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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푸른산악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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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8,714회 작성일 20-05-06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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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날 전투는 적아쌍방의 작전전술적기도와 전투방식, 력량관계와 전투력을 시사적으로 보인 싸움이라고 할수 있었다.

적들로서는 《노르만디공략작전》의 재판을 꿈꾸었다.

2차세계대전당시의 《노르만디공략작전》은 미국륙전사상 가장 특기할 화려한 작전이였다. 현대군사예술의 온갖 전법과 전술이 활용된 이 작전은 도이췰란드군의 시선을 왕청같은데로 돌리기 위한 간계와 기만으로부터 불의적인 공중타격과 땅크와 보병대, 항공륙전대의 맹렬한 급습으로 단숨에 적을 제압소멸한것으로 하여 《현대전》의 《교본》으로까지 되였다. 하여 이 작전에 참가한 장성들은 거의다가 전쟁의 《스타》로 되였으니 여기엔 릿지웨이와 밴플리트도 포함되여있었다.

승리한 경험은 그 경험의 응용과 재현의 기회를 노리게 한다. 그런데 모든데서 다 그러듯이 작전과 전투에서도 완전한 의미에서의 반복이란 있을수 없다. 대상과 장소, 시간이 다르기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릿지웨이나 밴플리트도 잘 알고있었고 아이젠하워와 함께 《노르만디》를 설계했던 합동참모본부의 브랫들리도 잘 알고있었다.

꿈은 꿈이지만 현실은 현실인것이다. 조선은 노르만디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받은 교육과 경험에도 있는것이지만 보다는 《국군》지휘관들과 참모진들속에서 제기된 문제였다. 단숨에 타고앉는것은 바라마지 않을 일이지만 험준한 산악, 미궁같은 수림, 인민군의 강세… 등등이 렬거되자 《노르만디》에서는 일련의 수정이 가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그 수정은 릿지웨이의 《잠식》이 덧붙여지는것으로 끝났다.

누에는 뽕잎을 먹어갈 때 모서리부터 야금야금 먹어간다. 때문에 단숨에 타고앉는 강행공격은 계속하되 2군단 방어선의 좌익과 우익을 죄여들어가면서 하나하나의 고지들과 진지들을 먹어치운다는것이였다. 그렇게 팔다리를 잘라먹던가 결박해버리면 기본몸통인 1211고지는 스스로 떨어질것이고 그후의 회양분지에 대한 공격은 허허벌판으로의 정보행진으로 될것이다.

이것이 8월 13일까지 완성된 최종작전안이였다.

이 안은 그들에게 있어서 여러모로 흡족한것이였으니 후날 사람들이 승리한 이 작전을 평할 때 《노르만디》 그대로의 《표절》과 《모방》이 아니라 창조적인 응용과 발전이였다고 할것이다.

이렇게 되여 전면공격과 함께 2군단 우익인 비아리북쪽의 983. 1고지와 가전리 서북쪽의 965고지, 774. 1고지를 먼저 먹어야 할 모서리로 보고 《노르만디》와 《잠식》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이날 전투에서 얻은것이란 적아쌍방의 공간지대였던 수림속의 일부 분지뿐이였고 그대신 네개 대대이상의 《국군》을 제물로 바치는것과 함께 미2사의 땅크절반을 잃는것으로 끝났다.

이것이야말로 릿지웨이나 밴플리트에게서 유감천만하기 그지없는 일이였으나 《만약 경우》에 비해 볼 때 가소롭기 그지없는 희생이라고 무시하고말았다. 오히려 이날 저녁에 있은 릿지웨이와 밴플리트의 무전교신에서는 《성과》와 《신심》에 넘친 대화만이 오고갔다.

밴플리트: 우리가 예측한바 그대로 적의 방어는 렬세다. 우리의 맹타에 적은 소총으로만 대응해왔다. 여기서 정신적투지만은 매우 높다는것을 강조한다.

인민군측에서는 종래의 정보자료를 반증하는바 그대로 약간의 반땅크포와 박격포만이 있다는것이 다시 확인되였다.

고사화력은 없다싶이하다.

하지만 조속한 시일내의 점령은 어렵다고 본다.

그것은 첫째, 이미 상술한바 적의 기세가 간단치 않다.

둘째, 우리와 대치한 적은 게릴라전에 익숙된 군인들이므로 소대, 중대가 대대, 련대급의 공격을 훼방, 좌절시키고있다.

그들은 험준복잡한 산과 골짜기, 미궁같은 수림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바 산악에 파악이 있는 한국군들도 생소한 지형지세인것으로 하여 피동에 빠져들고만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첫째, 불바다전술에 따른 공습과 포격강도를 계속 높이며

2군단 좌우익에 대한 가위형공격을 보다 적극화하는것이다.

릿지웨이: 귀관의 판단과 제의에 동감이다.

모든 정황과 정보에 비춰 볼 때 적은 우리가 예측한바 그대로이다.

귀관이 제기한 2군단 좌우익에 대한 가위형공격은 전술적으로 볼 때 당분간 우리의 주공타격으로 된다.

