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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계승자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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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200회 작성일 20-07-23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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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재영은 안개처럼 몽롱한 의식속에서 깨여나보려고 모지름을 썼지만 몸을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빈 창자를 뒤번지게 하는 구수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무겁게 내리덮인 눈시울을 겨우 떴다.

푸릿그레한 색바랜 도배지의 천정이 구름장처럼 뭉실거린다.

그 환영의 구름장들은 달포나마 집없이 떠돌아다닌 서글픈 방랑생활을 삽시에 되살려주었다.

외진 산기슭의 바위옆에 누워서 그리고 배고픔을 참아가며 한적한 강변의 풀숲에 앉아서, 렬차에서, 들추는 자동차적재함에서 그는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마음으로 푸른 하늘에서 뭉싯거리며 흘러가는 구름장들을 바라보았던가.

고모네 집에는 다시 갈수 없었다. 양부모가 쫓아내더라고 어떻게 말할수 있으랴. 렬차나 길가에서조차 낯선 사람들이 자기를 배은망덕한 자식이라고 눈여겨보는것 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고독감, 앞날에 대한 절망으로 하여 그는 더 살고싶지 않았다. 어린 자기를 키워준 양부모한테 그런 죄를 짓고 조금도 용서받지 못하고서 이 하늘아래 어데서 살겠는가.…

재영은 달포나마 방황끝에 허기진 몸을 가까스로 끌고 마지막으로 용서라도 받고 죽고싶어 아버지가 행정위원장으로 일하는 이 도시에 다시 왔다. 그러나 교외에 있는 곡산공장의 보이라에서 내버려 쌓인 탄재 슬라크무지곁에 쓰러지고말았다. 해묵은 탄재무지어방에는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가 마감으로 본것은 뿌옇게 흐린 하늘에서 떠가는 솜뭉치같은 구름장들이였다.

그런데 지금 머리우에 떠있는것은 구름장이 아니라 도배지무늬다. 찬 밖이 아니라 구수한 냄새풍기는 아늑한 집안이다.

《어이구, 눈을 떴소? 살아났구만!》

부엌에서 미음그릇을 들고 올라온 늙수그레한 녀인이 반색해서 소리질렀다.

녀인은 재영을 주의깊이 찬찬히 내려다보았다.

《아픈덴 없수?》

재영은 머리를 알릴듯말듯 가로저었다.

《일없을거라더니 의사선생말이 맞구만.》

재영은 몸을 일으켜보려 했다.

《가만 누워있수.》

녀인은 작은 숟가락으로 재영의 입에 따끈한 미음을 떠넣어주었다.

《염소젖을 넣은거라우.》

재영은 터갈라진 입술을 간신히 우물거렸다.

달콤하면서도 구수한 미음이 목안을 덥히며 넘어갔다. 낟알기를 감촉한 텅 빈 배속이 경련을 일으킨듯 꿈틀거렸다.

그는 정신없이 받아먹었다.

좀 더 빨리 먹고싶었지만 녀인은 동안을 두고 천천히 입에 떠넣어주었다. 어느결에 미음 한그릇을 다 비웠다.

《더 먹어선 안되우. 얹힌다니.》

녀인은 미음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서운해하는 재영이한테 그러기를 당부하듯 눈을 끔쩍해보이고는 손수건으로 그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재영은 정신이 아주 맑아졌다. 더는 천정도배지무늬가 환영을 일으키지 않았고 방안의 다른 기물도 형체가 뚜렷이 안겨왔다. 이마와 눈귀에 잔주름이 인정미마냥 박힌 오십대의 푸수해보이는 녀인의 모습도 완연히 보였다. 재영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녀인은 부축해주고서 잔등에 이불을 고여주었다.

《보이라기관장네 집이라우. 안심하고있어도 된다우. 내 남편이 어제 저녁 탄재무지에 쓰러져있는 총각을 업어왔다우.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영낙없이 잘못됐을거우다.》

《고맙… 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우?… 길을 잃었는가요? 어디로 가댔수?》

녀인의 호기심짙은 질문에 재영은 몸둘바를 몰랐다. 그는 녀인에게 자기의 신분을 확인시켜야 함을 깨닫고 주위를 살폈다.

녀인이 방구석에서 그의 트렁크를 가져왔다.

재영은 트렁크를 열고 공민증과 이동문건을 꺼냈다. 녀인은 문건들을 읽어보고나서 물었다.

《그런데 왜 여기로 왔나? 친척이라도 있수?》

《없습니다.… 좀 아는 동무가 있었는데…》

재영은 어떻게 그럭저럭 넘기게 되기를 바라서 어물거렸지만 녀인은 어지간히 따지고들었다.

《아는 동무를 찾아 살던 고장을 떠요?》

재영이 궁지에 빠져 눈을 허둥대자 인생경험이 많은 녀인은 짐작되는지 말머리를 돌렸다.

