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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길 제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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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4,981회 작성일 20-03-27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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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멀리에서 이따금 볼 때와 가까이에서 자주 볼 때 그 인상이 전혀 판이할수 있다.

한윤호가 본 최일만이 바로 그러하였다. 중공업성 부상이라는 직책에 앉아있는 그를 멀리에서 이따금 볼 때는 너부죽한 얼굴에 완강한 체격을 가진 그가 원칙이 있고 손탁이 드세며 매사에 시원시원하고 소탈하여 상대하기가 그리 나쁘지 않은 사람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부임되여 바로 자기 사무실 웃층에 틀고앉은 그때부터 그를 가까이에서 자주 보니 만만치 않게 눈꼬리가 우로 치째지고 관골이 뚝 삐여진 그는 언행이 조폭하고 과격한데다가 인정사정이란 전혀없이《원칙》만 기발처럼 내휘두르며 아래사람들을 들볶아대는 품이 한윤호에게는 그 어느하나도 마음에 드는것이 없었다.

그는 새 부임지에 나타나기 바쁘게 국가계획위원회가 무슨 반동소굴이나 되는것처럼 정준택의 소부르죠아사상과 반동분자들의 뿌리를 들추어낸다고 하면서 말끝마다 《색출》이요, 《청산》이요, 《타도》요 하면서 목에 피대를 돋구었다.

김일성동지께서 이 사실을 어떻게 아시였는지 최일만으로부터 사업보고를 받으시다가 국가계획위원회의 이전 사업을 허무주의적으로 대하여서는 안된다고 주의를 주시였다. 그리고는 그에게 계획사업이 생소하겠으니 우선 자기 사업을 깊이 연구하라는것과 아래일군들속에 들어가 담화도 하고 의견도 많이 들어보며 현실에도 자주 나가야 한다고 엄하게 이르시였다.

《3개년계획수행에서 돌파구를 열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우리 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을 관철할수 있는가 없는가, 우리 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터전을 능히 다져놓을수 있는가 없는가를 보여주는데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후 처음으로 쇠물을 뽑아 복구건설에 떨쳐나선 우리 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었고 지금도 자체의 힘으로 복구건설의 방대한 과제를 수행하고있는 강선제강소에 마땅한 주의를 돌려야 합니다. 강선제강소가 힘있게 나가도록 잘 도와주어야 하겠습니다.》

그이께서는 최일만에게 사업방향을 일일이 가르쳐주시고 당면하여 관심을 돌려야 할 구체적인 문제까지 일깨워주시였다.

웃층의 주인은 한동안 종업원들의 모임에도 잘 나타나지 않고 자기 사무실에 붙박혀서 자기가 할 사업을 진지하게 연구하는듯 싶었다. 아래일군들속에 들어가 담화도 하고 현지에도 몇번 나갔다 들어왔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한윤호를 자기 사무실에 불러올렸다.

《강선제강소에 나가봐야겠소. 그곳 제강소 기사장이란자가 쏘련의 원조를 배척하다 못해 모든것을 제힘으로 복구한다고 떠들면서 망동을 부린다고 하오. 분괴압연기 가열로를 뭐 3단가열로로? 1단가열로를 원상복구하기도 힘든데 단꺼번에 3단? 어림없소. 축세기복구공사도 시원치 않소. 조업한 전기로에서도 사고가 났다고 하오. 이러단 강선제강소가 3년계획의 돌파구를 열기는 고사하고 걸림돌이 되겠단말이요. 우리의 전진을 방해하는자들, 불순이색분자들을 무자비하게 쓸어버려야 하겠소.》

한윤호는 최일만의 말을 듣자 가슴이 서늘하게 얼어드는것 같았다. 그러나 차승룡으로부터 리웅천과 신철의 그 어떤 비밀설계에 대한 수상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는 그는 최일만의 말이 노상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바로 그 문제를 해명하려고 지금 승용차에 앉아 강선제강소로 나가고있는것이였다. 앞자리에는 옥산이 앉아있었다. 그런데 옥산이 그 자리에 앉기까지는 오빠와 상당한 의견충돌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동생이 강선제강소에 대한 글을 쓴다면서 그리로 자주 들락날락 한다는데 신경을 곤두세우고있던 한윤호는 옥산이 강선에 함께 가겠다고 하자 두마디 안팎으로 안된다고 잘라맸다.

