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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시대 제58회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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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512회 작성일 19-11-25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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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장

10

 

벌써 4월 하순이다.

평양시가의 언덕산들에 진달래가 만첩으로 피여나고 가로수들은 푸르러져 온 거리가 청홍색으로 물들어진듯싶었다.

전기학기사검정시험을 치르고 거리에 나선 오천행은 자못 즐거운 기분이였다. 그는 오늘까지 세번째 응시하여 해당한 전과목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시켜 전기기사자격증을 받은것이였다.

공업대학청사앞 교구동 인도로를 걸어가던 그는 확성기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에 무춤 멎어섰다. 길가던 사람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대동강동뚝앞에 매달아놓은 확성기에 눈길을 돌리였다.

김일성장군님을 모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대표단의 한 성원으로 40여일동안 쏘련을 방문하고 돌아온 홍명희부수상이 최고인민회의 제3차회의 연단에서 토론을 하고있었다.

《…이제는 귀국한지도 보름이 되였지만 지금도 저의 귀가에서는 까레야-게로이, 까레야-게로이(조선-영웅, 조선-영웅)라고 웨치는 쏘련인민의 열렬한 환호성이 울리고있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쏘련방문기간은 감격의 나날이였고 기쁨의 련속이였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 대표단을 인솔하고 행사와 례식에 참가하실 때마다 조선정부대표단을 열렬히 환영한다!동방의 영웅 김일성장군 만세!의 환호성이 터져올라 저는 부풀어오르는 민족적자부심에 기쁨의 눈물을 짓군 하였습니다. 그 자부심은 수난에 찬 근대민족사를 돌이켜보게도 하였습니다.

아 아, 우리 민족의 과거가 어떠했습니까.

김일성장군님께서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쏘련군명예위병대의 사열을 받으실 때 저의 눈앞에 무엇이 비쳐왔겠습니까? 로씨야땅을 거쳐 헤그에 갔던 리준렬사가 식민지조선의 불우한 처지를 통탄하며 할복자살한 만국평화회의 연단이며 을미사변(일제가 민비를 불태워죽인 사건)이후 공포에 싸인 고종이 왕세자와 함께 캄캄한 밤에 녀자옷차림으로 경복궁을 탈출하여 로씨야공사관으로 빠져들어간 아관파천의 그 가긍한 교여(가마)가 비쳐왔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애국인사들이 조선독립청원서를 가지고 만국평화회의장에 찾아갔다가 문전축객을 당한 근대조선의 그 모든 치욕스러운 기록장들이 연줄연줄 눈앞으로 흘러갔습니다. 모든 외교권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국제무대에서 하소연 한번 못하고 살아온 우리 조선이였습니다.

이제 비로소 조선정부대표단이 자기의 영명한 령수를 모시고 민주건국의 자랑이 새겨진 람홍색공화국기발을 날리며 당당히 국제무대에 나서게 되였으니 그 기쁨, 그 자랑 어떠했겠습니까.

저는 이번 쏘련방문을 통해 우리 공화국이 이룩한 정치경제적성과가 세계에 어떤 파문을 던졌는지 알게 되였습니다.

식량이 모자라던 나라가 식량여유국으로 된것, 230만의 문맹자가 있던 북조선이 3년반동안에 완전문맹퇴치를 한것, 해마다 공업생산액이 50~70프로이상 높아진것, 학생취학률이 제일 낮던 나라가 동양에서 제일 높은 나라로 된것, 해방초에 비해 로동자들 실질로임이 수십배로 높아지고 단 한명의 류랑소년도 걸인도 없어진것들에 대하여 민주진영의 나라들은 경탄해마지않았고 자본주의나라들은 북조선이 이제 무서운 나라로 될것이라고 겁질린 소리들을 하였습니다.

해방후 흥남비료공장에 자원적으로 남아있던 한 일본인은 은금의 시대-새 조선이라는 제목으로 공화국북반부에서의 생활체험담을 발표하였습니다. 그가 어떤 의미에서 은금의 시대-새 조선이라고 하였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돈많은 화려한 나라로 되였기때문인가요?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아직 부자가 못되였고 화려한 생활을 하지 못하고있습니다. 그럼에도 은금의 시대라고 한것은 로동자, 농민을 비롯하여 사무원도 지식인도 상인도 종교인도 지위가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그 누구를 물론하고 정치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위협을 모르고 값진 인격적대우를 받으며 마음편히 살아가고있기때문입니다.

은금보석을 깔고앉은 저 묘향산을 보시오! 나라의 보살피심속에 한점 상처도 없이 저렇듯 높고 푸르고 장엄하게 솟아있는 묘향산의 모습이 바로 나라의 주인, 이 세상 모든것의 주인으로 된 새 조선인민의 장한 모습입니다. 우리 민족사에 가장 으뜸이 되는 새 조선, 새로운 인민, 새시대가 탄생하였습니다.》

확성기에서는 돌연 장내를 진감하는 박수소리가 울리였다.

