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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장의 행운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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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6,127회 작성일 20-08-1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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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장

고향길

3

뚜거덕뚜거덕 말발굽소리가 가까와오더니 거품을 잔뜩 문 가라말 한필이 사단지휘부뜨락에 들이닥쳤다. 팥죽땀에 흠씬 젖은 말등에 웃몸을 낮추 붙였던 중좌가 날래게 뛰여내렸다. 맵시있게 알른거리는 장화에는 먼지 한점 없었고 엉치뒤에 털썩이는 전투가방도 밤빛이 도는 새것이였다.

별로 큰키는 아니나 사람들을 좀 내려다보는 자세로 층계를 오르는 그는 강파른 얼굴인데 남달리 불퉁한 코망울을 쭝깃거릴 때면 우습강스러운 인상마저 받게 된다. 그러나 정작 맞다들어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결코 어리무던한 사람이 아니라는것쯤은 쉽게 알수 있다. 깔끔하게 리치를 캐고 따끔하게 결함을 지적하는 능력이 제멋대로 놀아나기 좋아하는 배짱군들도 감히 숙보지 못하게 하는 사단급지휘관의 권위를 담보해주는것이다. 그가 바로 사단정찰과장 허찬이였다.

지금 그는 위궤양치료에 솜씨가 있다는 내무성병원 소화기내과의 안면있는 안경쟁이군의를 믿고 개별치료를 받던중 전쟁이 발발한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나온 길이였다.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른새벽에 떠나 드달려왔지만 평양에서 개성까지는 가깝지 않은 길이여서 꼬바기 이틀이 걸렸다. 그때는 벌써 사단지휘부가 38°선을 넘어 훨씬 남쪽으로 전진해나간 뒤였다. 그래서 또 지름길을 톺아 끝내 따라잡았다.

반년씩이나 부대를 떠나있게 되니 마음에 걸리는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였으나 치료를 받을바에는 아예 고질병을 뚝 떼여버린다 하고 지그시 눌러앉았던노릇이 공교롭게 되였다. 아니, 사실은 병치료도 병치료이지만 전선부대생활보다는 깊은 후방에서의 안온한 생활이 훨씬 나아서 시간을 질질 끌었던것이였다.

《위장질환이란건 고약한것이여서 결코 방심할게 못됩니다. 다 나은것 같다가는 재발하고 또 나았다가도 말썽을 부리군 하지요. 제바루 먹지 못하는 환자보다 불쌍한 환자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부대생활을 하자면 돌도 삭일수 있는 소화기관이 없이야 곤난한 법이지요.》

중국 동북에서 알게 된 군의는 꽤 역바른축이였는데 허찬의 마음속을 넉근히 헤아린 모양인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이모저모로 편의를 봐주었다.

군의가 말했듯이 먼길을 달려오면서 구미가 나지 않아 제대로 먹지 못했더니 위가 쓰려났고 이제는 참을수 없을 지경이였다. 부대식당이 어디에 있는지 흰쌀죽으로라도 요기를 하고싶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식당부터 찾아들어갈 체면이 없어서 참모부가 있는 곳을 물었다. 아픔을 억지로 참아내자니 좀전에까지 돋아있던 호기가 스르죽어버리고 자연히 손이 복부를 슬슬 어루쓸게 되면서 이마살이 찌프러졌다.

참모부에 들려 도착보고를 하고 부대의 정황을 대충 알아보고난 그는 즉시로 자기의 업무를 시작했다.

가장 난처한것은 자기 수하의 정찰중대가 전부 적후로 떠나버린것이였다.

(정찰중대를 송두리채 한구멍으로 들이밀었단 말이지?!)

정찰력량을 쪼개여쓸 대신 일반 전투구분대처럼 무리로 파견해버린 참모부의 사업에 의견이 없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시기에 이름을 날린 쏘련의 람자이공작조처럼 한두사람, 기껏해서 몇사람을 파견하여 솜씨있는 정찰조활동을 벌려야 한다는것이 그의 굳어진 견해였다. 그들은 몇손가락에 꼽을수 있는 인원을 가지고 얼마나 거대한 성과를 올렸는가. 세계적인 판도에 활동무대를 펼치고 거대한 제국들의 운명을 결정할수 있는 값진 정보자료들을 무수하게 수집하여 본부에 보내는 신비에 가까운 결실을 거두었다.

그런데 련합부대의 정찰력량을 통채로 파견해버리다니…

어지간히 화가 났으나 입밖에 내여 불만을 표시했댔자 행차뒤의 나발격이여서 혼자 묵새길수밖에 없는 일이였다. 아무리 시비를 밝혀봐도 자신에게 즐거울것은 아무것도 없을것이다. 오히려 오래동안 자리를 비운 정찰과장 그에게 책임이 돌아올수도 있다. 이럴 때는 군말없이 사태를 수습하는것이 상책이였다.

지금의 조건에서 사단정찰과가 할 일은 통신수단을 통해 정찰대의 활동을 철저하게 장악하고 통제하는것이다.

타산과 결심에서 빈틈을 남기지 않는 명민한 두뇌를 자부하는 그는 참모부의 동의밑에 통신과장을 다불러대여 널널이 돌아가지 않는 무선전대 하나를 정찰과에 전문배속시키는데 성공했다. 한명의 병사도 수하에 두지 못한 무졸군관신세를 모면하고 무선전대장과 무선수를 거느리게 되여 일감이 생긴셈이였다.

정찰과의 몫으로 배당된 반토굴에 무선기를 들여다놓자마자 조급한 성격을 참지 못하고 무선전대장을 들볶기 시작했다.

