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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빛나는 아침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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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8,309회 작성일 20-07-03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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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춘만은 대동강 기슭을 따라 모란봉으로 올라가고있었다. 옥류소나루터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교리쪽으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얼음판우에 쭉 늘어섰다. 이곳 사람들이 전하는데 의하면 대동강은 양력설을 열흘 앞두고 얼음이 건너간다고 하였는데 추위가 늦어진다던 이 겨울에도 역시 강은 제 습관대로 한주일전에 얼어붙었던것이다. 강기슭에는 얼음구멍을 까고 김장배추를 씻는 아낙네들이 쭉 늘어섰고 멀찍이 깊은곬으로는 낚시군들이 두간두간 앉아있었다.

그는 청류벽쪽으로 가지 않고 곧추 을밀대쪽 지름길에 들어섰다. 길가에는 살맹이나무가 우거졌고 몇걸음 숲으로 들어가면 소나무가 하늘이 보이지 않게 빽빽이 들어찼다. 그렇게도 흥성거리던 모란봉이건만 추위에 쫓겨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다. 간혹가다가 한둘 락엽이 깔린 오솔길을 걷는것이 눈에 띄였고 어데선가 껙껙 장끼 우는 소리가 나는데 신통히도 어느 심산속같은 정취를 자아내고있었다. 맑은 공기가 가슴에 스며들었고 추녀를 쳐든 을밀대가 그지없이 정다왔다. 양춘만은 검은색 외투에 중절모를 썼고 손에는 흰종이에 싼것을 하나 든채 줄곧 길바닥만 들여다보며 묵묵히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최승대를 왼쪽에 두고 대동강쪽으로 내려서니 민틋한 잔디판이 나졌다. 잔디우에는 눈이 한벌 덮여있었다. 양춘만은 눈에 덮인 분묘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비문을 쳐다보니 《항일렬사 박원식의 묘 1915년 12월 00일생》이라고 새겨져있었다. 그는 종이에 쌌던것을 조심스럽게 펼치였다. 그안에서는 역시 종이와 색갈이 같은 두송이의 국화꽃이 나타났다. 양춘만은 두손으로 꽃송이를 정중히 받들어 올리더니 잠간 그것을 쳐다보고나서 대리석상석앞으로 다가갔다. 허리를 굽혀 상석우에 덮인 눈을 손으로 말끔히 밀어제낀 다음 그우에다 꽃을 올려놓았다. 손이 후드드 떨리였다. 그렇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꽃송이를 다시 우로 돌려놓고 뒤걸음질을 해서 물러났다. 얼마간 간격이 생겼다고 보았을 때 그는 눈우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한번 절을 하고 다시 일어나 또 허리를 굽히려다가 양춘만은 그만 중심을 잃고 앞으로 푹 꼬꾸라지고말았다. 그는 땅에 엎드린채 끅끅 숨을 갑자르며 울기 시작하였다.

《박원식선생!》 그의 목소리는 설음에 지지눌려 겨우 후두를 빠져나왔다. 《양춘만이 찾아왔습니다. 뒤늦게나마 사죄하려고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허두를 떼자 가슴이 떡 막혀 말을 더 계속할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 묘등을 여겨보려 했으나 물속에서 눈을 뜬것처럼 뿌옇게 흐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눈을 문지르고 또 쳐다보았다. 그렇게 하노라면 수첩장을 펴들고 장군님의 말씀을 전달하던 박원식의 모습이 얼마간이라도 보일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앞에는 이음새를 아직 아물구지 못한 언틀먼틀한 떼장이 싸늘한 눈을 떠이고 누워있을뿐이다. 그는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자 팔을 부둥켜잡고 《양춘만선생이 옳습니까.》하고 너무 반가와 어쩔줄 모르던 박원식이 우렷이 떠올랐다. 그다음에는 경성역에서 차에 올라 굳이 앉을 자리를 내서 자기를 앉히고야말던 고집스러운 그 얼굴이 또 나타났다. (아! 나는 배신자올시다.)하고 양춘만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천추에 용서받을수 없는 죄인이다. 내가 왜 진작 그를 찾아오지 못했는가. 다문 한마디라도 그가 살았을 때 진정을 털어놓았어야 하는것이다. 나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을것이다. 그 저주롭고 통분한 감정을 그대로 가진채 그는 갔을것이다.

바람이 불었다. 석양이 비낀 공간에 은가루를 뿌려놓은것처럼 현란하게 눈가루가 날리였다. 바람결에 놀란 메새 한마리가 양춘만의 머리우를 날아 맞은켠 다박솔가지우에 앉아 울깃불깃한 목을 요리조리 휘두르고있다.

그때 언뜻 양춘만은 상석 옆자리에 눈길이 갔다. 별로 도두룩하게 눈이 쌓인 감을 주었기때문이다. 손으로 눈을 헤집어보니 뜻밖에도 그속에 어린애들 놀이감이 묻혀있었다. 하나는 나무로 깎아 먹칠을 한 곰이고 다른 하나는 고무줄로 쏘게 만든 나무권총이였다. 눈을 모아서 덮어놓은것으로 보아 며칠전 눈이 온 다음에 가져다놓은것이 틀림없었다. 그러고보니 놀이감이 묻혔던 그앞으로는 끼뼘 하나 되나마나한 어린애들의 발자국이 몇쌍 뚜렷이 찍혀있었다. 양춘만은 고개를 떨구고 눈을 감았다.