오천행이도 손에 들고있던 종합성적증을 품속에 찔러넣고 거리에 서있는 사람들과 함께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손벽을 쳤다.

그는 거리를 가로질러 대동강뚝에 올라섰다. 강건너 저편 수양버들이 우거진 선교동 일각에 하나의 공장을 방불케 하는 웅장한 건물이 일떠서고있었다. 8. 15해방 4돐기념 종합전람회 건설장이였다.

오천행은 종합전람회건설준비위원회 성원이였다.

기본관이 12개, 부분전람실이 40여개나 되는 해방후 최대규모의 전람회장에 진렬된 수만종의 전시품들은 노예로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나라의 주인이 되고 약자가 어떻게 강자가 되였는가에 대하여 웅변적인 설명을 해주게 된것이다.

오천행은 그날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명절옷차림을 한 각계각층의 군중들이 새벽부터 종합전람회장으로 꽃물결처럼 흘러간다.

종합전람회 첫관인 산업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관람자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며 탄성을 올린다. 높은 천정에서 비료폭포가 쏟아져내려 은색비료산이 쌓아지는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기때문이다. 마치 흥남비료공장에 들어선듯 한 느낌에 야야 소리가 그냥 터져나온다.

한쪽에서는 《흥남》, 《자주》라는 자호가 찍힌 비누를 비롯한 온갖 화학제품들이 콘베아에 실려 끊임없이 흘러가고 해방후 흥남로동계급이 만들어낸 1만볼트의 전압체계로 증기를 생산하는 아시아 제일등급의 특대형전기보이라가 흥남 5개 공장들에 열풍을 쏘아준다.

다음의 금속공업관에서는 청진, 황해제철소들, 제강소들, 제련소들의 용광로에서 쇠물이 사품치며 끓어번지고 선철, 강철, 압연 제품들과 유색광괴들이 강물처럼 흘러나온다. 일제시기에는 엄두도 내지 못한 기관차외륜, 레루, 아연도판들이 꽝꽝 쏟아져나온다.

전기공업관에 들어서면 고압선들이 줄줄이 뻗어간 대형조선지도사판과 수풍발전소언제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에 모두 입을 벌리게 된다.

바로 이 전기전람관에서 오천행이 관람자들에게 우리 나라 전기공업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해설한다. 전기력사와 더불어 그는 두개의 자아, 서로 다른 자기의 두 모습을 그려보며 관람자들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한쪽에는 무릎이 드러난 깡뚱한 홑잠뱅이에 발벗고 서있는 소년, 개구리와 메뚜기로 주린 배를 달래고있는 오천행이가 있다. 그옆에는 전기기사이고 조선로동당원인 오천행이가 앞가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로메달을 달고 서있다. 또한 오천행은 두개의 평양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것이다.

밤이면 캄캄한 어둠속에 묻히던 거리, 파괴된 공장들, 장티브스와 코레라가 번지던 빈민촌의 움막집들, 벌거숭이던 모란봉과 어린이들이 썩은 음식을 주어먹으며 다니던 역전광장, 이것이 4년전의 평양이였다.

지금은 얼마나 변했는가. 밤이 오면 장식등이 번쩍거려 평양거리는 더욱 화려해진다. 수많은 공장굴뚝들에서는 밤낮없이 흰 연기가 피여오르고 모란봉 푸른 숲에는 현대적인 극장건물이 일어섰으며 역병이 번지던 빈민굴은 아담한 로동자주택으로 변하였다. 방랑소년들이 헤매이던 역전광장에선 학생모를 쓴 얼굴 붉은 소년들이 기운차게 뛰여다닌다. 단 한개의 대학도 없던 평양에 김일성종합대학, 공업대학, 의학대학 등 여섯개의 대학이 생겨나고 의료시설의 황무지였던 거리에 병원, 진료소들이 조밀하게 들어서있다.

조선의 힘, 조선의 기술로 생산하는 우리의 전기가 민주수도 평양을 아름답게 비쳐준다.

양단, 모본단, 다색단, 공단 등 여러가지 명주천들과 당목, 옥당목, 옥양목 등 각종 면천들이 생산되는 직물관, 오곡이 설레이는 농업관, 보건관, 광업관, 수산관 등, 모든 전람관들에서 건국의 새 력사를 개척하신 김일성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와 헌신의 력사를 읽게 될것이다.

조국해방 4돐기념 종합전람관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시는 가장 귀중한 전시품이 있으니 그것은 《김일성선집》이다.

인민들은 종합전람관에서 그 위대한 도서를 보게 된다.

