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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50년 여름 제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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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9,099회 작성일 20-02-10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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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11 장

 

밤이 오자 시가의 소동은 한결 가라앉았다. 지옥의 불처럼 공포를 주던 인민군포격설은 《데마》로 돌려졌고 리승만의 유선방송이 《서울사수》를 읊조렸으며 (대전으로 쫓겨간 리승만의 록음테프가 돌아가는 소리였지만) 골목과 둔덕, 고층건물마다에 진을 친 《국군》의 보루와 그 무리들이 일정한 안정제로 된것이였다. 하여 권좌에 눈이 어두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국회의원》들과 몇몇 장관들이 모인 중앙청과 덕수궁의 《국회의사당》에서는 《서울사수》와 새《정부》조작의 꿈을 꾸며 떠들썩하였다. 그러나 태반의 《나리님》들은 승용차와 트럭들에 가족과 재산을 박아싣고는 짐승처럼 끌려 서울로 밀려드는 군인들의 장사진을 뚫고 남으로 남으로 줄행랑을 쳤다.

륙군본부의 넓다란 방에 틀고앉은 채병덕은 이 모든 사태에 매우 둔감한듯 군무에만 집념하고있었다. 세개의 전화기를 앞에 놓고 그는 줄기차게 정황을 묻고 따지고 호령하며 지시를 내렸다.

그는 오후의 상황청취시간에 춘천을 휩쓴 인민군52사가 6사를 추적소멸한다는 보고와 동시에 인민군52사와 53사의 린접으로 들이밀었던 혼합대대들로부터 (사단파병을 장담한 신성모는 한개 련대도 못되는 어중이떠중이들을 긁어모아 보내주었다.) 그곳에도 52사가 공격해오며 측면이나 배후타격위협에 주저앉았어야 될 인민군53사는 뒤주춤하기는커녕 오히려 속도를 높여 10여km 더 전진해온다는 비명같은 보고를 받고 케가 글러감을 깨달았다. 초저녁에(그때만도 《미군참전설》의 취기가 남아있을 때였다.) 또 한번 용기를 내여 창동미아리전선을 돌아본 그는 아침과 또 다르게 변한 엉망의 《전선》을 보았다. 월리쪽에서 인민군포탄에 하마트면 고기가루로 흩어질번 한 그는 호위차도 떨궈버리고 뺑소니를 쳤다.

그리고 골목을 요리조리 돌아 벽마다 푸른 담쟁이로 얼룩진 고풍의 2층 양옥에 차를 세웠다. 부관도 대동하지 않고 늘 채워있는 바깥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자 응접실에서 한 묘령의 녀인이 나타났다. 가슴과 팔을 훌 드러낸 까만 도레스차림의 녀인은 채병덕이를 보자 두팔을 뻗치고 채 가닿기전에 쓰러졌다. 채병덕이 그 큰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잽싼 솜씨로 안자 녀인은 쟈스민향기가 풍기는 흰팔로 채병덕의 목을 얼싸안았다.

《한시간만 더 기다린다면 저는 죽었을거예요.》

녀인은 가쁘게 숨을 쉬며 눈물과 입술연지로 채병덕의 가슴팍을 얼룩덜룩하게 하였다. 채병덕은 녀인의 따뜻한 입김과 체취, 은근한 향수내와 부드러운 살결에서 풍기는 감미로움에 취한채 한순간 모든것을 망각한 사람처럼 서있었다.

《그만-》

그는 녀인을 인형처럼 들어 마루에 세웠다. 그러자 녀인은 이제껏 운것 같지 않는 요염한 미소가 아롱진 눈길로 채병덕을 보다가 《커피?》 《위스키?》하고 재롱부리는 소녀처럼 말했다. 채병덕은 얼빠진 사람처럼 씨익- 큰숨을 쉬고는 퍼그나 무뚝뚝하게 말했다.

《다 잘됐겠지.》

《네, 이모부한테 전화도 했어요. 아휴, 국제전화소는 외국대사관 마담들로 벌레 끓듯 해요.》

《수골 했어.》

그 말에 녀인은 애교있게 고개를 약간 수그리며 이번에는 매우 서글픔이 어린 안개낀듯 한 눈으로 채병덕이를 바라보았다. 채병덕은 음울한 미소를 띄웠다.

《그렇게 보면 안되지.》

《알겠어요.》

녀인이 얕게 웃을 때 채병덕은 곰처럼 와락 그러안아 입술이며 터진 깃사이의 가슴에 마구 입을 맞추다가 조심스럽게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씨근덕거리며 녀인을 삼킬듯 보다가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이젠 떠나라.》

《그럼?》

《수원에서 만나자… 여차하면… 비행기로 하꼬다데로 가라. 네 차는 특별통과증이 있으니까 단속하지 않을것이니 걱정이 없고.

그리고 노세이상한테 금을 100폰트가량만 딸라로 바꾸고 그다음은 은익하게 해라.》

《알겠어요.》

녀인은 화려한 문양비로도가림을 드리운 응접실 벽에 다가가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실내화를 끌며 늙수레한 로인이 나타났다. 녀인은 이제까지와는 판다른 도담하고도 날카로운 태도로 말했다.

《내 말한것.》

로인은 절을 굽석하고 사라지더니 푸른 나이론보자기로 싼 지함을 가져왔다. 녀인은 지함을 들고 무릎을 꿇었다.

《제가 오늘 섬길수 있는건 이뿐이예요. 시장하실 때 잡수세요.》

채병덕은 이마살을 찡그렸으나 이제라도 자기를 위해서 죽으라고 하면 죽을듯 한 녀인의 교태어린 진정에 넋을 빼앗긴채 그것을 받아들었다.

《20분내로 차를 보내겠다.》

녀인은 당금이라도 잦아들듯 한 어조로 속삭였다.

《저는 당신이 잘못되면 이 세상에 없다는것을 아세요.》

녀인은 채병덕이 문밖에 나갈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을사오적과 일본황실의 먼 친척과의 사이에 생겨진 이 녀자는 채병덕이의 애첩이였다. 이 가냘프고 연약한듯 한 녀자는 오늘낮 채병덕이 은행에서 빼여낸 금괴를 수원비행장에 싣고가 일본 하꼬다데의 은행주인 이모부에게 부치고 돌아오는 놀라운 기적을 발휘하였다. 일본의 재벌계 탐정의 첩자로서 녀자숭배주의자의 무쵸의 심장을 사로잡아 채병덕의 출세에 보탬을 준 이 녀자는 끊임없는 포소리속에서도 자기 애인의 최종철수명령을 인내성있게 기다렸던것이다.

잠시후 이 녀자는 무장호위병의 옹위하에 당시 서울에 몇대밖에 없던 《크레뇽 30》차를 타고 어둠덮인 골목을 빠져나가 도피행 차들의 무리속에 섞여 유유히 한강을 건넜다. 이로 하여 채병덕의 마음 한구석엔 든든한 배심이 자리잡았다. 초조해 돌아치는 하우즈만을 보면 마치 백만장자가 파산당한 기업가를 보는듯 한 흥취까지 살아올랐다. 그 기분은 만나기만 하면 사등뼈를 문질러놓으리라 벼르던 백정식이가 나타났을 때 자비로운 용서를 낳게 하였다. 그는 성련화의 건은 전혀 모르는듯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어떻게 왔나? 자네 리대통령과 함께 대전에 가있는걸로 아는데-》

《허허, 매부, 무슨 소릴 그렇게 하시우. 방송을 들어보시우. 지금 바깥 스피커에선 리대통령께서 서울시민들에게 방송연설을 하고계시는데-》

《미친것.》

채병덕은 자기를 보면 언제나 조롱기로 나서는 백정식에게 꽥 소리지르면서도 배포유한 자세는 잃지 않았다. 자기의 말에 별로 자극을 받지 않은데 손을 든듯 백정식은 사실을 터놓았다.

《대통령께서 대구에 이르셨을 때 갑자기 무릎을 치고 창탁을 두드리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어인>인지 뭔지 하는걸 가져오는걸 잊었지요. 그걸 가지러 저를 보냈습니다. 못가져오면 되돌아서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임무를 수행해야지. 찾았느냐?》

《원 매부도… 우선 인척들의 안부가 기본이 아닙니까. 와보니 서울은 이제나저제나군요.》

《그따위 소리 말어.》

《매부, 대단허십니다.》

《너 한잔했구나.》

이때 하우즈만이 들어섰다. 그러자 술에 취했다고 생각한 백정식은 매우 례절겹게 일어나 하우즈만에게 경례를 했다. 채병덕이가 가족파티에서 소개된바 있는 백정식이를 흥미있게 뜯어보던 하우즈만은 불쑥 노기어린 소리로 말했다.