한윤호 보기에 동생은 강선을 나가볼수 있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을뿐아니라 그런 기회를 의식적으로 만들어내고있었다.

《왜요?》

옥산은 오빠가 자기 청을 그리 달가와하지 않으리라는것은 예상했으나 이렇듯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고 거절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으므로 저으기 시뜻해서 따져물었다.

《왜는 무슨 왜, 안된다면 안되는거지.》

《오빤 또 내가 마치 어느 총각 만나러나 가는것처럼 그런 시시한 생각만 하지요? 그렇지요?》

옥산이 성이 나서 속에 품고있던 말을 꺼리낌없이 내쏘았다.

한윤호는 아무 말도 못했다. 동생은 오빠의 속심을 자기 손금보듯이 들여다보고있었던것이다.

《아무튼 안돼.》

한윤호가 거듭 곱씹었으나 벌써 그 어조에는 맥이 풀려있었다.

옥산은 오빠한테 눈을 흘겨보이고는 제먼저 승용차앞자리에 들어가 털썩 앉아버리였다. 그리고는 어디 끌어낼테면 내보라고 시위하듯이 손가방을 무릎우에 올려놓고 웃몸을 당당하게 뒤로 젖힌 다음 머리를 높이 쳐들었다.

《좋다. 내눈으로 신철이란 그 녀석을 어디 한번 똑똑히 보자. 사고를 냈다는 전기로도 그 녀석이 설계한거라지.》

더 어찌할수 없게 된 한윤호는 이렇게 입속으로 뇌까리고 승용차 뒤자리에 웅크리고앉았다.…

차가 떠나자 옥산은 오빠와의 언쟁은 어느사이 다 잊어버린듯 줄곧 방실거렸다.

차창밖으로 모내기가 시작된 보통벌이 흘러갔다.

승용차가 팔동교에 이르렀을 때였다.

《운전사동무, 차를 오른편으로 꺾어주세요.》

옥산이 운전사에게 부탁하였다. 승용차는 옥산이 가리키는 좁고 험한 길을 따라 달리다가 야산기슭에서 덜컹하고 멎었다. 길이 너무 험해서 더는 갈수가 없었다.

《이건 뭐야?》

그제야 차가 강선방향과는 왕청같은 곳에 와서 멎었다는것을 알게 된 한윤호가 버럭 소리질렀다.

《오빠, 강선제강소에 데려다줄 사람이 있어서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옥산이 사정하듯이 말했다.

《뭐. 뭐? 강선에 데려다줄 사람?》

《그전에 강선지배인이 말하던 피혁기술자…》

《난데없이 피혁은 무슨 피혁이야?》

가뜩이나 기분이 상해있던 한윤호는 역증을 냈다. 그럴수록 옥산은 웃기만 하였다.

전번에 차승룡이 한윤호네 집에 찾아왔을 때 분괴압연기복구에서 또하나 걸린것이 고압바킹이라는것, 그것을 자체로 해결하자면 가죽이김기술이 있는 기능자가 있어야 한다고 한 말을 옥산은 잊지 않고있었다. 그는 사방에 수소문을 하고 그자신이 품을 놓고 여기저기 찾아돌아다니는 과정에 가죽이김기술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전 세월에 집짐승을 잡아 가죽을 이겨서 팔던 백정들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평양시에는 그러한 백정들이 보통강기슭의 운하동에 살고있었다는 말을 듣고 옥산은 그 일대를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전쟁때 다 흩어져서 백정질을 했다는 사람은 하나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다만 어떤 사람으로부터 중화군에 가면 백정촌으로 불리우는 마을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중화로 갔다.

장마비가 구질구질 내리는 궂은 날씨였다. 중화읍에만 가면 백정촌을 쉽게 찾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그곳에 도착하여 알아보니 이전에 백정촌으로 불리우던 버들골은 읍에서도 50리 잘되는곳에 있었다.

몹시 지친 옥산은 되돌아설가 하고 생각하다가 강선사람들이 가죽바킹때문에 고생한다는것을 상기하고는 내친 걸음에 버들골에까지 가기로 결심했다. 버들골 세포위원장은 아닌 밤중에 녹초가 되여 문을 두드린 녀기자를 보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지금이 어느때라고 백정을 찾습니까? 백정이란 직업자체가 없어진지도 오래 됩니다.》

세포위원장은 의아쩍은 눈으로 옥산의 아래우를 훑어보았다.

