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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계승자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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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8,770회 작성일 20-08-03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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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25

 

힘껏 내리치는 곡괭이날 끝에서 불꽃이 번쩍이고 돌가루가 연기처럼 풀썩 일었다. 곡괭이날이 맞받아 튕겨나는것을 보면 보통돌쪼각같지는 않았다.

채순봉은 눈을 지리감고 또 한번 참나무로 된 곡괭이자루를 거머쥐고 휘둘렀다. 곡괭이날이 두터운 탄성고무에 부딪친것처럼 탕 튀여올랐다.

반충을 받은 팔이 전류에 감전된듯 지르르 울렸다. 자기 팔같지 않았다. 팔의 아픔이 사라지자 손바닥이 쓰려났다. 손바닥 곳곳에 콩알처럼 여러개 맺힌 물집중에서 집게손가락 안쪽의것이 터진것이였다. 물집의 살가죽이 벗겨져 속살이 벌겋게 드러났다. 손이 칼에 찔리기라도 한것처럼 쿡쿡 쑤셨다.

《제길-》

순봉은 화가 나서 곡괭이자루를 발치에 집어던졌다.

젖은 눈판우에 그대로 주저앉는데 돌격대소대장 광천이가 아귀센 손에 삽자루를 막대기처럼 가볍게 쥐고 다가왔다. 철제일용품공장에서 온 제대군인청년이다.

저쪽에서 한바탕 삽질을 했는지 땀에 젖어 김이 문문 나는 얼굴과 실한 목을 수건으로 문대고난 그는 맥살놓고앉은 순봉을 넌지시 띠여보았다.

《곡괭이질이 힘들지?》

그는 입술구석에 흰 버덩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채순봉은 그가 자기를 당당한 청년돌격대원이 아니라 손아래동생을 대하는것 같은 지나친 동정과 친절을 베푸는것이 싫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관심을 피할수 없었다.

《손을 이리 내라구.》

《뭘 말이예요?》

순봉은 손을 등뒤로 감추었다.

《물집이지?》

《하나 생겼더랬는데 터졌는걸요.》

《고작 한개?》

《그럼요.》

소대장은 미심쩍은듯 고개를 기웃했다.

《순봉인 왜 곡괭이질할 때 벙어리장갑을 끼지 않아?》

《곡괭이자루를 어디 꽉 쥘수 있어야지요.》

《손바닥살이 연한것도 있겠지만 곡괭이자루를 꽉 거머쥐면 물집이 더 생겨. 곡괭이를 세게 휘둘렀다가 끝머리가 땅을 찍는 순간에 자루잡은 손을 살짝 놓았다 쥐란말이야. 그럼 팔이 울리지도 않구 물집은 덜 생겨.》

《정신없이 곡괭이질을 하는데 언제 그렇게 구체적으로 머리를 쓸새 있어요?》

《요령을 터득하지 않고 일을 닥치는대로 해선 안돼. 힘만 들구 능률은 덜 나.》

소대장은 더 시비를 가리려하지 않고 순봉이 발치에서 곡괭이를 집어들고 의사가 환자의 배를 손타진하듯 돌모서리를 툭툭 건드려보았다.

순봉은 자존심이 상해 벌떡 일어났다.

《곡괭이를 이리 줘요. 내가 마저 파낼게. 돌쪼각이예요.》

그러나 순봉은 소대장 광천의 힘센 손에서 곡괭이를 뺏아낼수 없었다.

《작은 돌이 아니야. 바위같아.》

소대장은 침착히 뇌이고나서 곡괭이끝으로 가만가만 흙에 묻힌 돌의 가장자리를 파들어갔다. 점점 크기를 가늠할수 없는 바위가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청석바위군. 두어t은 나가겠어.》

소대장은 걱정스레 말했다.

《제-길, 우리 소대구간은 맨 바위투성이야.》

순봉은 얼룩소잔등같이 군데군데 반나마 눈녹은 산마루쪽에 시틋한 눈길을 던지며 불만스레 내뱉았다.

《탄광고개길구간을 맡은 2소대랑 1소대랑은 잔돌섞인 푸석땅이 돼서 벌써 절반나마 길닦기를 했대요.》

《그대신 우리 3소대는 달구지길을 넓히니까 토량처리는 적어. 나이어린 청년들 소대라구 대장이 생각해줬지.》

《대장이 생각해줬을게 뭐예요. 탄광고개길부터 1소대 순서로 내려오면서 토막을 쳐서 차례진거지.》

《그래두 대장은 괜찮아, 청년돌격대지휘부를 우리 소대곁에 둔걸 보면. 후방물자 나눠주는것두 우리 소대청년들이 나이 어리다구 더 주지 않아.》

《그거야… 지휘부식당에 부식물이 넉넉해야 되니까 그런거죠.》

《이거 순봉이 꽤 까다롭다. 청년돌격대원은 일이나 수걱수걱하면 되지 아무데나 코 디밀어서는 안돼.》

《그저 눈에 보이는걸 말한거예요.》

광천은 버덩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람이 정의감이 있는건 좋아. 그렇지만 순봉인 어떤 일은 그렇거니하고 스쳐보낼줄도 알아야 해.》

《어쨌든 난 대장이 싫어요.》

《왜? 심부름시켜서?》

《그런것도 있지요.》

《순봉이… 도사로청에서 우리 령산탄광청년돌격대를 조직할 때 대장이 순봉이를 받아주지 않았다지?》

채순봉은 갑자기 벙어리가 된듯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는 소대장이 자기의 지난 공장생활경력을 죄다 알고있으면서 우정 그러지 않나 하고 살펴보았다.

그러나 소대장의 흰자위가 적은 진한 갈색눈동자속에는 조롱하거나 떠보는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으리만큼 순진하고 어질어보이는 그 눈에는 단순한 호기심이 조용히 떠돌고있었다.

순봉은 마음이 놓여 삽자루를 집어들었다.

《뭐 대장이 사람을 받고말고 하나요. 난 아버지만 떠밀지 않았으문 이런데 오지도 않았을거예요.》

《여기가 어쨌다구 그래?! 일이 힘들어서?》

광천의 미간에 두줄기 홈이 내리패웠다.