입대전에 함경도의 어느 군에서 기술전문학교를 다녔다는 전대장은 코밑에 보슴털이 보르르한 소위였다. 허찬이가 병원으로 떠날 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젊은이인데 알고보니 사단에 배치되여온지 석달밖에 안되는 애숭이였다.

《이름이 뭐라 했더라?》

《강승일입니다.》

《그래, 정찰대의 현 위치가 어디요?》

허찬은 일부러 웅글진 목소리를 내려고 애쓰며 통나무걸상에 무릎을 포개고앉아서 물었다.

《어제 오전 판문―장풍간도로 우측릉선에서 적 18련대의 중화력무기중대들을 소멸한 후 지금 한강계선으로 진출중입니다, 정찰과장동지.》

전대장은 뾰족한 턱을 흔들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제꺽 대답했다. 자랑기가 다분한 어투였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허찬은 대뜸 골살부터 찌프렸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지 상급의 불만을 리해하기 어려웠던 모양 애젊은 소위는 한쪽어깨를 치켜올렸다.

《소멸했다는건 뭐요?》 허찬은 들창눈을 치뜨며 낮으나 결코 부드럽지는 않은 어조로 력설부터 했다. 《앞으로는 보다 정확하게 보고하는 습관을 붙이시오. 시간과 장소 등등에 대해서 말이요. 어제 오전이면 몇시, 몇분인가, 중화력무기중대들이라면 소멸한 력량이 얼마이고 놓쳐버린것은 얼마나 되는가, 또 한강계선이라면 정확한 지점이 어디인가를 밝혀야 해. 이건 전탕 륜곽적이거던. 그런데… 이자 방금 뭐라고 말했소? 소멸했다?!》

《예, 두개의 적중화력무기중대를…》

《아니, 그럼 정찰대가 처음부터 골받이로 싸움판을 벌렸단 말이 아니요?》

기절초풍할듯 놀라는 상대를 보고 말끝을 가무린 소위는 얼떠름해서 올롱한 두눈을 껌뻑거렸다.

《?!…》

허찬은 용솟구치는 흥분을 누르기가 어려워 오른손주먹으로 왼손바닥을 몇번 탁탁 쳤다. 정찰물계에 들어서면 세계정탐사를 낱낱이 꿰뚫었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그런만큼 부과장 리학문이 데리고 나간 정찰대가 초보적인 규범조차 무시해버리고 침투로정의 시작부터 대판 전투를 벌렸다는 사실이 그를 아연케 했다.

불가피한 사정때문에 적과 조우했다 하더라도 이건 심각한 문제다. 정찰의 본도는 적정을 알아내는것이지 적을 소멸하는데 있는것이 아니다. 적에 대한 소멸은 보병이나 포병과 같은 전투구분대들이 하는것이다. 적후로 침투하는 과정에는 어떻게 해서든 총소리를 피해야 한다는것이 허찬의 지론이였고 철칙이였다.

(이건 전탕 마구잡이로군. 빨리 대책하지 않으면 어떤 우발적인 화근이 생길지 모르겠다. 정찰대가 괴멸되면 부과장이 책임질텐가. 이 정찰과장에게 모든 책임이 돌아올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품들여서 재간스럽게 쌓아올리던 조형의 탑이 점점 찌그러져가는듯 한 우려감을 털어버릴수 없었다. 그는 얼떠름한 표정으로 쳐다보고있는 무선수를 손가락으로 찌르듯 가리키며 엄엄하게 지시했다.

《정찰대를 호출하시오, 당장!》

《아직 교신시간이 안되였습니다.》

무선수는 지시하는 허찬이 아니라 당황해하는 전대장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고나서 난처한 기색을 지었다.

《지금 정찰대를 책임진게 리학문부과장이라 했지? 이름있는 정찰일군인데 왜 그럴가?!》

안면을 직접 익힌적은 없어도 한다 하는 정찰병으로 소문이 자자한 리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익히 들어온 허찬이였다. 동북민주련군에서 정위(정치지도원)로 있을 때 유명짜한 그의 이름을 알게 되였다.

동북해방작전에 참가한 조선인부대들이 거둔 전과들속에는 장춘전투나 개원전투에서의 통쾌한 무훈담과 같이 리학문이네 정찰병들의 공훈이 많았다. 리학문 그자신이 개원전투때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기마정찰로 적의 배치상태를 알아냈고 장춘전투때에는 단신으로 국민당 60군의 지휘부에 들어가 군장(군단장)을 직접 만나 의거를 촉구하는 아군의 요구를 전달한 후 긍정적인 확답을 받아냈었다. 그때 담력있고 명민한 그의 행동에 사람들은 너나없이 혀를 내둘렀다.

고산툰에서 있은 모범전투원대회때에는 특등공신들만 앉히는 주석단에 오른 리학문을 보았었다. 목대가 남달리 굵고 꾹 다물린 입이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인상을 자아내던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수 없었다. 조선인부대인 리홍광지대의 정통패장(정찰통신소대장)인 그가 소공 아홉개에 대공을 세개씩이나 세워 특공을 기록했다며 한다 하는 팔로군 전사들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허찬은 그때 한 동포인 리학문이 전투영웅으로 떠받들리우는것을 보고서는 일종의 친숙감과 자부감을 느꼈었다.

운명의 기이한 인연이라 할가, 해방후 조국에 돌아와서 사단정찰과장으로 임명받은 그는 리학문이 정찰부과장으로 배치되였다는 소식을 병원에서 듣고 놀라움과 함께 은연중 기쁨을 금할수 없었다. 정치일군출신이면서도 정찰사업에 어지간히 조예가 있음을 자부하는 그인지라 리학문과 맞다들면 비록 실전경험에서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작전과 행동상 서로 통하는데가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얼굴에 면도칼 한번 대본적 없는 전대장처럼 책상물림도 아닌 리학문이 정찰행동의 리치를 무시하고 지금처럼 분별없이 정찰대를 지휘하는데는 의문과 경계심이 생겨나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하여 괜히 조급한 마음이 살아나는것이였다.

