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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번영의 길 제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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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616회 작성일 20-03-24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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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택은 새로 복구한 내각사무국청사 현관으로 들어섰다. 공화국이 창건된 이후 이곳으로 옮겨온 내각사무국으로 처음 들어서던 그때의 감회가 되살아올라 그는 몇개밖에 안되는 현관층계를 하나하나 짚으며 천천히 올랐다. 어쩐지 그때가 아득히 먼 과거의 일처럼 생각되였다. 그러나 곰곰히 되새겨보면 그것은 불과 6년전이였다. 아마도 전쟁이라는 준엄한 시련의 해들이 그가운데 가로놓여 그렇게 먼 과거처럼 생각되는지도 모른다.

그는 현관에 우뚝 선 4개의 대리석 원주기둥옆을 스쳐지나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대리석기둥을 소중히 쓸어만지였다. 전쟁시기 적들의 폭격으로 청사지붕이 날아나고 벽체가 허물어졌으나 이 대리석기둥들만은 끄떡없이 서있었다. 일시적후퇴시기 평양을 강점한 적들은 도주에 앞서 이 대리석기둥에 수류탄묶음을 마구 줴뿌렸다.

처음에는 평남도당위원회가 자리잡고있었고 그다음에는 내각이 옮겨앉은 이 크지 않은 3층청사가 적들의 눈에는 우리 당과 정부의 상징물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대리석기둥은 수류탄묶음에도 끄떡하지 않았다. 악에 치받친 적들은 공병을 불러다 대리석기둥들에 다이나마이트를 장진하고 폭발시켰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시누런 흙먼지기둥이 하늘높이 솟구쳐올랐다. 땅이 뒤흔들리고 대기가 울부짖었다. 적들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부들부들 떨며 흙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뿌리채 하늘로 날아오를줄만 알았던 4개의 기둥이 여전히 대공을 향해 거연히 머리를 높이 추켜들고 우뚝 서있는것이였다. 다만 모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듯이 얼기설기 금이 가고 대리석과 콩크리트쪼각들이 처참하게 떨어져나간 자국들에서 화약내 짙은 돌가루들이 부슬부슬 흘러내렸을뿐이였다.

광복직후 우리 인민이 광복의 기쁨을 안고 제손으로 처음 일떠세운 많지 않은 건물들중의 하나였던 이 건물에는 바로 어떤 역경속에서도 당과 정부를 끝까지 받들려는 우리 인민의 철석의 의지가 깊이 뿌리박혀있었던것이다. 그 의지앞에서 적들은 전률했다.

정준택은 사연깊은 대리석기둥을 지나 2층 층계로 올랐다. 그는 전쟁전과 다름이 없는 복도를 지나 수령님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기였다.

(무슨 일로 부르시였을가?)

정준택은 김일성동지께서 최근에 관심하시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상기하며 생각을 기울이였다.

그이의 집무실에 들어선 정준택은 그이께서 권하는 자리에 단정하게 앉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서류가방을 앞상에 올려놓았다. 그 서류가방에는 그이께서 그 어떤 질문을 하시여도 즉석에서 정확한 대답을 올릴수 있는 수다한 자료들이 정연한 체계를 가지고 빈틈없이 갖추어져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 서류가방을 열지 않았다. 김일성동지께서 최근에 관심하시는 문제를 두고 여러가지로 생각을 거듭해온 그였으나 그이께서 어떤 문제를 화제에 올릴지는 딱히 짐작이 가지 않았던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벽에 걸려있는 조선지도앞으로 다가가시였다. 그 지도는 룡흥리골안의 갱도사무실에 걸려있던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지도에서 한동안 눈길을 떼지 않고계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정준택을 향해 돌아서시였다.

《지난해에 우리는 파괴된 인민경제를 복구하는데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황해제철소, 강선제강소, 성진제강소, 승호리세멘트공장, 천내리세멘트공장을 비롯한 많은 공장, 기업소, 광산들이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조업하였고 남포유리공장, 평양방직공장을 비롯한 많은 기업소들이 멀지 않아 전면적으로 조업하게 될것입니다. 철도수송이 정상화되고 중앙으로부터 도, 시, 군에 이르기까지 전신, 전화가 복구되였고 학교와 병원들이 문을 열었습니다. 토굴과 방공호속에서 고통받던 많은 사람들이 새 살림집을 받았고 간장, 된장, 기름공장들이 조업하였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지난해 거둔 성과들을 간단간단히 지적하시였다. 《이 모든 성과들은 대부분 우리 인민 자체의 힘으로 이룩한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민이 우리 당 경제건설의 기본로선을 관철하는 길에 한결같이 떨쳐나섰다는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한것입니다.》

그이께서는 다시금 지도에 눈길을 보내시였다. 재더미를 털고 일떠서는 도시와 마을들을 그려보시는듯 그이께서는 뒤짐을 지신채 오래도록 말씀이 없으시였다. 이윽고 그이께서는 지도에서 조금 물러나 방안을 천천히 거니시였다.