순봉은 소대장의 언짢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말이 청년돌격대지 무슨 빛이 있어요?》

소대장은 입귀에 버덩이를 얼핏 드러내며 비웃음을 지었다.

《번개불같은 섬광을 비쳐달라나? 순봉인 뭘 바라나. 훈장? 영웅?》

《그렇지 않구요. 하지만 이런 산골에서 길닦기공사나 해가지구야 어림도 없잖아요.》

광천은 순봉의 허영심과 어리석음을 비난하고싶은듯 마뜩지 않은 눈길로 보더니 끝내는 말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하고는 바위가장자리 흙을 부지런히 헤쳐놓았다.

《소대장동무는 내게 공명심이 가뜩하다고 우습게 보지 말라요.》

《위훈을 세워 훈장을 타구 영웅이 되겠다는건 좋은 일이야. 그런 욕망과 야심이 없으면 청년이 아니지. 하지만 공명심은 때와 장소를 가리는것이야. 순봉이 말마따나 여긴 누가 알아주지 않는 길닦기공사장이야. 이제 한두달쯤 일하구는 청년돌격대가 해산되구 제 직장으로들 돌아갈거야. 순봉이한테 어떤 명예가 차례지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성실한 땀을 바쳐 닦은 이 길로 자동차들이 석탄을 꽝꽝 도시에 실어오는걸 보문 흐뭇하지 않을가? 영예는 가슴팍에 다는게 아니라 땅에 새겨놓아야 해.》

광천은 누빈 솜옷을 벗어놓고 메를 집어들었다.

순봉은 자기의 진속을 모르는 소대장에 대해 안타까움과 억울함을 느꼈다. 가슴에 공로메달이라도 달고 버젓이 공장에 나타나면 얼마나 돋보일것인가.

그것으로 공장사람들한테서 철딱서니없는 녀석이라는 오명을 벗을수 있잖을가. 그리고 석화… 처녀앞에서 번쩍거리는 위훈을 세운다면 얼마나 멋질것인가.

한때 발을 잘못 디뎌 그렇지 실지는 훌륭한 청년이란걸 증명할수 있잖는가.

그런데 이런 한적한 산골에서 달구지길이나 넓히는 일을 해가지고야 무슨 소원을 성취한단말인가.

《정대를 달라구!》

소대장이 큰소리치는 바람에 그는 정신이 펀뜻 들었다.

순봉은 정대를 집어 도전하듯 소대장에게 내밀었다.

《메질을 내가 하겠어요.》

광천은 야무지게 나오는 순봉이와 싱갱이를 벌리려하지 않고 묵직한 메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벙어리장갑 낀 손에 정대를 틀어쥐고서 청석바위의 터진 틈사리에 끝을 대였다.

《치라구.》

순봉은 두손으로 가느다란 물푸레나무로 된 메자루의 뒤쪽을 모두어잡고 별반 겨냥하지도 않고 단번에 휘둘러 버섯모양의 정대머리를 때렸다.

이어 메는 춤추듯 온몸과 팔의 률동으로 공중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정대머리를 세차게 내리쳤다.

《메질은 괜찮게 하는구나.》

광천은 터져나가는 청석부스레기에 눈을 상할가봐 쪼프리고서 넌지시 칭찬했다.

순봉은 그쯤한걸 가지고 그러느냐고 피식 웃었다.

그는 이 산협길닦기에서 메질의 요령을 터득했다.

휘친거리는 물푸레나무자루의 탄력과 정대머리에서 반발하는 메의 튐성을 리용하면 힘을 덜 들이면서도 메질의 회수를 높이고 세괃게 해댈수 있었다.

순봉의 입에서 서리발김이 뿜어나왔다.

《교대할가?》

《일없어요.》

순봉은 숨이 차오르고 맥이 빠지는것을 느꼈지만 이를 악물고 메를 휘둘렀다.

버성긴 잡관목숲가에 자주색털수건을 목에 둘러감은 석화가 두손에 김이 문문 나는 법랑바께쯔를 갈라들고 오고있었다.

메질을 하는 순봉의 정신이 처녀쪽에 쏠렸다.

그는 석화가 법랑바께쯔를 땅에 놓고 소대장이 있는 이쪽으로 올가, 마른 개울쪽에서 석축할 돌을 주어내는 돌격대원들쪽으로 갈가 망설이는것을 보았다. 그리고 석화가 메질을 하는 자기를 다정한 눈매로 지켜본다는것도 알았다. 순봉은 어쩐지 기운이 빠지던 몸에 힘이 솟구쳤다.

(제길, 이쪽으로 올게지.)

그는 돌격대생활기간에 석화와 자주 만나지 못했다. 석화는 소대와 돌격대지휘부사람들의 식사를 맡아서 눈코뜰새없이 바쁜데다가 강운학대장의 성칼스러운 눈초리를 피해서 만나는것이 귀찮았다.

한순간 순봉이 헛눈파는 사이에 메질이 정대모서리를 슬치여 빗나갔다. 버섯머리에서 파편쪼각이 떨어지고 광천의 손에 낀 벙어리장갑이 찢어졌다. 손가락을 다칠번하였다.

소대장은 끔쩍도 하지 않고 당황해하는 순봉이를 올려다보더니 정대를 놓았다.

《무리했어. 쉬자구.》

소대장은 잡관목숲가에 머물러있는 석화를 오라고 손짓했다.

정대를 잡고 메가 떨어지는데 신경을 쓰느라 못 보는것 같아도 다 보고있은것이였다.

《오늘 곁두리는 감자야?》

광천은 석화의 손에서 삶은 감자와 배추국을 담은 법랑바께쯔를 받아놓았다.

《대장동지가 떡은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래. 쌀을 아껴야지.》

광천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순봉이한테 먹음직하게 터갈라진 큼직한 감자를 집어주었다.

순봉은 한걸음 물러섰다.

《소대동무들이 온 다음에 먹겠어요.》

광천은 한눈을 끔쩍여보였다.

