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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길 제1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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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5,091회 작성일 20-03-10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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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윤호는 어스름이 짙어가는 창밖을 초점없는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고있었다. 요즘 그에게는 자주 그런 모양으로 창밖을 내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그의 머리속에서는 두서없이 착잡한 생각들이 번거롭게 오락가락하였다.

(쏘련은 원조를 준다고 선포만 해놓고 왜 아직 아무런 실제적조치도 취하지 않는가. 그것만 명백하면 강재생산목표도 확신을 가지고 더 높일수 있을텐데...

한윤호는 이런 생각을 하며 김일성동지께서 이곳 청사를 찾아주시였을 때 있은 그 눈물겹던 일을 다시 상기하였다. 그이께 궁전을 지어드리지는 못할망정 이미 쓰던 집의 구조조차 편리하게 고쳐드릴수 없는 안타까운 정상도 결국은 나라가 페허가 되고 가난하기때문이였다.

고박하기 이를데 없는 정준택이 마른 나무에서 기름을 짜내듯 세번씩이나 퇴짜를 놓으면서 중공업부문에서 예비를 찾아내라고 다긋는것도 가난한 살림을 지탱해가려는 궁여지책이라 보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이번에 황철의 평로와 강선의 전기로를 배로 확장하여 올해안으로 쇠물을 생산하는것으로 계획을 잡았다. 마지막순간까지 확신은 가지지 못하였지만 정준택의 요구가 보통이 아니였고 더우기는 강재에 대한 수요와 공급사이의 균형을 맞추자니 어찌할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후 내불고는 담배 한가치를 손더듬으로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나 불붙일 생각은 잊었는지 성냥곽은 찾지 않고 길다란 담배물주리만 질근질근 씹었다.

그때 책상우의 전화가 울리였다.

(또 독촉인가?)

한윤호는 피해자의 예민한 감각때문인지 자기도 모르게 책상우의 복구안을 내려다보았다. 비준에 제기하기에 앞서 그 문건을 마지막으로 검토하려는 정준택의 전화일것이라고 지레짐작하면서 한윤호는 오만상을 찡그리였다. 고지식하고 일 하나밖에 모르는 정준택은 전화를 걸어도 꼭 퇴근하기전에 걸군 하였던것이다.

한윤호는 천천히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학사선생이요?》

송화구에서 울려나오는 류창한 로어발음이 불시에 한윤호의 귀청을 때렸다. 최일만의 전화였다.

한윤호는 좀 켕기였다. 그는 이번에 처음으로 최일만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공업성에서 제기한 강철생산계획을 째고 그보다 훨씬 높은 계획을 세웠던것이다.

그러나 최일만은 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비치지 않고 지금 뭘 하고있는가, 바쁘지 않는가, 빈 인사말로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한윤호는 무엇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잠시 송수화기를 든채 묵묵히 앉아있었다.

《왜 말이 없소? 갑자기 벙어리가 됐는가?》

최일만의 말소리가 다시 귀청을 때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갑자기 하던 일이 있어놔서...

한윤호는 최일만의 기분을 거슬릴세라 황황히 변명했다. 하지만 말과 어조와는 달리 그의 갱핏한 얼굴에는 조금도 아부하는 빛이 없었다. 그의 얄팍한 입술에는 랭소와도 같은것이 떠돌기도 하였다.

《내 한윤호동무에게 한가지 기쁜 소식을 알려줄게 있소.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오라구. 동생도 데리고... 오늘이 우리 마라 생일이요. 기쁜 소식은 그때 알려주지.》

마라란 고급중학교에 다니는 최일만의 딸이였다.

《귀한 손님들도 오니 꼭 와야 하오.》

전화는 걸려올 때처럼 갑자기 끊어졌다.

(기쁜 소식이라니? 귀한 손님이란 누구이고?)