《그러나 우리는 성과만 가지고 론할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거둘수 있는 성과를 더 거두지 못한것도 적지 않다는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공업성산하에서만 보더라도 몇몇 중요설비때문에 황철이나 김철의 복구가 지장을 받고 일부 탄광들에서는 탄차가 부족하여 석탄을 제대로 캐지 못하고있습니다. 인민생활도 아직 크게 펴이지 못했고 전쟁의 상처도 가시지 못했습니다.》

지도앞에서 걸음을 멈추신 그이께서는 정준택이더러 앉으라고 이르고는 다시 말씀을 이으시였다.

《나는 강선제강소동무들이 분괴압연기를 자체로 복구하기 위하여 간고한 전투를 벌리고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특수용접봉을 해결하기 위하여 무려 100차에 가까운 시험을 하고있다고 합니다. 용접봉공장조차 없이 그런 고생을 시키는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이의 얼굴빛이 흐려지였다.

정준택은 그이의 얼굴이 밝아질 말씀 한마디 올릴수 없는것이 괴로웠다. 오히여 그가 마음속으로 준비하고있는것은 걱정거리뿐이였다. 쏘련측에서 받아야 할 설비납입날자가 계속 지연되고있었던것이다. 정준택은 그 사실을 그이께 말씀드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럴것입니다. 크레믈리회담때 다 예견한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난 오늘 구성으로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오늘 말입니까?》

정준택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창밖을 걱정어린 눈으로 내다보았다.

《그렇습니다. 도처에서 기계를 요구하는 지금 공작기계공장창설문제를 더는 뒤로 미룰수 없습니다. 쏘련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인 싸부로브가 아무리 반대를 해도 우리는 우리의 강력한 공작기계생산기지를 꾸려야 합니다. 갑시다. 가서 공작기계공장 터전을 잡아줍시다.》

정준택은 그래도 선뜻 대답을 올리지 못하였다. 그는 시름에 잠긴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보라는 갈수록 더 기승을 부리였다.

뒤짐을 지고 방안을 거니시던 김일성동지께서는 이윽고 자리에 돌아와 앉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지도에서 눈길을 떼지 않은채 말씀을 이으시였다.

《나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저 지도를 바라보군 하오. 백두산을 머리에 이고 남으로 뻗은 반도, 푸른 바다가 조국의 세면을 사시장철 부드럽게 쓰다듬는 삼천리 금수강산은 얼마나 풍요한 땅이요. 면적은 22만여㎢, 지하에는 온갖 보화가 가득 차있고 사시절이 바뀌는 기후도 사람 살기에 그저그만이요. 얼마나 욕심나는 땅이요.? 그래서 외래침략자들이 군침을 흘리며 이 땅에 침략의 마수를 뻗쳤던거요. 어떻게 하면 원쑤들이 다시는 함부로 넘보지 못하는 그런 강유력한 나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를 일떠세울것인가, 나는 밤낮으로 그 생각만 하고있소....

정준택은 언젠인가 그이께서 적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할 그런 강유력한 나라, 세계에서 으뜸가는 부유한 나라를 일떠세우자면 자체의 강력한 기계제작공업기지가 있어야 한다고 절절하게 말씀하시던것을 회상하였다.

그것이 언제였던가? 눈보라치는 창밖을 내다보는 정준택의 눈앞에 문득 그날의 눈보라가 떠올랐다.

(아, 눈보라, 눈보라...

그것은 정준택의 머리속에 하나의 신비한 전설처럼 새겨진 지난 조국해방전쟁때의 어느 겨울날에 있은 일이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정준택과 함께 방금 건설을 시작한 희천공작기계공장을 찾아가려고 승용차로 건지리를 떠나신것은 그날 오후 2시경이였다. 희뿌옇게 흐린 하늘에서 닭털 같은 흰 눈송이가 푸득푸득 날아떨어지고있었다. 일행이 희천에 당도했을 때는 자정도 깊어갈 무렵이였다. 원래 희천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예정했으나 밤이 너무도 깊고 캄캄하여 어디가 어딘지 향방을 잡을수 없었다. 일행은 희천을 지나 고개 하나를 또 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그 고개란것이 여간 가파롭지 않았다. 부나비 같은 흰 눈송이들이 전조등앞으로 끊임없이 날아들었다. 갑자기 승용차가 꽁무니를 휘저었다.