《먼저 먹으라구. 내 소대원들을 데려올게.》

광천은 솜옷을 집어들고 개울쪽으로 내려갔다.

순봉이와 석화는 침묵속에 소대장이 자기네들을 남겨놓고싶어 갔다는것을 느끼면서 마주서있었다.

《왜 소대장동무를 말리지 못했어요?》

석화가 물었다.

《동무와 같이 있고싶어서.》

순봉은 솔직히 말하고 자기의 렴치없는 처사에 스스로 얼굴을 붉혔다.

《배고프지요?》

석화는 순봉이가 삶은 감자를 우물우물 먹는것을 손우누이와 같은 정겨운 눈매로 지켜본다.

《응.》

순봉은 어리숙한체 순종해보이고 목구멍이 메도록 대충 씹은 감자를 삼켰다. 저녁밥은 일을 늦게까지 하고 날이 캄캄하게 어두워져야 먹게 되니 작업장에 나온 새참으로 미리 시장기를 눌러야 하는것이다.

그는 석화가 또 한개 집어주는 감자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처녀앞에서 점잖게 처신하던가 하다 못해 약간한 체면이라도 차려야 한다는걸 알았지만 배속에서 꿈틀거리는 주린 욕망은 그따위 례의를 헌신짝처럼 차던지였다.

석화는 감자를 또 집어주면서 타이르듯 나직이 말했다.

《그렇게 배고파하면서 왜 식당에 오지 않아요?》

《대장동무한테 들킬가봐.》

《보면 뭐래요?》

《요전날 어스름때 식당천막 뒤켠에서 석화동무를 만날가 하고 기다리는데 불시에 누가 내 어깨를 철썩 치겠지. 보니까 대장이야. 입에서 술냄새를 풍기며 내게 윽박지르지 않겠어. 청년돌격대원이 구차스레 뭘 더 얻어먹을가 하고 식당주변에서 기신거리지 말라는거야.》

석화는 꽁진 머리를 매만지며 근심많은 녀인처럼 한숨을 쉬였다.

《좀 참아요. 이제 지원물자랑 오문 밥그릇이 높아질거예요.》

자기의 주접스러운 행동을 조금도 나무람하지 않는 처녀의 아량넘친 말은 순봉의 마음을 울렸다.

순봉은 처녀의 침착하고 지혜롭게 반짝이는 눈과 익은 복숭아빛얼굴이 자주빛목도리에 어울려 눈부시게 아름다운것을 보았다.

그는 푸른 소나무에 덮인 흰눈처럼 깨끗하고 신성해보이는 처녀를 허기진 배를 달래는 보잘것 없는 욕망에 어지럽혀진 눈으로 바라보는것부터가 죄스럽게 느껴져 슬며시 눈길을 돌렸다.

그는 이 청년돌격대에 와서 한달 남짓한 기간에 더 어른스레 숙성하고 생활경험이 많은 녀자처럼 세련되고 여유있는 성품을 갖춰나가는 석화를 기쁘면서도 부럽고 쓸쓸한 마음으로 생각하고있었다.

자기를 그토록 생각해주고 자기와 가장 가까우며 자기가 눈동자처럼 보호하고싶은 욕망에 끓는 처녀의 성장이 그지없이 기뻤으나 한편으로는 마치도 인간수양의 봉우리에 올라선것 같은 처녀의 그런 인품이 아직도 수양의 개바닥에서 헤매는 자기와 너무도 거리가 멀어진데서 오는 소외감과 아릿한 실망감이였다. 순봉은 자기의 이런 복잡한 심중의 갈피를 막연하게 헤쳐보기는 하면서도 그것이 우정인지 사랑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처녀에 대한 자기의 순진하고 타오르는 불길처럼 뜨거운 감정을 단순히 우정도 사랑도 아닌 인간애의 고상하고 열렬한 모든 감정을 다 합친것만큼 크고 류다른것으로 여겼다.

자기가 청년으로서 교양없이 처신하고 리성에 지배되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모순된 인간이라는것을 알면서도 처녀에 대한 감정만은 그런 숭고한 의미로 자부하는것이였다.

그래서 이렇게 배고픔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처녀의 은총을 받으면서 서있는것이 즐거운것이였다.

《석화, 난 아무래도 우리 아버지가 말하는 그… 사람질이란걸 못해낼것 같아.》

《배고픈걸 못 참아서요?… 그야 청년돌격대일이 힘들고 <돌이라도 소화시키는 나이>가 돼서 그런걸요. 먹는걸 비천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일없어요.》

처녀의 리해심과 융화가 순봉에게는 별로 위로가 되지 못했다.

《난 말이지 시내에서 동무들과 밀려다닐 땐 선반기 돌리기 싫고 맥주나 마시면서 놀아대는게 나쁘다는걸 알면서… 아버지가 그렇게 욕질하는데도 참아내지 못하고 방아간에 날아다니는 참새격이 됐어. 청년돌격대에 와서 그런대로 일에 맘 붙였지. 석화를 내놓고는 소대동무들이 다 날 모르지 않아. 그래서 새 출발하는데 글쎄 이번엔 우습게도 배집이 날 머저리로 만들거든.… 석화, 웃지 말어. 난 먹는 문제를 말하자는게 아니라 뭐든지 욕망을 참아내는 재간이… 아니, 의지라고 할가. 그런게 나한테 쪼꼼도 없다는것이야.》

순봉은 먹던 감자알을 침울해서 들여다보았다.

석화는 자신을 랭정히 돌이켜볼줄 알고 잘못을 가식없이 드러내는 순박성이 쩌들지 않은 이 청년에게 진심으로 마음 끌리였다.

처녀는 땅바닥에서 순봉의 솜옷을 집어 눈을 털었다.

《입어요. 감기 들겠어.》

아래쪽 개울에서 소대원들이 올라오는지 웅웅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잡관목숲에서 강운학청년돌격대장의 오소리털모자가 불쑥 나타났다.