한윤호의 머리속에 이런 생각이 얼핏얼핏 스치였다. 언젠가 한윤호가 최일만의 사무실로 찾아갔을 때 그가 당중앙위원회의 요직에 있는 한사람에게 허물없이 전화를 걸며 자기 딸애의 생일에 그와 그의 딸을 초청하던 일이 생각났다.

가늣한 손가락끝에서 담배연기가 실오리처럼 가느다랗게 피여오르고있었으나 한윤호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생각을 굴리였다.

한윤호는 최일만이 계획문제와 관련하여 정준택과 의견이 맞지 않으면 자주 그를 친일파라고 하면서 비난한다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최일만은 한윤호와 같은 선진국가에서 전문교육을 받고 경험도 축적한 일군이 나라의 계획사업을 맡아보아야 한다고 내놓고 말하고있는터였다. 그러나 한윤호당자는 거기에 별로 신경을 써본 일이 없었다. 그는 자기야말로 정치가가 아니라 학자라고 표방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는 그 어떤 높은 직책보다 학사라는 그 학위를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하긴 직책이란 아무나 차례지면 용의하게 맡아할수도 있으나 학위란 준다고 해서 누구나 감당할수 있는것은 아닌것이다. 더구나 경제학사란 우리 나라에서는 통털어 몇사람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윤호는 정준택과 손을 맞잡고 일해나가기가 나날이 어려워진다는데 생각이 미칠 때면 그의 수하에 있는것이 어쩐지 불합리한 처사같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는 자기의 지식과 경험이 현직책과 잘 어울리지 못할뿐아니라 그것이 무식한 웃사람의 리해를 받지 못하여 부당한 마음고생을 하는것만 같았다.

사람들과의 교제를 좋아하지 않는 한윤호였지만 최일만의 초청에는 기꺼이 응하기로 결심하였다.

한윤호는 정준택이한테서 복구안에 대한 전화가 오기전에 자리를 뜨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퇴근차비를 서둘렀다.

그가 경상골에 있는 단층집으로 퇴근해왔을 때 옥산은 웃방책상에 마주앉아 글을 쓰고있었다.

《오빠, 내가 쓴 글을 들어보겠어요?》

옥산은 한윤호가 방에 들어서자 가무스레한 속눈섭을 치켜들고 큰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옥산은 글을 써도 언제나 오빠한테 먼저 읽어주군 하였다. 오빠는 옥산에게 있어서 가장 리해성있는 독자이면서도 엄한 비평가였다.

《우리 신문에 낼 글이예요. 들어보세요.》

《흠...

한윤호에게서 찬성인지 반대인지 명백치 못한 코소리가 울리였다. 그러거나말거나 옥산은 신이 나서 자기가 쓴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강선제강소에 도착했을 때는 불볕이 쨍쨍 내려쪼이는 한낮이였다. 우리는 강선제강소도 다른 공장, 기업소들과 마찬가지로 복구건설로 들끓고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상하였다. 제강소는 숨을 죽인듯 너무도 고요하였다....

《얘얘, 시간이 없다. 그 글은 후에 듣기로 하고...

한윤호가 동생을 제지시켰다.

《그러지 말고 들어보세요.》

《시간이 없다는데...

《제강소가 왜 숨을 죽이고있었는지 알겠어요? 전기로가까이에 박힌 불발탄을 해제하는 전투가 벌어졌기때문이였어요. 난 우리의 복구건설이 얼마나 간고하게 시작되고있는가를 체험하였어요. 정말 간고한 출발이예요.》

옥산은 오빠가 자기가 쓴 글을 들으려고 하지 않자 이렇게 글의 내용을 말로 펼쳐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윤호는 그말조차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 옥산아, 우린 이제 어디에 좀 가야 한다.》

《그 불발탄을 누가 해제했는지 아세요? 신철동무가 했어요. 언젠가 내가 오빠한테 이야기해준 그 신철동무예요. 그가 목숨을 내대고 불발탄의 신관을 해제했어요. 그 광경은 정말 잊을수 없는...