이로부터 기본공격집단은 비아리-직동령, 가전리-이포리방향에 집중시켜 성과를 확대해 나갈것이다.

밴플리트: 나는 귀하의 결심에 따라 비아리-직동령방향의 983. 1고지, 가전리- 이포리방향의 965고지, 774. 1고지를 점령한 시간을 1211고지에 대한 주공격개시시간으로 택하려 한다.

릿지웨이: 옳다. 귀관은 그 계획시간을 어떻게 보는가.

밴플리트: 래일안으로 그 고지점령의 회보를 알릴것이다.

릿지웨이: 귀관의 용기에 감사를 표한다.

릿지웨이와 밴플리트의 결심은 옳았다.

그런데 그들이 한가지 착오를 범한것이 있으니 그것은 김일성동지께서 이미전에 그들의 작전적결심이 이런 방향에서 지향되리라는것을 다 내다보고계셨음을 몰랐다는것이다.

이날 저녁 김일성동지와 최현사이에도 무전교신이 있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비아리-직동령, 가전리-이포리도로방향의 고지들에 제2제대 부대들의 탄약과 포탄까지 보내줄데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 방향에 대한 공격이 가일층 심화될것이라는데 대하여 경종을 울리시였다.

그와 함께 1211고지방어를 위해 전진시킨 중곡사포들을 로출시키지 말것과 그곳 방어부대들에서는 방어공사를 더 한층 다그치는것이 차적과업이라고 하셨다.

끝으로 그이께서는 오늘의 전투에서 위훈을 떨친 군인들에게 감사를 보낸다는것과 황영학이네 식의 교란전투와 각종 습격조를 조직하여 적을 혼란에 빠뜨릴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하늘에는 실날같은 달이 떠있었다.

기관단총을 엇가로 멘 황영학은 포탄의 작렬음이 가까이에서 울릴 때마다 뒤를 돌아보군 하였다. 팔소매를 걷어붙인 군인들이 긴 종대를 이루어 그를 따르고있었다.

권석찬소대장이 맨앞에 서있고 그 옆에는 석정의 카빙총을 멘 진갑수가 련대장의 눈길에 미쁜 웃음을 던진다.

전날밤 적의 정찰대와 황영학이네 련대정찰병들이 조우한 곳에 이르렀을 때 황영학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포탄때문이 아니라 옆구리가 너무 아파들었기때문이다. 그는 기관단총을 벗어 왼쪽어깨에 다시 메고 흘러오는 대렬을 지켜보았다. 전사들은 그와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사뭇 씩씩한 태도를 보였고 개중에는 그와 비슷이 눈섭을 위엄있게 찌프리는 군인들도 있었지만 그의 《사열》을 받고난 뒤면 싱긋벙긋 웃었다.

황영학은 지난 밤에 정찰소대와 한개 중대를 데리고 그동안 그처럼 그려마지 않던 권석찬이 속한 대대를 찾았다. 그가 적아의 계선이 명백치 않는 이곳으로 나오려는데 대해 사단장은 선뜻 찬동하지 않았다. 《적후정찰전》과 다름없는 교란전투에 련대장이 직접 나간다는것은 완전한 파격이였기때문이였다.

황영학은 두가지로 그를 설복시켰다. 하나는 예견되는 적의 공격이 어떤 력량, 어떤 방식으로 가해질지 모르는 형편에서 련대장이 나가는것이 옳다는것과 또 하나는 억지다짐의 론리아닌 론리였다.

《나는 이미 전사로 강직되였던것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니만치 사단장동무는 나를 리해해줘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라는 말이 사단장을 움직이게 한것 같았다.

하급이 《과오》를 범했을 때는 그의 직계상관도 책임이 있지 않는가.

황영학으로부터 1211고지방어에 대한 최고사령관동지의 작전적구상을 들은 전사들은 련대장까지 온것으로 하여 처음부터 사기들이 높았다.

동해의 7함대에서 발진한 함재기들과 군산, 목포, 김포, 인천에서 뜬 중폭격기들이 하늘을 까맣게 뒤덮고 수백문의 포가 965고지와 그 뒤계선을 들이칠 때 전사들은 그가 들으라는듯 《용감성》을 표현하기 위해 급급해했다.

《실컷 퍼부어라, 실컷.》

적의 코밑에 이르렀기때문에 포사격권에서 벗어졌다는 안도감도 없지 않았다. 적의 공격서렬이 통과할수 있는 둔덕과 바위뒤에다 분대, 소대단위로 인원배치를 한 황영학은 적장교들의 호각소리와 고함소리가 울리는 곳에까지 나갔다. 《공격출발진지에로의 은밀한 접근》이 개시되였다는것을 알았을 때는 줴기밥과 비물로 어지간히 배를 채우고났을 때였다.

동녘이 휘연히 밝아오며 숲속의 어스름이 물러가는 속에서 수천의 발걸음소리가 폭음과 땅의 진동을 눌러버렸다. 처음에는 지뢰탐지기를 든 한개 소대가량의 공병정찰들이 지나갔다. 그자들은 빽빽한 수풀과 기복진 곳을 두렵게 보면서도 전날밤 자기네 정찰들이 확인한 안전지대라고 생각했던지 밋밋한 풀판에서나 지뢰탐지기로 훑었을뿐 거침없이 나갔다.