《이제부터는 무휴통신으로 넘어가시오. 빨리 찾소, 빨리!》

무선수와 전대장은 자기들을 다그어대는 정찰과장을 리해하지 못해하는 표정이였으나 최대출력으로 탐색에 들어갔다.

《참매, 참매, 나 멸악산…》

응답이 없었다. 그럴수록 허찬의 독촉은 불같아졌다. 한시바삐 무선결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사이에 돌이킬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듯싶은 조바심에 마음을 못놓고 무선수를 지켜보던 허찬은 버럭 화가 돋아올라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젠장! 그럼 공개통신으로 찾소!》

×

정찰대의 행동에 불만을 표시한 허찬정찰과장의 무선내용은 리학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초면인사나 같은 교신치고는 즐거운것이 못되였다. 무선통화를 보장하고난 차용대도 입술이 뿌주름해서 소나무가지에 올리던져 걸었던 안테나를 와락와락 걷어내렸다.

허찬은 정찰대의 행동을 로출시키는 공개적인 전투를 무조건 피할것을 요구하면서 감시정찰에 대해 장황하게 력설한 뒤 력량을 조별로 분산시켜 행동할것을 지시했다. 판문에서의 전투를 두고는 일종의 모험주의적행동이라고 어마어마한 표쪽까지 달았다. 규범이 어떻고 전선조건이 어떻고 하며 곱씹어 말하는 딱딱한 목소리는 화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것이였다.

학문은 밸머리가 꿈틀거렸으나 꾹 참고 소나무숲속으로 더 깊이 걸어들어갔다.

《야! 한강이라는게 이렇게 넓었구만. 이게야 바다이지 어디 강이요?》

김동호가 탄성인지 불만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늙은이들처럼 혀를 끌끌 찼다.

이곳은 림진강과 한강이 합류되는 곳이여서 강폭이 대단히 넓었다. 오른쪽으로는 뽀얀 운무속에 강화도가 어렴풋이 바라보이고 왼쪽으로는 김포반도의 푸르스름한 자태가 드러나보였다. 이미 지도상에서 확인하면서 강이 너무 넓어 강행도하가 조련치 않으리라는것을 생각했지만 막상 현지에 와서 보니 역시 간단한 문제가 아닐것 같았다. 그래서 총참모부는 규정도하기재의 거의 전부를 전선서부를 맡은 련합부대에 돌려준것이다.

이따금 따쿵따쿵 총소리가 울리고 심심풀이로 쏘아대는듯 드문드문 날아온 포탄이 쿵쿵 처절썩 쏴― 하고 소소리 물기둥을 일으키군 했다.

이런 정황에서 저편기슭에 적의 얼마만 한 력량이 배치되였는지 또 놈들의 정확한 방어구역이 어디에 집중되였는지 손쉽게 알아낼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보았으나 신통하게 떠오르는것이 없었다.

학문은 날이 저물 때까지 적정을 감시해보기로 하고 유리한 도하지점이나 배를 찾아보도록 안창항이네 조를 떠나보냈다. 멀어져가는 대원들을 바라보면서 착잡한 마음을 겨우 눌렀다.

그의 마음을 괴롭힌것은 허찬이 보내온 무선내용과 함께 라동수가 여기저기 돌아가며 감시구역을 정해주고 일일이 잔소리를 해가면서 적정을 수집하는 모습이였다. 아마 그는 부과장이 감시정찰을 포치한것을 허찬과장의 요구가 그대로 집행되는 표현으로 알고 흡족해하는것 같았다. 하지만 학문은 밤을 기다려 적정을 감시해볼 생각일뿐이였다.

허찬의 요구가 어떻든지간에 필요한 전투행동을 하지 않을수는 없다. 정찰과정에 적과의 충돌을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식의 론리는 구체적인 전투정황에 늘 맞을수 없는것이다.

이런 때 적정감시임무를 맡은 정찰병들은 지루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떠나간 동료들이 이제 어떤 결과를 가지고오겠는가 하는 긴장감과 함께 무료하게 분초를 흘려보내야 하는 괴로움이 모두의 마음을 간지럽히는것이다.

비에 푹 젖은 소나무숲속에 오후내껏 들어앉아있자니 갑갑증마저 들었다.

라동수가 돌아와 옆자리에 드러눕는것도 모르고 학문은 비옷을 깔고 앉아 지도와 지형을 대조하며 적정을 연구했다.

개미 한마리가 목덜미를 못견디게 간지럽혔다. 손바닥으로 철썩 갈겼다. 그러자 다른 놈이 또 기여올라 성화를 먹인다.

《어디에 불개미둥지가 있는게 아니야?》

옆에 엎드려있던 라동수도 개미성화에 벌떡 일어나앉았다.

《거 지독한 놈들인데… 가만, 저기 있군요. 이사가는 모양입니다, 온통 떨쳐난걸 보니.》

소나무밑에 와글거리는 개미둥지를 발견한 라동수가 움쭉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련락병! 공병삽을 가져오라구.》

개미둥지를 파버릴 잡도리였다.

학문은 그를 나무랐다.