《당신 대통령을 둬두고 왜 여기에 와있소.》

《각하, 저는 국부께서 주신 특수임무를 받고왔습니다.》

《무슨 용건이요.》

《용서하십시오. 그건 기밀입니다.》

백정식이 차렸을 하며 싱긋이 웃었다. 하우즈만은 불쾌함을 간신히 참으며 알겠노라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채병덕은 하우즈만의 패롭게 찌프린 눈을 불안스럽게 살피고나서 백정식에게 엄하게 말했다.

《빨리 떠나게, 내 걱정은 말고-》

《누이와 가솔은 피신시켰습니까?》

《무슨 소린가?》

《집사람들을 피신시켰는가 하는겁니다.》

백정식이 재차 하는 말에 채병덕은 차겁게 웃었다.

《나나 나와 관련된 사람들에겐 피신이란것이 없다. 서울이 살면 나도 살고 내가 살면 가족도 사는것이다. 네 누이와 조카들은 집에 있다. 래일도 모레도 떠나지 않을것이다. 시체로 되여도 거기 있을것이다.》

백정식은 낯빛이 하얘서 채병덕을 보다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후날의 사가들이 입모아 칭송하겠군요. 훌륭합니다.》

채병덕은 벌떡 일어섰다.

《닥쳐라!》

하우즈만은 놀란듯 채병덕을 보다가 다급히 말했다.

《대위, 나가시오. 참모총장의 가족은 내가 책임적으로 피신시키겠소.》

허나 백정식은 이발을 깨문채 까딱않고있었다. 이때 전화가 오지 않았으면 채병덕이 무슨 연극을 했을지 모른다. 전화기를 잡아든 채병덕은 몇마디안짝에 《뭘 꾸물거리는가.》 하고 호통을 치고 하우즈만에게 피발선 눈길을 돌렸다.

《형무소폭파준비가 잘 안되고있소. 서대문형무소는 폭약은 있는데 뢰관이 도중분실되였다는군.》

《나한테 말하면 뭣합니까. 토론된대로 해야지요. 그 헌병사령관이란 작자는 어깨에 메주를 달고 다니는것이 아닙니까?》

채병덕은 하우즈만의 노염이 헌병사령관이 아니라 자기에게 향한것임을 알고 얼굴이 벌개지며 전화통에 대고 소리쳤다.

《당신은 어쩌자는거요? 그들을 살려두는것은 공산군 한개 사단을 살려주는것과 같다고 당신도 말했지… 길게 말할것 없소. 총이건 포건 휘발유건… 옳소. 모든걸 동원해 그놈의 서대문형무소것들을 싹 없애치우시오. 누구의 명령인가구… 거 무슨 식어빠진 소리요?》

《뭣입니까?》

하우즈만이 차겁게 물었다.

《형무소청소에 대해서 떨떨한 자식들이 겁나 물러서려는군요.》

채병덕은 이마에 줄져내리는 땀방울을 손으로 닦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우즈만의 독살스러운 눈길이 묻는듯 찌르는듯 자기를 견줘 번쩍이고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채병덕은 열이 나 전화기에 대고 웨쳤다.

《건… 대통령도 그리고 이 나 채병덕이도 다 토론된것이요. 즉시 집행하오. 책임은 내가 져.》

채병덕은 전화기를 놓았다.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앞에는 퍼렇고 뻘건 옷을 입은 수천명 수인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육박해오는 환영을 보았던것이다. 하우즈만은 창문을 열고 포소리를 가늠하는듯 한동안 서있다가 창문을 도로 닫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합니까? 내가 이 방에 들어와 10분이 지나도록 정황보고가 한건도 없습니다.》

채병덕은 대답할수 없었다. 그는 오직 퇴각할 기회와 방안만을 연구하고있을 1선의 장교들을 그려보았다. 그보다 무시무시하게는 공산군들이 이미 잠적하여 모든 전화선을 절단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가슴을 싸늘케 했다.

《채총장, 당신은 진실로 안해와 가족을 여기에 남겨두려 합니까?》

하우즈만이 채병덕을 굽어보았다.

《그렇습니다.》

채병덕은 자기의 복잡한 심회를 보이기 싫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굵직한 려송연을 뽑아 하우즈만에게 내밀었으나 받지 않았다. 채병덕이 그것을 붙여물었을 때 하우즈만은 매우 은근한 어조로 계속했다.

《아무리 전쟁이더라도 그러면 안됩니다. 나는 채총장이 자기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너무 무관심한데 대하여 충고를 줍니다.

물론 때에 따라서 인간은 죽음의 잔도 태연히 마시는 쏘끄라테스적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를 끝까지 소멸할 사명을 띠고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처자의 생명은 귀중합니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미국군대의 전통적인 인도주의입니다.》

채병덕은 담배불을 비벼껐다. 속으로는 코웃음이 나왔으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 말이야말로 후날 자기의 영웅성에 대한 보증을 암시하는 말과 같은것이기때문에 더욱 귀중한것이고 그만치 지금 이 사람의 기분에 거슬리지 말아야 하는것이다. 하우즈만은 구슬리듯 말했다.

《군기에는 지장이 없을테니 이제라도 처자를 피신시키는것이 좋겠습니다.》

채병덕은 침중한 눈길로 하우즈만을 보다가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그러나 일구이언은 못하겠습니다.》

하우즈만은 빙긋이 웃고 문밖으로 나갔다.

채병덕은 이 순간 저으기 감동되였다. 그는 사실 말대로 가족의 피신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후에 패전을 가지고 구구한 론의들이 있을 때 참모총장은 가족의 안위도 돌보지 않고 싸웠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였으며 그것으로 한점 더 따려는 야심에서였다.

그리고 솔직한 말로 정떨어진 그 녀편네는 차라리 공기처럼 사라져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각 하우즈만이 자기 처자를 걱정해주는것은 어쨌든 나삐 보이지는 않는것이였다.

하우즈만이 나간지 1분도 못되여 전화기가 울었다. 창황중에 전화를 받은 채병덕은 깜짝 놀랐다. 2사, 5사, 7사 구역에서 인민군기습대가 들어오고 땅크가 7사 1련대의 진지로 쳐들어온다는것이였다.

《계속… 전화결속을 하라.》

채병덕은 얼른 전화기를 놓고 부관을 불러 장갑차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하였다.

《륙본을 지킬것이요.》

부관에게 이렇게 주를 달아 내보낸뒤 30분후에 두명의 사단장이 채병덕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인민군포위망에 드는것 같으니 철수하게끔 해달라는것이였다. 사단고문관들도 승낙했다는 말에 채병덕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퇴각은 없소. 결사로 저지시키시오.》

그리고 뒤가 켕겨 하우즈만에게 들어가 사태를 보고하는데 온몸이 피투성이인 미군고문이 뛰여들었다. 그는 하우즈만에게 경례를 하다가 문녘에 서있는 채병덕을 보자 큰소리로 웨쳤다.

《당신네 군대는 똥자루들이요. 한개 소대 기습대에 련대지휘부가 몽땅 녹았소.》

채병덕은 파랗게 질려 눈알을 희번뜩거리는 그자를 보며 터져오르는 분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습관적으로 손을 권총에 가져갔다. 그러자 피투성이 미군고문은 더 잽싸게 권총을 뽑아들었다.

《노!》

하우즈만이 다급히 뛰여와 미군중위의 팔목을 호되게 내리쳤다. 권총을 떨군 중위는 짐승같은 눈초리로 채병덕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피젖은 손수건을 꺼내 입을 닦고는 채병덕의 면상에 던졌다.

방안의 화장실에 들어간 채병덕은 피젖은 손수건이 닿았던 얼굴자리를 오래도록 씻고 오데꼴론향수를 치고난 후 잠시 거울앞에 마주서있었다. 이지러진 얼굴을 본 그는 허허 웃고말았다.

(그래, 저 미군중위의 행동에 분격할 리유는 없다. 오직 이제는 사는것뿐이다.)

그는 입연지자리가 남아있는 가슴자락을 내려다보며 지난 기간 그 녀자의 나긋나긋한 살뜰한 애무까지 기억해낼 여유를 가졌다. 그 회상의 단편으로 이 염열의 지옥같은 환경속에서 도피해버리는것이였다.

(그래 살아야 한다. 향락을 누리기에 충분한 돈이 있다. 퇴역이 되면 기업을 일쿤 옛날의 일본인 친구들도 결코 자기에게는 무심하지 않을것이다. 그쪽에 간다 하여 못살건 무엇인가, 삶의 존재방식은 같다. 온천주변에 별장 하나를 얻어 전쟁도 소음도 없고 피젖은 손수건도 없는 환경에서 살아보자.)

채병덕은 허탈비슷한 상태에 잠겼다. 그러나 전화기와 큰별이 번쩍거리는 철갑모를, 그리고 나폴레옹의 기마상을 그린 유화를 보느라면 심장이 금시라도 뒤틀려 터질듯 한 동통에 사로잡힌다.