기본종대서렬이 나타나자 거친 숨결속에서 퀴퀴한 땀내와 막걸리냄새가 풍겼다. 그렇게 봐서인지 팔굽까지 걷어붙인 장교들과 사병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술독에 잠겼다 나온것처럼 벽돌빛으로 달아있었다.

황영학은 이 공격1진이 리승만의 하사품인 청주와 위스키로 담을 부풀리고있다는것까지는 몰랐다.

사관학교를 금방 나온듯 군복도 새것, 견장도 새것인 소위가 하는 말에 황영학은 소스라치게 긴장되였다.

《께름직한데요. 복병이 있을갑숀데요.》

다행히 그 소위견장의 옆에서 걷던 자가 몰풍스럽게 부정했다.

《그건 공포증이야. 지금은 전호에만 구겨박혀있다는걸 잊었어?》

얼굴이 험상궂게 총창자국이 난 그자의 팔소매에는 《독전관》완장이 둘러져있었다. 그 대렬 뒤를 거들지게 따르던 대위와 소령의 입에서도 그 비슷한 말이 오고갔다.

《대대장님, 여기서부터 산개를 하는것이 좋잖을가요?》

《야, 여기서 산개했다가 어느 세월에 고지밑에 가닿겠니. 다들 리태백이 되여 자빠져있겠는데-》

한여름철인데도 멋부림식으로 목에 흰 명주수건을 걸친 소령의 손에는 노란 개나리가 들려있다. 기관총소대인듯 미식브로닝경기와 중기관총을 멘 대렬속에서 대자배기몸집에 볼에 구레나룻자리가 퍼릿한 자가 자기 동료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이런 숲에서 하나 끼고 누우면 세상만사가 오락가락일게로다.》

《저 고지만 먹으면 정말 한달 휴가를 줄가?》

《금강산까지 가야 될거다. 그땐 서울기생까지 다 올테고-》

구레나룻은 제 겨드랑이밑에 다가붙은 동료의 얼굴을 슬쩍 쓸어주고는 히죽이 웃는다.

하나, 둘, 셋, 넷… 두개 대대로 짐작되는 대렬이 지나갔을 때 선두대렬이 갔음직한 곳에서 자지러진 기관단총 총성과 수류탄폭음이 울렸다.

무반동포와 60㎜박격포를 걸멘 대렬이 흠칫하며 멈춰서는가 싶더니 《붙었다! 구보로!》 하는 새된 악청에 덴겁한 소떼처럼 내달렸다.

하나, 둘… 황영학은 기다렸다. 드디여 군기를 둘러멘자를 선두로 한개 중대가량의 헌병대렬이 나타났다.

《쐈!》

황영학의 손에서 수류탄이 던져짐과 함께 수십개의 공같은것이 날아가 터지고 련이어 불을 토하는 자동총사격에 질서정연했던 대렬은 삽시에 죽탕이 되고말았다. 그래도 선발된 군기호위병들이여서인지 죽어가면서도 기관총을 란사하였고 어림대고 맞뿌리는 수류탄이 무수한 파편으로 나무잎새들을 흩날렸다.

전투는 5분도 채 안되여 끝났다.

무덕무덕 쓰러진 시체더미속에서 마지막숨을 톺는듯 한 신음소리만이 이따금 울릴뿐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황영학은 시체에 짓눌린 새파란 풀들과 거밋한 땅에 검자색피가 내려앉는것을 보다 말고 앞서간 대렬쪽에서 울리는 총소리에 귀기울였다. 여기저기 이동하며 쏘아대는 따발총사격에 맞서 엠원보총과 중기관총의 둔탁한 발사음이 점점 커져갔다.

(어떻게 할것인가?)

시작부터 끝까지 면밀히 타산하고 계획한 전투였으나 일순간 망설임이 왔다. 시체더미속에 묻혔을지 아니면 숲속 어딘가 숨어배긴 자의 가슴팍에 품겨있을지 모를 군기가 그를 유혹했기때문이였다. 하지만 가벼운 지진과 같은 땅의 울림과 숲속의 와슬렁거림에 정신을 차렸다.

공격대렬 2진이 가까와온것이다.

손수건을 꺼내 세번 휘젓고난 그는 와슬렁거리는 숲쪽을, 11. 43㎜들이 불을 토하는 곳을 향해 긴 점발사격을 퍼부었다.

한개 소대의 사격에 수백정의 11. 43㎜와 기관총이 응전했다. 몇발의 백색신호탄이 ×형을 그리며 그들의 머리우로 날았다.