《그냥 놔두라우. 개미들이 이사하면 장마가 진다는데 그것들도 제살 궁리를 하는거요.》

《하기는 저것들한테도 자기들 식의 리치가 있을테니까요. 헌데 미물인 저것들이 어떻게 장마가 진다는걸 먼저 알가요?》

《그것들속에두 정찰병이 있는게지.》

《하하… 부과장동진 늘 정찰생각뿐이군요. 그런데 부과장동지, 이제 안창항동무네가 돌아오면 수집된 적정을 부대에 보고하고선 제꺽 우회해서 강을 건너야 하지 않을가요?》

《그건 무슨 뜻이요? 수집된 적정이라니?! 그 동무들이 가져올 정보는 강심깊이에 따른 도하지점확정뿐이요. 그외에는 확인한 적정이 아직 없는데… 적들의 력량배치에 대한것은 어림짐작해서 보내자는게요? 우린 아직 저 강건너편에 어떤 놈들이 배치되여있고 그놈들의 기본방어구역이 어디에 정해졌는지 모르고있소, 지어는 최대화력밀도조차 말이요. 혹시 동무는 아직도 전투없는 정찰만을 바라는게 아니요?》

리학문은 정색한 목소리로 따져물었다. 그러는 모양을 동수는 흘끔 한번 곁눈질하고는 주먹으로 제 무릎을 툭툭 두드렸다.

《전투를 두려워해서야 무슨 정찰병이겠습니까. 하지만 전투진행에 대해선 과장동지와 잘 토의해봐야 할겁니다. 과장동진 정찰활동중의 전투행동은 벌써 정찰사업의 실패라면서 제일 질색합니다. 부과장동지가 온 뒤부터 많은것이 달라졌는데 정찰규범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견해상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는지 난 그게 우려돼서 그럽니다.》

학문은 눈길을 홱 돌렸다.

불쾌감이 불뭉치처럼 마음속을 참을수 없게 지져대며 솟구쳐올랐다.

《동무는 어떤 견해요?》

《나야 뭐 아는게 있어야지요. 리치적으로는 과장동지의 말이 옳은것 같은데 전투환경을 보면 또 그렇지도 않고…》

《전투환경이 어떻다는거요?》

날카롭게 따지고드는데도 라동수는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이 아니였다.

《실례로 개성에서 괴뢰 18련대놈들을 족친건데 만일 우리가 정찰과장동지의 요구대로만 행동했다면 적정을 부대에 통보해주는것으로 임무 끝! 했을게 아닙니까. 헌데 정말 그놈들을 살려둔채 부대에 그냥 인계했다면 보병친구들이 갑절로 고생했을겁니다. 일은 잘된거라고 보는데… 하, 이것도 저것도 우단점이 있는것 같아서 뭐가 잘되고 뭐가 잘못됐는지 어디 알겠습니까. 부대의 전투승리를 위한 견지에서 보면야 우리가 놈들을 쳐내깔려버린게 썩 잘된거지요.》

그제서야 학문의 얼굴에 서렸던 노기가 가셔졌다.

(그럼 이제는 생각을 달리한다는것인가?! 무엇이 그의 마음을 돌려놓은것일가? 아니야, 사고가 너무 단순해서 그럴거야. 정말 꼬장꼬장한 친구라니까.)

너무도 쉽게 제잡담 결론지어버리는 그를 보며 학문은 허허 웃고말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러니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되지 않겠소. 우리한테 유리하면 치는게고 불리할것 같으면 그만두는게고. 안그렇소?》

《그런것 같긴 합니다. 좌우간 부과장동지가 말했듯이 군인의 량심대로 행동하면 되겠지요.》

날이 어슬어슬해왔다.

밤이 되기 바쁘게 조강리와 마근포쪽의 강대안에서는 벌써 여러개의 탐조등줄기가 뻗어나와 검푸른 물면을 샅샅이 훑었다. 이런 때 일제사격으로 위력정찰을 해보면 대안의 적 방어구역을 확정할수 있다. 그러나 강폭이 너무 넓은데다가 대원들모두가 위장을 위해 카빈총이나 엠완총만을 가지고있어서 적을 놀래워볼수가 없었다. 한가지 좋은 수는 놈들의 코앞까지 접근해서 자극함으로써 반응하는 형편을 관찰하는것이다. 그러자면 저쪽대안에 바싹 가붙어야 했다.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일이였다.

안창항이네가 돌아온것은 사위가 온통 어둠속에 묻혀버린 때였다.

《덕천이가 어떻게 돼서 그림을 잘 그리는가 했더니 쪼간이 있습디다. 어두운 속에서 어떻게 봤는지 물풀속에 숨겨져있는 매생이를 찾아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능력을 미술에선 뭐 투시력이라구 한다나요. 난 매눈이라고 했지요, 하…》

안창항은 싱글싱글하며 말수더구를 떨었다.

《도하지점은 어떻소?》

《한 사오십리 올라가봤는데 어디나 강심이 깊습니다. 그러니 도하지점은 강심깊이에 따라서가 아니라 적들의 배치상태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허, 그래? 창항동무가 옳게 말했소. 우린 적들이 밀집되지 않은 곳을 찾아내야 해. 매생이가 생긴건 정말 큰 횡재요. 덕천동무가 큰일을 했구만.》

학문은 몹시 기뻤다. 이제는 저쪽으로 은밀히 접근하여 적을 놀래워볼수 있는것이다. 그의 생각을 알게 된 안창항이가 선자리에서 팔을 부르걷었다.

《그러니까 놈들이 불질하게 만들어서 적정을 알아내자는거지요? 부과장동지! 우리가 가겠습니다.》

《동무네는 좀 쉬오, 피곤하겠는데.》

《쇠도 단김에 두드려야지요. 보내주십시오.》

흥분해하는 그를 보니 불시에 눈앞이 흐려왔다. 보통때는 감정표현이 거의 없어 무뚝뚝해보이는 안창항이지만 어려운 일감이 생길 때면 이렇게 자신을 걷잡지 못해한다. 믿음이 가는 친구였다.