그의 눈앞에는 흐릿한 달빛아래 팔을 내두르며 《우리와 같이 가자!》하던 평산벌장면이 그대로 펼쳐져보이였다. 야음을 흔들며 처절하게 울리던 박원식의 고함소리가 그대로 귀를 울리는것이다. 무아몽중에 빠진 양춘만은 박원식을 향해 가노라고 벌떡 일어나 잔디언덕에 뛰여올랐다.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서 더 나갈수 없게 되자 그는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지만 박원식의 웨침소리는 그냥 귀를 울리였다.

《가지 말라. 돌아서라. 우리와 같이 가자! 우리와 같이 가자!》

이윽해서 환각에서 깨여난 양춘만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사위를 둘러보았다.

《그렇다! 같이 가겠다. 당신들이 가는 길을 이 한목숨이 진할 때까지 따라가겠다. 김일성장군님께 령도하시는 길로 드팀없이 걸어가겠다. 그 길우에서 영광이 차례져도 좋고 또 어떤 경우에 불행에 빠져도 좋다. 그 길에서 먹어도 좋고 굶어도 좋다. 그 길에 어떤 리념이 놓여도 좋다. 공산주의라도 좋고 또 어떤 다른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이의 령도를 무조건적으로 절대적으로 따르겠다. 참된 인간의 보람을 안고 사는데야 무슨 타산이 필요하며 무슨 주저가 있겠는가. 박원식선생! 당신이 내뻗친 그 손을 굳게굳게 붙잡고 가겠소. 영원히 변치 않고 가겠소. 같이 가겠소. 같이 가겠소!》

그는 두팔로 땅을 짚고 앉아서 분묘쪽을 지켜보고있었다. 온 얼굴에서 땀이 흘러 턱밑으로 방울져 떨어졌다.

그때 난데없는 사나이가 하나 나타났다. 그는 양춘만이쪽을 한동안 멀거니 바라보다가 그만 외면을 해버리고 분묘앞으로 다가가고있었다. 양춘만은 정신을 가다듬고 지켜보았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사나이는 상석앞에 바투 다가서서 고개를 숙여 묵상을 하였다. 그런후에 사나이는 나무꼬챙이로 분묘 오른쪽 가장자리에 자그마한 구뎅이를 하나 파기 시작하였다. 그는 염낭에서 종이에 싼것을 꺼내더니 뭐라뭐라 하면서 하얀것을 주르르 구뎅이에 쏟아부었다.

양춘만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발볌발볌 거기로 다가갔다.

사나이는 정성들여 구뎅이를 메웠다.

《박원식동지! 그때 그 쌀을 가져왔소. 해주의 쌀이요. 제밥을 해가지고와 술을 붓는것보다 이것이 날것 같아 그랬소. 량해하시오.》

사나이는 갈린 목소리로 한마디 하고나서 뒤로 물러선다.

잠시후 그들은 나란히 최승대로 통하는 언덕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참말, 저 박원식동지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혁명투사의 전형이구요.》 사나이는 걸음을 멈추고 분묘쪽을 다시한번 돌아다보면서 말하였다. 《저는 평양철도국에 있는 한명구라고 합니다. 피차 박원식동지를 잊지 못해 찾아온것 같은데요. 난 한생 처음으로 참되고 숭고한 인간을 보았습니다. 내가 갈 길에 그가 대신 갔다가 반동들에게 희생되였습니다. 순 나때문에 그렇게 된것이지요.》

말문이 막혀 더 이어대지 못하고 헐떡거리였다. 양춘만은 온몸이 굳어진채 한명구를 지켜보고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는 강선제강소에 있는 양춘만이라고 합니다. 저의 사정은 선생님에게 비길바가 못됩니다. 나는 그를 배반했습니다. 고인의 가슴에는 내가 찢어놓은 상처가 그대로 있을것입니다.》

흥분을 이기지 못해 눈에 눈에 벌겋게 피가 진 그들은 새 생활에 들어선 자신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겠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펼치였다.