《빠지자.》

탄창의 마지막탄알까지 죄다 쏘고난 그는 새로운 탄창을 날쌔게 맞추고 미리 봐두었던 홈타기로 뛰여내렸다. 한사람, 두사람… 맨 마지막으로 오는 권석찬까지 확인하고난 그는 될수록 빽빽한 숲을 찾아 걸음을 재우쳤다. 탕수진 개울을 건너 얼마안갔을 때 바위틈과 풀숲에 까투리처럼 배겨 든 적들이 헛총질을 하는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의 머리우로 또다시 백색신호탄이 날아오르고 앞의 산병선에서도 같은 우군임을 알리는 백색신호탄이 날아올랐다. 폭음의 메아리와 총성속에서 앞의 공격진과 련계를 취하려는 뒤대렬의 군호가 연거퍼 울렸다.

《백호! 백호! 우리는 현무! 우리는 현무다!》

황영학은 마음이 촉급해졌다.

《앞의 놈들과 뒤놈들을 맞불질시켜야겠소.》

뒤쪽의 숲이 또다시 와슬렁거리고 산병선의 적들이 저마끔 돌아볼 때 소대의 일제사격이 개시되였다. 한번은 앞의 산병선을, 다음은 뒤의 공격진을… 수류탄이 날아갔고 각종 저격무기들이 불을 토했다. 앞의 산병선에서는 황영학이네 뒤쪽을 향해 연막탄까지 쏘아댔다.

두개 대대의 맞불질속을 빠져나온 황영학이네가 이름모를 고지릉선에 붙었을 때는 가전리쪽 도로에 집결한 적땅크들이 제편끼리 싸우는 곳을 향해 직사사격을 들이댔다. 전사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눈가에 내려온 위장풀때문에 애먹던 진갑수는 오늘 새벽 한시간나마 품을 들여 꽂은 가랑나무며 쑥풀따위를 죄다 뽑아버리고 두손을 번쩍들고 만세를 불렀다. 황영학은 대렬 맨 뒤끝에서 오는 군인이 리수복임을 알아보았다.

자기 소대도 중대도 아닌 대렬 맨끝에 있는것이 이상스러웠다.

리수복의 잔등에는 우리것이 아닌 커다란 배낭이 무겁게 지여져있었다.

《왜 이렇게 락오자가 되였소?》

황영학의 물음에 수복은 흰 이를 드러내며 귀엽게 웃었다.

《전 소대장동지의 명령대로…》

리수복은 남 들을가 저어하듯 주변을 둘러보고 소리를 죽여 말했다.

《소대장동진 제가 눈썰미가 있다고 하며 대렬 맨뒤에서 방차대역할을 하라고 했습니다.》

《허.》

영학은 억이 막혀 웃었다. 권석찬은 대대장의 명령이였다고 하면서 자기의 호위소대장역을 놀더니 수복은 수복이대로 련대장이 조직하게 된 임무를 자진 맡은셈이다.

《잔등에 진건 뭐요?》

《통졸임입니다. 상표를 보니 소고기여서…》

《소고기?》

황영학은 그와 걸음을 맞추었다. 또다시 옆구리가 켕겨들었다. 음식소리를 듣게 된탓인가?

무언가 옆구리를 단단히 스치고 지나간것 같았으나 만져볼 생각까지는 없었다. 이제 만져서 상처의 부위를 알게 되고 혹시 끈적끈적한것이 묻어나게 되면 아픔이 더 커질것이라는 생각때문이였다. 옆구리에 신경이 간 탓인지 걸음발이 더 무거워 들었다.

《수복이, 힘이 빠지지 않나?》

《전… 원래 피곤을 모릅니다.》

《그래, 용쿠만. 집이 순천이라고 했던가.》

《네, 우리 순천사람들은 죄다 팔팔하답니다.》

《허, 그런가.》

《장군님께서 우리 고장에 와서 선거를 하신건 아시겠지요?》

《알고있소.》

《그것만 봐도 우리 순천사람이 어떠리라는건 환하지 않습니까.》

《이 친구가.》

황영학은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다가 끝내 옆구리에 손을 대고 말았다. 짐작했던 그대로 끈적끈적한것이 묻어났다.

(넨장.)

그는 이마살을 찌프리며 절로 나오는 신음을 입안으로 삼켜버렸다.

사단장지도에 《1초소》라고 표기된 무명고지기슭에서 리수복이네와 헤여졌다. 그들은 서화원통계선에서 《사귄》적들과 결산하게 되여있다.

그 적들은 대우산때부터 맞서 승부를 겨루던 《호림부대》의 잔당들이다. 물론 이것은 수복이네가 속한 대대지휘관들이 해보는 소리고 지금의 전투계획속에는 교란전투에 능숙한 그들을 사단의 맨앞코숭이에 세움으로써 오늘과 같은 전투성과를 얻으려는데 있다.

황영학으로서도 《구적과의 결판》을 바라는 그들의 심정에 호응하게 되는것이고 전투적열정과 승세의 기분에 차넘치는 그들을 방어공사작업에 《안착》시키자면 좀 품이 든다는때문이였다.

지금 《굴파기》에 인입된 군인들도 최고사령관동지께서 관심하신다는것때문이지 그렇지 않으면 거의다가 나가자빠질 형편이였다. 이 며칠 굴파기군이 되여보니 전투보다 더 어려운 노릇이였다.