반공의 보루로, 력전의 영웅으로, 나가서 이 나라의 절대군주로 받들리우리라던 야심을 깨끗이 저버려야 한다는 기막힌 사실만은 쉽게 접수할수 없었던것이다. 그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아직은 끝나지 않았다. 씨저도 한때는 다몰리워 포로까지 되잖았는가. 맥아더도 그렇지. 바탄도에서 도망친 그였으나 지금은 세기의 영웅으로 받들리지 않는가.)

그는 이런 궁리도 해봤으나 그 생각에는 힘이 없었다.

(무엇때문에 패전하게 되는가. 전술인가. 그래 작전전술에서도 실패한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왜 장교건 사병이건 싸움만 붙으면 도망부터 치려드는가? 문제는 용기와 신념이다. 더구나 리승만이 같은 고루한 령감들탓이기도 하다.

아직 패망을 말하기는 이르다. 내가 충실하고 용감한 장군인이상 미국인들은 나를 저버리지 않을것이다. 천금의 꿈을 안은채 도박장에 나타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손을 털고 사라지는것이 인생이라지만 나는 결코 빈손으로 물러설 범인이 아니다. 인생이 도박일진대 나는 꼭 갑오를 쥘것이다.)

《그래 살아야 한다.》

채병덕이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짓고있는데 요란한 구두발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얼굴이 까맣게 된 작전국장이 뛰여들었다.

《각하, 공산군땅크가 혜화동로타리를 거쳐 돈암동으로 침습해오고있습니다.》

《뭐야?》

《강문봉대령이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 땅크는 바리케트를 막 깔고 거침없이 들어온답니다.》

거만한 자세로 서있던 채병덕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하우즈만대위에게 알리시오.》

채병덕이 도주로정을 그리며 무슨 문건을 가져갈가 생각하는데 문짝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하우즈만이 날아들었다.

《당신 지금 뭘하고있습니까?》

《공산군땅크를 제압할 방법을 생각하는중이요.》

《한강다리폭파준비는 어떻게 됐습니까?》

《다 됐소. 부득불 아군이 패퇴할 경우 주력이 다 철수한 후에 폭파시키려고 하오.》

《뭐요. 당신은 주력의 퇴각을 생각하오? 당신은 일선장교로 갈걸 그랬습니다.》

채병덕은 자기의 《침착성》과 《용기》가 이런 모욕으로 치뤄지는데 놀랐다. 하우즈만은 독살스럽게 노려보다가 웨쳤다.

《한강교는 30분내에 폭파시켜야겠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륙본은 떠나야겠소. 지휘관만 있으면 병사는 생기는 법입니다.》

《주력을 그대로 두고말이요?》

《그들은 싸우게 해야 합니다. 동양의 옛 싸움에 배수진이 있지요. 퇴로가 없으면 더 잘 싸울것이요.》

채병덕은 한동안 번히 서있었다. 기계적으로 수화기를 들어 공병감을 찾았으나 선뜻 말을 뗄수 없었다. 공병감은 연신 《각하》를 불러대고있었다. 채병덕은 이마에 땀이 솟았다. 그러나 하우즈만의 독한 눈초리에 부딪치자 그는 무거운 망짝을 끌던 늙은 당나귀가 지쳐 쓰러질 때의 울부짖음같은 소리로 웨쳤다.

《이제 30분내로 다리를 폭파시키시오. 한강다리입구에서 나를 대기하시오. 뭣이?… 고문단의 명령이요. 군말할것 없소. 지시를 집행하오.》

채병덕은 낯이 하얗게 질려 전화기를 놓았다. 하우즈만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고 한결 풀린 소리로 말했다.

《자, 우린 떠나봅시다.》

채병덕은 바깔에 나왔을 때 컴컴한 어둠과 공포의 대기를 떠실은 소음이 온몸을 옥죄이는것을 느끼며 부관을 시켜 대기시켰던 장갑차에 올랐다.

 

성송암은 5룡등촉에 백옥같은 초대로(이 초대는 그가 1차 원동인민회의 성원으로 모스크바로 갈 때 티베트의 한 고을을 지나다가 고려의 왕실에서 만들어진것임을 알고 산것이다. 보부상의 등짐에 실려 그 먼 타국에까지 간 그 초대를 선조의 뛰여난 솜씨에 대한 긍지로 수십년 건사하던 그는 오늘 골동품들을 정리하다가 자기로도 무엇때문인지 모르게 꺼내 꽂은것이다.) 환히 불을 밝힌 밑에서 고대페르샤의 멸망사를 읽고있었다. 죽은 안해의 낡은 치마로 차광막을 친 방은 양초의 불빛으로 대낮같이 밝았으나 돌개바람이 지나간 뒤같이 어수선하였다.

집안벽을 장식하던 그림과 서예품들은 거의다 없어지고 고서를 넣던 문갑들이 이리저리 널려있었다. 때오른 베개들을 덧놓고 누워있는 송암의 머리맡에는 까맣게 탄 보리밥 누룽지가 담긴 귀떨어진 바가지가 놓여있었다. 밥을 안친채 책을 보다가 다 태워먹은 후 그 누룽지쪼박으로 위를 달랜 그는 마음괴롭고 불안할 때면 달관의 세계로 이끄는 고대강국과 부유민족들의 멸망사를 읽었다. 송암이 《미이라》로 될 결심을 지니고 지하실에 있은것은 불과 두시간도 못될것이다.

먼 후날의 세대들이 보면 좋고 보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생각되는 글발을 적어놓고 지하실벽에 기대여있던 송암은 처음부터 환각속에 자주 빠져버렸다. 쥐가 버스럭거려도 그랬고 몸을 움직일 때 간혹 떨어지는 흙부스레기에도 그는 신경을 뻗치며 《폼뻬이의 마지막날》과 같은 시각을 그렸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가도 폼뻬이를 페허로 만든 활화산의 폭발과 같은 폭음은 들리지 않았다. 그만큼 초조했고 신경은 더욱더 예민해졌다. 습기찬 지하실이라 호흡조차 가빠들었다. 이것을 극복하려 공상을 달리기도 했다. 수백년후에 이 페허로 된 땅을 어느 발굴대가 뒤지다가 력사의 슬픈 결론을 담아쓴 글발앞에 굳어져있는 자기와 수백천년전부터 만들어진 도자기며 금은공예품을 보면서 쓸쓸한 미소를 그릴것을 상상해보며 기다리는 초조감을 잊어도 보았으나 그것도 한때였다. 그런데다 점심과 저녁을 다 번진지라 배가 몹시 고파났다.

더구나 자기가 여기 박혀있는 시간에 련화가 왔다가 사라져버릴것만 같은 불안까지 겹치자 더 앉아있을수 없었다. 결국 이런 실제적인 느낌과 생각이 그로 하여금 지하실에서 나오게 한것이다.

(죽을 때는 죽는거고…)

송암은 아테네의 창녀 타이스가 페르샤인들에 대한 복수로 아케 메네스조의 화려한 왕궁을 불사르던 페지를 번졌다. 그러나 지금은 이 글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뿐만아니라 마음을 가라앉히지도 못했다. 여느때면 보석으로 몸을 휘감고 주지육림속에 살을 찌우며 향락과 방탕으로 질탕한 나날을 보내던 그 부요한 민족의 처참한 멸망을 눈앞에 방불히 보면서 인생의 무상과 일종의 허무를 느끼면서 고뇌와 번민을 잠시나마 잊고 최면상태에 이르군 했었다. 그것이 남의 큰 불행앞에서 자기의 작은 불행을 위안하게 되는 인간의 리기적지력에서 생겨나는것임을 알면서도 송암은 늘 이렇게 하였었다. 허나 지금은 그것을 읽을수록 그때와 방불한 현실에 생각이 뻗어가며 그의 일체 감각을 밖으로 이끌어갔다.

송암은 원색그림들로 가득찬 세계사를 집어던지고 머리맡을 더듬었다. 바가지가 손에 마치자 그는 누룽지 한쪼박을 집어들어 쓰고 쩝쩔한 그것을 입에 넣고 씹다가 도로 뱉어버리였다. 그리고 다시 머리맡에 손을 올려 부딪치는 책을 집어들었다. 신채호의 문집이였다. 6월 24일 저녁 집에 돌아와 한번 다시보자 하면서도 다만 자기의 불안스럽고 혼란된 마음을 위안하는것으로 보기에는 그 대학자며 애국자인 고인의 령혼앞에 죄스러운것 같아 몇번 들었다가 놓은것이다. 그는 별로 페지를 찾지 않고도 자기가 말년에 이르러 깨도하게 된 체험을 딱 찍어 밝힌듯 아프면서도 감복할만치 정확하게 썼다고 본 대목을 더듬어 읽었다.

《…공자, 예수, 맑스 그 누구를 보더라도 그 제자들은 스승들의 정의를 잘 리해하여 자기의 리익을 구했던고로 중국의 석가는 인도와 다르고 일본의 공자는 중국과 다르며 카우츠키의 맑스와 레닌의 맑스, 또한 중국이나 일본의 맑스는 모두 다르다.