《그러니까 박원식선생이 지금 몇살입니까?》

《오늘이 생일이니까 만 30입니다.》

《30!!》하고 양춘만은 어깨를 들었다놓으며 긴 한숨을 쉬고나서 말하였다. 《나보다 나이는 두살 아래지만 200년은 앞선 사람입니다. 훌륭한 사람이지요. 인간이 도대체 무엇때문에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이 질문에 아직 똑똑한 대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길지 않은 한생을 괴롭게 살지 말아야 한다는것은 명백합니다. 빈궁하게 사는것이 괴롭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굴종하며 사는것보다는 나을것입니다. 굴종, 인간이 못할것이란 굴종하는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크고 혹독한것이라 해도 후회를 남기는 일보다는 괴롭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자기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나는 박원식선생의 묘앞에서 울었습니다. 그를 슬퍼해서가 아니라 나자신의 후회가 너무 크고 가련해져서 울었습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한명구의 팔을 붙잡았다. 혼자서는 몸을 지탱해내기 어려운 모양이였다. 《아! 나는 어쩌면 좋습니까. 김일성장군님품에 안기자고 내 손을 붙잡고 끌어당기던 박원식을 나는 배반하고 도망을 쳤단말입니다. 그가 나를 부르며 같이 가자 같이 가자 하던 고함소리가 아직 귀에 쟁쟁합니다. 사람이 났다가 사람에게 덕은 주지 못할망정 원한을 끼쳤다면야 그게 무슨 인간입니까. 남의 희생우에 뿌리를 내린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개짐승만도 못하지요. 인간은 인간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데 나는 그것을 배반했습니다. 이 후회를 무엇으로 씻습니까. 무엇으로! 나의 마지막 소망은 박원식선생처럼 그렇게 림종을 겪어보고싶다는것뿐입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수건으로 눈물을 닦고있는 양춘만을 쳐다보군 하였다. 가슴에서 부글부글 괴여오르는 설분을 끝없이 토로하고싶었지만 그렇게 할수 없는것이 유감이였다. 쌀한줌, 곰, 권총들이 눈앞에 어른어른하여 끝내 그는 기침을 터뜨리게 되였다. 기침을 진정시키게 되자 그는 또다시 말을 계속하였다.

《그래 나는 강철을 만들겠습니다. 그속에 내 인생을 깡그리 녹여넣겠단말입니다. 나에겐 이 길밖에 없지요. 피차 우리는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삽시다.》

키가 껑충한 한명구는 불을 토하는것 같은 양춘만의 말을 들으면서 계속 고개만 끄덕이고있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에서는 저편만 못지 않게 인생이라든지 후회라든지 하는것을 놓고 토로하고싶은 욕망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종시 그럴 틈을 얻어내지 못하였다. 다만 그는 저편에서 눈물을 보일 때는 눈물로, 자기타매를 할 때는 또 그대로 자기 가슴을 움켜잡고 몸부림치군 하였다.


4

 

가죽가방을 손에 든 원시범은 평양역에서 전차를 타지 않고 걸었다. 사람래왕이 많은 거리에 나서자 그의 행색은 말이 아니게 초췌하였다. 줄무늬가 간 회색 제낀옷은 람루해졌고 머리에 올려놓인것은 공장에서 쓰던 기름때가 밴 캡이였다. 고개를 숙일써 하고 되도록 사람들을 피해 차도의 한쪽 가녁을 밟으며 가고있다.

딱히 어데로 간다는 지향이 없이 모란봉쪽으로 올라가고있는것이다. 하나는 려관에 들 생각 또 하나는 백추화를 찾아갈 생각 그 두 갈래가 서로 똑같은 힘으로 그를 끌어당겨 이렇게 지향이 없이 만든것이다. 본정에서 황금정으르, 종로에서 경상으로 이리저리 발가는대로 방황하는데 어쩐지 몸은 저도 모르게 경상골로 접근해가고있었다.

한편 경상골 백추화네 집에서는 손님대접을 하느라고 안방에서 부엌사이를 녀인들이 바삐 드나들고있었다. 권태롭고 단조로운 나날을 보내던 이 집 외동딸 추화양은 신바람이 나서 부엌에 나가 간참도 하고 하녀대신 기름이 끓는 쟁철을 보는가 하면 또 방안으로 음식을 나르기도 하였다. 석고처럼 희고 말씬한 팔을 드러내놓고 문턱을 넘어설 때면 원피스자락이 보기좋게 물결치고 청신한 기운이 온 방안에 풍기였다. 방안에는 자개를 박은 두리반에 세사람이 둘러앉아있었다. 주인 백씨가 실내옷으로 만든 명주바지저고리를 입고 대머리를 이따금씩 쓸면서 술을 권하고있다. 그 맞은쪽에는 금테안경을 낀 중년사나이가 점잖게 앉아 대접을 받고있다. 그는 서울서 온 민기환이였다. 그옆에는 눈이 빛나는 청년이 앉았는데 말투부터 하대를 하는것을 보면 민기환의 동료이거나 그 배하인물같았다. 술상에는 리조자기를 본딴 사기술병에 자작 만든 청주가 들어있고 그옆에는 양서로 꼬불꼬불하게 쓴 금박인쇄상표가 붙은 꼬냐크병이 놓여있었다.

《그러니까 원시범군과 이미부터 지면이 있었다는거지요?》

석잔안에 벌써 이마부터 붉어진 백씨는 갈비찜을 손님앞으로 밀어놓으며 묻는다. 이미 대강은 알고있었지만 사위감이 그렇게까지 대단한 기술자이고 또 대단한 실업가의 자식이라는 말을 듣게 되여 벌써 기분이 들떴다.

《저는 사업상 직접 관계는 안했습니다만 잘 압니다. 수일안으로 제가 직접 본궁에 찾아가 만나보겠습니다.》

민기환은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올리고나서 꼬냐크잔을 단숨에 쭉 비웠다. 안주를 집다 말고 그는 《이 집 사위는 이런데 묻혀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교또대학에서도 이름난 수재올시다. 우리는, 아니 저쪽에서는 쌘프랜시스코박사원에 넣었다가 필요한만큼 학위학직을 주어 건너보내겠다고 합니다. 백선생도 그쯤 알고 사위에게 잘 타일러주시오. 이 집에서는 사위자 아들이 아니겠습니까. 네!》 하고 제가 먼저 만족해서 껄껄 웃었다.