옥산은 실언을 했다는것을 깨닫고 황급히 백정이 아니라 가죽이기는 기능공을 찾는다고 말했다.

《강선제강소에서 집채같은 압연기를 복구하는데 가죽바킹이라는것이 꼭 있어야 한답니다. 그런데 그런것은 가죽이기는 기술이 능한 사람만이 할수 있다는군요.》

옥산의 남다른 헌신성에 세포위원장은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그는 옥산이 요구하는 기능자를 찾으려고 마을의 매집을 돌았다. 그런 끝에 찾아낸것이 팔동교 가까이에서 산다는, 지금 옥산이 데리러간 바로 그 사람이였다.

옥산은 거의 한시간이 다 되여서야 어깨가 쩍 벌어지고 구레나룻이 거뭇한 50대안팎의 작업복차림을 한 사람을 데리고 나타났다.

《오빠, 이분이 피혁가공기술이 높은 기능자예요. 저의 오빠랍니다.》

옥산이 두사람을 인사시켰다.

《제가 무슨 기능자겠습니까. 그저 천한 백정입지요.》

구레나룻기능공이 능청스레 싱글거리자 옥산이 그 롱을 유쾌히 받아들이며 깔깔 웃었다. 그 두사람은 그사이 여러번 만나 친교가 퍽 두터워진것 같았다. 승용차 뒤구석에 들어박힌채 꼼짝 않고있던 한윤호는 차창밖을 흘낏 내다보고는 건성으로 인사치레를 하였다.

다시 승용차가 떠나자 반쯤 열어놓으며 차창으로 몰려들어온 6월의 훈풍이 옥산의 중발한 탐스러운 머리채를 기폭처럼 날리였다. 수도의 교외를 벗어나니 전쟁의 상처를 더는 찾아볼수 없었다. 다리와 도로들이 복구되고 자동차길과 철길을 따라 촘촘히 파헤쳐졌던 폭탄구뎅이도 모두 메워졌다.

어느덧 승용차는 제강소정문을 지나 낡은 건물의 벽체에 의지하여 새로 지은 지배인실앞에서 멎었다.

《오후 5시에 평양으로 들어가겠다.》

한윤호가 차에서 먼저 내리며 뒤따라내리는 옥산에게 말했다. 출발시간을 지키라는 뜻이였다.

《알았어요.》

옥산은 쾌히 대꾸하였다.

《그런데 넌 어디부터 들리려느냐?》

한윤호가 무엇이 미덥지 않은지 다시 동생을 건너다보며 물었다.

《분괴압연복구장부터… 이분을 소개해드려야지요.》

한윤호는 더는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고 승용차안에서 엷은 서류가방을 꺼내 옆구리에 끼더니 약간 고개를 뒤로 젖히고 틀지게 천천히 지배인실로 걸어들어갔다. 옥산은 여전히 즐거운 미소가 흘러넘치는 영채도는 눈으로 오빠가 지배인실로 사라지기까지 그 뒤모습을 지켜보다가 분괴압연직장쪽으로 향하였다.

한윤호가 지배인실에 들어섰을 때 거기서는 숱한 사람들이 둘러앉아 무슨 모임인가 하고있었다.

《아, 국장동무가 어떻게…》

차승룡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윤호를 반기였다.

《회의중입니까?》

한윤호는 딱딱한 어조로 물었으나 그 어조에는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필요로 하지 않는 막역한 사람들사이에서만 찾아볼수 있는 그런 친근감이 울리고있었다.

《아, 아닙니다.》

차승룡은 황급히 부정하며 모여앉은 사람들에게 무슨 눈짓인가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은 슬금슬금 자리들을 떴다.

《스레트랑 아연도판이랑 필요한 자재들을 배정해주어 고맙습니다.》

차승룡이 한윤호를 마주하여 나앉으며 인사를 했다.

《그런 말은 관리국에나 하라구.》

《물론이지요. 관리국을 무시할수 있나요.》

차승룡은 한윤호가 권하거나 말거나 그가 앞상우에 올려놓은 담배곽에서 길다란 담배 한대를 꺼내들며 말했다. 몇번 술자리를 함께 한 두사람은 이제는 공식적인 례의범절을 무시할만치 가까운 사이가 되였다.