그러나 우리 조선사람은 리해이외의 진리를 구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는 되지 못하고 석가의 조선이 된다. 기독교가 들어오면 조선의 기독교가 되지는 않고 기독교의 조선이 된다.

대체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못하고 주의의 조선이 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한 조선은 있어도 조선을 위한 도덕, 주의는 없다,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일것이리라…》

《그럴지고.》

저도 모르게 옛날 말투가 영탄조로 흘러나오고 손에서 책이 미끄러져 바가지우에 떨어져내리고 눈귀로는 뜨거운 눈물이 맺히다가 귀밑으로 주르르 흘러내린다.

갑자기 빗장을 지른 바깥대문이 왈가닥거리고 가냘픈 녀인의 목소리와 청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부른다.

《아버지-》

《선생님-》

환각속의 부름인듯싶어 자리에서 일어나앉아서도 그대로 있던 송암은 자동차의 경적소리까지 반주하듯 울리자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현기증에 머리가 팽 돌아 손을 헛짚었다. 신사임당의 족자가 손에 잡혀 삐뚜루 돌아간다. 뒤축을 베여낸 코찢어진 백고무신을 끌고 대문가에 이르자 계화의 목소리가 초조히 울렸다.

《아버지 빨리-》

찌그덩 문이 열리자 검정두루마기로 몸을 감싼 계화가 엎어질듯 하며 송암의 손을 잡았다.

《웬일이냐?》

송암은 대문앞에 선 리윤병의 승용차와 계화의 뒤에 선 억대우같은 남자를 살펴보며 물었다.

《아버지, 어쩜 이러고계셔요. 공산군들이 시내로 들어와요.》

《그래-?!》

《마구 사람을 죽인다고 시부께서 모셔오라고… 피난해야 한다고 했어요.》

송암은 제앞으로 짐을 실은 리야까가 삐그덕거리며 굴러가는것을 보았다.

《아빠, 나 잘래.》

《쉿, 안된다. 자면 빨갱이가 와 널 잡아먹는다.》

《이잉, 거짓뿌리.》

맞은편 자전거포에서 널대문에 못을 박는 소리가 청승스럽게 울린다.

《아버지, 어서요.》

계화가 발을 동동 구른다. 송암은 밤어둠속에 처염할 정도로 희맑게 보이는 딸의 모습을 보다가 가슴 찌르는 회한의 아픔을 느꼈다. 피줄이란 어쩌지 못하는가부다. 그래도 제 애비라고 이처럼 끄는것이 아닌가.

《선생님, 가셔야 됩니다. 선생님은 여기 계시면 일없다고 생각하는것 아니요.》

체대 큰 사나이가 비쳐들었다. 리윤병이네 사환을 하는 사람인것을 알아본 송암은 서글프게 웃었다.

《군대란 살생이 법인데 내 어찌 무사할걸 믿겠소. 더구나 독이 오를대로 올라 내달아오는 군대가 아니겠소.》

《그렇다면 왜 망설입니까. 그래도 리윤병장관님께서는 일각이 삼추같은 형편에서도 선생님의 신상을 걱정하셔-》

《아버지, 난 아버지 안가면 안갈래요.》

계화는 해여진 송암의 팔소매를 잡고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송암이 모질게 먹은 결심이 흔들렸다.

(인민군대가 서울에 들어온다면 장관의 며느리에 장교의 처인 계화는 참살을 면할수 없으렸다. 계급적원쑤에게 무자비하다는것이 그네들의 신조일진대 그러나 련화는… 어찌하는가.)

송암은 저만치 사라진 리야까의 형체를 더듬다가 한숨을 푹 내쉬였다.

《련화가 찾아와 내 없으면 어쩌겠니?》

《아버지, 내 깜박 잊었군요.》

울음울던 계화는 반겨 입을 열었다.

《시부가 그러는데 련화는 분명 대전으로 끌려갔을것이라는거예요. 게까지 가면 이번엔 자기가 꼭 빼내겠답니다.》

《련화가 끌려갔다고?-》

송암은 련화를 빼내겠다는 윤병이의 장담은 못믿었으나 행방은 알아봤을수도 있겠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가자!…》

《아버지, 짐을 챙겨야지요.》

《짐은 무슨 짐.》

《선생님, 우리 댁 어른께선 선생님한테 짐이 많을것이라고 하셨는데… 》

례의 그 사나이가 전지불을 켜들고 집벽을 비추었다. 그러자 방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계화도 돌따서 한마디하였다.

《아버님이 보관하시던것을 다 가져가야 한다고 했어요. 공산군이 오면 다 없어질것이라구요.》

《그래?-》

성송암은 어이없었다. 리윤병의 약아빠진 얼굴이 떠올랐다. 옛날 서대문에 갇혔을 때 소장된 골동품에 대해서 그 시세까지 미주알고주알 캐묻던것이 떠올랐다.

(그래서였구나. 내가 아니라 그 유물들이 탐났을테지.)

송암은 일체 귀중품을 지하실에 감춰둔것을 거의 통쾌하게 생각하며 싹 잘라 말했다.

《뭐 없어져서 아까울 물건이란 없다.》

송암은 이렇게 말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옛날에 메고나니던 륙크샤크에 입을 옷가지와 5룡촉대 신채호의 문집과 세계사를 쑤셔넣었다. 장서에 가득한 책을 보다가 한숨을 짓고 돌아섰다. 그런데 계화가 장농을 뒤져 어머니의 반짇고리며 패물따위를 꺼내여 륙크샤크에 쑤셔넣었다. 성송암은 벽에 건 옛날 몇대조 할아버지가 신사임당에게서 기념으로 받은 족자를 내려놓았다. 그것도 넣을가 했으나 자리가 없었다. 그때 밖에서 서성거리던 사내가 뛰여들어오며 송암이 매만지는 륙크샤크를 황급히 집어들었다.

《땅크소리입니다. 빨리 나가야겠습니다.》

송암은 계화의 손에 팔목을 잡힌채 끌려나갔다. 그는 대문을 닫고 문득 맞은편 자전거포주인이 널문에 못질하던것이 떠올라 못을 박을가 하다가 《에라, 그만둬라.》 하고는 차에 올랐다. 계화가 《아버지, 불을 안껐군요.》 하고 말했다. 송암은 차광막 틈새로 빠금히 비쳐나오는 그 불을 보고 울음이 터지려는것을 간신히 참았다.

《차라리 저 불이 모든걸 다 태우면 좋겠다.》

짐을 가득 실은 스리쿼다옆에서 서성거리던 리윤병은 성송암을 태운 차가 나타나자 늦었다고 아우성을 치면서도 몹시 반기는 기색이였다. 그러나 차안과 뒤의 짐실이칸을 본 그의 얼굴은 순간에 새풋하게 질렸다. 그는 성송암을 못마땅하게 보며 말했다.

《아, 거 옛날 그릇들이랑 어쩌려고 그대로 남깁네까.》

《다 팔아버린 뒤지요.》

송암의 말에 리윤병은 두눈이 올롱해지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말은 더 할수가 없었다. 자지러진 총소리가 길건너 집뒤쪽에서 울리였던것이다. 리윤병은 냉큼 계화와 송암이 탄 차의 앞자리에 앉으며 《떠나자.》 하고 소리쳤다.

앞에서 달리는 리윤병의 세간을 실은 차의 적재함우에 산봉우리처럼 가려 쌓은 짐이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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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앞에서 달리는 리윤병의 세간을 실은 차의 적재함우에 산봉우리처럼 가려 쌓은 짐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리윤병은 짐을 보고서인지 아니면 무슨 생각에 따라서인지 십자를 긋고는 손수건을 꺼내 코와 함께 눈물을 풀어내치고는 목멘 소리로 탄식했다.

《46년이 엊그제같은데 또 적색마귀에 쫓기게 되였으니… 으흑 춘설이 분분히 날리는 그날은 맵짜기도 하더니. 그래도 신양리 자택을 떠나 대동강을 건넜을제는 희망이 꿈틀거렸건만… 온다는 미군은 과연 오는지…》

한강교에 들어섰을 때 장갑차가 길을 튀며 질러나가다가 리윤병이네 화물차를 들이받아 란간에 짓쪼아놓았다. 그 차의 운전칸에 처를 태웠던 리윤병이 비명을 치며 일어섰으나 앞뒤로 빼곡이 밀려드는 흐름속에서 차를 세울수도 문을 열수도 없었다. 차가 한강다리를 건너 영등포로 나가는 길에 들어서는데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폭음이 울리며 차까지 움씰하고 들었다놓았다. 그들이 뒤돌아보았을 때 한강다리가운데가 불길속에 휘말려 훌 들리였다. 한강대교의 폭파인것이다.