오늘부터는 웬간한 떡심 아니고서는 총부터 잡고 내달아나가려할것이다.

얼마후 965고지앞 좌측릉선에 당도하니 개별적으로 파견했던 매복습격조들도 다 와있었다. 낮사이에 고지는 몰라보게 변해있었다. 파편에 잘린 나무아지들과 통채로 자빠진 거목들이 길을 막았고 한벌 뒤집혀진 석비레땅에 정갱이까지 빠져들었다.

6련대 1대대 군인들이 마중해내려왔다. 그동안 이들이 들어갈 굴을 파면서 가까와진 6련대 1대대장까지 나타나 수다스러울 정도로 열변을 토했다.

《정말 놀라왔습니다. 네개 중대로 두개 련대를 쥐고 놀았다는것은… 정말 멋진 마수걸이였습니다. 이번 전투에 대해서는 제가 후날 무슨 론문으로든가 쓰겠습니다. 그때 련대장동지가 도와주겠지요. 저는 <백두산에서 창조된 김일성장군님식 매복, 망원, 습격전의 현대적응용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달가 합니다.

정말 4련대 동지들덕에 많은걸 배우고 힘을 얻고 또 부족된 탄약도 보충받게 된 여유를 얻었습니다. 아시다싶이 저희 대대는 대부분 신대원들인데 적들속을 종횡무진하는 50년대의 <항일빨찌산>들을 보면서 아! 저렇게 용감한 사자들로 되여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감격과 흥분으로 하여 오늘 같은 폭격과 포격속에서 다른 때라면 눈도 못 뜨고 바지에 오줌까지 갈길수 있었지만 다들 눈섭 한번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탄약을 지고 왔던 77사 동무들까지 동지들의 싸움을 보았는데 다들 입을 짝 벌렸습니다.》

《전투는 이제부터요.》

황영학은 그의 장광설을 막으려 한마디 했으나 대대장의 흥분을 가라앉힐수 없었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적들이 추서기는 어려울것입니다. 다들 넋이 나가 소경 제 닭 잡아먹기가 아닙니까.》

《한데 여긴 왜 이렇게 조용하오?》

황영학은 그의 《감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딴전을 피웠다. 말해놓고 보니 더욱 이상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고지들에는 연방 포탄이 떨어지는데 이 고지엔 칙칙한 어둠만이 적막을 드리우고있다.

《여긴 그렇지만 우리 뒤골짜기는 콩마당질판입니다. 들리지 않습니까?》

황영학은 들었다기보다 보았다.

수묵화의 검은 선처럼 뻗어간 고지등말기뒤의 하늘색갈이 수시로 변했다.

번쩍하는 번개불같은 빛이 환히 밝아졌다가는 어두워지고 그 어둠은 다시 갈가리 찢겨지며 선명한 노을빛이 하늘에 쫙 퍼져갔다. 황영학은 그 폭음의 크기로 봐 155㎜ 중곡사포사격임을 알았다. 아군의 물자보급과 병력지원을 차단하려는 조애사격같았다.

《로병관동지의 말에 의하면 우리 고지가 기본이랍니다. 그에 대해선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직접 말씀이 계셨는데 지금의 현상을 놓고는 우리의 긴장을 풀게 한 다음 들이치려는 암수라고 합니다.》

《그가 여기 와있소?》

《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련대장동지를 무척 기다리는것 같습니다.

참, 저와 함께 굴간을 나섰댔는데-》

《굴간》이란 그동안 황영학이네가 너럭바위밑의 오소리굴을 확대해 뚫은 지휘부겸용의 은페호이다.

《아, 저기 있군요.》

황영학은 그 참호의 둔덕우에 서있는 로병관을 알아보았다. 순간적으로 애달픈 련민과 아픔이 가슴굽을 훑었으나 그와 마주쳤을 때는 어떻게 왔는가를 묻고는 그냥 스쳐지났다.

황영학이 자기 침실이자 《공병작업지휘처》로 된 굴간끝방에 이르러 사단장에게 전화보고를 할 때 로병관이 따라들어왔다. 황영학은 그의 슬죽은 얼굴과 포탄상자우에 댕그랗게 놓인 두사람분의 밥과 국그릇을 보면서 어금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와는 직무상의 관계밖에 없다고 생각한 전선사령부의 밤이 가슴을 싸늘하게 식혔다. 그러면서 속으로 빌었다.

(이보게 병관이, 사사로운 얘기는 하지 말자구.

지금의 우리한테는 당면한 전투가 기본이거든. 그러니 이외의것은 다 후날로 미루자구. 시간이야말로 모든것의 시금석이고 상처를 아물게 하는 명약이 아닌가.)

다행히 로병관이도 그와 사단장간에 오가는 전화대화를 들으며 정황과 과업속에만 묻혀있는 기색이였다. 그런데 황영학이 전화기를 놓고 돌아설 때 그의 입에서 놀란 소리가 터져나왔다.

《상했구나.》

무섭게 흡뜬 눈으로 황영학을 쏘아보다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굴간 측벽에 세워놓은 정대를 걷어찬것 같았다. 5분도 안되여 대대준의를 데리고 나타난 로병관의 눈에는 초조와 불안만이 넘쳐있었다.