백씨는 좋아서 고개만 연방 끄덕이고있다. 술이 몇잔 더 오고간뒤에 민기환이 백씨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나직이 말하였다.

《백선생은 경성제국대학 교수 안동권선생과 죽마지우라면서요?》

《죽마지우라고까지 할수는 없지만. 나보다 3년 우인 평양고보 동창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 선생이 요새 모진 고민을 한다는것 같습니다. 몇번 만났는데 공산당에서 딱 붙잡고 어쩌지 못하게 한답니다. 그래 서울로 넘어가자던 당초의 계획도 실현할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에 복무할수 없어 요새는 독한 마음까지 먹는다는것 같습니다.》

《허어! 그래요. 그건 정말 뜻밖인데요. 나같은 실업쟁이면 몰라라 과학자들이야 밑천이 든든해서 불안이 없겠는데요. 과학을 빼앗거나 훔쳐가지야 못하지요. 한데 독한 마음이란건 뭡니까?》

백씨는 이마살을 찌프리면서 로이터안경을 번뜩이고있는 민기환을 쳐다본다.

《별것이 아니지요. 오도가도 못할 신세가 되였으니까 제손으로 제 목숨을 끊고 이 세상을 하직하자는거지요.》

《끔찍한 소리! 세상만사는 다 살자는 놀음인데 그럴수가 있나 원. 그래 안선생이 실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우둔한것처럼 하면서 찔러본다.

《아니지요. 우리가 보건대 그렇다는겁니다. 이 추측은 틀림없습니다. 담보합니다.》

민기환은 잔을 부어주며 구도를 크게 잡은 연극의 수를 하나하나 꺼낼 차비를 하였다. 그는 지금 서울로 끌어낼수 없다고 본 안동권을 없애치울 작정을 하였고 그것을 안동권이 스스로 하게 된 자살극으로 연출할 작정이였다. 지금 여기서는 그 연극의 서막을 시작하는것이다.

《친구지간이라기에 귀띔해드립니다만 송죽같이 절개가 바른 안동권선생이니 그럴수도 있겠지만 이제라도 우리에게 손을 내밀면 살아날 구멍이 열릴수 있습니다. 수고스러운대로 한번 만나 이야기해보시오.》

《허어!》

백씨는 맥이 풀린 눈을 들어 쇠리쇠리한 말을, 그것도 전후좌우를 다 재서 빈틈없는것 같은 말을 하고있는 민기환을 쳐다보면서 허파가 빈 소리만 련발하고있다.

그때 《텅텅!》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지내 크고 거칠어서인지 백씨는 순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였다. 추화가 나가는것 같아 백씨가 문을 열고 내다보니 푸른 군복을 입고 총을 멘 보안서원 2명이 주인이 어데 있는가고 딸에게 묻고있다.

《왜 그러시우. 제가 이 집 주인이요.》

백씨는 태연하게 대답하면서 이마부터 찌프리였다. 보안서원가운데서 나이 좀더 먹어보이고 키가 큰 사나이가 장총을 어깨에 멘채로 마당한가운데 서서 인사를 하더니 용건을 말하였다.

《이 집 창고를 좀 보아야겠습니다. 우리 군수품을 뽑아낸 범인을 심문했는데 이 집에 그 물건의 일부가 있다고 합니다.》

《그럴수 없겠는데요.》

백씨의 목소리는 부르르 떨리였다.

쇠대를 열게 한 다음 보안서원들은 창고안에 들어가 퉁구리를 지은 모포, 군복, 광목들을 연방 마당에 굴려내였다. 그러다가 바오리를 끊고 모포퉁구리를 하나 헤치니 그안에서는 38식보총 2자루가 나졌다.

보안서원은 온 가족을 옴짝 못하게 출입을 금지하더니 얼마후 화물자동차를 끌고와서 군수품을 죄다 실어갔다. 맨 나중에 보안서원은 백씨에게 확인증에 지장을 찍게 하더니 휘딱 사라지고말았다. 술상도 거두지 못한채 방안에 갇혀있던 민기환은 총총히 어데론가 사라지고 이 집 식구들만이 남았다.

보안서원들이 아직 마당에서 떠나지 않았을 때 원시범이 들어섰다. 도가집에서나 느낄수 있는 음울한 공기가 이마전을 휙 스치였다. 오지 말아야 할데로 왔다는 후회가 생기였다. 백씨일가는 순식간에 란장판이 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것이 균형을 잃고 정상이 파괴된것이다. 그 어떤 세파에도 드놀지 않게 견고한 기초우에 완강하게 구축된 고풍의 이 기와집은 쉴사이없이 이 집 가장 백씨의 울분에 찬 웨침소리에 의해 들썽들썽하였고 피아노소리가 그윽하게 울리던 외동딸 추화양의 방에서는 끅끅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였다. 그런가 하면 눈부시게 흰 행주치마자락을 가볍게 날리며 양식 또는 중국식 료리를 번갈아 나르며 나비처럼 마당을 에돌던 하녀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어데로 사라졌는지 있고도 숨을 안쉬는지 알수 없을 정도로 이 마당안에는 화기란 전혀 찾아볼수 없고 하루에 한두번 굉장한 몸차림을 하고 례배당이나 유한 부인 모임에 나가던 이 집주인의 위풍당당한 행차도 볼수 없었다.