침침한 어둠속에 거대한 탑마냥 적황색 불기둥이 일떠섰다. 그 화염의 기둥속에는 부서진 교각, 철근쪼박과 세멘트덩이, 찢겨진 승용차들과 짚검불처럼 타버린 시체가 휘말려올라갔다. 수초동안 하늘과 강물을 찬연한 백광으로 물들이던 불기둥이 사라지자 무서운 폭음이 진동하였다. 삽시간에 묘혈로 되여버린 한강은 사품쳐 끓어번지며 수백수천의 인명과 수백대의 차량을 삼켜버리였다.

장사진을 이둔 도주의 무리들, 군용트럭과 고급승용차에 몸을 실은 장교들과 《장관님》들, 《국회의원》들은 미처 저주의 말을 뱉을새도 없이 뒤로 밀려드는 인파와 장갑차, 트럭의 추적속에 끊임없이 그 낭떠러지, 차와 사람이 겨끔내기로 떨어져내리는 물속으로 곤두박혀 들어갔다. 말그대로 아비규환 염라국의 한 장면이 20세기 고도 서울에서 연출된것이다.

성송암이 탄 차는 몇메터 못가서 멈춰섰다. 앞서달리던 차와 사람의 떼가 일시에 멈춰섰다. 화광속에 해골같은 얼굴들과 경악한 눈들이 번쩍였다. 아우성과 비명이 폭음의 메아리와 더불어 강반의 어둠을 찢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한 녀인이 학생모를 움켜들고 《철아, 철아.》 하고 부르며 부러져나간 다리쪽으로 미친듯이 내달았다. 그 녀인만이 아니였다. 이름을 부르며 오가는 사람들이 저들끼리 부딪치고 넘어진 사람을 타고넘기도 하였다. 장성을 단 《국군》이 권총을 뽑아들고 누구를 향해선지 욕설을 퍼부으며 떠들썩 고아대는 다리목으로 달려갔다.

《<국군>이 다리를 끊었다.》

《군대가 배신했다!》

차문을 열어젖히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성송암은 다리가 꺾인듯 쓰러졌다. 단말마의 포효같은 스산한 웨침이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계화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으나 송암은 넋을 잃은듯 주먹으로 차창문을 두드렸다.

《불쌍한 배달의 민족아.》

몸을 옹골뜨리고 얼빠진듯이 앉아있던 리윤병은 후들후들 팔을 떨며 입안의 소리로 웅얼거렸다.

《하느님, 굽어 감찰하옵소서.》

그의 의식속에서는 아직 자기 처가 강물에 수장되였다는것이 사실로 새겨지지 않은 모양이였다. 혼돈과 광기의 시간이 강반을 지배하고있었다.

 

똑똑똑, 똑똑똑

옹골차게 쥐여진 녀인의 주먹이 거멓게 쩌들은 세멘트담벽을 두드린다.

성련화는 오도카니 앉아 그 통방신호를 지켜보고있다. 백정식의 마수에서 벗어나 달리다가 다시 경찰서, 헌병대를 거쳐 이 서대문형무소에 들어온 성련화는 다행스럽게도 《국대안》반대투쟁에 나섰다가 잡힌 처녀들, 로동쟁의에 떨쳐났던 녀공들이며 제주도의 이름짜한 해녀들과 한방살이를 하게 되였다. 통방신호를 날리는 후리후리한 체격에 두눈이 호남자의 눈처럼 억실억실한 그 녀인은 제주도폭동시 한 소조장이였다. 그 연고로 또 상대를 압도하는 기품과 폭넓게 사람을 감싸는 마음으로 이 방의 호주로 되고있다.

지금 그 녀자의 통방신호를 보지 않는 녀자는 련화옆에 망낭둥이라 불리우는 녀인뿐이다. 그는 저녁밥을 들여오는 목궤에서 누군가 집어넣은 쪽지를 본 후부터 지금까지 내처 울고있다.

그 쪽지에는 《오늘 오후 려수순천사건관련자들을 흥제원화장터에서 집단학살했음.》이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그 려수순천사건관련자들속에 이 녀인의 애인이 있었던것이다.

방금전 그들은 오늘밤내로 형무소 수감자전체를 학살한다는 소식을 옆방에서 보내온 통방신호로 알게 되였다. 방안사람들은 자기들모두에게 닥쳐든 불행앞에서 마지막 최후를 생각하고 다른 호실과 련계를 취하는것이다.

《동무들!》

통방을 끝낸 정록주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한손으로 추어올리며 번쩍이는 눈길로 둘러보았다. 성련화는 겨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제저녁 이리로 오기전 호송차에 실리우며 한 헌병장교의 구두발에 호되게 채운 옆구리가 쑤셔나 이발을 앙다물었다.

정록주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후시각에 다들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부르기로 했어. 그런데 다른 호실들에서는 뭔가 남겨야 한다는거야. 이제 인민군대가 오면… 그래도 이 세상에서 공화국을 우러러 싸운 사람들이 있었다는것을 알려야 한다는거야. 매 사람이 가장 남기고픈… 말하자면 유언이기도 한것을말이야.》

성련화는 《유언》이라는 말에 이제껏 별로 깊이 생각해보지 않던 죽음에 대한 생각에 섬찟했다.

(그러니 내가 좀 있으면 영 이 세상에서 사라진단 말인가. 파파 늙었을 때 하게 되는 유언을 이제 한단 말인가.)

정록주가 언제 준비해뒀는지 흰 옥당목자투리를 꺼내 정히 펼쳤다. 그는 자기 동무들을 묵묵히 보다가 련화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련화는 무엇을 남겼으면 좋겠어?》

고개를 쳐든 련화는 뿌연 전등빛에서 자기를 주시하는 엄숙하면서도 더없이 다정스러운 눈길들과 부딪치자 엉겁결에 입을 열었다.

《전… 저의 동무에게 제가 여기서… 간다는 글발을 남기면 해요…》

말을 마친 련화는 문득 려수사건관련자인 애인의 죽음으로 눈물을 흘리던 녀인의 시선과 부딪치자 고개를 수그렸다.

《그 동무란 누구예요? 물론 비밀이라면 말 안해도 돼요.》

련화는 정록주의 맑고 큰 눈을 보다가 애인을 잃었다는 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미안스러웠다. 그런데 그 녀자의 눈매는 더없이 상냥하였고 눈가에는 동정의 빛까지 어려있었다. 성련화는 이 사람들속에서는 조그마한 비밀도 숨겨둘수 없음을 느꼈다.

《그 동문 저의 애인이였어요. 지금 이북에 가있어요.》

《그래요?! 동문 행복하군요.》

애인을 잃은 녀인은 웃어보이며 련화의 손을 꼭 잡아쥐였다. 련화는 그의 행동이 눈물이 나게 고마왔다.

정록주의 말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나는 이 천에 우리 마음의 태양인 김일성장군님 만세를 피로 새기고 우리들의 이름을 적자는것을 제기해요.》

《언니!》

격동어린 웨침과 함께 주먹쥔 손들이 불쑥불쑥 올라갔다. 련화의 손을 뜨겁게 매만져주던 녀인도 손을 쳐들었다.

련화는 엄숙하면서도 감격에 번쩍이는 눈길들을 보는 순간 자기와 이들과의 아득한 차이를 감득하며 송구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정록주가 그의 어깨를 그러안았다.

《동무의 소망도 적자요. 적을 자리는 많으니까.》

련화는 그 뜨거운 정이 담겨진 말에 흑 하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죽음이란 때로 비겁한 사람도 용감하게, 용렬한 사람도 슬기롭게 만든다. 그것은 죽음의 목적과 의의가 신성할 때 정화된 량심이 비쳐주는 빛에 고무된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때문인것이다. 격앙된 흥분속에 죽음을 과감히 직시하는 이들은 그러한 승화된 세계의 절정에 이르러 아무런 두려움도 슬픔도 모르는듯 저마끔 손에서 피를 내여 자기 마음속의 가장 소중한 글들을 새겨갔다.

일이 끝났을 때 련화는 벽에 기댄채 지친듯 눈을 감고 운학이를 그려보았다. 운학의 말을 따랐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으리라는 애잡짤한 후회가 가슴을 훑었다. 운학이와의 마지막이 눈물겹게 떠올랐다.

그날 련화가 저녁동자를 마치고 설겆이물을 쏟으러 밖에 나가니 온 천지가 하얗게 눈속에 묻혀있었다. 련화는 흰눈에 얼룩지을 설겆이물을 차마 마당에 쏟지 못하고 울타리밑에 선 무궁화나무밑에 던졌다. 그런데 그 흰눈 쓴 무궁화나무뒤에서 꿈속의 모습인양 림운학이가 표연히 나섰다.

《어마!》

《쉿!》

운학이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댔다. 련화는 문쪽을 얼른 돌아보고는 대야를 뿌려던진채 운학에게 달려갔다. 운학의 손과 옷은 물에 푹 젖어있었다.

《아이!》

《좋은 선물을 받았어.》

운학의 말소리는 덜덜 떨렸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뭐 조금.》

련화는 눈뿌리가 따끔해져 행주치마를 풀어들고 설겆이물에 적셔진 그의 가슴자락을 닦았다. 운학이가 그의 손을 조심히 뿌리쳤다. 그 손은 얼음장처럼 차거웠다.