《무슨 피치 못할 사연이 있었는거구만. 약혼녀같은 처녀를 찾아왔던가.》

재영은 다행스러워 지푸래기를 붙잡았다.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알아맞혔습니다. 사실… 친한 처녀가 있었는데… 와보니 글쎄 며칠전에 결혼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런! 총각하구 약속까지 하구서?…》

《그… 랬지요.》

《에그, 체네라구 속이 다 고운건 아니지.》

《…》

《그래서 보이라재더미에 와있었구만. 총각이 실련을 당했으니 오죽 고통스러웠겠나. 그래 살고싶지 않았던가 보지.》

《어머니말씀이 맞습니다. 사실…》

재영은 량심가책에 더 늘어놓을수 없어 거짓이 내비친 눈을 황황히 내리깔았다.

《인젠 그만 누워있으라구. 며칠 푹 안정하느라면 건강이 회복될거요.》

재영은 녀인의 다정한 말을 쫓아 다시 편안히 드러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거짓말이 드러날가봐 두근거렸지만 어차피 래일이라도 이곳을 뜨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위안을 가졌다.

마당에서 누군가 무슨 쇠통과 쇠붙이들을 내려놓는 소리가 요란스레 났다. 녀인은 밖으로 나갔다. 석쉼한 목소리가 누워있는 재영이의 귀가에 들려왔다.

《여보, 그래 환자가 좀 낫소?》

《정신을 차렸어요. 미음을 먹고 방금 누웠는걸요.》

《살려냈구만. 온밤 속을 태우더니.》

《이 쇠통은 웬거예요?》

《우리 도를 현지지도하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탄문제때문에 그렇게 마음쓰셨는데 기관장인 내가 가만있겠소. 우리 고장 저질탄을 때는 비등식보이라를 연구해보려구 하오. 뜨락에다 모형을 차려놓구서…》

마당에서는 쇠붙이들을 옮겨놓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린다.

재영은 자기가 마음이 그지없이 고결하고 충성스런 사람들속에 와있다는것을 후덥게 느꼈다. 부끄러워 이불을 머리우에 끌어올렸다. 그는 자책의 괴로움과 절망으로 그리고 기쁨과 희망으로 소리없이 울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도에 오셨댔단 말이지! 그러면 시행정위원장인 아버지도 그이를 만나뵈웠겠구나. 아,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저를 구원해주십시오. 그 옛날 제가 어렸을 때 어버이수령님과 같이 공장에 오신 지도자동지께서는 공부를 잘 안하는 저의 잘못을 두둔해주시고 얼마나 사랑해주셨습니까. 저를 친아들보다 더 귀하게 자래운다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칭찬해주셨지요. 그런데 저는 부모를 버렸습니다. 산골에 내려가기 싫고 아버지를 믿지 않은것이 제 잘못이였습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버림받고 고독과 비애의 쓰라림을 당해야 합니까. 저를 구원해주십시오.…

재영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러 베개잇을 적시였다. 마당에서는 재영의 신원에 대해 남편에게 이야기하는 녀인의 음성이 도란도란 들려왔다.

잘 생기고 착하고 성실한 청년이 그렇게 됐다고 아쉬워하자 잇달아 기관장의 석쉼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 인젠 어떻게 하겠다던가. 고모네 집에 도루 가겠다우?》

《원 성급하다구야. 채 낫지도 않은 총각한테 그걸 묻겠소?》

《그런 총각이문 우리가 아들삼아 데리구있었으면 좋겠는데…》

《당신두 욕심스럽지. 기저귀 하나 채워보지 않구 통짜루 남이 다 키워놓은 아들을 가진단말이우?》

재영은 더 참고있지 못하고 이불을 활 밀어제꼈다. 그리고 얼빠진 사람처럼 소리질렀다.

《어머니! 기관장아바이!》

두사람은 집안에서 무슨 일이 났는가 해서 부리나케 달려들어왔다.

재영은 속에서 부글거리는 량심의 오물을 토해냈다.

《기관장아바이! 저는 부모를 섬길 자식이 못됩니다. 오래전에… 그럴 권리를 잃었습니다.》

기관장내외는 어리둥절해있었다.

마침내 재영의 말을 자기나름으로 리해한 기관장이 무릎을 꺾고앉아 달래였다.

《총각, 울지 말라구. 내가 그저 말해본거네. 일없어. 아들이 되지 말게. 부담이 되문 어떡허겠나.》

《그… 그런게 아닙니다.》

《됐네. 이런 말은 없었던것으로 치세.》

《기관장아바이, 저를 보이라에서 일하게 해주십시오. 저도 보이라에 저질탄을 때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기쁨을 드리고싶습니다.》

《얼싸 환영하네. 그 힘든 보이라에서 일하겠다니 정말 고마우이. 보배덩이를 얻었어. 총각이 장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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