몸집이 뚱뚱한 그는 순봉이한테는 어방없이 클 솜옷이 작은지 아니면 지휘부천막의 도람통난로를 쪼여 열이 나선지 앞자락단추를 끌러놓았다. 솜옷의 안거죽은 깨끗했고 때묻지 않은 목깃이 하얀 와이샤쯔는 느슨히 동인 혁띠우에서 보기 좋게 부풀었다.

그는 아래가랭이가 좁은 솜바지주머니에 한손을 찌르고 바른손은 실한 허리춤에 얹고서 느직느직 다가왔다.

《순봉이가 날쌔단말이야. 소대원들이 오기 전에 감자를 해치우는걸 보면.》

강운학이 롱으로 찔러대는 말에 석화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내 몫을 먼저 먹는거예요.》

순봉은 픽 쏘아붙이고 돌아섰다.

《꼬맹이같은게 롱질도 몰라.》

강운학은 허리를 굽히고 성난 순봉의 얼굴을 기웃이 엿보았다.

《롱담속에 진담이 있다구 했어요. 그리구 난 <꼬맹이>가 아니라 당당한 청년돌격대원이예요.》

《꼬맹이라는 별명이 뭐가 나빠서 그래?! 좋아, 그럼 이제부텀 청년돌격대원 채순봉동무라구 불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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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소대원들이 우르르 쓸어올라왔다.

그들은 강운학의 눈치를 살피며 인츰 감자바께쯔에 달라붙지 못했다.

《어서들 먹으라구.》

강운학은 턱짓으로 권했다.

그래도 소대원들은 대장이 어려워서 쭈물거렸다.

소대청년들은 대개 순봉이보다 나이가 한두살 더 먹은 정도여서 그다지 푸접이 좋지 못했다.

석화가 법랑바께쯔를 그들앞에 옮겨놓아서야 청년들은 하나 둘 허리를 굽히고 감자를 집어들었다.

석화는 순봉이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개울쪽으로 내려가는것을 보았다. 처녀는 마음이 아팠지만 대장앞에서 어떻게 표현할수 없었다.

뒤늦게 오던 소대장이 순봉이와 마주쳐 왜 그러느냐고 묻는것 같았으나 순봉은 못 들은척하고 가버렸다.

광천은 기분이 언짢아서 뜨아한 눈길로 강운학을 건너다보았다.

강운학은 쓰거운듯 입맛을 다셨다.

《소대장, 꼬맹이를 내버려두라구. 망아지같이 버르장머리없는 녀석의 밸통을 고쳐줘야겠어.》

《울뚝거리는게 어린 나이 청년의 성민데 리해해야지요.》

광천은 사연을 몰라 한마디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흠, 무턱대고 감싸는군.》

강운학이 시까슬렀지만 소대장은 응대하지 않고 벙어리장갑을 깔고앉더니 웃주머니에서 《해당화》담배곽을 꺼내여 한가치 물었다.

석화가 거진 동이 난 바께쯔에서 감자 한알을 집어 소대장에게 주었으나 그는 손으로 밀어버렸다.

《난 바람켜서 못 먹어.》

석화는 소대장이 그래서가 아니라 삶은 감자 한개라도 소대원들에게 먹이려는 후더운 마음에서라고 생각했다.

말없이 담배만 피우는 소대장은 이런 때 보면 스물여섯살 청년이 아니라 서른살을 넘은 아이아버지같은 묵직한 기품이 엿보이는것이였다.

강운학은 소대장한테서 무시당한데다가 청년돌격대원들이 자기를 어려워하고 눈치만 보면서 곁을 주려하지 않자 멋적은듯 둔덕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작업장을 휘둘러보던 그는 대뜸 소대장을 불렀다.

《3소대구간은 왜 이렇게 일자리가 나지 않소?! 제일 쉬운 달구지길을 떼주었는데 거부기 한가지구만!》

《도처에 암반이 나지는 바람에… 소대원들이 힘들어하고있습니다.》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을 발휘하오. 곤난을 극복해야지. 바위는 까내란말이요. 다른 소대들은 생땅을 파내는데 암반이 없는줄 아오?! 소대장은 대원들을 아끼는건 좋은데 지내 어루만지며 한가스레 늦잡고있거든.》

광천이가 구실을 대거나 변명하지 않고 잠자코 서있자 강운학은 말투가 한결 누그러졌다.

《어린 청년들일수록 더 세괃게 다몰아대야 하오. 어자어자해서 사정을 봐주면 점점 게으른 버릇을 궂히기마련이요.》

《대장동지, 우리 소대청년들속에는 힘에 부쳐 그렇지 투쟁정신이 미약하거나 게으른 동무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소대장이 담담한 어조로 찍어 말하자 강운학은 사나운 눈길로 그를 돌아보았다.

《반발이요?! 동무하고는 말할 재미가 없소. 접수력이 그렇게 없어가지구야 일해먹겠소?!》

《성내지 마십시오. 대원들이 추운 산골짜기에서 죽을내기로 일하는데 정신상태야 옳바로 평가해야 할게 아닙니까.》

《좋소. 두고보기요. 동무네때문에 길닦기공사가 늦어질 때는 가만두지 않을테요.》

《걱정마십시오. 우리 소대는 맡은 구간을 죽으나사나 제기일에 끝냅니다.》

광천은 배심좋게 말했다.

강운학은 추운지 솜옷단추를 채우고 저만치 가다가 돌아섰다.

《소대장, 거 채순봉이를 지휘부에 보내라구.》

광천은 쓰다달다 말없이 서있다가 석화에게 걱정스러운 얼굴을 돌렸다.

《동무가 좀 알려주겠소?》

석화는 개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순봉은 얼어붙은 개울에 솟은 바위에 걸터앉아 애꿎게 상처입은 자존심을 쓸어만지고있었다.

두꺼운 유리판같은 투명한 얼음층밑으로 맑은 개울물이 알른거리며 흐르고있었다. 공기가 희박한 얼음밑에서는 기포방울들이 떠돌고 생기를 잃은 누르끼레한 물이끼덮인 길죽한 돌멩이들이 숨을 죽이고 엎드려있었다. 가재 한마리가 돌밑에서 기여나와 긴 촉수를 흐느적거리며 얼음층을 뚫고 물속에 비치는 해빛을 쪼였다.