《얘얘, 어디에 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니!》

한윤호가 옥산의 말을 푸접없이 꺾어버리며 짜증을 내였다. 그제야 옥산은 오빠가 자기의 말에는 애당초 귀도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는것을 눈치챘다.

《갑자기 어디로 간단 말이예요?》

옥산은 시무룩해서 볼부은 어조로 물었다.

《최부상네 집에 가야 한다. 최부상한테서 직접 전화가 왔댔다. 나와 너를 초청한거다. 오늘이 그 집 딸 마라의 생일이라고...

《난 싫어요.》

옥산은 앞으로 흘러내린 탐스러운 머리칼을 성가시다는듯 뒤로 홱 넘기며 내쏘았다.

한윤호는 대번에 성이 나서 동생을 쏘아보았다.

《가야 한다.》

《싫어요.》

《가야 해》

그래도 옥산은 수그러들려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난 싫어요. 오빠 혼자서 가세요.》

옥산은 오빠를 빤히 올려다보며 매몰스럽게 말했다.

《마라의 생일이라고 하지 않니. 마란 네 동무가 아니냐.》

《동문 무슨 동무, 이제 겨우 고급중학교에 다니는 처녀애인데…》

옥산은 코웃음을 쳤다. 한윤호는 아무리 동생이라도 우격다짐으로 마구 내몰수 없다는것을 깨닫고 할수 없이 목소리를 낮추고 타이르기 시작하였다.

《옥산아, 생각해보아라. 최부상동지가 너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써왔니. 네가 소원이던 기자가 된데도 그 사람이 힘쓴 덕이 있지 않느냐. 사람은 언제나 은혜를 몰라서는 안돼… 네가 쓰고있는 그 글은 돌아와서 들어보기로 하자꾸나. 반대 없지 응?》

옥산은 교만하고 건방지게 나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끝까지 해보고 겸손하고 순하게 나오는 사람에 대해서는 인차 마음이 약해져서 수그러드는 성미였다.

지금도 옥산은 그처럼 도고하게 윽박지르던 오빠가 목소리를 낮추고 지어 사정하는듯 한 비굴한 표정까지 보이자 인차 마음이 여리여져서 오빠한테 굽어들었다.

그들남매가 최일만이 보낸 승용차를 타고 그의 집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9시도 지난 뒤였다. 뽀뿌라나무가 무성한 숲속에 불빛 휘황한 양옥집이 있는것을 보고 옥산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비록 단층집이기는 하지만 유리창문들이 번쩍거리고 각종 장식등들이 정원을 환히 비치는것이 페허가 된 수도에서는 보기드문 집이였다. 그는 썩 후에야 그 집도 전쟁시기에 혹심하게 파괴된것을 정전이 되자 인차 복구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한윤호와 옥산이 현관에 들어서자 알락달락한 무늬의 가벼운 옷차림을 한 처녀가 마주나왔다. 그가 오늘밤 생일연회의 주인공인 마라였다. 마라는 살이 너무 져서 모든것이 오목오목하게 생긴 작달막한 처녀였다.

《생일이라지, 축하한다.》

《축하해, 마라.》

한윤호와 옥산은 행복에 넘쳐 생글거리는 처녀에게 인사를 건늬였다. 《고맙ㅡ습니다.》

마라는 혀가 겨우 돌아가는 조선말로 인사를 받았다.

《오, 옥사나》

문득 현관끝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옥산은 키가 작고 똥똥한 사람이 짧은 다리를 약간 벌리고서서 싱글싱글 웃으며 자기를 맞이하고있는것을 보았다. 최일만이였다. 옥산은 그를 몇번 본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자기 이름을 로씨야식으로 《옥사나》라고 부르군 하였다. 그전에는 그렇게 허물없이 불러주는것이 싫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귀에 거슬리였다. 하지만 옥산은 초청을 받고온 손님답게 그런 내색은 감추고 깍듯이 머리숙여 인사를 하였다.