(정은 헤픈 사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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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황영학은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황영학의 웃동을 벗긴 준의가 상처를 처치하는것을 묵묵히 뜯어보던 로병관이 갑자기 너스레를 떨었다.

《여보, 지금 이렇게 보니 자넨 진짜 석기시대의 혈거인이야. 짐승한테 짓씹혀진 상처를 그런 식으로 처맸을게거든.》

로병관이 황영학을 놓고 혈거인소리까지 하자 준의도 흥겨이 응수했다.

《장령동지, 그땐 이런 붕대가 아니라 느릅나무나 피나무껍질같은걸로 동여맸을겁니다.》

《그래. 그렇지. 한데 련대장동무의 몸통이 그때 사람들 비슷하지 않아?》

황영학은 로병관의 롱담에 진저리가 났으나 자기의 벌거벗은 몸을 보니 과시 혈거인 비슷했다.

축축히 젖어든 벽에 얼른거리는 그림자며 천반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마저 동굴생활의 옛 혈거인들을 생각케 하는것이였다.

《이젠 화농만 되지 않으면 <후송>념려는 안해도 될것 같습니다.》

황영학의 허리에 붕대를 동이고 맺음끈을 단단히 마무리하고난 대대준의는 예술가가 자기의 창조물을 감상하듯 황영학의 탄탄한 몸매를 그윽히 바라보았다.

《다됐으면 이젠 가보우. 나 비슷한 부상자가 한둘이 아닐거요.》

《알겠습니다. 한데 한주일간은 안정치료라는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가 나가자 로병관의 얼굴에 새겨졌던 지어낸 미소와 활기는 깨끗이 사라졌다.

《여기서 그냥 견뎌낼수 있겠소?》

《동무가 본것처럼… 짐승의 이발자리가 아니요.》

황영학은 주섬주섬 속내의와 웃옷을 입었다.

붕대를 단단히 동인탓인지 아픔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도 예상했던것보다 깊지 않았다. 준의는 파편이 2㎝만 더 깊이 스쳤다면 황천에 갔을것이라고 하면서도 손바닥만큼 떨어져 너덜거리는 살가죽이 이제 다시 붙게 될것이라고 했다.

《그럼 좀 얘기를 해주오. 사단장동무도 필요한 지시와 정황에 대해선 동무가 알려줄것이라고 했는데…》

황영학은 오늘 처음으로 그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빈속인데 좀 들지 않겠소?》

로병관은 포탄상자우에 놓인 뚜껑을 터친 통졸임과 팥밥을 눈짓하며 흔연한 표정을 지었다.

《먹어도 얘기를 다 들은 다음에 먹겠소.》

《로보물자를 가져왔는데.》

로병관이 시죽이 웃자 황영학은 얼굴살을 찌프렸다. 《로보물자》란 탄광이나 유해가스계통에서 일하던 군인들이 이름 붙인 술의 대명사이다.

로병관은 정색을 하였다.

《그 몸으로 공병작업을 계속해낼것 같소? 동문 일주일안으로 이 굴을 <턴넬>처럼 만들겠다고 했다는데.》

황영학은 그것도 말이라고 하는가 하고 눈살을 찌프리다가 자기가 너무 몰풍스럽게 대한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부상처를 톡 쳐보이며 로병관이식 롱담으로 응했다.

《이 부상처덕으로 이젠 지시만 하게 되였으니 그에 대해선 념려마오. 사단장동문 래일의 전투를 놓고도 <노들강변>이라고 하는데… 동문 어떻게 생각하오?》

《그에 대해 말하자면 오늘 있은 전투부터 말해야 할것 같구만.》

로병관은 문대신 쳐놓은 모포쪽을 얼핏 살피고는 계속했다.

《오늘 63사가 멋있게 했소. 사태리쪽에서 비아리-직동령 도로를 따라 들어오던 적의 땅크대가 만신창이 되였고 특히 983. 1고지 전투가 멋있었소. 거기서도 사전에 동무네 비슷한 <신출귀몰전투>를 벌렸는데 그들을 추격해오던 놈들은 지뢰원에 걸려들어 두개 중대가 하늘로 날아났소.