순봉은 발로 얼음장을 탁탁 두드려 왕가재를 놀래워보았다. 가재는 촉수를 사뭇 곤두세웠을뿐 느릿느릿한 뒤걸음질로 돌등을 넘어 찬 물살을 맞지 않는 움푹한 곳에 거접했다. 가재는 얼음속에 갇혔으나 조금도 탓하지 않고 본성적인 관습대로 두툼하고 투명한 얼음보호막속에서 추위와 기나긴 겨울을 이겨낼 잡도리였다. 물속을 기여다니는 미물이지만 삶이 배포유하다.

순봉은 한숨을 쉬였다. 자기는 이 산간벽지의 돌격대생활에 익숙되지 못하고 얼마나 복잡하게 받아들이고있는가. 배고프고 힘들고 애초의 희망과 기대가 허물어지였다. 안정과 쾌활성을 잃고 나날을 이어가는 고독한 생활뿐이다. 그래서 하찮은 일에도 언짢게 부딪치고 비위가 거슬려 반발적이다. 탄불을 후끈히 때고 식탁이 푸짐한 집생각이 간절하다.

언제나 자기를 두둔하고 어루만지고 무작정 애정을 쏟아붓는 어머니가 보고싶다. 아버지는 원망스럽기만 하다. 어찌하여 자기를 산길닦는 공사장에 보내여 고생시키는가.

자식이 집안의 가장인 부친을 존대해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는걸 알면서도 순봉은 그렇지 못했다.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불편한 다리를 절름거리며 아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생활의 갈피마다 끼여들어 훈시질을 하고 채찍질한다. 생활의 자유는 구속할수 있겠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들어놓은 선천적인 아들의 개성을 이제 와서 어떻게 제 마음 내키는대로 변화시킬수 있단말인가.

내가 《애군》이고 《건달군》이란말이지…

글쎄 싸움질한건 좀 나쁘지만 딱친구들과 밀려다니고 맥주를 마시는게 뭐가 잘못되였단말인가.

선반기 돌리는 일이 맞갖잖아 하는걸 건달을 부린다고 한다. 아버지자신은 내 나이만할 때 동무들과 놀러다니지 않고 글공부만 했는가.… 하긴 아버지는 소년시절을… 왜정때여서 놀러다니기는 고사하고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다 팔아 집살림에 보탰다지. 전쟁만 아니더면 아버지도 고중을 마저 다니고 대학에도 갔을걸. 청년시절에 공부도 못하고 총을 쥐고 나라를 지키는 싸움판에 나선 아버지지. 다리를 다쳐 종신불구가 되고… 아버진 고생을 했지. 순봉은 스스로 그런 어찌할수 없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니 아버지를 원망할것까지는 없다. 아버지의 간섭을 피하는 길은 내절로, 내 힘으로 내 인생을 개척하는것이다. 동무들과 뒤섞여노는건 좋지만 가랑잎이 바람에 날리듯 그들의 의지에 맹목적으로 순종해서는 안될것이다. 자기를 잃고 놀아대면서 옳고그름을 가려보지 못하면 무슨 일에나 합세하게 되고 《불량청년》이라는 딱지가 붙을수밖에 없다.

인생길을 잘못 내디뎠다는 후회와 좌절감이 밀려드는 추억만은 아니였다.

《털보》, 《안테나》, 《첫째형님》… 친구들이 얼마나 좋았던가. 창범이형님은 내게 권투도 배워주고 뭐나 맛있는게 생기면 《막내》라고 나한테 먼저 주었다.

직업에 애착을 붙이지 않고 영화관과 맥주집에 쏘다니며 놀아서 그렇지 친구들은 좋은 사람들이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회적의무를 망각하고 개인생활의 안일과 향락에만 물젖은 동무들속에는 결코 좋은 친구가 있을수 없다고 나를 꾸짖었다.

그렇지만 친구들이 그립다. 내가 아직 과거와 깨끗이 결별하지 못해서인가. 사람의 추억이란게 지난날의 즐거운 일과 불미스러운 일을 가리지 않고 머리속에 지꿎게 배회하는 까닭인가.

뒤에서 개울가녁의 엷은 얼음쪼각이 조심스레 밟혀 부서지는 소리에 순봉은 집요한 번민에서 깨여났다.

석화는 두손을 가슴에 모아잡은채 다가오지 못하고 개울가에 뿌리박은 한그루 봇나무처럼 서있었다.

총각에 대한 깊은 동정과 남모르는 보호의식으로 하여 처녀의 얼굴은 그늘져있었으나 천성적인 명랑성과 순진미로 하여 처녀의 전체 용모는 봇나무의 줄기처럼 엄혹한 겨울에도 희고 깨끗하고 아름다와보이는것이였다.

순봉은 처녀의 표정이 풍부한 얼굴, 입술사이로 하이얀 이새가 보일듯말듯 하고 눈시울에서 감도는 상냥스러운 미소에 현혹되고 압도되여 한순간 자기의 괴로움, 침울한 감정을 잃어버리고 어정쩡해앉아있었다.

석화는 자신있게 다가와 장미빛입술을 약간 비죽하고 곱게 흘기는 눈으로 그를 어루만졌다.

《시상을 잡댔어요?》

《비웃지 말어.》

순봉은 처녀의 가벼운 롱말이 얼어붙은 마음을 살풋이 녹이는데도 무뚝뚝하게 응대했다.

《정말 성났어요? 온 참, 대장동지가 롱으로 그런건데.》

처녀가 순봉이한테 바투 다가서자 두사람의 무게에 눌린 얼음이 뿌지직하며 사방 실금이 갔다.

물속에서 평온스레 해살을 쪼이던 왕가재가 갑작스레 얼음지붕이 어두워지고 쩌개지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돌틈사리에 기여들어가버렸다.

석화는 주머니에서 큼직한 감자 한알을 꺼내여 순봉에게 주었다.

《받아요.》

순봉은 터진 껍질사이로 가루가 푸실푸실 이는 먹음직한 감자를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손을 내밀어요.》

처녀의 말은 명령조로 울렸다.