《앗!》

고개아래는 깎아지른듯 한 벼랑이고 그밑으로는 강이 흐르고있었다. 아래를 굽어본 주인홍은 물론 정준택이까지 머리칼이 곤두서는것을 느꼈다. 일행은 가까스로 고개마루에 올라섰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캄캄한 어둠의 바다였다.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차거운 밤하늘에서 이따금 무엇인가 희뜩거리였다. 그것이 얼굴에 닿으면 온몸이 선뜩해지군 하였다. 그것은 령마루에 높이 솟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눈송이였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앞으로 더 나가자니 안전을 담보할수 없고 돌아서자니 방금 톺아온 길도 여간 위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찬바람이 오가는 령마루에서 한밤을 지샐수도 없었다.

정준택은 갑자기 이 세상 천지간에 자기들만이 홀로 남은것 같았다. 무서운 고독감과 적막감이 심신을 휘감았다. 수원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있는데 김일성동지께서 승용차에서 내리시였다.

《수령님, 밤날씨가 찹니다.》

누구인가 그이께 말씀드렸다.

《괜찮소. 그런데 왜 여기다 차를 세웠소?》

《갈 길이 위험하고 또 갈데가 시원치 않아 그럽니다.》

주인홍이 솔직히 말씀드렸다.

《허허, 갈데가 없다니... 저건 뭐요? 불빛이 아니요?》

김일성동지께서 차거운 눈바람이 으스산하게 몰아쳐오는 어둠의 장막속에 눈길을 주시며 물으시였다. 수원들은 일제히 그이께서 바라보시는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아, 보입니다. 불빛입니다.》

주인홍이 맨먼저 불빛을 발견하고 환성을 올렸다. 멀리 어둠의 바다 저쪽끝에서 반디불 같은 희미한 불빛이 눈보라속에 스러질듯 말듯 간신히 명멸하고있었다.

《봤으면 됐소. 그리로 갑시다.》

승용차는 고개마루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또다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한 순간순간이 흘렀다. 간신히 고개마루를 내린 승용차는 사나운 강바람이 불어치는 동뚝길을 타고 달리였다. 밤손님들을 유혹하듯 명멸하는 한점의 불빛은 바로 그 동뚝아래에서 흘러나오고있었다. 동뚝아래에는 추녀낮은 자그마한 농가 한채가 있었다.

정준택은 그 농가에서 보낸 하루밤을 두고두고 잊을수 없었다.

이튿날 그이께서는 건설중인 희천공작기계공장을 찾으시였다. 건설자들은 그이를 열광적으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병아리를 깨우기 위해 엄지닭을 키우듯이 우리 나라 기계제작공업의 귀중한 모체공장을 안아키우기 위해 그이께서 간밤에도 눈보라를 헤치며 얼마나 어려운 길을 헤쳐오시였는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정준택은 또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고있었다. 내각사무국청사쪽으로 오는 다리우에 높이 쌓였던 눈이 공중높이 휘뿌려지고 지붕우의 눈들이 연기처럼, 백포자락처럼 펄펄 날리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있소?》

김일성동지께서 문득 정준택에게 물으시였다.

《전쟁시기 희천공작기계공장을 찾아가던 때를 회상하였습니다.》

《그래, 그때도 눈보라가 몹시 휘몰아쳤지.》

그이께서는 생각깊으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저는 어찌하여 기계제작공업기지창설때문에 길을 떠날 때마다 눈보라가 휘몰아칠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건 우리가 가는 길이 그만큼 간고하고 시련에 차있다는것을 말해주는거요. 일제놈들은 이 땅에서 재물를 략탈해가는데만 혈안이 되였을뿐 간단한 농기구를 생산할수 있는 기계공장 하나도 세우지 않았소. 오늘날 대국주의자들도 기계제작공업을 발전시키는것을 달가와하지 않소. 그런가 하면 일부 사람들은 <기계에서 밥이 나오는가. 기계를 뜯어먹겠는가.>고 하면서 외국에서 원조해주는 돈으로 먹을것이나 들여다가 때려먹을 생각만 하고있소.》

방안에는 정적이 깃들었다. 창문에 싸락눈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릴뿐이였다.

《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정준택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중히 말씀드렸다.

《나와 함께 갑시다. 전쟁때도 그 험한 눈길을 갔는데 전쟁이 끝난 지금에야 어딘들 가지 못하겠습니까.》

정준택은 서둘러 불룩한 서류가방을 옆구리에 끼였다. 그가 집무실을 나서려고 하는데 그이께서 그를 불러 멈춰세우시였다.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그이께서는 정준택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말씀하시였다. 정준택은 영문을 알수 없어 다음말씀을 침착히 기다렸다.

《구성으로 떠나기전에 경공업성에 들려 공선호란 사람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대단한 견방직기술자입니다. 구성으로 가던 길에 그를 녕변견직공장에 데려다주려고 합니다.》

《알았습니다.》

정준택은 이렇게 대답을 올리고나서 집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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