그로부터 몇달후인 1949년 8월 중순 종합전람회가 개관되는 날 경제학자 김광진은 《김일성선집》이 전시된 방에 장문의 감상록을 남기였다. 거기 한 대목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일부 사가들은 고구려력사가 끝난 이후의 우리 민족의 력사는 잃음의 력사, 짓밟힘의 력사요, 굶음의 력사, 무너짐의 력사라 개탄했었다. 그래서 마침내는 통채로 나라를 잃었다는것이다.

허나 슬퍼말라, 해방후 4년에 우리 민족은 잃었던 모든것을 되찾고 짓밟혔던 모든것을 되살렸을뿐아니라 반만년 민족력사에 맞먹는 수십세기의 세월을 주름잡아 앞으로 내닫고 우로 솟구쳐올랐다.

우리는 이것이 김일성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의 결과임을 오늘의 공화국을 축도한 여기 전람회관에서 다시금 육안으로 확인하였다.

오랜 세월 허리를 굽히고 살아온 우리 인민을 떳떳이 허리펴고 걸어가게 해주신 장군님, 서러운 굶음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자기 손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기계를 돌리고 금은보석을 캐내는 자주민족, 자립의 나라로 우리 조선을 높이 일떠세워주신 장군님의 은덕을 무슨 말로 표현할수 있겠는가.

종교인들은 천당으로 가기 위해 성서를 외우며 기도를 올리지만 나는 이 방에 높이 모신 《김일성선집》을 그네들이 외우는 성서보다도 더 절절하게, 더 엄숙하게 심장으로 읽고 넋으로 외우고 뼈와 살에 쪼아새기리라.

어린 학생들도 읽으면 리해할수 있도록 가장 평이한 글로 씌여진 이 위대한 도서에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이 밝혀있고 위대한 정치경제학, 군사, 교육, 문예학이 있고 가장 고결한 인생관, 사랑관이 있으니 분명하다, 우리 민족은 영원무궁한 번영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야외극장, 종합식당, 종합진료소, 간이매대까지 구비되여있는 대박람회, 종합전람회는 매일과 같이 초만원이였다.

 

×

 

종합전람회가 개관된 때로부터 한달 남짓이 지나 오천행이 결혼식을 하게 되였다.

큰길을 마주하고 서있는 잔치집으로 새벽부터 숱한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애주가들은 벌써 한대포 들이켜서 불카해진 얼굴에 함뿍 웃음을 피우며 돌아가고 잔치차비군들은 신랑행렬에 앞세우고 갈 나무기러기며 신랑의관인 사모관대를 들고 바삐 뛰여다니였다.

오천행의 친구들은 물론이고 리문도, 김광진을 비롯하여 중년나이의 선배들과 전기처의 일군들도 와있었다.

음식차비를 하느라 앞치마를 두른 방씨는 너무 기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치며 설레발을 쳤다.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부엌문으로 들락날락하던 방씨는 병풍을 맞들고 다니는 리문도를 띠여보고 미안쩍어하였다.

《아니, 손우수로 따라가실 처장님이 왜 병풍을 맞들고 다니시우. 방안에 가만히 앉아계시라요.》

《나두 마음이 둥 떠서 한자리에 앉아있질 못하겠습니다. 내 이제 사돈집에 가서 오천행일 나무란 고씨령감태길 혼쌀내우겠습니다.》

《에구, 딸가진 집에선 옛날부터 그렇게 재세하는 법이외다. 너무 심하게 굴진 마시우, 호호호.》

웃방에선 청년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결혼식장에서 부를 축하의 노래를 련습하고있었다.

《좋구나! 장군님은덕에 좋은 세상 왔구나.》

앞마당에선 방씨패의 늙은 녀인들이 춤을 추며 돌아갔다.

이 시각 승용차 한대가 대동교를 지나 수양버들 우거진 강기슭에서 멎어섰다. 이윽고 차안에서 김일성장군님께서 기다란 흰 종이두루마리를 들고 내리시였다. 동뚝에 서있던 김책이 승용차를 향해 급히 마주 걸어왔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황해도 토산쪽으로 현지지도를 가시는 길에 긴한 용건이 있어 김책을 여기서 기다리게 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얼핏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시였다.

《날씨가 좋습니다.》

그이께서는 몇발자국 앞으로 걸어나오시여 멀리 선교거리 동쪽 가닥길을 마주하고 서있는 잔치집어방에 눈길을 보내며 말씀하시였다. 《김책동물 여기서 기다리라고 한것은 오천행동무의 결혼식때문입니다. 부모없는 오천행동무의 결혼식에는 내가 꼭 참가하자고 했는데 짬을 낼수 없군요. 아무래도 내대신 김책동무가 가서 축하해줘야 하겠습니다.》

김책의 얼굴은 밝지 못하였다.