한데 983. 1고지에서의 전투야말로 앞으로의 싸움이 얼마나 어렵겠는가에 대한 반증으로 되오.》

로병관은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이 고지로 오기전에 있은 군단참모장과의 전화를 생각하게 되였다. 로병관이 알게된 전반 전투과정은 참모장을 통해 알게 된것이였다. 참모장은 《이젠 흥분을 가라앉히고 지휘관들이 랭정해질 때》가 왔다는것을 말하며 983. 1고지전투에 대한 분석으로 앞으로 있을 전투의 간고성을 예시했다. 지난 기간의 경험으로 볼 때 한개 지뢰원에서 두개 중대정도이상이 녹아났다면 전투는 종결을 의미한다. 허나 적들은 물러설념을 하지 않았다. 끊임없는 포병사격으로 지뢰원을 개척한 적들은 2진, 3진의 공격력량을 계속 들이밀어 끝내는 2참호에까지 접근했다. 그 고지방어를 책임진 지휘관은 적들의 항공대와 포병대의 화력을 면하기 위한 근접전투를 바라서 조금 물러섰다지만 참모장도 로병관도 그것을 믿을수 없었다. 그런 의도도 있었겠지만 적의 공격이 그만큼 드세찼기때문이였을것이다. 그후의 전투과정이 그에 대한 증명으로 되였다. 지휘관의 말대로 적아가 맞붙다싶이 되는 근접전투가 벌어지자 적의 비행대는 더 어쩌지 못했으나 사태리쪽에서 쏘아대는 적 땅크포탄과 직사포탄은 참호를 제압했다. 정확한 묘준사격이여서 전호의 전사들은 머리조차 내밀수 없었다.

궁극에는 적들이 참호에 뛰여드는 결과까지 빚어졌고 류혈어린 백병전속에 참호를 잃었다가는 되찾고 찾았다가는 빼앗기는 전투가 계속되였다. 하여 첫날에는 로출시키지 않기로 했던 사단곡사포들이 지원사격을 하지 않을수 없었고 린근고지들의 박격포들도 협동사격의 포문을 열었다.

《전과를 보면 대단하오. 그 고지앞 경사면에 널린 적의 시체만 봐도 천에 가깝다고 하니까.

한데 동무도 능히 짐작하겠지만 머잖아 이앞의 모든 대소고지들이 983. 1고지와 같게 될것이란거요. 가렬한, 정말 크고 험한 싸움일것이요.》

《동무가 여기 온건 그 가렬하다는 교양사업때문이요?》

황영학은 불쾌감을 참을수 없었다.

가스등의 불빛을 등진 로병관의 얼굴이 어둡게 보이는것은 불빛을 등진탓이 아니라 겁에 질려있기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병관은 《헛.》 하고 웃음기 비슷한 소리를 내였는데 그것 역시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할 전선사령부에서의 밤을 떠올리며 그라는 인간의 비겁과 용렬함의 표시처럼 느껴졌다.

《로동무, 그 말만이라면 난 더 들을 필요가 없소. 거기에 내가 들은 말 한가지를 더 보탭시다. 오늘 새벽 우린 혀로 될 중위 한놈을 잡았댔소. 그자는 끝없이 많은 유생력량과 미10군단전체의 진입을 떠벌이며 금강산과 원산까지는 떼논 당상이라고 했소. 가관인것은 자기는 지리산유격대 <토벌>때부터 싸움을 했는데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갔을 때도 승리를 채 믿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확신한다는것이였소.

놈으로서는 상관들이 한 말을 옮긴것이라고 보겠지만… 간단치 않은 준비를 하고 덤벼드는것만은 사실이요. 하니만치 나한텐 그런 소리를 더 하지 마오.》

《해야겠소.》

로병관은 싱긋이 웃으며 황영학의 속을 중떠보듯 눈을 감츠렸다.

《동문 6군단이 우리한테 온다는것을 알고있소?》

《그건 무슨 소리요?》

《모를테지. 동무네 사단장도 오늘에야 알았으니까.》

로병관은 또 한번 달콤하면서도 만족스런 웃음을 짓다가 정색했다.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6군단의 기본력량을 우리 군단에 배속시키게끔 해주셨소.》

《그게 사실이요?》

《이런데서도 거짓말이 있소?》

《음.》

영학은 온몸의 힘줄이 와드득 일어서는감을 느꼈다.

(사실이라… 그렇다면…)

천반에서 물방울이 법랑세면기에 시간 맞춰 촐싹촐싹 떨어지는것을 여겨보며 자기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너무나도 어마어마한 사실앞에서 생각의 사슬들이 이어지지 않았다.

《영학동무, 대상이 온곱잖은 사람이면 그가 하는 말도 귀찮게 들릴 때가 있소. 하지만 이제 하는 말만은 명심해주오.

동무가 나를 어떻게 타매하든 나로서는 할 말은 없소. 또 내가 어떤 사람이였고 어떤 사람으로 되려는가에 대해서도 더 말하지 않겠소. 내가 여기로 온것은 이 고지전투의 중요성도 있지만 동무한테 꼭 하지 않으면 안될 말때문이요. 끝까지 들어보오.》

로병관의 말이 떨렸다.

《나는 이 며칠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것을 배우고 느꼈는가를 말하자고 하오.》

로병관의 입에서는 련대장인 자기로서 알면 안된다고 생각되는 최고사령부와 군단, 최고사령관동지와 최현과의 사이에 있은 모든 통신교신과 토론된 작전방안들이 쏟아져나왔다.