복도에는 붉은 색갈의 폭신폭신한 주단이 깔려있었다. 응접실바닥에도 주단이 깔려있었다. 페르샤주단에서 흔히 볼수 있는 복잡하고 현란한 무늬가 옥산의 눈을 끌었다.

벽에는 뿌슈낀과 레브 똘스또이의 초상화들이 걸려있었고 응접실복판에는 옻칠을 하고 자개를 박은 커다란 원탁이 놓여있었다.

옥산은 값비싼 가구들이 어디에서 생겼는지 자못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최일만이 손님들을 원탁앞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어서 앉소.》

옥산은 그때에야 방안에 처음 보는 손님들이 먼저 와있었다는것을 알았다. 최일만이 직접 나서서 한윤호와 옥산에게 그 사람들을 인사시켰다.

한윤호는 그들이 바로 최일만이 귀한 손님이라고 말하던 당의 요직에 있는 그 사람의 안해와 딸이라는것을 알았다. 풍만한 몸매에 이국풍의 화려한 옷차림을 한 그들모녀는 주인들과 한창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있던중이였다. 옥산은 다소 주눅이 들어서 원탁앞의 의자에 치마를 내리쓸며 조심스럽게 앉았다.

《차를 들겠소 커피를 들겠소?》

최일만이 한윤호에게 물었다.

《아무거나 들겠습니다.》

한윤호의 대답이였다.

최일만은 옥산이도 오빠와 같은 생각이라는것을 알자 중앙아시아에서 가져온 차를 권하였다.

주인과 손님들이 차를 마시는동안 음식들이 들어왔다. 음식들 역시 조국에서 거의나 처음 보는것들이였다. 구멍이 숭숭한 자그마한 바구니 같은 그릇에 골숨하게 담은 흰 빵과 마카로니를 가지고 만든 음식들, 살라드(랭료리)가 이채를 띠였고 치즈, 햄, 쥬스(과일즙)가 구미를 돋구었다.

마지막으로 워드까와 포도주가 들어왔다.

《차린것은 없지만 많이들 드오.》

이번에도 최일만은 한윤호와 옥산에게만 특별히 권하였다. 먼저 온 화려한 옷차림의 모녀는 주인들이 구태여 권하지 않아도 잘 먹고 마시고 하였다. 그것만 보아도 당의 요직에 있는 그집과 이집이 얼마나 친밀하게 지내는 사이인가를 알수 있었다.

《마라, 인젠 앉어.》

옥산이 음식을 나르느라고 들락날락하는 마라의 팔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러자 최일만은 키가 큰 자기 안해한테도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 건넌방에서 몇사람의 말소리가 들렸으나 최일만은 그들에게는 별로 주의를 돌리지 않고있었다.

《오늘이 마라생일인데 뭘 선물로 줄만한것이 있어야지. 변변치 않는것이지만 성의로 알고 이걸 받으라구.》

한윤호가 어색해하면서 주머니에서 포장지로 싼 자그마한 곽을 꺼냈다.

《뭔가?》

최일만이 호기심을 품고 물었으나 한윤호는 대답을 하지 않고 선물곽을 마라앞에 밀어놓았다. 마라가 생글거리며 포장지를 벗기고 자주빛곽을 열었다.

《야!》

마라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모두가 곽속에 든것을 들여다보았다. 포도송이를 형상한 보석브로치가 전등불에 반사되여 금빛광채를 발산하고있었다.

이 순간 누구보다 놀란것은 옥산이였다.

옥산은 24살이 되도록 지금까지 숱한 생일을 쇠였지만 오빠한테서 선물을 받아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빠는 원래 그런 감상적인 잔재미가 없는 사람이였다. 그러한 오빠가 처녀라면 누구나 다 탐을 낼 반짝거리는 보석브로치를 자기가 아닌 남에게 그것도 이제껏 별로 가까이 상종해보지도 않은 처녀에게 생일선물로 주는것이 놀랍기만 하였다. 옥산은 오빠가 이집 주인과의 친교를 매우 중히 여긴다는것을 느꼈다.