한윤호는 자부심이 강하고 우월감이 센 사람이였으나 학자와 같이 고지식한데가 있어서 아래사람들의 성의를 무시해버리는 일은 없었다. 그는 아래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가타부타 의사표시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번 가능한 한도내에서 애로를 해결해주군 하여 성격이 차고 메마르지만 실속은 있는 간부라는 평판을 받았다. 차승룡도 그를 믿음이 가는 일군으로 보았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나오셨습니까?》

차승룡이 한윤호의 표정을 살피며 넌짓이 물었다.

《당신네 일이 심상치 않다면서? 전기로에서 사고까지 내고…》

《무슨 일 말입니까?》

차승룡은 끔쩍 놀라는 시늉을 하였으나 그는 벌써 한윤호가 내려온 목적을 알고있었다. 그는 이미 새로 확장한 전기로 동체가 터져서 쇠물이 쏟아져나온 사고가 있었다는것과 분괴압연직장이 축세기복구며 가열로공사에 문제가 있다는것을 한윤호에게 보고한적이 있었고 전번에 최일만이 료해차로 현장에 얼핏 나타났을 때도 그 문제를 비친바있었던것이다.

《축세기복구는 어떻게 되고있소?》

차승룡이 짐작한대로 한윤호는 축세기문제부터 꺼냈다.

《그럭저럭 돼가지요. 특수용접봉시험을 성공했다고들 떠드는데 실지 성공했는가 하는것은 부러진 축세기를 용접해봐야 합니다.》

《아직도 축세기용접을 안했소?》

《예.》

《한심하군. 축세기복구가 기본인데 그건 빨리 내밀지 않고 다른것을 암만 복구해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차승룡은 아무 말도 못하고 담배만 뻑뻑 빨았다. 한윤호의 말이 너무도 정당했던것이다.

《가열로공사는 아직도 그 비밀도면인가 하는것을 가지고 3단으로 하겠다는거요?》

《그런가봅니다.》

《3단? 한심하오. 내 설계를 똑똑히 검토해보라고 했지. 그 설계도면이 어데 있소? 전기로에서 사고가 난것만 보란 말요.》

한윤호의 세모진 작은 눈이 얼어붙은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차승룡을 노려보고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미타해서 나도 검토해보는 중입니다.》

차승룡은 자리에서 움쭉 일어서더니 서류함에서 둘둘 만 설계도를 들고왔다.

《음.》

앞상우에 펼쳐놓은 설계도를 들여다보는 한윤호의 얄팍한 입술에서 신음소리 같은것이 흘러나왔다. 최일만이 강선제강소에서 불순이색분자들이 암약하고있다고 말하던것을 상기했던것이다.

《보십시오. 3단이란 얼마나 위험천만한가를 가스화염을 3면에서 쏴준다고 해서 3단이라고 하는데 생산은 몇배로 올라갈지 모르나 위험하기 그지없지요. 1,000°도 훨씬 넘는 가열로내부로 찬물이 도는 얇다란 관을 통과시키고 그 관우로 360t의 강괴가 두줄로 흘러간다고 하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차승룡이 설계도의 해당부분을 짚었다.

《360t! 그 엄청난 무게를 가진 중량들이 찬물이 도는 이 얇은 관우로 지나가면서 3면으로 쏴주는 가스화염에 의해 시뻘겋게 가열된다는겁니다.》

《그러니 이게 기사장이 말하던 3단복식이라는 그 가열로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1,000°도 훨씬 넘는 온도속에서 360t의 강괴를 실은 이 얇은 관이 견뎌낼가요? 찬물이 도는 이 관이 1,000°이상의 고온속에서 터지는 날에는… 에에,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전기로사고와는 대비가 안되지요.》

한윤호는 제강소복구계획을 세울 때부터 지배인의 안과 대치되여온 리웅천의 복구안에 대하여 여러번 들어서 대체로 파악은 하고있었지만 실지 3단복식가열로설계를 보니 의심스러운데가 적지 않았다.

《그러니 이 설계가 리웅천이 어데선가 훔쳐온 쏘련의 설계를 신철이라는 류학생이 고쳐그린거겠소?》

《그렇지요. 그런데 눈속임하느라고 설계를 일부 뜯어고친것이 문제입니다. 신철동무를 직접 만나보지 않겠습니까?》

《만나보겠소.》

차승룡이 그 대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듯이 닁큼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여기저기 전화질을 했다.

