와 일본가무 무대에 출연하면 한순간에 많은 돈을 벌수 있었으나 결연히 음악과 결별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데 대하여

김광진은 화페와 련관되여있는 자신의 과거 사생활에 대에서 솔직하게 다 이야기하고나서 이렇게 말하였다.

《보시다싶이 사회관계망은 화페라는 매듭으로 직조되여있기때문에 나라와 인간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화페의 영향과 통제에서 벗어날수 없습니다.

화페류통은 나라의 운명과 련결되여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저는 여기서 돈의 만능을 주장하는것이 아닙니다. 돈의 만능을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화페는 빛갈은 화려하지만 이미 전세대 경제학자들이 말한것처럼 그것은 더러운 피고름으로 주조된것입니다.》

김광진은 이런 맺음말로 첫 강의를 아퀴지었다. 그는 다음 강의들에서도 일제가 척후병으로 내몬 조선침략의 길잡이가 화페이며 그것으로 조선의 화페경제를 파탄시키고 조선을 집어삼킨데 대하여 일관하게 강조하고 이렇게 격조높이 웨치였다.

《여러분! 1947년이 저물어가고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기간 내외의 반동들과 민족허무주의자들이 소리를 모아 우리의 인민경제발전계획에 대하여 비난하고 중상하고 모독한데 대해 잊지 않고있으며 또 잊을수가 없습니다. 털어놓고 말해서 우리 간부들과 경제전문가들, 교육자들속에도 낡은 경제관, 자본주의적화페관에서 벗어나지 못한탓으로 하여 장군님의 뜻과는 어긋나는 길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페단이 적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런 실책과 과오를 범했던 경제교육자의 한사람입니다.

모범로동자인 오천행동무가 동양발전소건설초기에 1. 4분기계획을 미달했던것은 전적으로 저에게서 나쁜 물이 들었기때문이였습니다.》

장내가 갑자기 수선거리였다. 그러나 인차 소음이 잦아들고 물을 뿌린듯 조용해졌다. 김광진은 손수건에 얼굴을 파묻는 안해를 보면서 계속하였다.

《저는 한때 평양곡산공장에서 생산하는 고급기름 〈마조라〉도 로동자들에게 먹이지 말고 외국에 팔아서 나라의 자금을 마련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 고급기름은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은덕으로 단 한그람도 외국에 나가지 않고 우리 로동자들이 먹고있으며 그 사랑의 열이 원동력으로 되여 공장, 기업소들에서 생산능률이 10배, 20배로 올라가고있습니다.

화페의 노예가 되느냐, 화페의 주인이 되느냐 실제상 이것이 인간의 가치를 규정합니다. 자본주의 억만장자들은 돈앞에서는 언제나 굴복하면서 루추한 모습을 보입니다.

오늘의 새조선은 결코 돈앞에 굴복하지 않고 일본〈황실〉만이 먹던 〈마조라〉를 우리 로동계급에게 먹이고있으며 돈이 아니라 인민의 행복을 위해서 동양발전소를 건설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의 영명하신 지도자 김일성장군님의 옳바른 지도와 근로인민들의 애국적열의에 의하여 1947년도 인민경제계획의 승리를 확고히 내다보게 되였습니다. 지난날 망국의 슬픔을 안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경제론문을 집필했던 제가 오늘은 부흥하는 민족경제를 눈앞에서 바라보면서 리조말기의 비극적인 화페문제를 회고하고있으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이것이 장군님의 은덕임을 경제전문가인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저는 오늘 강의를 마치면서 허물많은 이 사람을 이런 영광의 연단에 올려세워주시고 새조선의 부흥기를 마련해주시여 우리모두의 피맺힌 설음을 풀어주신 영명하신 지도자 김일성장군님께 삼가 최상최대의 영광과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김광진은 눈물을 흘리며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였다. 그리고 두손을 높이 쳐들며 《김일성장군 만세!》 하고 소리높이 웨치였다. 만세 3창이 우렁차게 울리고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극장안에 메아리쳐 청강생들의 가슴을 두드리였다.

강연에 대한 군중반향은 대단히 좋았으나 그때까지 이 강연을 조직하신 김일성장군님의 진의도를 리해하고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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