한윤호는 선물을 내주고는 마치도 그 어떤 중량물을 어깨우에서 벗어놓은것처럼 모두었던 숨을 내쉬며 저으기 가벼운 몸으로 자리에 앉았다.

마라는 너무도 좋아 줄곧 생글거렸다.

《어때요, 어머니?》

보석브로치를 앞가슴에 달고 거울앞에 서서 비쳐보며 마라가 물었다.

《좋다 좋아. 새 아가에겐 저런 치장거리가 제격이지.》

최일만이 안해를 대신하여 이렇게 말하자 한윤호는 저으기 기뻐하였다. 옥산이도 억지로 웃으려고 하였으나 어쩐지 얼굴근육에 마비가 온것처럼 웃어지지를 않았다.

한윤호는 엷은 입술에 가벼운 미소를 담고 한결 안정된 기분으로 최일만이 전화로 귀뜀하여준 기쁜 소식이 무엇일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최일만이 제입으로 그 소식을 말할 때를 참을성있게 기다리고있었다.

《내인들은 포도주나 마시라지. 우린 워드까를 들자구.》

최일만이 주인의 립장에서 한윤호의 잔에는 워드까를, 옥산의 잔에는 빨간 포도주를 찰찰 넘치게 부었다.

《자, 들자구. 옥사나, 들라구. 모두들 함께...

최일만은 한윤호가 부어준 술을 단숨에 꿀꺽 마시였다.

옥산은 자기앞의 포도주는 마실 생각을 하지 않고 바구니에서 노랗게 구워진 길쭉한 빵 하나를 집어들고는 꾸득꾸득 부풀어오른 껍데기를 심심풀이처럼 손가락으로 야금야금 뜯어내여 입안에 넣으면서 분홍색이 도는 시원한 과실쥬스를 졸금졸금 마시였다.

《옥사나! 들라구.》

최일만이 모두들 술을 다 들었는데 유독 옥산의 잔에만 빨간 포도주가 그냥 있는것을 보고 다시 끈덕지게 권했다. 그는 줄창《옥사나, 옥사나》 하면서 정도이상으로 옥산을 살틀하게 대하였다.

《예, 들겠습니다.》

옥산은 이렇게 말하며 포도주를 마시였다. 잔을 비우고 머리를 쳐드는 순간 그의 눈길이 문득 벽에 걸린 뿌슈낀과 레브 똘스또이의 초상화에 박혔다. 구레나룻이 류달리 더부룩한 두 작가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내키지 않는 술을 마시며 억지로 웃으려고 안깐힘을 쓰는 자기를 예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조소를 보내고있는것만 같았다.

옥산은 얼굴을 붉히였다. 그것은 결코 술기운때문이 아니였다. 도대체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것은 그의 천성에 어울리지 않는것이였다.

술잔이 몇순배 돌자 최일만은 취기가 올라 조선말과 로어를 섞어가며 법석 떠들었으나 한윤호는 점점 얼굴이 해쓱해지면서 얄팍한 입술을 꼭 다물고 앉아있었다.

《이 사람, 내 한가지 소식을 전해주지.》

최일만은 통통한 짧은 손가락 하나를 곧추 펴들어 자기에게 모두의 주의를 집중시키고는 조금 굳어진 혀바닥을 힘들게 굴리기 시작하였다. 한윤호는 숨을 죽이였다. 술기운도 싹 없어지고 정신은 말똥말똥해졌다.

《무스겐고 하니.》 최일만은 또다시 술잔을 기울이고는 하던 말을 이었다. 《쏘련대사관에서 쏘련정부가 우리 나라 정부대표단을 정식 초청하였다는것을 알려왔지. 10억루블리를 주겠으니 토론하자는거야.》

《야, 10억루블, 정말 대ㅡ 대단해.》

마라가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몸 좋은 모녀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들은 이미 그 소식을 알고온것이 틀림없었다.