《장군님, 오천행동무의 결혼식도 결혼식이지만 정숙동무의 병이… 지내 무리하게 일하더니…》

장군님께서는 묵묵히 서계시였다. 문득 문앞에서 바래주시던 김정숙녀사의 병색짙은 얼굴이 눈앞에 어려왔다. 기실 산에서 싸울 때는 물론 해방후에도 4년동안 녀사께서는 너무 과로하시였다.

《장군님, 보위상과 내무상도 지금 적들이 38도선지구에서 계속 불질을 하고있다고 하면서 장군님께서 그쪽으로 가시지 않도록…》

장군님께서는 례외적으로 김책의 말을 막으시였다. 《그 동무들이 나에게도 직접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쪽지구가 복잡하기때문에 내가 더욱 가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토산땅은 황해도에서 제일 못사는 곳입니다. 작년에 그곳에 갔을 때 래년 가을에 다시 와보겠다고 인민들과 약속했습니다.》

매일과 같이 바쁜 일이 제기되는 김일성장군님께서 토산으로 가실 시간은 이날밖에 없었다. 이미 짜놓은 일정을 드티면 국사에서 엄청난 혼란을 일으키게 되는것이 그이의 생활이였다.

장군님께서 시계를 들여다보고 손에 들고있던 긴 종이두루마리를 펴시였다.

하얀 바탕에 《가화만사성》이라는 붓글자가 새겨진 족자였다. 그이께서 친필하신 결혼식선물이였다.

《오천행이한테 주자고 족잘 하나 만들었습니다. 나라에 가정이 하나 더 늘어났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그윽한 미소를 지으시였다. 허나 뜻깊은 족자를 받는 김책의 눈에는 물기가 어리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승용차는 천천히 자국을 뗐다. 로동자아빠트가 일어선 동평양거리는 명절날처럼 흥성거리였다.

승용차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거리를 누비면서 9월의 아침해빛이 내리비치는 들판 한끝으로 아물하게 멀어져갔다.

앓으시는 녀사를 뒤에 두고 먼 현지지도의 길을 가시는 장군님의 마음은 지금 얼마나 무거우시랴.

먼발치에 보이는 잔치집주변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오고가고 대동강수면에는 유람선들과 발동기뽀트들이 점점이 떠있었다. 대동강 량쪽기슭에는 채양모며 등산모를 쓴 낚시군들이 주런이 앉아서 고기를 낚는다.

즐겁고 행복한 풍경이였다.

확성기에서 노래소리가 울려나왔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조선 꽃다발우에

    력력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군

    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장군

   

    …

 

김책은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앞이 뿌잇해졌다.

피어린 자욱을 찍으시며 항일의 혈전만리를 걸으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오늘도 변함없이 로고의 자욱을 새기며 민주건국의 길을 걷고계시는것이였다.

이날은 1949년 9월 21일이였다. 이날에 하신 김일성장군님의 현지지도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특별히 기억하고있을것이다. 특히 토산땅(당시는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사람들은 잊지 못하리라. 하지만 당시에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이날이 커다란 불행을 하루 앞둔 날이라는것을 알지 못했다.

김책이도 그런 슬픔이 기다리고있을줄은 몰랐다. 김일성장군님께서도 아실수가 없었다. 녀사의 얼굴에 병색은 짙었지만 너무도 밝은 웃음으로 그이를 바래워드리셨기때문이다.

장군님을 모신 승용차는 이미 멀리로 사라졌다. 허나 김책의 눈에서는 벌판길 달리는 장군님의 승용차에 뽀얗게 어리였던 황토색먼지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인민들은 잔치와 들놀이를 벌리며 즐겁게 휴식하고 장군님께서는 총소리 울리는 38도선 가까운 시변리마을로 가신다. 더 큰 인민의 행복을 마련하고 인민의 즐거운 생활을 지켜주시려 험한 길 이어가시는 장군님의 걸음걸음에 신병의 고통도 감추고 그이를 바래워드리신 김정숙녀사의 밝은 웃음이 떨기떨기 꽃처럼 피여난다.

그이께서 가시는 길 어디에서나 인민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풍작을 거둔 논밭들에서는 풍년가소리가 구성지게 울려온다.

1949년은 그때까지의 조선의 농업력사에서 최고의 알곡수확고를 기록한 해였다.

인간생활의 필수불가결의 요구조건들인 쌀, 옷, 집, 학교, 병원에 대한 수천년 인민의 숙원이 기본적으로 이루어졌다.

민족력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새 조선의 행복, 어디에서나 인민의 웃음이 넘치고있는 새 나라의 이 행복이 우리 장군님의 이같은 피어린 로고의 대가로 꽃펴났음을 부디 잊지 마시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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