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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시대 제5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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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479회 작성일 19-11-2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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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 장

4

 

내각결정 제7호에 의하여 9월 하순부터 드디여 평남관개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온 나라 곳곳에서 《건국사상총동원운동》의 기치높이 삽, 곡괭이, 질통, 삼태기 등속의 작업도구들을 들고 수많은 인민들이 공사장으로 달려왔다.

국가고정로력이 무려 1만 6천여명이고 지원로력은 수천수만을 헤아려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 하였다.

며칠후 10월 7일 내각 제5차전원회의에서는 양덕-천성, 개고- 고인 전기철도건설을 시작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오천행이 전기철도건설의 총대장으로 선출되였다.

장군님께서 과업을 주신대로 탐사처의 최석견은 묘향산 금광개발에 동원시키려던 로력과 설비들을 서해지구 물탐사에 돌리고 보건성에서는 평원군과 숙천지구 해변지구에 나가 페지스토마 구제사업을 벌리였다.

그무렵 수풍발전소 지배인으로 최재하가 임명되고 리지찬은 장진강발전소 기사장으로 내려갔다.

리병남보건상은 10월초부터 토질병이 제일 심한 남동부락에 아예 나가살았다.

남동부락이 바로 김일성장군님께서 하루밤 주무시고 가신 마을이였다.

기러기울음소리만 들려오던 황막한 풀밭에서 시추기를 돌리는 발동기소리가 울려나오고 날마다 물탕크를 실은 소달구지들이 드나들었으며 부락민들이 거처하는 떼장집마당으로는 흰 위생복을 입은 사람들이 청진기와 약병을 들고 왔다갔다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에서는 꼬장모농사를 짓는 평안남도 평원군과 숙천군의 해변마을농민들에게 현물세를 면제시키고 무상치료의 혜택을 베풀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리극로도 농림상과 함께 자주 남동마을에 찾아다니였다. 농림상은 직분상 이곳에 자주 다녔고 리극로는 마타리물을 마시며 꼬장모농사를 하고있는 이 고장 농민들에 대한 장군님의 이야기가 노상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아 무시로 찾아와서 농업경제도 연구하고 방언수집도 하였다.

이날도 리극로는 농림상과 함께 남동부락을 돌아보고 거기서 바다쪽으로 20리가량 나가있는 보덕부락이라고 하는 서해의 끝마을까지 가보았다. 그는 물새소리만 들리는 이 외지고 적막한 보덕부락에까지 장군님께서 찾아오시여 떼장집들을 일일이 돌아보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리극로가 보덕마을 한 로인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시작하고있는데 보건상이 찾아와서 김일성장군님께서 서해지구에 나가있는 상들을 급히 부르신다고 하였다. 장군님께서 부르신 까닭은 상들에게 승용차를 배정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김책이 최근 수입용자금을 마련할수 있는 새 통로를 개척하였을뿐아니라 장군님께서 걱정하시는 문제들중 하나인 상들이 전용할수 있는 《인민의 심부름차》(승용차)까지 해결하였다는것이였다.

《장군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더랍니다.》

리극로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인민들과 일군들에 대한 장군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겁고 다심한가를 전화내용을 전달하는 보건상의 말에서 깊이 느낄수 있었던것이다.

장군님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밤낮없이 뛰여다니며 빠른 시일에 걸린 문제를 해결한 김책의 충성심이 또한 감동적이였다. 그는 장군님께 말씀올린 그대로 한그람의 금도 팔지 않고 수입용자금을 마련할수 있는 믿음직한 길을 개척했다는것이다. 이것은 모든 문제가 간부들의 충실성여하에 달려있다는것을 시사해주고있었다.

보건상은 또 하나 놀라운 소식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미제의 고용간첩 김춘선의 유서에 대한 이야기였다. 최근 내무윈들이 바로 여기 평원군의 어느 한 갈밭에서 김춘선의 시체와 유서를 발견하였다고 했다.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나, 김춘선은 미국의 고용간첩이다.

사주팔자론자들은 인간의 운명을 태여난 해와 달과 날자와 시간에 관계된다고 말하지만 나의 운명은 시간보다는 장소와 깊이 련결되여있다. 사주팔자 점패풀이에서 장소를 무시한것은 치명적인 허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1896년 3월 7일 황해도 연백군 목단면의 독실한 신자(례배당 장로)의 아들로 태여났다.

민족주의자이며 신자였던 아버지는 순결무구한 유년시절의 나의 머리에 민족주의적애국심과 종교의식을 심어주었다.

나는 일곱살때 벌써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을 뜬금으로 외울수 있었다. 목단면의 신자들과 19세기말부터 연백지구에 와있는 미국선교사 호리스는 어른들보다 성서를 더 잘 외우는 나를 보고 신동이라고 하였다.