《이제 올겁니다.》

차승룡이 이렇게 말하고 웬일인지 도면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자기 자리로 삑 돌아와 털썩 앉았다.

(리웅천이 쏘련에 가서 흘레브, 빠다만 먹고 빈털털이로 돌아오게 되니까 바빠나서 비밀도면을 손에 넣어가지고 온거지…)

얄팍한 입술사이로 담배연기를 날리는 한윤호의 머리속에서 이런 두서없는 생각들이 엇갈렸다.

한윤호는 지금도 자기 대신에 리웅천이 쏘련방문의 길에 오른것을 생각하면 분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인지 리웅천이 쏘련방문에서 빈손으로 돌아오자 모든것을 제힘으로 복구한다면서 떠들고다니는것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동안이 지나서 밖에서 문기척소리가 들려왔다. 차승룡이 들어오라고 하자 머리칼이 푸시시 일어선 젊은 사람이 기름때가 반질반질한 작업모를 한손에 말아쥐고 방으로 들어왔다.

한윤호는 세모진 눈을 가늘게 뜨고 푸르무레한 짙은 담배연기속으로 신철을 뜯어보았다. 한윤호에게는 벌써 첫눈에 청년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쏘련에 가서 류학을 했다니 외국물도 어지간히 먹었겠는데 그의 눈에 비껴든 청년은 너무도 어수룩하고 촌티가 흘렀으며 게다가 어딘가 모르게 내숭스럽고 음험해보였다. 미래가 촉망되는 모스크바대사관의 그 끼끗한 젊은 서기관과는 모든 면에서 대비조차 되지 않았다. 한윤호는 하나밖에 없는 사랑하는 누이동생이 이 청년에게서 무엇을 장점이라고 보고 늘 입에 올리는지 도무지 리해할수 없었다.

《국가계획위원회 국장동지가 전기로사고와 분괴압연직장복구정형을 알아보려고 내려왔소. 특히 가열로에 대해서 관심을 두고있으니 잘 이야기해주오.》

차승룡이 신철이를 부르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동안 신철은 눈길을 내리깔고 교원실에 들어선 학생처럼 공손하게 서있었다.

신철은 언제나 말쑥한 옷차림에 넥타이를 매고다니는 이 키크고 칼칼하게 생긴 사람이 옥산의 하나밖에 없는 오빠라는것을 이미 알고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사모하는 련인의 오빠라는 한가지 리유만으로도 그를 존경하고 그 요구에 아낌없는 방조를 주고싶었다.

《앉소.》

한윤호는 자기가 앉으라는 말만 하지 않으면 몇시간이고 어줍은 자세로 서있을것만 같은 청년에게 눈앞의 의자를 눈으로 가리켜보이며 물었다.

《이름이 뭐요?》

한윤호는 상대방의 이름이 무엇인가를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신철은 재판장에서 피고에게 묻는것과 같은 그런식질문이 귀에 거슬렸지만 꾹 참고 자기의 두자이름을 공손하게 대였다. 한윤호는 앞상우에 올려놓은 백지에다 그 이름을 적었다.

《생년월일은?》

신철은 이번에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인내성을 가지고 상대방이 묻는 자기의 출생지와 경력에 대해서도 대답했다.

《부모형제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있소?》

한윤호가 느닷없이 또 이런 질문을 하자 신철은 마침내 참을성을 잃고말았다.

《미안하지만 담화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신철은 얼굴을 들고 처음으로 상대방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한윤호는 졸지에 말문이 막혀 갑자기 시력이 나빠지기라도 한것처럼 눈을 쪼프리고 신철의 얼굴을 뻔히 바라보았다.

《아, 아, 아무것도 아니요. 국장동지가 동무를 처음으로 만나니 두루두루 알아보는거지…》

차승룡이 개입해나섰다. 그는 이 사건의 불을 지핀 장본인이였으나 그 불길이 어떻게 번질지 모르는 형편에서 당분간은 까다롭고 아슬아슬한 이 놀음에 발을 잠그지 않기로 결심하고 멀찌기 앉아있었다. 그는 자기앞에 펼쳐놓은 빽빽하게 줄칸을 친 어떤 문건에 눈길을 박고 사무에 골똘한체 했으나 사실은 한윤호와 신철이의 대화에 온 신경을 다 모아 귀를 강구고있었다. 그런데 한윤호는 사람을 다루는것이 너무나도 서툴었다. 자칫 잘못하면 잡아야 할 물고기는 한마리도 잡지 못하고 물만 잔뜩 흐려놓을수 있었다. 할수 없이 차승룡은 중재자의 립장에서 두사람사이를 조종하지 않을수 없었다.