《아! 사람이 미치겠군.》

하루밤 자고나서 원시범은 악마의 소굴에 갇힌것처럼 머리를 싸쥐고 울부짖었다. 이 집이 란가로 된 그것이 원시범을 이렇듯 고통에로 몰아넣은것은 물론 아니다. 그보다는 강병철의 사건을 계기로 자기가 여직 새롭게 떼였다고 보았던 그 길이 뜻하지 않게 흔들레판에 깊숙이 빠져들었기때문이다. 언제나 심각해질줄을 몰랐으며 항상 명랑하게 살줄 알았던 그가 갑자기 말이 적어지고 사색 일면에만 치우쳐나가는것이다. 그는 훌쩍 일어나 청류벽쪽으로 걸음을 옮기였다. 대동강은 얼어붙고 어데를 보나 우울을 가실만한 정취를 찾아볼수 없었다. 그는 실성한 사람처럼 와삭와삭 마른풀을 밟으며 을밀대쪽으로 올라가보았다. 담배를 찾아 손을 넣으니 담배대신에 강병철이 내주던 편지가 손에 잡히였다. 어떤 소중한것인줄 알고 받아넣었었는데 궁금해서 뜯어보니 그것은 매우 은유적으로 된 유서같은것이였다. 강병철의 비굴한데 화가 치민 그는 북북 찢어서 차창밖에 뿌릴가 하다가 아무데나 쑤셔넣었던것이다.

《강병철이 좀 참으라구. 죽을수 나면 살수도 난다는 허황한 격언도 때로는 믿을 필요가 있다네, 어쨌든 내가 살아날 구멍을 찾을테니까 기다리게. 이제 최준걸을 만나 상보를 제기하겠네. 그것이 안되면 다른 수를 쓰고, 이것이 하나의 안이고 다른 안은 다시 오던 때처럼 고도도약을 해서 서울로 가는거네. 거기 가보고 수가 틀리면 안국동 뒤골목 그 줄을 쥐여도 되는것이고. 그것도 맞갖잖으면 나는 교또시절의 그 통로로 뻗는것이고 강병철이 자네는 자네대로 려순공대 그 줄을 쥐고 만주땅을 밟으면 되는거네.》

이렇게 혼자소리를 하며 환상의 줄을 늘이자 그의 눈앞에는 모란봉설경이 아니라 일본의 옛도읍 교또의 동북쪽 대숲이 우거진 아늑한 오솔길이 떠오른다. 그는 짬이 있으면 대숲사이로 열려진 푸른 하늘에 희망을 날려 미국 하바드대학 교정을 거닐고있는 자신을 그려보군 했다. 때로는 노벨상수상식에 참가해서 검고 후렁후렁한 례복에 수실로 장식한 사각모를 쓴 자기를 보기도 하였다. (지금 여기 북조선에서는 차츰 남조선에 진주한 미국에 대해서 경각성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미국은 쏘련 등 반파쑈진영속에서 큰몫을 담당한 문명국이 아닌가.) 원시범은 을밀대에 올라가서 성돌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어방에 자기가 걸어가야 할 어떤 길안내도가 적혀있기라도 한것처럼 유심히 살피고있었다.

《여기에 있는걸 모르고,… 왜 이렇게 혼자 나오셨어요.》

고개를 돌리니 진하게 화장을 하고 여우목도리를 두른 백추화가 한폭의 그림처럼 단풍나무언덕에 서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나왔소?》

구슬픈 심정이 어린 원시범의 물음이다.

《내가 여기 오면 안돼요?》

그도 역시 이런 가시돋힌 감정을 보이고싶은것은 아니였는데 그렇게 깔금하게 되여지는것을 어쩌는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사랑이란 이토록 합리적인것인지 알수 없다고 원시범은 생각하였다. 그렇게도 우울하던 기분이 삽시간에 밝아져서 눈에 비쳐오는 모든것이 아름답고 정겨워보이였다. 을밀대 소나무들은 푸른 가지에 흰눈을 담뿍 이고서서 찬란한 저녁해빛을 받고있다. 하늘도 마냥 푸르다. 원색이 잘 어울린 모란봉의 경치는 참으로 류다른 느낌을 주는것이였다. 그보다 더 좋은것은 한껏 더 아름다와진 백추화의 모습이였다. 약간 순진할사한 웃음이 노상 감돌고있던 눈언저리에 지금은 사색이 깃들어 한층 더 인품을 돋구고있다. 바람이 불어올적마다 그에게서만 맡을수 있는 독특한 체취가 원시범을 취하게 만든다.

《왜 그렇게 되였소, 집이?》

원시범은 아픈데를 다치는것이 안됐지만 그래도 알아야 직성을 풀수 있어서 이렇게 직발 물었다.