내가 만 열살되던 해에 연백지구에 무서운 역병이 돌고 큰 가물이 들어 목단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해에 나의 부모님들과 어린 녀동생도 병사하였다.

사람들이 무리로 병들어 죽고 굶어 죽은 이 비극적인 재난이 졸지에 혈혈단신의 고아로 된 나의 어린 생명에 어떤 운명의 그림자를 던지였는가?

내가 울면서 거리를 방황하고있을 때 미국선교사 호리스가 찾아왔다. 조선말을 잘하는 그는 나의 울음을 달래면서 《너의 아버지, 어머니는 천당으로 갔다. 너는 이제부터 내 양아들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너는 장차 하느님의 나라 미국으로 가게 될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1909년 호리스는 나를 미국으로 데려가 중등교육을 시키고 세계에서 제일 력사가 오래다는 이딸리아의 블로냐대학에 류학을 보냈다. 류학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나는 극비의 정탐교육을 받게 되였다. 이것이 바로 나를 기른 호리스의 의도였다는것은 후에 안 일이다.

나는 1929년부터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며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각 분야의 비밀자료들을 수집하여 미국에 제공하였다. 1940년초부터는 중국 중경지구의 좌익단체에 침투하였는데 그때 나는 쏘련, 중국, 일본의 비밀자료들을 수집하는데서 특출한 공적을 세웠다.

나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때부터 미국사람들에게 더욱 무조건적으로 멸사봉공하였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일본과 전쟁을 하고있는 오직 미국이라는 나라가 우리 조선을 독립시켜줄수 있다고 믿고있었기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뿌리깊이 심어진 나의 민족주의적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46년초에 나는 미중앙정보국으로부터 북조선에 침투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당시 중국공산당적을 가지고있은 나는 어렵지 않게 평양곡산공장 업무부장의 자리를 얻을수 있었다. 말과 글을 배우기 시작한 때부터 반공숭미사상으로 교양받은 나에게 있어서 북조선은 철저히 적국이였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북조선의 정책에 대해 절대적으로 찬의하는 공산혁명가로 분석하는데 최대의 힘을 넣었다. 확신하건대 1948년초까지는 남조선주둔 미군정사령관 하지와 미중앙정보국 특파요원 후레 드리크 이외에는 그 누구도 나를 미국의 간첩이나 반공분자로 생각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고 본다. 나에 의하여 조종되는 간첩들도 자기한테 가끔 찾아오는 곡산공장 업무부장을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알고있었다.

나는 리은실의 음악적호기심을 리용하여 나를 효과적으로 위장시키였다.

나는 북조선에 침투하여서도 미국을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치였다.

나는 리은실을 비롯해서 일부 음악애호가들이 저녁마나 풍금을 타러 오게 하여 그 풍금으로 매일 무전을 날리는 나의 행동에 보호막을 씌우게 하였다. 다시말해서 나의 집에 있는 풍금이 아무런 비밀도 없는 보통 오락용풍금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였다.

나는 적지 않은 국가비밀자료들을 미군정에 넘겨주었다. 한편 나는 반공분자들과 간첩들을 한줌에 꿰가지고 조종하였는데 그들을 통하여 공장, 기업소들에서 기계파손, 창고방화를 한것만도 150여회 되며 허위적인 반동요언으로 민심을 소란시킨 회수 또한 세일수 없이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것들의 하나가 《예수의 계시문》, 《전기도용사건》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실패작들이였다.

20여년의 나의 간첩활동에서 이러한 실패를 보기는 처음이다.

특히 《전기도용사건》이 있은 다음부터는 나의 간첩행적은 무참한 실패로 이어졌다. 흥남비료공장, 서해조선소, 황해제철소, 수풍발전소 등 북조선의 주요공장, 기업소들을 파괴할 임무를 주어 들여보낸 간첩들이 모조리 체포되였다.

더우기 스스로도 알수 없는 놀라운 일은 반공숭미사상으로 철저히 굳어져있는 나의 머리에서 파동이 일어나기 시작한것이다. 그 파동이란 김일성장군님께서 실시하시는 인민정치에 대한 경이감이였다. 나는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세상 못 본것이 없었지만 최하층인간들인 화전민들을 위해 나라가 손해를 보면서 전기공사를 하는 나라, 외국에 팔면 순간에 많은 돈을 벌수 있는 《마조라》기름을 돈 한푼 받지 않고 로동자들에게 먹이는 나라, 묘향산밑에 매장된 금을 캐지 못하게 하는 나라, 그런 나라는 보지 못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런것들은 경제적으로 막대한 손실을 주지만 그 《손실》이 신비한 도술적인 힘을 가지고 기이한 《확대재생산》을 일으켜 기적적인 창조물을 낳게 하였다. 단적인 실례로 보통강개수공사를 단 55일동안에 완수한것, 높은 장성률의 인민경제계획을 넘쳐수행한것 등등은 그러한 《손실》이 가져다준 기적이였다.