《그럼 좋소, 떠나시오. 적의 대안을 한바탕 두드려놓고는 즉시 돌아서라구.》

《념려하지 마십시오. 저 아래쪽에서 이쪽의 웃목까지 다 쑤셔놓겠습니다.》

자정이 가까울무렵, 4명의 정찰병이 매생이를 타고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

노젓는 소리가 얼마간 들려오다가 철썩, 솨― 철썩, 솨― 하고 쉬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묻혀버리고말았다.

미친놈의 눈깔마냥 희번득이는 탐조등의 불빛이 물면우를 훑으며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그 불빛에 드러난 물결이 맹수의 이발처럼 허옇게 보였다. 탐조등이 지나가면 또다시 어둠이 모든것을 묻어버렸다. 그 어둠속을 지그시 응시하느라니 오만가지 생각이 마음을 괴롭혔다. 걱정과 불안, 기대와 의문, 예상과 희망…

문득 정찰과장에 대한 생각이 머리속을 스쳤다.

이런 때 그는 어떤 결심을 내렸을것인가. 규범절대주의를 론하는 사람, 흥분보다는 차디찬 론리를 앞세우는 사람이다.

(정찰활동의 규범이라?!)

어둠! 어둠! 반복되는 탐조등의 교차! 매생이는 어디쯤 갔을가?

반시간쯤 흘렀을 때 갑자기 저쪽대안에서 펑끗펑끗 섬광이 일더니 콩볶듯 하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맹렬한 사격이 시작되였다.

무수한 조명탄들이 꼬리를 끄을며 솟아올라 강안을 대낮처럼 밝히고 쿵쿵 지심을 울리는 포성과 함께 강물우에 물기둥들이 일어섰다.

강물이 쏟아질듯 뒤설레였다. 몇발의 포탄이 이쪽기슭에까지 날아와 터졌다. 이런 때는 육안감시만으로도 적의 밀집방어구역과 포진지배치정형을 순식간에 알아낼수 있다. 화력을 보아 적은 한개 련대이상의 보병과 대대정도의 포병을 가지고있다는것이 확인되였다. 수백리에 달하는 강안에 력량을 널어놓으려니 그 이상의 방어밀도를 보장할수 없었을것이다.

《무선수!》

학문은 지도우에 찍은 좌표들을 련이어 불렀다. 포사격을 부르는 전파가 날았다.

(됐어! 이젠 모두 무사히 돌아와야겠는데…)

시간이 갈수록 속이 조마조마해들었다. 그들이 돌아오면 아군의 포병준비타격이 개시될것이다, 그뒤엔 공병들이 강행도하를 위한 기재를 전개할것이고…

동녘하늘이 희붐해지기 시작했다. 미구하여 새날이 밝을것이였다.

학문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5시가 가까왔다. 이 사람들은 왜 아직 돌아오지 못하는가?! 이제 30분 아니, 15분만 지나가도 때는 늦는다. 강물우에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면 적의 조준사격을 받게 될것이다.

학문은 입술을 피나게 깨물었다.

(창항이! 뭘하고있는거야? 왜 돌아오지 못하는가?)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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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동― 무― 들!》

철썩철썩 기슭을 치는 물결소리를 타고 흐느낌인양 부르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달려간 정찰병들은 강기슭에 쓰러져있는 2명의 전우를 발견했다. 안아일으켜보니 안창항과 김덕천이였다.

《부과장동지, 임무를…》

안창항은 겨우 입술을 움지럭거렸다. 겨우 쳐들렸던 눈시울이 다시 맥없이 내리감겼다.

《빨리!》

소나무숲속에 안아들이고 응급처치를 해서야 그들은 의식을 회복하였다. 온몸이 물에 퉁퉁 부어올랐고 타박상을 입어서 움직일수 없었다. 그 몸으로 그 넓은 강을 헤염쳐돌아왔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였다.

적의 대안에 이른 그들은 놈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련발사격을 한바탕 들이대여 적들을 놀래워놓고 물러났다. 적의 사격권을 빨리 벗어나기 위해 2명은 노를 젓고 안창항과 김덕천은 헤염치면서 배를 떠밀었다. 그런데 눈먼 포탄이 직통 매생이를 명중하였다. 노젓던 2명의 정찰병은 배와 함께 갈가리 흩날려 희생되였고 헤염치던 안창항과 덕천은 폭풍에 날려 휘뿌려졌다.

《덕천이!》

《조장동지!》

뒤번져지는 물결우에서 겨우 부둥켜안은 두사람은 초인간적인 의지로 헤염치며 마사진 널쪼각에 의지했다. 희생된 전우들은 벌써 강물에 떠내려갔는지 어둠속에서 아무리 찾아헤매였으나 시신조차 찾을수 없었다. 그들은 솟구쳐오르는 비분을 안고 적들에게 마지막탄알까지 다 날렸다. 어떻게 아군편의 강대안까지 헤염쳐왔는지 그들은 기억하지 못했다.

정찰병들은 숙연히 모자를 벗었다. 말없이 돌들을 모아다가 소나무아래에 오각별을 새겼다. 시신도 남기지 못하고 전사한 전우들을 위한 추모의 표식이였다. 오각별의 가운데 놓인 큰돌에는 희생된 전우들의 이름을 새겼다.

《동무들!》

학문은 콱 목이 메여 더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모두들 묵묵히 서있었다. 말없는 속에서 뜨거운 그 무엇이 모두의 마음속에 흘러들고있었다.

(정찰대의 첫 희생! 이런 희생이 얼마나 있어야 할는지 그 누가 알수 있단 말인가.)