백추화는 설음을 터칠데가 없어 애타하던 때라 곧 《말씀드려야겠어요. 그래야 나도 숨을 쉴것 같아요.》하고 한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말하였다. 《결국 돈때문이지요. 아다싶이 아버지의 인생관은 첫페지에서부터 마지막장까지 수지타산으로 꽉 차있으니까요.》

백추화는 아무런 울분도 없이 마치 판판 무관계한 그 누구의 말을 하듯이 자기 가정사를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목재상을 하면서 겸해 평양법교국(일제말기에 이름있던 큰 동약국)에 생약을 넘겨주는 중류자산가 백씨는 해방이 되면서 갑자기 영업궤도를 잃게 되였다. 양덕에서 탄광들에 넘겨주려던 동발목 수만립방은 한달어간에 어데론가 날아나버렸다. 한껏 구차해졌을 때 외사촌되는 수단군이 나타나 재산을 통털어 사동벌에 널린 군수품을 사자고 하였다. 품목은 광목, 모포가 위주이고 일부 쌀도 있으며 굉장한 량의 자동차다이야도 있다고 하였다. 그것을 슬쩍 사두었다가 다시 내놓아도 되고 한단계 가공을 거치면 그것은 그것대로 고부라진다고 하였다. 며칠사이에 백씨는 온 재산을 다 긁어모아 약차한 금액을 중개자에게 넘겨주었다. 투전목을 조이듯 시간을 재는데 약속한 기일을 3번이나 어기였는데도 당사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알고보니 협잡군은 남조선으로 내뺐던것이다. 그런 정도로 기가 꺾일 백씨가 아니였다. 완력패 3명을 사서 서울에 보냈는데 보름만에 빈손으로 돌아왔다. 거간군은 생판 허풍쟁이인데 군수품을 굉장히 샀다는것을 보이기 위해 몇달구지 실어다가 곡간에 가져다두었던것이다. 그것마저 싹 실어갔다는것이다. 이것이 백씨를 망하게 한 사건의 전모이다.

《돈을 벌게 해주는 조건하에서만 예수그리스도도 거룩한 존재로 되거든요. 우리 아버지앞에서는.》

백추화는 구슬픈 목소리로 이렇게 야유하면서 원씨가 이 집에 기둥이 되여 새롭게 살아나갈 길로 이끌어달라는 심정을 로골적으로 내비치였다.

《허허허.》

원시범은 처량한 소리를 내였다. 누가 난파선인지 누가 구조선인지 알수 없었다. 하여 원시범은 설상가상이 될가봐 강병철이와 자기자신에게 다닥친 복잡한 인생문제, 순수 추상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 자기 지향, 량심 이런것때문에 생사기로에 놓여있다는데 대해서는 조금도 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그는 래일아침 행정10국가운데서 경제적명맥을 장악한 산업국에 찾아가 최준걸이란 성대출신간부를 만나야겠다는것만을 말하고 만수대쪽으로 에돌아 내려왔다.

예정했던대로 그이튿날 원시범은 산업국에 찾아갔다. 대동교에서 그닥 멀지 않은 네거리에 자리잡은 산업국은 려관으로 쓰던 2층집이였다. 마당에는 한대의 야전용 풍차가 서있고 눈을 무져놓은 마당가녁에는 한 댓대의 자전거를 세웠다. 현관에 들어서는데 《여기로 오시오.》하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리니 자그마한 접수구에서 중년사나이가 손짓을 하였다.

《어데로 가시오?》

《네! 흥남인민공장에서 왔는데 책임자동지를 만나려고 합니다.》

《어느 책임자말인가요?》

《어느 책임자이라니요. 여기에 책임자가 몇이나 되게요.》

《하하, 이 손님이 이쪽으로 들어오시오. 보아하니 말이 좀 길어질것 같소.》하고 접수구 사나이는 싱글벙글 웃었다.

《난 시간이 바쁜데요. 최준걸동지 있지 않소. 안경을 끼고 색시처럼 곱게 생긴…》

《알만해요. 그래 들어오라고 하잖소.》

원시범은 벌써부터 얼떠름해졌다. 그래 홀동광산인지 백년광산인지 어느 광산에 있다가 행정10국이 나오면서 여기서 일하게 된, 이런 등등을 섬겨댈수록 저쪽에서는 그거 다 알겠는데 조급해 말고 들어오라고 하는것이였다. 원시범은 책상 하나에 의자 2개가 놓인 비좁은 방에 들어가 앉았다. 우선 어떤 장애가 가로막힌다 해도 필사적으로 뛰여넘을 심산으로 담배 1대를 태우며 마음의 신들메를 조이였다.

《최준걸동지와 어떤 사이인가요?》

중년사나이는 줄무늬가 뚜렷한 모직 제낀옷에 머리가 강굴강굴하고 록록치 않은 예리한 눈을 가진 원시범을 쳐다보면서 침착하게 물었다. 《나는 본궁화학공장에서 일하는데 좀 토론할것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용무는 이것이 다지요. 이전에 한두번 공장에서 만나 사업토의가 있었구요.》

《아! 그렇습니까. 알만합니다. 그런데 동무가 만나자는 그 최준걸동지는 며칠전에 이렇게 돼서 성흥광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렇게라고 표현하는 그때 사나이는 손으로 목을 썩뚝 베는 시늉을 하며 웃어보이였다. 원시범은 마치 그 누구의 목이 아니라 자신의 목이 베여지기나 한것처럼 목을 뒤로 젖히며 낯을 찡그리였다. 잠시후 다시 정색해져서 그는 물었다.