김일성장군은 자본주의경제학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새로운 경제학으로 새 민주조선을 세우고계시였다.

나는 맑스, 엥겔스, 레닌의 저서들을 공산주의자들 이상으로 탐독한 사람이다. 적을 이기자면 적을 알아야 하기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저서를 읽으면서도 일부 공감되는바가 없지 않았지만 적의감과 반발심이 일어나는 때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맑스주의자들은 유산자들을 두드려패는 계급혁명과 전세계의 무산계급만을 귀중히 여길뿐 민족을 무시하고 지어는 민족주의와 민족애를 반공적인것으로 보고있기때문이였다.

하지만 김일성장군님의 론문, 연설, 담화문들을 읽어보느라면 인간애, 향토애, 조국애, 동지애, 민족애 등등의 따스한 사랑의 세계에로 자석처럼 끌려들어가는 나자신을 다잡을수 없었다.

우리 정탐가들에게는 《인도주의는 금물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성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하는것이다.

심장에 철의 장막을 둘러야 한다. 그러나 장군님의 저서들은 태양의 열광처럼 그 철의 장막을 녹여내여 잔악성과 위선의 어지러운 진액으로 엉켜있는 나의 뇌수와 심장을 휘저어서 정화시키는듯 했다.

결코 저서뿐이 아니였다.

내 눈으로 확인한 장군님의 현지지도는 《인간의 노래》와도 같은것이였다.

장군님께서 곡산공장에 오시여서 미분탄아바이라고 하는 귀머거리 석로인을 친히 옆자리에 앉히시고 술을 부어주신 그 이야기는 인간이기를 그만둔 나와 같은 사람의 눈에서도 눈물이 돋게 하였다. 일찌기 부모를 잃고 류랑걸식하던 리은실의 오랍동생을 대학에서 공부하게 해주신 장군님의 사랑과 인간미에 또 가슴이 젖어들었다.

1948년 6월 26일에 발표한 구암저수지와 례의저수지의 관개용수를 남연백지구에 공급할데 대한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 제155호는 나의 머리에 커다란 균렬이 가게 한 또 하나의 극적인 계기로 되였다.

피는 숨길수 없다. 남조선에서는 내 민족을 두쪽으로 분렬시키는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농민들의 생명선인 물길마저 끊으려 할 때 북조선에서는 전민족의 통일정부수립에 전력을 기울이면서 남쪽의 논벌들에 사랑의 생명수를 대줄데 대한 국가결정을 채택하고있었으니 연백벌사람인 내가 어찌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북의 정치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수 있겠는가.

나는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하여 살았던가? 무엇때문에 이 해변마을로 천방지축 달려왔던가? 동물본능적인 생의 욕망에 붙들려 어리석게도 살아보자고 하였다. 나는 남조선으로 도망쳐도 죽고 도망치지 않아도 죽게 되여있는 사람이다.

하지나 후레 드리크가 실패하고 돌아온 나를 반겨맞아줄수가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이미 다 우려먹은 장독이였다.

기원전시대의 군사가인 손자의 표현을 빌면 나는 생간(살아야 할 간첩)이 아니라 사간(죽어도 무방한 간첩)으로 되였다.

거의 모든 조선인 미국간첩들의 말로가 그러하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한번 발을 들여놓은 다음에는 도저히 그 수렁에서 빠져나올수 없는것이 우리들의 운명이다.

나는 20여년동안 너무도 나쁜짓을 많이 하였다. 연백사람들앞에 지은 죄는 얼마나 무서운것인가.

이제 자수할 체면도 없다. 하여 나는 죽음으로써 죄를 비는 한장의 유서를 쓰고 누구에게나 허용되는 최후의 만찬을 베풀기로 결심하였다.

원통하다, 호리스가 살던 목단면에서 태여난것이. 그렇다, 인간의 운명에 가장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것은 어느때, 어디에서 태여났는가 하는 시간과 장소의 합치점이다.…

이것이 저승행차표를 끊고 총총히 쓴 김춘선의 유서였다.

리극로는 이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으로 자문하였다.

과연 태여날 때의 장소와 시간이 인간의 운명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것일가? 물론 거기에도 영향이 있을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의 운명에 보다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것은 믿음의 선택에 있다고 본다. 무엇을 믿는가 하는것이다.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는가? 이 믿음의 선택이 한 개인의 운명뿐아니라 나라의 흥망성쇠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는것은 리극로가 복잡한 인생행로를 거쳐 터득한것이였다.

(나는 영원히 김일성장군님을 믿고 그이의 사상을 믿을것이다.)

리극로는 마음속으로 뜨거이 웨치며 붉은 구름이 넓게 퍼진 동쪽하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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