검푸른 한강이여! 너 고이 새기라. 전쟁의 승리를 위해, 조국의 통일을 위해 한목숨 바치는 이 나라 병사들의 위훈과 헌신을 너 후세에 말해주라!

《복수합시다!》

학문은 겨우 이 말 한마디 하고는 권총을 머리우에 높이 쳐들었다.

《복수하자! 복수하자!》

정찰병들이 목소리를 합쳐 부르짖었다.

땅! 조총을 대신하여 리학문의 권총에서 날아오른 푸른 신호탄이 새벽의 하늘에 곡선을 그렸다. 그러자 이편에서 한강건너 저편으로 긴 포물선을 그으며 시뻘건 불줄기들이 뻗어가기 시작했다.

쉬―이―익! 쉭―쉭―쉭!―

그것은 성난 맹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같았다. 아군포병대의 집중화력타격이 시작된것이다.

쾅! 콰과쾅! 꽈르릉!

저쪽대안에 무수한 불꽃이 펑끗거리더니 요란한 포성이 하늘땅을 뒤흔들었다. 솟구치는 화광이 거뭇한 구름발을 훌 밀어던졌다. 삽시에 적의 방어구역은 온통 불바다로 변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공병들이 물면우에 배떼다리를 쭉 펼쳐놓자 어둑어둑한 수림속에서 땅크들이 와릉, 와르릉― 기세좋게 달려나왔다. 무한궤도가 강철판을 으직으직 짓긁으며 다리우에 올라서자 거대한 배떼우에 솨―철썩! 사나운 물결이 격랑쳐올라 쏟아졌다. 장쾌한 그 멋에 성수가 오른듯 땅크들은 검은 배기가스를 연꼬리처럼 달고 달려간다. 그 다음엔 마차들이 쩌―쩌― 채찍소리를 허공에 울리며 나아가고 보병부대들도 뒤질세라 따라섰다.

아군포병들의 정확한 조준사격을 받은 적의 포진지와 기관총좌지들은 벙어리가 되여버렸다.

《잘한다, 잘해!》

화광이 충천하는 강건너편에 대고 주먹을 내흔들던 동호가 주먹으로 눈굽을 뻑 닦는다.

《뒤로 전달! 속도 빨리!》

배떼다리우에 올라선 학문은 앞장에서 내달렸다.

정찰대는 또다시 대오의 척후에 서야 한다. 도하순번을 앉아서 기다릴수 없다.

서울을 정면에서 공격하는 련합부대들과의 협동을 보장하기 위해 사단은 한강남안지역을 먼저 차지하여 놈들의 퇴로를 차단해야 했다. 사단주력의 신속한 행동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정찰대가 보병부대들을 썩 앞질러 한시바삐 영등포로 진출해야 한다. 로획했던 차들마저 버렸다. 한시바삐 목적지에 이르자면 자동차를 도하시키느라 늦잡을 시간이 없었다. 하여 아수한대로 자동차들을 1련대 포병대대에 넘겨주고 도보로 도하장을 빠져나가는것이였다.

자동차를 넘겨받은 포병대대장은 련대장 한태설과 쌍둥이라 할만치 인상좋은 텁석부리였는데 너무도 좋아서 입이 귀밑까지 돌아갔다. 한순간에 허물없는 너나들이사이가 되여 리학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 신셀 뭘루 갚는다?! 근데 정찰에서는 어떡하자구?》

《괜한 걱정은 말란데두.》

《아하, 하긴 포병의 정찰병걱정이란 늘 거부기의 토끼걱정 한가지이지.》

육중한 120㎜박격포를 견인한 군마들이 요란스레 투레질을 하며 배떼다리우로 전진해나갔다. 흠씰거리는 그우로 정찰병들도 걸음을 다그쳤다.

쏴아― 또다시 세차게 솟구쳐오른 물갈기가 무릎을 쳤다. 그러나 누구도 주춤거리지 않았다.

《비켜서라구! 죽고싶어 그래?》

포마의 검누른 가죽고삐를 감아쥔 늙수그레한 상등병이 좁은 포가사이를 비집고 새치기로 빠져나가는 정찰병들한테 도끼눈을 부라리다가 제풀에 헤벌쭉 웃는다. 인민군복장에 괴뢰군복을 덧입은 그들이 범상한 사람들이 아님을 제꺽 알아차린 모양이다.

《상등병아바이, 미안하외다. 천천히 따라들 오라구요.》

바쁜통에도 늘짓한 황소걸음을 하던 김동호가 말아문 마라초연기를 입귀로 훌훌 내뿜으면서 량해를 구했다.

도하장을 인츰 빠져나온 정찰대는 한강을 거슬러올라 행주나루쪽으로 장달음쳤다. 맨 앞장에서 내달리는 학문의 등뒤에 소금버캐가 허옇게 내불리여 지도를 그렸다. 벌써 서울북쪽으로 돌입하는 련합부대들의 포성이 쿵쿵 들려왔다.

《부과장동지!》

이미 무휴통신으로 넘어가 무선기의 조절기를 돌리던 차용대가 큰소리로 불렀다.

《뭐요?》

용대는 대답대신 무선기수화기를 쑥 내밀었다. 흥분하기 잘하는 그였지만 지금의 이 순간에는 보통때와 판이한 기색이였다. 말로써는 형용할수 없는 비장감까지 눈빛에 어려있었다. 수화기를 내미는 손이 약간 떨었다.

그 어떤 비상한 예감에 사로잡힌 리학문은 두손으로 수화기를 받아쥐였다. 다음순간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었다. 수화기에서 귀에 익은 우렁우렁한 음성이 울려나왔던것이다.