순봉은 처녀의 꾸짖는듯 한 눈빛과 요구성에 마음이 흐뭇이 젖어 손을 순순히 펴들었다.

《어마?! 손바닥이 온통 물집투성이군요!》

처녀는 놀라서 부르짖었다.

떨어진 감자알이 얼음판우를 굴러갔다.

처녀는 주저없이 순봉의 손을 끌어잡고 들여다보았다.

《어쩌면!》

순봉은 수치와 당황에 얼굴이 붉어졌으나 체면을 이겨내고 비위살좋게 처녀에게 손을 그대로 내맡겼다.

처녀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안에서 자기의 꿋꿋하고 찬 손이 녹는것을 달콤한 즐거움으로 감수하는것이였다.

《딱총을 놓아줄게요. 성냥 있어요?》

처녀는 재빨리 물었다.

순봉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이마를 찡그리고 마치 중상이라도 입은듯이 맥을 놓은 손을 처녀한테 그냥 맡겨두고는 다른 손으로 솜옷 안주머니를 더듬어 성냥을 꺼냈다.

《그러니 담배를 피우는군요?》

석화는 성냥이 있어 다행스러운데도 한마디 힐책하고는 성냥을 빼앗듯 잡아당겼다.

《딱총 놓는건 언제 배웠어?》

순봉은 처녀가 화약이 듬뿍 붙은 성냥가치를 골라 콩알물집에 눌러대는것을 지켜보며 물었다.

석화는 그 말엔 대꾸도 않고 종이를 꺼내여 물집만 드러나게 조그만 구멍을 내였다.

화약이 탈 때 주위살이 데지 않게 하려는것이였다.

《곪으면 어쩔려구 물집을 그냥 가지고있었어요?》

《저절로 없어질가 했지.… 이젠 곡괭이 잡기조차 불편해.》

처녀는 성냥불을 켰다.

순봉은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참아요.》

물집우에 댄 성냥가치화약이 팍 하고 불이 붙자 순식간에 콩알물집이 타서 납작해졌다.

《아파요?》

《응.》

순봉은 이마살을 찡기고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 모양이 우스워났으나 처녀는 인차 웃음을 거두고 련이어 세개의 물집에 성냥가치뜸을 놓았다.

《천막에 가서 빨간약을 바를가?》

《싫어.》

순봉은 목을 빼들고 소대원들이 일을 시작한 언덕쪽을 올려다보았다.

《함마질을 해야 해.》

처녀는 손끝에 침을 묻혀 딱총놓은 자리에 발라주었다.

《사람의 침이 소독제래요. 복구건설을 할 때 우리 어머니는 곡괭이질을 하다가…》

《동문 보지도 못하고서 전후에 고생한 이야긴 꺼내지도 마.》

말머리를 잘리운 처녀는 새침해져 입술을 감빨았다.

《귀찮아요?》

《응, 그런 이야긴 아버지한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

《나한테서도 듣기 싫다는거죠?》

처녀는 차겁게 물었다.

《아니… 거… 그렇지는 않은데…》

순봉은 도저히 처녀의 자존심에 반항할 용기가 나지 않아 얼버무렸다.

《빨리 가서 일해야겠기에…》

《소대에 가지 않아도 돼요.》

《왜?》

《대장동지가 순봉동무를 지휘부에 오라구 했어요.》

《이제?》

《그래요.》

《제길!》

순봉은 화김에 운동화신은 발을 쾅 굴렀다.

얼음판에 실금이 몇개 더 갔을뿐 맑은 개울물은 크고작은 기포방울로 물무늬를 얼른거리며 소리없이 흐르고있었다.

 

노루꼬리 겨울해가 지쳐 건너편 산마루에 주저않았다.

골짜기사이로 난 지름길은 낮에 겉녹았던 눈이 얼어붙기 시작해서 미끄러웠다.

순봉은 도토리술이 담긴 다섯ℓ들이 비닐방통을 손에 들고 조심스레 발을 옮겨디뎠다.

술통은 갈수록 무겁게 팔에 매달렸다.

농촌마을상점에서 사들고나올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십리나마 걸어오고나니 몇번 쉬였는데도 열댓㎏는 나마될 중량물같이 느껴졌다.

순봉은 추위로 곱아드는 손을 녹이려고 술통을 번갈아 옮겨쥐였다. 거치장스러운 장갑은 애초에 벗어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땀에 젖은 발이 시려났다. 운동화코숭이가 눈에 젖어서 더한것 같았다. 낡은 신이니 바닥이 얇은것이였다.

순봉은 올리막길에서 미끄러 넘어지지 않으려고 눈얼음우에 드러난 새초풀가지와 돌쪼각을 골라디디였다. 힘겹고 발시린것은 그런대로 이겨낼수 있었지만 가슴속에서 고패치는 굴욕은 시간이 흐를수록, 돌격대지휘부천막이 가까와올수록 더욱 고통을 자아냈다.

술심부름하는것이 과연 굴욕스러운 일인가? 돌격대에서 그중 어린 자기가 두곱나이도 넘는 사람 그것도 대장이라는 상급의 심부름을 하는것이 도덕적으로 당연하지 않을가. 그렇게 좋게 타당성을 앞세워 생각하는데도 하는 일이 조금도 달갑지 않고 속은 부르터오르기만 했다.

눈앞에는 돌격대지휘부천막에 갔을 때의 일이 괴롭게 떠오른다.

…도람통난로안에서는 참나무장작이 타고있었다. 강냉이닦는 고소한 내와 내내가 서린 천막안은 후끈하게 더웠다.

이마가 두드러지고 턱이 뾰족한 돌격대후방부대장은 나무가지로 도람통난로우에 펴놓은 강냉이알들을 휘젓고있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천막문가에 버티고 선 순봉이를 알아보고 반가와했다.

《난 또 누구라구. 그림자처럼 가만히 있으니 어디 알겠어. 꼬맹이, 자 어서 오라구. 강냉이가 익기 시작해.》

《대장동지는 어데 갔습니까?》

순봉은 한걸음도 내딛지 않았다.