《집에 들어가요. 동상 걸려요.》

《아버님 계시지?》

림운학은 방문쪽을 힐끗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겁쟁이!》

련화는 이렇게 말했으나 그를 끌고들어갈 담보까지는 없었다.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주의바람》에 날뛴다고 하며 운학이가 오는것을 엄금하였다.

《아버님한테 꾸지람 많이 들었소?》

《안…》

련화는 거짓말을 하였다. 사실 련화는 운학에 대한 처사에 맞서 아버지와 몹시 다투었다. 운학이와는 이미 깊은 관계를 가졌다고, 정 말리면 자살하겠다고까지 위협했다.

《아버님 노엽히는 일은 마오.》

운학은 모든것을 눈치챈듯 부드럽게 말했다. 련화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 어떤 륙감에 소스라치듯 놀라며 운학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슬픔에 싸인 모습이였다. 꽉 다문 입, 움직이지 않는 눈동자, 그 눈길은 련화의 시선을 안고 깊은 호수처럼 그윽히 빛났다.

《련화!》

운학의 목소리가 떨리였다. 그가 한걸음 무섭게 다가왔다. 련화는 얼결에 한걸음 물러섰다. 운학의 손이 련화의 팔목을 잡았다. 련화는 머리가 핑 도는것만 같아 잠시 멍하니 있다가 어째서인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운학은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손을 어떻게 건사했으면 좋을지 몰라 그을음이 잔뜩 낀 굴뚝모서리를 잡았다.

《손이 어지러워져요.》

련화는 눈살을 찌프리며 아래사람에게 하듯 나무랬다. 림운학은 억지로 웃어보였다. 다음 그는 매우 활발한 태도로 건강을 조심하라거니 아버지를 잘 모셔야 한다거니 두루 말하던끝에 불쑥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내밀었다.

《이걸 받아주겠소?》

《건…》

련화는 영문을 알수 없었다. 그 수첩은 련화도 잘 아는것이였다. 운학이가 좋아하는 작가와 철학가들의 명언으로부터 걸리기만 하면 감옥에 갈수 있는 이북의 노래들이 적힌 수첩이였다. 언제인가 련화가 장난겸 진정겸으로 써넣은 여덟줄짜리 시도 적힌것이다.

운학은 망설이는듯 하다가 말했다.

《난 집으로, 어머니한테로 가오.》

《네? 그럼 전…》

련화는 발밑이 무너져내리는듯 하였다. 운학은 까딱하지 않고 그를 보다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난 련화씨도 함께 가줬음 하오.》

《이북으로요?!… 아버지는 어찌하고… 그리고 거긴 험하다는데.》

《그 험하다는건 반역도배들의 거짓선전이요. 련화, 제발 함께 가주오.》

운학의 숨소리는 거칠었고 눈은 황황히 불을 뿜는것 같았다.

련화는 속이 한줌만해지며 한걸음 물러섰다. 미지의 그 세계는 그에게 공포로만 그려졌다. 운학은 한숨을 짓고 모든것을 체념한듯 허구픈 웃음을 지었다. 그는 무궁화나무에 얹혀진 눈을 움켜쥐고는 손가락사이로 녹아내리는것을 즐기듯 보다가 훌 털어버리고 불쑥 손을 내밀었다.

《련화, 벗을 잘 사귀여주오.》

애절한 목소리였다. 련화는 몸부림을 치고싶었다. 그는 슬픔과 야속함에 못이겨 울음질려 소리쳤다.

《나에겐 운학씨보다 더 귀중한 벗은 없어요.》

련화는 끝내 흐느낌을 터치고야말았다. 기침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불빛을 등에 지고 나서는 아버지를 보자 운학은 결심한듯 그쪽으로 다가섰다.

《아버님, 작별인사로 왔습니다.》

《운학군인가?》

《…》

아버지는 끌신을 신고 문밖 대돌에 나와섰다.

《어델 가는가?》

《고향에 갑니다.》

《고향?!… 엄친은 어찌하고…》

《부친께서 분부가 있었습니다.》

《음… 옳은 처사지.》

련화는 몸을 떨었다. 온갖 생각들이 얼어붙은듯 심장만 놀란 새가슴처럼 바삐 뛰였다. 아버지가 상해에 갔을 때 사왔다는 해리털외투를 들고나왔을 때야 자기도 뭔가 움직이고 말해야 한다는것을 알았으나 제정신이 아니였고 발은 땅에 뿌리내린듯 움직여지지를 않았다.

《바래주거라.》

외투를 억지다싶이 운학에게 씌워준 아버지가 성난듯 한 음성으로 이 소리를 남기고 문을 쾅 닫고 들어갔을 때야 련화는 자기일생에서 가장 비극적인 시각이 닥쳐왔음을 알아차렸다.

《안돼요!》

그는 제잡담 운학의 팔굽을 잡아쥐였다.

《이러지 마오.》

림운학은 뼈짬에서 나오는듯 한 힘겨운 소리로 뇌이며 련화의 두손을 꼭 포개쥐였다가 놓았다. 련화는 어쩔바를 몰랐다.

《반동한테는… 시집가지 마오.》

운학의 말은 여기서 끊어졌다. 그는 성송암이 준 외투를 련화의 어깨에 얹어주었다.

《잘 있소.》

그다음 운학은 홱 돌아섰다. 대문밖으로 나갈 때야 련화는 정신을 차렸다.

《운학씨!-》

련화는 목메여 부르짖으며 달려가 그의 팔을 그러잡았다. 외투가 발치에 흘러내려 둘사이에 계선을 그었다.

《가지 말아요.》

련화는 애타게 뇌였다. 운학의 몸이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운학은 모질게도 련화를 뿌리쳤다. 그다음 비칠거리며 쫓기듯 걸어갔다. 외투를, 외투라도… 련화는 그를 쫓아 달리다가 쓰러지고말았다. 아버지가 찾아나올 때까지 그는 차고 슴슴한 눈을 녹이며 그자리에 그냥 엎드려있었다.

방안에 들어간 련화는 운학이가 주고간 수첩을 펼쳤다. 첫페지에 큼직큼직한 글이 불덩이처럼 살아 꿈틀거렸다.

《련화씨,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죽어도 살아도

            부디 안녕히!》

이처럼 그들의 사랑은 고백과 함께 슬픈 리별로 끝나고말았다. 그때부터 애모쁜 그리움과 괴로움속에 번민어린 나날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축구공을 넣은 그물중태기를 엇가로 멘 상고머리의 낯선 청년이 나타났을 때 련화는 그가 행복과 희망을 가져올 천사인줄 꿈에도 몰랐다. 그 청년은 언젠가 림운학이와 눈물어린 작별을 하였던 무궁화나무옆으로 돌아가 그물중태기에서 축구공을 빼들었다. 그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축구공의 죄임끈을 풀고 내피의 바람을 뽑았다. 납죽해진 축구공안에 손을 집어넣고 무슨 요술사처럼 움직이더니 네절로 접은 모조지를 넘겨주었다.

그것은 림운학의 편지였다.

상고머리청년은 경평축구대회로 평양에 갔다가 풋낯이나 알고있던 운학이를 만나 편지를 받아왔노라고 하였다. 련화는 이 고마운 《은인》을 방에 모실 생각도 못하고 굴뚝모퉁이에 쪼크리고 앉아 편지를 읽었다.

…사랑하는 련화.

나는 동무를 잊으려고 했습니다. (《동무》라는 말 어설피지요? 그러나 나는 련화를 《동무》라고 부르렵니다.) 기억속에서 마음속에서 동무의 자태마저 잊으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남남의 평행선을 걷는 운명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나는 이 《결심》이 얼마나 허무한 위선이고 거짓이였는가를 깨달았습니다.

련화, 나는 지금에 와서 동무 없는 삶의 매 순간순간은 아픔과 후회로 이어진 고통의 지루한 시간이라는것을 알았습니다. 동무를 데려오지 못한것, 억지로라도 끌어오지 못한것, 강제로라도 사랑을 쟁취하지 못한것, 이 모든것이 후회로 남습니다.

여기는 창조와 활력의 세계입니다. 랑만과 환희, 희망에 넘치는 동산입니다. 이로 하여 나의 후회는 더 크고 번민 역시 무겁습니다. 그러나 나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한나라, 한민족이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 어찌 갈라져 살수 있겠습니까! 《평화통일》을 위한 세찬 움직임이 대하처럼 일어나고있습니다. 나는 동무를 끝까지 기다리기로 기다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지금 그대는 무얼 하는지. 그 아름다운 눈동자속에, 고요히 맥박치는 심장속에 이 나를 받아주오. 동무를 떠난 내가 없듯이 내가 없는 동무가 없게 되기를 나는 충심으로 빕니다…

련화는 그 다음날로 상고머리청년을 찾아가 림운학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달하였다. 일생 림운학이만을 알며 살겠노라고 썼다.