《우리 사람들이 이젠 쏘세지, 햄을 먹고 번쩍거리는 구두를 신고다니게 됐다니.》

최일만은 이렇게 호기있게 웨치고는 포크로 순대 한토막을 푹 찍어 입안에 닁큼 넣었다.

자금부족으로 골치를 앓고있던 한윤호에게는 최일만이 전해준 소식이 기쁜 소식인것만은 틀림없었으나 그것만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한것 같았다.

그는 자기의 개인적인 운명과 관련되는 그런 소식이 있기를 은근히 기대했던것이다.

《마라, 전축을 틀어라!》

우둥퉁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최일만은 끊임없이 호기를 부리였다.

전축에서 잔잔한 선률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다가 인차 경쾌한 선률로 번져갔다.

국경초소에 서있는 사랑하는 병사를 그리워하는 처녀의 노래는 계속되고있었다. 그것은 광복직후 널리 류행되고있던 노래《까츄샤》였다.

노래는 흐를수록 더욱더 발랄하고 경쾌해졌다. 취흥이 도도해진 최일만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마라, 옥사나. 춤을 추라구 춤을!》

옥산은 사양하였으나 마라는 아버지한테서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듯이 붉은 머리수건을 펼쳐들고 원탁앞에 나섰다. 옆구리에 두손을 짚고 불룩한 가슴을 앞으로 내민 그는 웃몸을 기울거리며 건드러지게 방안을 한바퀴 돌았다. 최일만이와 그의 안해 그리고 손님들은 노래곡조에 맞추어 박수장단을 쳤다. 옥산이도 박수를 쳐주지 않을수 없었다.

마라의 앞가슴에서 황금빛갈이 감도는 파란 포도송이 보석브로치가 반짝반짝 눈부신 빛을 뿌렸다. 그 빛은 비수처럼 옥산의 눈동자를 콕콕 찔렀다. 어느덧 그 브로치는 옥산이 눈에 자그마한 아름다운 대리석조약돌로 바뀌여 보였다. 수풍호반에서 신철이 고향의 《보물》이라고 하던 조약돌이였다. 그는 품속에 손을 넣어 그 《보물》을 꼭 쥐였다.

노래는 계속되고 춤은 고조되였다. 마라는 빨간 머리수건을 기폭처럼 머리우로 펄펄 날리며 발장단을 쳤다. 그의 앞가슴의 브로치는 여전히 눈부신 광채를 내뿜었다.

옥산의 눈앞에 불쑥 손바닥만 한 뙤창이 지상으로 간신히 얼굴을 내민 강선의 그 어둑침침한 지하실이 떠올랐다. 그러자 주단이 깔리고 고급가구가 놓인 이 방에서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상상조차 못하고있는 고급술을 마시고 음식을 들며 외국노래를 입에 올리는것이 몹시 어색하고 부당하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 이국풍의 무더운 방을 나서고싶어 자주 오빠를 쳐다보았다.

《윤호, 이 사람아! 자넨 이제 씨베리아대지를 횡단할거야. 내가 자넬 이번 정부대표단 수원으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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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내가 자넬 이번 정부대표단 수원으로 추천했다이.》

최일만이 손장단, 발장단을 치며 한윤호에게 소리쳤다. 순간 한윤호의 귀가 항 열리였다.

《저를 말입니까?》

한윤호는 최일만이 취중에 허튼소리를 한것 같아 다시 확인하였다.

《자넨 이제 씨베리야를 횡단해. 내가 자넬 모스크바에 보내고싶으면 보내는거야. 내 말이면 다지 암... 아 씨베리야, 씨베리야.》

당의 요직에 믿음직한 줄을 가지고있는 최일만은 그쯤한 은혜를 베풀어주는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대수롭지 않게 몇마디 하고는 노래가락을 뽑았다.