변두리가 시뻘겋게 단 도람통난로의 터진 틈사이로 실연기가 솔솔 새여나왔다. 난로웃판에 누르스름하게 익은 강냉이알들이 탁탁 튀여오르며 하얗게 먹음직한 솜꽃을 피웠다.

세차게 튕긴 강냉이알이 순봉이 발치에까지 날아왔다.

《꼬맹이, 어서와 주어먹으라는데. 대장은 방금 나갔어.》

후방부대장은 자기 무릎에 튀여난 따끈따끈한 강냉이솜꽃을 주어 입안에 넣고 이몸을 데지 않으려고 연신 혀바닥으로 굴려가며 조개턱으로 씹어삼켰다.

《난 <꼬맹이>가 아니라 채순봉입니다. 대장동지가 없으면 돌아가겠습니다.》

《어, 어. 순봉이, 가지 말라구. 내가 불렀어.》

후방부대장은 통나무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난로우의 까맣게 타지는 강냉이알들을 비자루로 와락와락 쓸어 세수소랭이에 담았다.

《알겠어? 순봉인 내가 찾았단말이야. 이리 오라구. 과업 줄게 있어.》

후방부대장은 방금전의 누그럽던 태도를 돌변시켜 위엄스레 말했다.

순봉은 마지 못해 몇걸음 다가섰다.

《꼬맹이심사가 편안치 않군 그래.》

후방부대장은 혀바닥으로 이몸두리에 붙은 닦은 강냉이부스러기를 핥아 삼키고나서 안주머니에서 지페 한장을 꺼냈다. 그는 조개턱짓으로 천막구석을 가리켰다.

《저기 비닐빵깡 있지? 그걸 가지고 마을상점에 가서 술을 좀 사오라구.》

《후방부대장동지, 난 청년돌격대에 일하러왔지 술심부름하러 오지는 않았습니다.》

《뭐라구?!》

후방부대장은 참대처럼 바르게 맞서는 순봉이를 어떻게 꺾어야 할지 몰라서 어리뻥했다가 기어코 자기 뜻을 관철할 의지로 천막구석에 가서 비닐방통을 집어다 돈과 함께 널침상우에 탕 놓았다.

추위를 막느라 천막문에 덧댄 모포를 들치고 강운학이 불쑥 들어왔다. 그는 발뒤축으로 찬바람이 들어오지 않게 드리운 모포의 아래가장자리를 대충 여며놓았다.

《어 춥군.》

그는 통나무의자에 한아름될 엉뎅이를 붙이기 바쁘게 도람통난로를 그러안다싶이 했다.

난로가에 펴든 그의 손은 힘든 육체로동을 하지 않아 보동보동한 살이 오르고 해말쑥한게 어린아이 손같았다. 그는 난로열을 뽑아 앞가슴에 집어넣기라도 하려는지 분주히 솜옷단추를 끌러 앞자락을 벌려놓았다.

《왜 <꼬맹이>가 말 듣지 않나?》

그는 긴장이 달아오른 두사람의 기분을 눈치챘으나 별로 대수롭지 않은듯 난로에서 떨어지지 않고 물었다.

《싫다누만요. 돌격대원 순봉이가 아주 세게 나오누만요.》

후방부대장은 방금전의 당황해하던 기색은 싹 집어치우고 어이없다는듯 순봉이쪽에 코웃음을 던졌다.

《돌격대에 술심부름하러 오지 않았다나요.》

후방부대장은 한마디 더 외워바치고 굵은 절두목의자를 들어다 도람통난로옆에 놓고앉았다.

강운학은 후방부대장한테서 담배가치를 받아 손가락으로 뱅글뱅글 돌려 딱딱한 써레기가치를 뽑아내고서 도람통난로의 벌겋게 단 철판에 대여 불을 붙였다.

《순봉이, 왜 그래? <꼬맹이>가 어쨌다구 싫다 어쩌지 말라 하고 성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일쿼세우나?》

강운학은 여유있는 웃음을 짓고서 순봉이 짐작외로 소대작업장에서의 감정을 누그럽게 터쳐놓았다. 순봉은 그의 입에서 빠져나온 똬리모양의 담배연기가 키낮은 천막천정에 떠올라가 흩어지는것을 보고있었다.

《돌격대적으로 순봉이가 제일 나이 어리니까… 귀엽구 사랑스러우니까 <꼬맹이>라 하는거구 심부름도 시키는게 아니겠어.》

강운학은 뜨거워나는지 순봉이쪽으로 돌아앉았다.

《그렇지만 난 싫습니다.》

순봉은 웃입술을 당겨 잘근잘근 깨물었다.

《비위가 거슬린다?》

강운학은 쓸쓸히 웃으며 다시금 아량을 보였다.

《그래요. 거슬려요. 이소프도 말하지 않았어요. <주인의 사랑은 노예를 구슬프게 한다.>구》

《뭐라구? 이소프가 누구야?》

강운학은 후방부대장을 돌아보았다.

《옛날 그리스의 우화작갑니다.》

《그러니 자본주의나라 속담이구만. 주인이구 노예구 우리 생활에 통 맞지도 않는거 아닌가.》

《참작할수 있는거지요.》

순봉의 태연스런 대꾸에 강운학은 놀라운 낯빛을 지었다.

《이 친구 대단한데?! 이제 보니 보통내기가 아니야. 단단히 잡도리하구 교양해야겠는걸.》

《애초에 돌격대에 받지 말았어야지요.》

후방부대장은 조개턱을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채순봉은 온몸의 피가 머리끝에 솟구쳐오른것 같은 충혈감을 느꼈다. 한켠에서 맴돌던 수치와 모욕의 검은 피가 폭포처럼 소리내며 혈관속을 빠져나가고있었다.