 

갑자기 복도가 술렁거리는 소리에 련화는 회상에서 깨여났다.

대여섯명의 경관들이 복도에 나타났다. 손에는 번쩍거리는 휘발유통을 들었다. 열쇠꾸레미를 쥔 녀간수가 흰자위가 가득한 눈을 이상스레 희번뜩거리며 련화네 호실앞으로 다가왔다. 얼굴에 깨김까지 다 드러나게 낯이 핼쑥해진 간수는 련화를 보자 손짓했다.

《성련화 나왓.》

녀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련화에게 쏠렸다.

련화는 도대체 무엇때문에 부를가, 이 언니들은 무엇때문에 이렇게 나를 바라보는가 하고 똑바른 판단을 내리려고 했으나 무엇인지 아직은 딱히 알수 없는 불안스러운 예감에 짓눌려 머리가 뻥하였다. 간수가 쇠를 열었다.

《빨리 나와!》

간수는 초조한 기색으로 소리쳤다. 련화는 차마 걸음을 내짚을수 없었다.

《련화, 나가봐요. 혹시.》

정록주가 땀기어린 손으로 련화의 종다리를 가볍게 떠밀었다.

그 힘에 련화는 앞으로 나가려다가 무춤하고 멈춰섰다. 그는 백정식을 보았던것이다. 경찰들의 뒤에서 불쑥 솟구쳐나온 잠바차림에 푸르딩딩한 살기어린 얼굴의 백정식은 오도카니 서있는 련화를 보자 뻔뻔스럽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련화는 이제라도 백정식이 또 야수처럼 덤벼들것 같은 공포속에 한발자국 뒤걸음쳤다. 백정식은 눈섭을 찌프렸다.

《미쓰 성, 용서하오. 지나간건 말하지 맙시다. 시간이 없습니다. 우선 나오시오.》

련화는 몸서리가 처졌다. 이 순간 그는 여기에 자기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이자앞에서 지금은 무서워할 하등의 리유도 없음을 깨달았다. 이 생각에 닿자 후안무치하게 덤벼들던 그자의 더러운 행동이 떠오르며 차거운 비웃음이 떠올랐다,

《전 안나가겠어요, 떠나가요.》

련화는 자기도 통쾌할 정도로 차겁게 내쏘았다.

《정말이요?》

백정식의 눈에서 불이 번쩍했다.

《이제 안나가면… 여긴 불바다가 돼.》

련화는 부지중 그자의 낯판대기에 침이라도 콱 뱉어줄 심정으로 웨쳤다.

《물러가요. 더러운것.》

백정식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쌍년!》

낮게 뇌인 그는 갑자기 문을 홱 열어젖혔다. 그러자 이제껏 둘의 대화를 지키던 녀인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일어났다. 백정식은 황급히 문을 도로 닫으며 뒤로 물러섰다. 후들후들 떠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하며 서있던 련화는 알수 없는 쾌감과 동시에 아찔한 흥분속에 잠겼다.

《정말 안가겠소?》

눈을 희번뜩거리며 위협적으로 물은 백정식은 집어삼킬듯 련화를 노리다가 《이 빨갱이년!》 하며 갑자기 권총을 뽑아들었다.

련화는 권총의 격발기를 여닫는것을 보며 《아!》 하고 낮게 신음쳤다. 그때 정록주가 련화를 밀치며 나섰다.

《무슨짓이예요. 당신은 뭐예요?》

《이 빨갱이들!》

백정식은 악마같은 상을 하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벌겋게 충혈된 눈이 커다랗게 확대되였다. 련화의 얼굴을 보자 총구를 그쪽으로 돌렸다.

《그래 쏴라. 이 망나니야.》

련화가 정록주의 잔등을 막 밀치며 악에 받쳐 앞으로 내달을 때 《련화동무.》 하며 한 녀인이 달려나가며 련화를 막았다. 백정식의 짐승같은 악청과 함께 권총의 야무진 총성이 련발사격하듯 울렸다. 신음소리와 함께 《저놈 죽여라!》 하는 웨침이 감방안을 울렸다. 련화는 자기 앞을 막아섰던 애인을 잃었다고 울던 녀인의 몸이 넘어지는것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그러안았다. 뜨겁고 끈적끈적한것이 만져졌다.

《이 인간백정아-》

련화는 정신없이 소리쳤다. 모든것이 뽀얀 안개속에 휘말려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지러진 총성과 폭음이 일며 복도에서 백정식의 광기어린 발작을 구경하던 경관들이 왁작 고아대며 뛰쳐달아났다. 누군가 백정식의 팔소매를 잡아끌자 《이년들 보자.》 하고 소리치며 달려나갔다. 마루바닥이 울리고 벽체까지 움직이는것 같았다.

《인민군대다! 인민군 땅크다!》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모를 소리를 따라 울음진 만세의 웨침들이 터져올랐다. 그러나 련화는 자기 가슴에 안겨 마지막숨을 몰아쉬며 초점잃은 눈길로 허공을 쳐다보는 녀인을 그러안은채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예측대로 인민군땅크 한대가 서대문형무소로 들이닥쳤다. 땅크는 휘발유도람통을 만재한 석대의 트럭을 류탄으로 날려버리고 괴뢰군 헌병들과 경찰들을 기관총사격으로 쓸어눕혔다.

그다음 우에 타고있던 보병들을 내려놓고 륙군형무소쪽으로 내달렸다.

그 땅크에는 림운학이 타고있었다. 마포형무소까지 세개의 형무소폭파를 막을 임무가 그들에게 지워져있었다.

그런데 땅크는 륙군형무소근방에 이르기전에 시창이 명중되여 불타기 시작했다. 림운학은 단신으로 철갑우의 불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밤 세시 정찰국장으로부터 한강교가 폭발되였다는 전화보고를 받으신 김일성동지께서는 무선전화로 최용건을 호출하여 서울시내에 진입한 소부대들의 전투상태를 알아보고 즉시 시가공격을 단행할데 대하여 명령을 주시였다.

《적들이 한강교를 폭파한것은 이미… 작전수뇌부가 제정신을 잃었다는것을 말합니다. 수습되기전에 공격을 개시해야 되겠습니다.

특히 시가에 먼저 들어간 기습대의 안전을 위해서도 더욱 급박한 문제입니다. 류경수동무의 주력땅크들도 곧 전투에 진입시키시오.》

이렇게 되여 력사적인 서울해방전투는 그 장엄한 서막을 열었다. 두개 종대로 나뉜 류경수의 땅크려단이 푸릿푸릿한 어둠속을 뚫고 내달리기 시작하자 뒤이어 보병서렬들이 소리없이 일떠나 밀물처럼 밀려나갔다.

온밤 독전장교들의 서슬푸른 호령에 떨며 어둠을 향해 끊임없이 총을 쏘아대던 사병들은 묵묵히 다가오는 땅크와 보병서렬의 질풍공격에 대뜸 얼이 빠져버리고말았다. 서울방어의 요새진이라고 할수 있는 수락산, 불암산, 돌장대, 미아리고개, 봉화산, 북악산의 적 참호와 진지들은 포사격과 땅크공격, 두개 보병사단 병사들의 질풍공격에 삽시에 무너지고말았다.

방어계선을 깊숙이 돌파한 땅크들은 도로상의 모든 적들과 화력진지들을 짓뭉개며 적의 일체 방어체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땅크의 질풍공격에 절단당한 방어계선의 약한 고리마다 아군의 보병구분대들이 쐐기쳐 뚫고나가 지역별 포위망을 형성하고 적을 요정냈다. 주요대상물을 맡은 소구분대들은 좌우의 적을 무시한채 과감한 돌격전으로 시내 깊숙이 돌입하여 이미 들어가있는 기습대와 련계를 보장하였다. 적의 전선은 구획과 계선이 없었다. 토막쳐진 뱀의 몸뚱이가 마지막 경련하듯 고립된 적의 부대들은 이렇다할 반항도 못하고 붕괴소멸되였다. 시가의 도처에서 섬멸전이 한창 벌어지고있을 때 중앙청까지 가는 로상에서 땅크들은 열두문의 포를 뭉개버렸다. 그 과정에 땅크들은 포탄과 수류탄, 화염병공격에 장갑이 우그러들고 그슬렀으나 일각도 지체하지 않았다. 맨 선두땅크들은 보병들이 시가종심에 들어서기전에 《중앙청》을 장악하고 공화국기를 게양했다. 그 기발은 이 도시에 재생과 환희의 상징으로 나붓겼다. 전투원들은 펄펄 휘날리는 공화국기를 향해 만세를 부르며 기세충천하여 마지막전투에 들어갔다.