그 말을 듣는 과정에 황영학은 자기가 최현이 된 심정에 휩싸이기도 했고 장군님과 가까이 있었을 때의 여러가지 일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랭담한 돌로부터 열정적인 청강생으로 변한 황영학의 모습에 사기가 난 로병관이 머잖아 1211고지가 기본전투지점으로 된다는 말을 할 때 그를 따라왔다는 사단경비중대의 한 군관이 들어섰다. 로병관의 호위겸 보좌관격으로 따라 온 그는 후면골짜기에 대한 포사격이 끝났으니만치 이젠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고 말하다가 황영학의 마뜩지 않아 하는 눈길과 마주치자 사단장으로부터 받은 과업이라는 말로 량해를 구했다.

로병관은 자기가 선뜻 일어설가봐 기이는 황영학을 보자 좀 더 기다리라는 말로 그 군관을 민들레씨처럼 날려버렸다.

《내가 하자는 말은 다 끝난셈인데-》

로병관은 좀전까지의 활기를 잃고 어색스런 표정으로 영학을 보다가 눈살을 찌프리며 영숙이의 편지를 내밀었다.

《이걸 보오.》

《이건?…》

편지겉봉을 훑어보고 난 영학은 눈을 치떴다.

《이거야 동무한테 온게 아니요.》

《동무도… 봐야 할거요. 편진 최고사령관동지께서… 련락군관의 기통가방에 넣어 보내주신것이요.》

로병관은 그와 사이를 두려는듯 일어서다 키낮은 천반에 머리를 부딪쳤다.

그 바람에 흙부스레기가 우스스 떨어졌다.

《이건 뭐 락반이라도 생기지 않겠소?》

그가 딴전을 피울 때 황영학은 벌써 편지 뒤장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요. 전 분명히 《기동전주의자》라고 썼어요.

이 세상 가장 가깝고 또 가깝다고 생각하려 했던 사람에게 이런 락인을 찍는것이 저로서는 결코 쉬운것은 아니였어요. 하지만 그러지 않을것이라는, 그러지 말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이렇게 쓴것이예요. 저를 멋모른다고 혹독하다고도 할수 있어요. 혹독해진데 대해서는 부인하지 않아요. 제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가고 묻는다면 고향에 갔다온 다음부터라고 그리고 동지와 우리 오빠로 하여 생겨난 대우산의 비극을 알게 된 그때부터라고 할수 있어요. 처음에는 울기도 했어요. 어쩌면 그럴가, 과연 정말일가 고민도 했어요.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더 쓰지 않으려 해요. 사실은 가슴 아플 이 글 전체를 없애야 하는것이였어요. 이건 다름아닌 우리 장군님께서 말씀이 계셨기때문이예요.

장군님께서는 《기동전주의자》라고 쓴 글구를 보시고…



황영학은 혼자 있고싶었다. 로병관도 그것을 알아차린듯 우선우선한 태도로 말했다.

《이젠 돌아가겠는데 부탁할 말이 없소?》

《없소.》

굴간좌우에 네활개를 펴고 굳잠이 든 전사들사이를 에돌아 밖에 나가니 포성은 멀리서만 들리고 안개낀듯 자욱한 연기발속에서 눈섭같은 달이 빛을 던졌다. 로병관은 앞에 선 경비중대군관이 길을 찾느라고 두릿두릿거리며 내려가는것을 보다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장군님께서 용서해주셨는데 동무한테서도 그걸 기대해도 되겠소?》

《그런 말은 말기요.》

황영학은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로병관의 모습이 어둠속에 잠겨들자 비틀려지는 아픔이 가슴을 엄습했다.

눈물이 울컥 솟구쳐올랐다.

이상스럽게도 조국개선직후에 있었던 일이 불쑥 떠올랐다.

씨름군인 김충렬과 김성국을 앞세우고 나팔산밑의 추석씨름판을 찾아갈 때였다. 숱한 사람들의 선망어린 눈길속에 흐뭇해 걷는데 노타이샤쯔차림을 한 청년의 말이 귀에 거슬렸다. 《쏘련계 조선사람들이야.》하는 말때문이였다. 황영학은 그에게 다가가 자기들은 조선인민혁명군임을 밝혔다.

《동지도 김일성장군님의 조선인민혁명군입니까?》

노타이샤쯔가 의문스럽게 물었다. 황영학은 당황했다. 노타이샤쯔는 그의 사복차림때문에 (황영학은 그 전날밤 배청소를 하는통에 군복을 입고있었던것이다.) 물었겠건만 황영학으로서는 자기의 6개월학습기간을 비웃는듯 한 소리로 들렸기때문이였다. 그는 별다른 생각없이 말했다.

《나는 보고 배우는 연구생이요.》

이 말이 김일성동지를 노하시게 할줄은 몰랐다.

그이께서 정말 연구생으로 되겠는가고 물으실 때 이미 자기의 실언을 뉘우쳤다. 때는 늦었었다.

《장군님, 사실 전 아직 조선인민혁명군 대원으로서 경력도 준비도 부족하기때문에 무심중에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허, 그런가. 난 또 우리 군대 한사람을 잃는가 했지.》

김일성동지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그리고 황영학으로서 일생 잊을수 없는 말씀을 하시였다.

《나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한 이상 동문 나의 곁에서 물러설수 없소. 일단 나와 손 잡으면 그는 나의 영원한 동지고 전우요.》

(그래, 그것은 법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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