《<꼬맹이>가 귀엽다고 어자어자하니까 꼭뒤에 올라앉으려드는구만. 여 순봉이, 동무네 공장사로청위원회에서 보낸 평정서에 어떤 딱지가 붙어왔는줄 알아? 건달군, 술망나니, 패싸움군… 훌륭한 칭호들이야. 사람을 못 쓰게 만드느라 날조한것도 아니야. 순봉인 내가 공장사로청을 지도할 때도 그랬으니까. 그런걸 난 도당책임비서동지가 돌격대에 넣어 교양하라는 지시를 했다기에 특별히 관심해두었어. 순봉이가 돌격대생활에서 위축될가봐 과거를 일체 비밀로 붙였지. 그래 감동되지 않아?》

순봉은 고개를 떨구고 속으로 쓰디쓴 눈물을 삼켰다.

인생길을 잘못 내디딘 후회와 비탄의 설음이였고 과거는 어떻든 몸에 지닌 존엄이 소중하고 그것이 사정없이 칼질 당하는데 대한 울분과 항변의 눈물이였다.

어째서 사람이 한번 저지른 잘못이 거마리처럼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을가. 어떻게 하면 불미스런 과거를 사마귀나 헌데딱지처럼 뚝 떼던질수 있을가. 그래서 젊은이의 지난날 잘못을 거머쥐고서 신성한 자존심을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들고 굴욕스러운 처지에 빠뜨리면서도 관심이요 사랑이요하는 너울을 덮어씌우는 이런 관료풍의 위선적인 인간과 사로청원답게 당당히 맞섰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순봉이가 이 대장하구 엇서는건 지난번 공원에서 있은 일때문에 그러는것 같은데… 난 동무를 나쁘다고 하지는 않아. 사로청원이 련애할수 있지뭐.》

강운학의 말은 진심과 조롱이 뒤섞인것 같았으나 퍼그나 진지하게 들렸다.

순봉은 그가 지난날을 또 끄집어내는것이 불쾌했으나 자기를 무작정 몹쓸놈이라고 얕잡아보는 태도를 좀 버린것 같아 잠자코 서있었다.

《내가 말하는건 남자가 자기 인격을 갖추고… 이를테면 나이도 들고 직장생활도 바로하고… 의젓한 사로청원이 됐을 때 련애도 하라는거야. 내 말이 틀리나?》

도람통난로화구에 참나무장작을 몇가치 집어넣은 후방부대장이 끼여들었다.

《이제보니 순봉이는 돌격대장동지의 신세를 입었구만. 그러문야 술심부름같은거… 돌격대사업에 필요해서 그러는건데 닁큼 갔다올수 있지뭐. 곡괭이질두 안하구 좀 좋아서.》

순봉은 후방부대장의 부채질은 귀등으로 넘겼다.

강운학의 말이 옳다고 여겨지면서도 수긍할수 없었고 공원에서 받았던 모욕과 멸시감은 되살아나 곪은 종처처럼 부풀어올랐다.

《원래 련애라는건…》

강운학은 순봉의 침묵을 제나름으로 해석하고 늘적지근히 말을 꺼냈다.

《련애라는건 한 이성이 다른 이성을 원하는 사랑놀음이야. 사람의 검질긴 본성적감정에 뿌리를 두고있어서 일단 빠지면 헤여나지 못해.

그래서 사람들은 련애하기 시작하면 불치병에 걸린 중환자처럼 고민하거나 눈이 멀어가지고 헤덤비는거야. 사랑과 기침은 도무지 감추지 못해. 순봉이와 석화하구 관계만 보더라두…》

순봉은 도람통난로를 둘러싸고앉은 두사람이 흠칠 놀랄 정도로 튕겨나가 침상우에서 돈과 술방통을 움켜쥐였다.

《대장동지는 나한테 그따위 시시한 련애강의는 하지 말라요.》

총알처럼 내쏘고난 순봉은 천막문가에 이르러 몸을 홱 돌렸다.

목이 꺽 막혀 원하는 부르짖음을 터칠수 없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타드는 입술을 혀로 적시였다.

《그리고 석화동무를… 그 처녀는 거들지 말아주십시오.》

순봉은 겹드리운 천막휘장과 모포를 단숨에 들치고 바람처럼 솟구쳐나왔다.…

(체, 뭐 련애가 사람의 검질진 본성적감정이라구?!…)

얼어드는 손으로 술방통을 쥔 채순봉은 코웃음을 치며 눈얼음깔린 미끄러운 골짜기길을 내려갔다.

그때는 듣기 역해서 나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사람에게서 련애가 얼마나 고상한 감정인가를 피력하지 못한게 후회되였다.

그러나 련애가 어째서 어떻게 고상한 감정인가를 설명할 자신은 없었다.

부정하는 강렬한 반발심과 빈약한 체험속에 떠오르는 막연한 주장이 속에서 꿈틀거릴뿐이였다.

불시에 순봉은 눈얼음우에 박힌 새초풀을 헛디뎌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모재비로 비칠거리다가 궁둥방아를 쾅 찧었다. 손에서 놓쳐버린 술방통이 눈얼음덮인 언덕길을 미끄러져가더니 길섶에 뿔솟은 바위에 탕 부딪쳤다. 대바람에 터진 비닐방통에서 술이 쏟아졌다.

순봉은 엉뎅이의 아픔을 느낄새없이 비명같은 신음소리를 내지르며 언덕길을 지쳐 내려갔다. 도토리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허겁지겁 달려가서 술방통을 덮치였을 때는 술이 거의다 쏟아지고 깨지지 않은 밑굽에 조금 남아있을뿐이였다.

순봉의 눈에서 분통에 찬 눈물이 빨갛게 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이 된 비닐방통을 화풀이로 나무숲속에 힘껏 집어던졌다.

자기에게 이런 구차스런 심부름을 시킨 사람들을 저주하고 황당한 실수를 저지른 자신을 원망하며 울고있을새가 없었다.

이따위 심부름을 바로 못했다고 그들한테서 구박을 당하고싶지 않았다.

되돌아가서 술을 사가지고와야 했다.

돈도 없고 술통도 없다. 마을상점은 이미 문을 닫았을것이다. 어떻게 한다? 농촌집문을 두드리고 사정하면 술을 얻을수 있지 않을가?

순봉은 정신없이 생각을 굴리며 골짜기지름길을 달음질쳐갔다.

산마루에서 불타던 저녁해는 사라지고 어느덧 골안에는 땅거미가 깃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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