신철은 다시 한윤호의 질문에 곰살궂게 대답하기 시작하였다.

《이 가열로도면을 동무가 그렸소?》

마침내 한윤호가 기본문제로 들어갔다.

《예.》

《사고를 낸 전기로도면도 동무가 주관해서 그렸다면서?》

《예.》

《이 가열로도면을 그릴 때 참고한 원도가 있다지?》

《있습니다.》

《어느 나라거요?》

한윤호가 따지고들었다.

《여기에 도면의 국적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이 가열로도면에 료해할것이나 의견이 있으면 그거나 물어보십시오.》

(야, 이것봐라, 아주 당돌한데…)

한윤호는 촌티가 난다고 단정한 청년이 결코 호락호락 굽어들 인물이 아니라는것을 느꼈다. 하지만 한윤호도 이런 면에서는 여간 집요하고 검질기지 않았다.

《필요해서 묻는거요. 어느 나라 도면을 참고했소?》

한윤호가 다시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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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한윤호가 다시 반복했다.

《여러 나라 도면에서 참고했습니다.》

《여러 나라라니 어느 나라요?》

《쏘련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입니다.》

《마저 대오.》

《그게 무슨 의의가 있습니까?》

《우리한테는 의의가 있소. 전기로사고와 같은 사고가 가열로에서도 일어날수 있단말이요.》

《전기로사고는 용해시간이 지나치게 늦어졌기때문에 일어난것입니다.》

《그러니 설계상 결함이 아니고 운영상 결함이란 말이지?》

신철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질문에 일일이 대답함으로써 시간을 허비하고싶지 않다는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이 더구나 한윤호의 부아를 돋구었다.

《좋소. 설계상 결함은 후에 검토하겠으니 지금은 이걸 참고한 원도의 출처만 밝히오.》

한윤호는 쏘련에서 비밀로 취급한다는 도면의 출처를 밝힘으로써 그것을 훔쳐내온 리웅천의 죄과를 기어이 인정시키고싶었다.

《말하오. 누가 동무한테 원도를 넘겨주었소?》

신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 여위고 표독스럽게 생긴 사람이 과연 옥산의 오빠가 옳긴 옳은가 하고 의심하였다. 이 사람은 도대체 안팎으로 옥산이와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말하지 않겠단 말이지. 그런다고 우리가 모를것 같소?》

신철은 대답대신 쓰겁게 웃었다. 그 웃음에서는 한윤호에 대한 로골적인 조소를 엿볼수 있었다.

《그래 말하지 않겠소?》

한윤호는 어성을 높였다.

《기사장이 주었습니다.》

《기사장은 어데서 얻었소?》

《알수 없습니다.》

《알고있소.》

《아, 아, 참으십시오.》

또다시 차승룡이 개입하지 않을수 없었다. 짐승이 사나울수록 잘 달래서 굴레를 씌워야 하겠는데 목축업을 꽤 하는듯한 중앙아시아에서 오래동안 살았다는 한윤호는 이 단순한 리치도 깨치지 못한것 같았다.

차승룡은 신철이를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신철이, 솔직히 말하라구. 기사장이 극비도면을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손에 넣었나? 또 그 도면은 지금 어데 있나? 그런 특수도면은 비밀엄수가 첫째야, 적들이 노리거든…》

《…》

신철은 터무니 없다는듯이 창밖을 내다보고 한윤호는 세모진 깔끔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고있었다.

《말하지 않겠소? 비밀도면의 출처를 대오.》

한윤호가 다시 랭소를 지으며 따졌다. 《하긴 동무로서는 모든게 뜻밖일테지. 붙잡힐걸 알면서 도적놈과 공모할리는 없으니까…》

한윤호는 음험해보이는 이 젊은 녀석이 비밀도면을 내놓지 않는것으로 보아 필시 그것을 나쁜놈들에게 빼돌렸을것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비밀도면의 출처를 밝혀내는데 다시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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