54사 18련대는 5련대의 좌익에서 시가를 정면 중심으로 공격하였다. 송기덕의 중대는 905땅크들과 협동동작속에 전투에 진입하였다. 포사격없이 서울을 해방하라고 하신 장군님의 명령은 송기덕이네를 비장한 감격과 열정속에 휘말려들게 하였다. 오직 무자비하게 적을 족쳐야 한다는 결심에 이를 갈던 송기덕은 군인집회에서 육탄이 되여서라도 공격로를 열것이고 인민들의 생명재산을 지켜서라면 자기의 목숨까지 서슴없이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하여 그는 포나 화점과 맞다드는 경우에도 땅크에서 내려 무쇠철갑의 뒤에 몸을 은페해야 된다는것은 아랑곳않고 그대로 포탑에 앉아 경기관총을 휘둘렀다.

인왕산기슭으로부터 무학고개에 이르기까지 길이란 길, 공지란 공지는 적들로 한벌 덮여있었다. 땅크의 기관총사격과 기덕이네의 일제사격에 적들은 꿩새끼처럼 땅에 머리를 틀어박고 별반 응전할념도 못했다. 무학고개에서는 직사포진지를 그대로 깔아뭉개면서 내달렸다. 서대문형무소주변에서는 두개 련대가량의 적들이 우물거리다가 땅크가 나타나기 바쁘게 갈게처럼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기덕은 형무소마당의 여기저기에 쓰러진 적의 시체들과 아직도 불길과 내내를 뿜고있는 깨여진 휘발유통들과 자동차의 잔해들을 보며 여기서도 얼마나 가혹한 격전이 벌어졌는가를 알았다.

거무침침한 형무소의 거대한 건물이 통채로 들리우는가싶게 《만세!》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조그마한 뙤창마다에 하얀 손들이 내밀리워 바람에 흐느적이고있었다.

《인민군대 만세!》

《김일성장군 만세!》

파도쳐나가는 함성, 울음섞인 웨침이였다. 그다음 만세소리는 노래로 바뀌였다.

《김일성장군의 노래》,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가 창구들마다에서 장엄한 메아리로 흘러나왔다.

전사들은 형무소정문으로 달려가 총탁으로 철문자물쇠를 까기 시작하였다. 땅크 한대가 철문을 향해 돌진해왔다. 류경수장령이 탄 100호땅크였다. 땅크는 자기의 드센 몸체로 철문을 들이받았다. 그러자 철문은 썩은 바자처럼 나가넘어졌다. 군인들이 물밀듯이 쏟아져들어갔다. 우야! 하는 함성과 함께 감방문들이 깨여져나가며 푸르고 붉은 수인복을 걸친 사람들이 하얗게 쓸어나왔다. 누가 군인이고 수인이였는지 분간할수 없게 되였다. 마구 얼싸안고 돌아갔다. 서로 그러안고 얼굴을 부비고 울고불고… 그야말로 환희의 절정이였다. 기덕은 마당에서 얻어든 57㎜포탄깍지를 거꾸로 쳐들고 미처 열지 못한 감방문들의 자물쇠를 돌아가며 짓부셔버렸다. 무수한 손들이 그를 얼싸안으려 했으며 눈물을 머금은 감사의 말들이 숨닿게 쏟아져나왔다.

《진정들 하시오. 진정들… 동무들! 해방이요!》

기덕은 눈물에 목이 잠겨 정신없이 뛰여다녔다. 그런데 그는 한 감방안에서 뜻밖의 광경에 부딪쳤다. 미모의 한 처녀가 가슴팍에 피자욱이 랑자한 녀인을 부둥켜안고 흐느끼고있었다. 둘러선 다른 녀자수인들의 눈에도 물기가 어려있었다. 기덕은 련락병이 달려와 땅크련대장이 자기를 찾는다는바람에 구체적사유를 묻지 못한채 슬픈 자리를 떴다.

《안녕히 가십시오. 생명의 사도들이여!》

한 녀인이 시를 읊듯 조용히 속삭였다. 모든 녀인들이 기덕이네쪽을 향해 절을 하였다. 주검을 그러안고 통곡하던 처녀가 기덕에게는 어디선가 무척 인상깊게 본 얼굴이라고 생각되였다. 밖에 나간 기덕이네는 전투가 계속되고있다는 륙군형무소쪽을 향해 두대의 땅크에 분승하여 내달렸다. 그들은 륙군형무소의 한 귀퉁이가 보이는 길목에서 화염에 휩싸인 아군땅크를 발견하였다. 땅크둘레에는 적들이 까맣게 몰려있었다. 놀랍게도 불길에 싸인 땅크에서는 도간도간 화점의 불꽃처럼 기관총사격이 일었다.

《우리 땅크다!》

《아직 살아있다!》

기덕이 탄 땅크는 무섭게 용을 쓰며 전속으로 적들의 무리를 맞받아달렸다. 불타는 땅크를 에워쌌던 적들이 쫘-악 흩어져 달아났다. 그러자 그 땅크에서 울리던 총성이 멎었다. 땅크의 주변은 수류탄과 포탄에 벌둥지처럼 파헤쳐졌고 여기저기 인화병부스레기가 널려있었다.

기덕이는 땅크안에 과연 생명을 가진 존재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안고 그리로 기여갔다. 불길에 온몸이 휘감기며 뛰여올라 포탑뚜껑을 열려고 했으나 끄떡도 하지 않았다. 기덕은 연기와 화염에 질려 그대로 뛰쳐내리고말았다.

그때 두명의 땅크병이 그 불타는 땅크밑으로 기여들어가더니 불에 그슬린 시체들을 끌고 나왔다.

《또 있소, 또!》

하는 소리에 기덕은 소스라치며 그 땅크밑으로 기여들어갔다.

열려진 밑창문으로 노릿한 연기와 숨막힐듯 한 뜨거운 열기가 밀려나왔다. 기덕은 기침을 터뜨리며 그안에 들어가 손을 더듬다가 한사람의 몸뚱이를 붙안았다. 그 사람의 손은 기관총방아쇠를 꼭 당긴채 굳어져있었다. 손가락을 간신히 비틀어 빼낸 후 그의 상체를 그러안고 뒤걸음으로 그 좌실에서 빠져나왔다. 맨땅에 끌어다 눕혀놓고보니 얼굴이 온통 그을음으로 검게 탄 그 사람은 다름아닌 림운학이였다.

《운학이!》

기덕은 너무나 놀랍고 반가와 목메인 소리로 부르짖으며 운학의 몸을 와락 그러안았다. 내내가 물씬하게 풍기는 군복자락이 종이장처럼 미여졌다.

《운학이 정신차려, 나다 기덕이야!》

《가스에 질식한것 같습니다.》

옆에 따라와 선 위생지도원의 말에 기덕은 다소 마음을 놓았으나 불에 그슬린 군복자락을 헤칠 때 저절로 눈물이 텀벙텀벙 쏟아지였다. 위생지도원이 캄파를 놓자 운학은 《끙》 하고 앓음소리를 치며 눈을 떴다.

《수인들은?》

그의 첫말이였다. 기덕은 너무나 기쁘고 반가와 꽥 소리쳤다.

《야… 다 살았다. 살았어-》

기덕은 운학이를 더 붙안고있을수 없었다. 전투중이였던것이다. 륙군형무소지하실에서 마지막까지 발악하던 헌병대를 총창과 수류탄으로 요정낸 기덕이네가 다시 땅크에 올랐을 때 거리의 확성기에서 불현듯 챙챙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친애하는 서울시민 여러분! 동무들! 겨레들! 미제와 리승만의 학정밑에 얼마나 신음하였습니까. 오늘 서울은 영용한 인민군대에 의하여 해방되였습니다. 저는 서울에 처음으로 입성한 인민군대의 한 일원으로서 여러분들에게 동포애의 정을 담아 뜨거운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905땅크려단 문화부려단장 안동수가 방금 점령한 서울시 방송국에서 첫 방송전파를 세계에 날리는것이였다. 기덕은 시계를 보았다. 10시 30분이였다. 땅크우에 올라탄 전사들은 저마끔 어깨를 그러안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기덕이도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옆으로 인민군 위생차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갔다. 차문에 새겨진 십자표식을 바라보던 기덕의 뇌리에는 방금전 헤여진 림운학의 일이 걱정스럽게 떠올랐다. 그의 옷이 불에 그슬려 쉽게 갈라지던것이 선히 살아올랐다.

(안에 내의랑 지갑은 일없었지.)

순간 그는 옆사람이 듣게 《아차!》 하고 소리쳤다. 보안간부훈련소시절 림운학이 강행도하훈련을 끝마친 강녘에서 물에 젖은 지갑을 꺼내여 밀랍종이에 싼 처녀의 사진을 말리던것을 상기했던것이다. 그때 웬 사진인가고 따지고들자 림운학은 매우 서글픈 기색으로 서울에 두고온 녀동무라고 했다.

《하참.》

기덕은 다시한번 혀를 찼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본 처녀가 생각났다.

(분명 그 친구 말하던 녀자야. 살눈섭이 길고 눈이 빛나는… 운학이가 이걸 알면 얼마나 속을 끓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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