《…

사랑하는 형제자매들!

우리 인민군 군관, 하사관, 병사들!

…우리 조국과 인민에게는 커다란 위험이 닥쳐왔습니다.》

(아, 장군님의 육성이 아닌가?)

그는 너무도 귀에 익은 음성을 듣는 순간 솟구치는 감격을 금할수 없었다. 조국에 돌아온 전사들을 만나시려 부대에까지 찾아오셨던 그날 가슴속에 깊이 새겼던 김일성장군님의 못잊을 그 음성이였다. 이웃나라 혁명을 돕는 전쟁에서 단련된 동무들이 우리 군대에서 많은 일을 할수 있다고 하시며 크나큰 믿음을 베풀어주시던 장군님의 그 음성이였다.

그는 수화기를 높이 쳐들고 흥분한 목소리로 웨쳤다.

《동무들! 김일성장군님께서 방송연설을 하시오!》

차용대가 수화음출력을 최대로 올렸다. 간간이 울리는 포성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려들을수 있었다. 그의 주위에 몰켜들어 한덩어리가 된 정찰병들은 모두들 숭엄한 감정에 휩싸였다.

연설은 계속 이어졌다.

《…우리 조국을 통일할 시기는 왔습니다. 승리에 대한 확고한 신심을 가지고 용감히 나아갑시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갑시다.》

장군님의 방송연설이 끝나자 《조국보위의 노래》가 힘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 조국통일의 날이 멀지 않았다. 조국통일의 그날이 바로 정다운 고향으로 가는 날이다. 우리는 김일성장군님의 명령을 받들고 통일의 그날을 마중가는 척후병들이다!)

다시 출발한 정찰병들은 힘이 백배하여 달렸다. 달리며 모두들 뜨거운것을 삼켰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의 승리를 확신하고계신다! 김일성장군님의 명령대로 하루빨리 남녘땅을 해방해야 한다! 저 남해가에 미국놈들과 리승만괴뢰역적을 쓸어넣어야 한다!

걸음보다 마음이 앞서달리는 길이였다. 벌써 행주나루가 눈앞에 다가왔다.

나루터는 서울거리에서 넘어와 몰킨 적들로 수라장이였다. 배에서 내려선 괴뢰군놈들과 사민들이 저저마다 먼저 빠져나가겠다고 헤덤비는 바람에 누구도 인차 빠져나가지 못해 인산인해를 이루고 붐비였다.

정찰병들은 리학문의 명령대로 곧추 선창으로 달려가 엄엄하게 뻗치고섰다. 카빈총을 비껴들고 늘어선 그들의 위엄앞에 그 누구도 주눅이 들지 않을수 없었다. 나루터는 간단히 장악된셈이였다.

마포쪽에서 떠난 나루배 한척이 기우뚱거리며 또 건너왔다. 배우에 립추의 여지없이 올라선 놈들은 거개가 괴뢰군장교들이였다.

출렁이는 물결이 금시라도 배머리를 삼켜버릴듯 위태위태했다. 가까이 다가온 다음에 살펴보니 일가족속을 거느린 고위급장교들도 더러 있었다.

배전이 선창에 닿자마자 중령의 계급장을 단 놈이 뚱기적거리며 제일먼저 뛰여내렸다. 나루가에 벋디디고섰던 김덕천이가 그놈의 멱살을 틀어쥐여 홱 나꾸챘다. 그 바람에 모래판에 나가넘어진 그놈은 눈깔을 희번득거리더니 성이 나서 일어서며 다짜고짜 권총을 뽑아들었다.

《으짜 이러는기야? 사병놈이 재수머리없이…》

때를 놓칠세라 내지른 리학문의 군화발이 놈의 권총을 강물우로 날려버렸다.

《중령계급장을 달았으면 사생을 결단하고 서울을 지켜야지 사병들을 내버리고 먼저 도망을 쳐? 우린 〈륙참〉소속 독전부대요!》

상대가 비록 소령계급장을 달았어도 《독전부대》장교인데다가 됨됨이 결코 만만치 않은것을 알아차린 그놈은 대뜸 주눅이 들어버렸다. 이런 판에서는 군사규정보다는 주먹이 위력한 법이여서 중령이라고 상급행세를 하려다가는 큰코 다칠수 있다는것을 제꺽 알아차린것이였다. 그러면서도 제법 체면만은 잃지 않으려고 툭툭 엉치를 털고나서 점잔을 빼며 동닿지 않는 말을 중얼거렸다.

《소령, 문둥이같은 자식들이 한강다리를 폭파했당게로.》

리학문은 권총을 휘두르며 호통쳤다.

《그게 바로 리승만박사의 의지요. 군인에겐 물러설 곳이 없다는걸 알아야 돼. 자자, 이제부터 대렬을 편성하겠소. 모두 사렬횡대롯!》

중령놈이 봉변당하는 꼴을 목격한 장교놈들은 벌벌 떨며 옹송그린채 모래불에 늘어섰다. 그놈들을 외따른 곳의 모래불로 몰고가서 무장해제하고나서 모두 포로해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선창가에 또다시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이걸 놔라! 이걸 놔!》

크고작은 보짐을 이고진 부유층족속들이 또 우르르 쏟아져내린것이였다.

한 부상병놈이 짝다리를 마구 휘두르며 장교놈과 싸움질하고있다.

약육강식의 법도는 말로에 이른 패잔병들을 더욱 포악하게 만들어버렸다.

다른켠에서는 뭣때문인지 장교놈이 사민과 주먹다짐싸움을 벌려놓았다. 그속에서 별로 매끈한 양복차림의 안경쟁이사나이가 리학문의 시선을 끌었다. 그놈은 얄팍한 서류가방을 옆구리에 끼였다. 행정부나 특무대의 요원일수도 있다.