때마침 전축에서는 영화《씨비리아대지의 곡》의 주제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한윤호는 노래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야릇한 기대감이 랭정한 그의 리성을 저으기 들뜨게 하였다.

(이것은 운명의 기회다. 사람이 한생에서 한두번 만나나마나한 절호의 기회다. 기회는 놓치기는 쉽지만 든든히 붙잡기는 힘들거늘...)

한윤호는 정준택이 몇번씩이나 퇴짜를 놓은 불쾌한 그 문건을 다시 상기했다. 페허가 된 땅에서 자꾸만 예비를 짜내라고 다그어대는 그 사람이 지금에 와서는 불쌍하게까지 생각되였다. 세계의 첫 사회주의국가에서 계획경제를 전문하여 학사가 된 한윤호는 쏘련의 경제실무진에 강력한 인맥관계를 가지고있었다. 그는 모스크바에 가기만 하면 원조몫에서 우리 나라 중공업을 재무장시킬수 있는 막대한 자금과 설비를 받아낼 당당한 배심이 있었다. 정준택으로서는 도저히 그 일을 해낼수 없을것이다. 오직 자기만이 그 일을 해낼수 있다고 그는 자부했다.

(그때면... 그때면 이 한윤호가 공밥만 축내는 사람이 아니라는것을 모두가 알게 될게다.)

한윤호는 비로소 자기의 앞길이 환히 트이는것 같았다.

《모스크바에 가면 내가 말하던 서기관을 만나보라구. 총각서기관...》

최일만은 옥산을 넘겨다 보며 한윤호에게 넌지시 비쳤다.

《예.》

한윤호가 입귀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똑똑한 총각이지. 암 그렇고말고...》

옥산은 오빠와 최일만사이에 밀담처럼 오가는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이마전에 땀발이 솟기까지 하였다. 그는 최일만이 말하는 그 서기관이 다름아닌 오빠가 기회만 있으면 한번 만나서 이야기해보라고 강요하다싶이 권고하는 바로 그 박순일서기관이라는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옥산은 더는 자리에 앉아있고싶지 않았다.

향수내가 떠도는 무더운 방안의 들큰한 공기며 끊임없이 호기를 부리며 떠도는 최일만의 언행이며 마라의 가슴노리에서 팡긋팡긋 예리한 섬광을 발산하는 브로치며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겹기까지 하였다.

《오빠.》

옥산이 한윤호의 팔굽을 건드리며 눈짓을 했다. 빨리 자리를 뜨자는 신호였다.

《그런데 강선문제는 어떻게 락착되였소?》 최일만이 불쑥 잊었던것을 상기한듯 한윤호에게 물었다.

《종전의 전기로기초를 그대로 두고 전기로를 배로 확장하겠다는 주장말이요. 뭐 대형변압기와 경동장치도 그전의것을 그대로 쓰겠다고 ? 어림없는 소리...》

《지금 그대로 써내겠는가를 검토하는가 봅니다.》

《믿을것이 못돼. 예비선을 쳐야 하오. 그래서 내가 국장동무를 쏘련에 파견하는거요. 알만 하오?》

최일만은 무게있는 어조로 오금을 박았다.

《걱정마십시오 중공업복구에 요긴한 설비는 다 받아오겠습니다.》

한윤호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암, 그래야지. 지금과 같이 어려울 때 큰집아주바이들의 신세를 지지 않고 언제 지겠나? 아, 광막한 씨비리아, 씨비리아...》

기분이 둥 뜬 최일만은 웅글은 탁성으로 노래가락을 뽑기 시작하였다.

옥산은 더는 참지 못하고 오빠의 팔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들이 최일만의 집을 나선것은 자정이 다 되였을 때였다. 하지만 한윤호는 피곤한줄 몰랐다. 감정이 무딘 그도 이날밤만은 저으기 들뜬 기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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