《롱담은 그만하고 사실을 말해주시오. 어떻게 된겁니까 도대체.》

《예나 지금이나 관청에야 출세가 아니면 효수가 있는 법이 아닙니까. 그것이 없이야 무슨 권력이겠소.》

약간 이그러지기는 했지만 록록치 않은 지식분자가 틀림없었다. 얼마동안 롱담투로 주고받다가 실토하는데 최준걸은 지식분자들을 옹호하다가 오기섭이라는 공산당안의 큰 인물에게 걸려서 내몰리였다는것이다. 그래서 백년광산에 있던 처자를 데려왔다가 밥가마도 걸어못보고 다시 금을 생산하는 성흥광산에 내려갔다고 하였다. 직접 들은것은 없고 돌아가는 말에 의하면 최준걸은 공업을 복구하는데서 왜정때 기술자들을 얼마간 인입하였는데 그것이 우리 공장, 광산을 다시 친일분자들의 손에 넘겨준 과오로 되였다는것이다.

《나도 당신네와 같은 족속인데 곡산공장에서 전분이나 기름을 뽑는 기술이 있어서 행여나 하고 찾아왔다가 벼락탕을 맞고 자리를 내놓았수다. 공교롭게 되였지요. 고장난 기계를 수리해서 금방 돌리자고 하는데 그날밤에 불이 났수다. 몽땅 탔지요. 알고보니 미국놈에게 붙어먹던 기술자 하나가 불을 지르고 내빼다가 체포되였습니다. 이런 판이니 공산당의 해석도 무리는 아니지요. 최준걸은 진짜 량심적인 사람인데,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지금은 첨예한 계급투쟁의 시대가 아닙니까. 이내몸도 오늘까지 여기 앉았다가 달구지를 하나 세내서 가마를 떠싣고 고향 황주로 가자는것입니다. 그건 그렇고…》하며 그 사나이는 당직일지를 벌컥벌컥 뒤지더니 물었다. 《선생님 성함이 무엇이요?》

《원시범입니다.》

《옳습니다. 여기 적혀있습니다.》

《내 이름이 거기 적혀있다구요?》

《이거 보십시오. 원시범 옳지요. 빨리 공장으로 돌아오라고 전화가 왔다는겁니다.》

원시범은 더 깊이 묻지 않고 되돌아섰다. 모든것이 예상했던대로이다.

산업국접수실에서 나온 그는 대동강가로 걸어 련광정쪽으로 올라갔다. 흥남에 가나 평양에 오나 지금 인테리라는 그 무정형의 인간군에게는 진회색이거나 아니면 애매한 보라색으로 도색되여있는것이다. 이것이 그 산업국문칸을 지키고있던 사나이가 본 색채이자 우리모두가 접수해마지 않아야 할 색조인것이다. 그렇다면 강병철이 이미 체념해버린 그 결론이 옳은것이 아닌가. 그는 강바람이 스산해서 목깃을 세우고 량쪽 염낭에 손을 지른채 얼음이 건너간 강바닥에 들어섰다. 하얀 백지장같은 눈덮인 얼음판을 내려다보느라면 거기에는 진정 그 어떤 위선이나 불의에 의해 가공된 생활은 없고 오직 순결한것만 비쳐있는것 같았다. 그는 마치 깨끗한 리상세계에 이른것처럼 숙연한 감정에 사로잡혀 사색을 더듬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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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원시범은 결코 실망하거나 번민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모든 사물은 이런 양태도 있고 저런 현상도 있는 법이다. 여기서 인테리를 싫어한다면 여기를 버리고 다른데로 가면 될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에 의한 우리의 강요가 부당한것처럼 우리의 강요에 의해 그 누구의 견해나 립장을 바꾸는것도 옳은 처사가 못된다. 그러나 한가지 대전제와 모순되는 점이 있다. 대전제란 내가 직접 듣고 환성을 올린 10월 14일 김일성장군님의 개선연설이다. 연설에서는 분명히 《지식있는 사람은 지식으로》라는 표현이 있었다. 이것은 이 북조선지역 나아가서는 3 000만 일반에게 해당되는 론리의 대전제이다. 현실에서는 지금 이것과 상반되고 모순되는 점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이제 그 전제를 근거로 강병철이 다시 구원될 가망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내뗀 지향에서 키를 돌릴것인가, 다시 38°선을 넘어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나갈것인가. 주어진 두점사이를 련결하는 직선은 단 하나뿐이라는 공리는 옳기는 하지만 일면적인것이다. 강병철이 집착되여있는 그 일면적해석에서 과감하게 빠져나와야 한다.

얼음구멍이 나졌다. 유리알처럼 투명한데를 들여다보니 강바닥이 환히 들여다보인다. 고기잡이군이 요행수를 견주는 구멍이다. 물밑에서 팔뚝같은 물고기가 느릿느릿 움직이고있다. 하기야 이 강바닥에서만도 요행수를 바라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이 넓은 세상을 두고 그것을 전혀 무시하는것은 말이 안된다.

뒤에서 인적기가 나 돌아보니 백추화가 서있다. 그들은 얼음판에서 나와 대동문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였다.

《추화!》하고 부르며 원시범이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거기는 인적기가 드문 돌담안쪽구석이였다. 처녀는 대답 대신에 물기가 촉촉히 젖은 눈을 들고 쳐다보았다. 《사정에 의해서 내가 먼저 량해를 구하지 못했는데 나는 이제 서울로 가겠소.》

《뭐라구요?》

너무도 놀라운 일이였다. 그 무엇인가 불안을 느끼기는 했어도 이렇게까지 놀라운 일에 다닥칠줄은 정말 몰랐다.

《그건 어째서요?》

《그 리유에 대해서는 몇마디 말로 설명해낼수 없소, 저번날에도 말했지만 강병철씨도 그렇고 또 나도 그렇고 우선 우리는 운명의 기로에 놓여있는거요. 그래 첫 출발을 정확히 하기 위해 가는거요.》

《그러면 여기 온것은 그의 출발이 아니였는가요?》

백추화가 알기에도 서울에서 바로 그것을 위해 몇밤이나 론쟁을 한뒤에 38°선을 넘어섰던것이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된 백추화는 로골적으로 《그것은 결국 나에 대한 혐오감이거나 아니면 결별이지요?》하고 절망적으로 물었다.

《아니요, 아니요.》하고 원시범은 당황해서 웨치였다. 그러나 처녀는 너무나 첫 타격이 커서 리성을 가다듬을수가 없었다.

《알겠어요. 다 알겠어요.》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했던 처녀는 가정분위기로 보나 자기 처지로보나 애오라지 한 사나이에게 의탁할수밖에 없었는데 그 기대가 너무나 급격히 무너지게 되니 마음을 종잡을수가 없었다. 원시범은 자기의 차후행동은 어디까지나 직업과 관련된것이지 그것이 절대로 애정에 관계되는것이 아니라고 설복하였지만 그렇게 될수록 처녀는 더욱더 가슴을 박박 쥐여뜯었다.

원시범은 어떻게 해야 애정에 변화가 없다는것을 납득시킬지 알수 없었다. 그는 두손으로 추화의 볼을 싸쥐고 쌍까풀진 눈을 들여다보았다. 언제나 기쁨과 희망을 속삭여주던 검은 눈동자는 금시 불이 꺼진 숯덩이처럼 되고말았다.

원시범은 당황해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웨치였다.

《나는 추화씨를 사랑하오. 나는 백추화를 피해가는것이 아니라 나와 백추화앞에 가로막아서는 불행을 피해가는것이요. 솔직히 말해서 여기서는 우리가 살수 없게 되여있소, 우리가 38°선을 넘어올때 내다보던 유토피아는 다 무너져 황무지가 되였소. 자! 보오, 그렇게도 고지식하고 완강한 강병철이도 이렇게 자기 아들에게 유언같은것을 써보내고있소. 지금 흥남보안서에 감금되였소. 얼마간 기다려주오. 내 이제 갔다가 데리러오겠소. 진정이요.》

이때 원시범은 여직까지의 그 복잡한 과정을 다 설명해낼수 없다는것을 알았다. 하여 그는 《나는 당신을 버리지 않는다》를 강조하다나니 절대로 내놓아서는 안될 대구로 보내는 편지를 꺼내게 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원시범이 이것저것 설명을 하면 할수록 백추화에게는 그것이 더 큰 의혹으로 되였으며 《내가 싫어났지요. 결별이지요.》하는 극단한 해석에로 이끌어가게 되는것이였다.

얼굴을 싸쥐고 울고있던 처녀는 두팔로 원시범의 가슴을 떠박지르며 몇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만하세요. 다 알겠어요, 저를 더 이상 설복할 필요는 없어요. 기억나세요. 흥남에서 나한테 뭐라고 했어요. 앞으로 북조선에는 공산주의정권이 설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용납할 각오가 되여있다, 왜 그런가, 세상에는 권력밖에 존재하는 인간이란 없기때문이라고 했었지요. 난 그것을 믿었댔어요. 그런데 그후 몇달이 지났는데 이렇게 종이장 번지듯 하는가요. 맘대로 떠나가세요. 그러나 남자대장부가 그렇게 함부로 변해서는 어데 가도 성공 못해요. 아! 결국 그것이 아니지요, 우리 집이 파산됐다고…》

백추화는 온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그렇게도 부드럽고 온화하던 처녀의 눈에서 독기가 내뿜기였다. 사랑이 크고 절절했던 그만큼 그에게는 적개심과 반발이 크게 일어났다. 백추화는 꼿꼿이 선채로 몇초동안 쳐다보다가 홱 몸을 돌려 경상골쪽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원시범은 넋없이 서서 보는데 처녀는 아무런 미련도 기대도 없이 한번 돌아다보지도 않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원시범은 오도가도 못하고 그자리에 서있었다. 머리우에서는 잎을 한장도 가지지 못한 느티나무가지가 바람에 몹시 흔들리였지만 거기서는 아무 소리도 들을수 없었고 오직 《그만하세요. 다 알았어요.》하는 야멸찬 처녀의 목소리가 귀를 아프게 울릴뿐이였다. 대동문앞 돌층계에 앉아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서 그는 속으로 플로렌쓰사람들에게 유명한 하나의 격언을 상기하였다. 《시비질을 할테면 하라. 나는 나대로 살아갈것이다.》 그는 이것을 두번 거듭 외우고나서 평양역으로 나가는 전차길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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