(저 가방에 중요한 문건이 들어있을수도 있다.)

본능적인 호기심이 생긴 리학문은 권총을 휘둘러 그놈을 끌어냈다.

《임마! 너 인민군대 렴탐군이지?》

낯선 《국군》소령이 다가들자 안경쟁이는 덴겁하여 뒤걸음쳤다.

《소, 소령님, 와 이러십니꺼. 난, 난 일반사민입니더.》

《잔소리 말아! 그 가방을 보자.》

《이건 아무것두 아닙니더. 토지문서입니더.》

서류가방을 빼앗아서 뒤져보니 정말 곰팽이내가 풀풀 나는 종이뭉테기뿐이였다. 학문은 문서장들을 꺼내여 벌컥벌컥 뒤지면서 따져물었다.

《어디 지주야?》

《예, 예, 우리 아버지가 황주벌대지주였는데 장교님, 북조선빨갱이놈들한테 땅을 송두리채 뺏기구 월남했습니다. 그걸 찾겠다구 38°선근방에서 여태껏 벼르구 별렀는데… 헌데 글쎄 바루 그제 빨갱이들의 포탄세례를 맞구 즉사했지여. 어허엉, 으흑…》

밴밴하던 얼굴이 눈물로 벌창이 되였다.

환멸과 증오가 머리끝까지 치받친 리학문은 토지문서뭉테기를 가방채로 한강물에 내던지고나서 그놈의 배허벅을 군화발로 걷어찼다.

《민충이같은 자식! 인민군대가 들이닥치는 판에 이따위 파지뭉테기나 들구 다녀? 이런 종이장이 네놈을 지켜준대?》

시서늘한 학문의 서슬앞에서 안경쟁이는 두손으로 아래배를 그러안고 죽는 시늉을 해보였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장교나리.》

비굴한 작태를 보니 더 부아통이 터져나서 다시한번 엉치를 힘껏 내찼다.

(시시하군.)

그때 사민 3명을 거느린 중령 하나가 시야에 걸려들었다. 학문은 그놈들이 돈냥이나 있는 놈들이라는것을 첫순간에 간파했다. 사민놈들이 걸친 옷가지들이 여간 값비싼것들이 아니였던것이다.

《중령님, 이런 전시에 사민들을 데리고 유람을 가는거요?》

중령놈은 촉감이 빨랐다. 그놈의 말상같은 얼굴에 일순 당황한 빛이 스치고지나갔다.

리학문은 꿱 소리질렀다.

《이 사민놈들의 신분을 확인해보라!》

형세가 까다로와지자 중령놈은 초조해했다.

《소령, 그러지 말고 그까짓것, 우리 절반씩 나눠가집시다. 사실 마대의것은 현금이요. 난 3사후방과장인데 다 망한판에 돈이라두 건사해야 하지 않겠소.》

순간 학문은 불이 번쩍나게 그자의 귀뺨을 후려갈겼다.

《이따위가 무슨 장교야? 일선에선 피를 흘리는데 후방자금을 제 주머니에 처넣어?》

그 사이에 동호와 차용대가 사민놈들이 메고있던 자루를 풀어헤쳤다.

《소령님, 이자들한테 돈이 3마대나 있습니다.》

《당장 회수하라!》

정찰병들은 돈마대를 빼앗고 놈들을 꿇어앉혔다.

(이런 놈들이 무슨 군대인가, 이따위놈들을 믿고 전쟁을 일으킨 미국놈들두 한심하지.) 하고 생각하며 학문은 소리소리 질러댔다.

《네놈들을 몽땅 〈국방부〉에 넘겨 군사재판에 회부할테다! 괘씸한 돈벌레놈들!》

그다음부터 련이어 들이닥치는 배들은 그런 식으로 다루어낼수 없었다. 죽기내기로 밀려드는 패잔병들이 선창가로 와―아― 밀려나왔다. 사람사태속에서 아츠러운 비명소리가 그칠새 없었다. 본때를 보여주어야 했다.

《질서를 파괴하는 놈은 즉석에서 이렇게 쏴죽인다. 사격!》

버럭 소리치며 몇방 갈겼다. 난탕을 치며 돌아가던 장교 몇놈이 죽어넘어져서야 모두들 공손해졌다.

학문은 권총구멍에서 몰몰 피여오르는 연기를 입김으로 훅 불어버리고 웨쳤다.

《모두 들으라! 우린 새로 부대를 편성할 임무를 지닌 〈륙참〉독전부대다. 우리 일을 방해하는 놈은 현장에서 총살이다! 모두 사렬횡대로 서라!》

괴뢰군사병들과 장교들도 기품이 당당한 《국군》소령의 딩딩한 서슬에 감히 대들지 못했다.

일단 선창가를 수습해놓고 대령놈을 심문하는 과정에 서울에서 쫓겨난 괴뢰군부대들이 배로 도망치려고 인천으로 밀려간것을 알게 되였다. 곁따라 영등포지구의 적들도 부랴부랴 밀려갔다는것이였다. 창발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많은 적을 놓쳐버릴수 있었다.

학문은 3조를 떨구어 보병들이 도착할 때까지 나루터를 통제하도록 하고 인천을 향해 서둘러 출발할것을 명령했다.

그때 지휘부에서 무선이 날아왔다. 행주나루터를 장악했다는것과 영등포지구의 적들이 모두 달아났다는 보고를 받고서도 지휘부에서는 부디 영등포지구의 적정을 확정하여 보고할것을 요구했다.

(빨리 인천으로 나가야겠는데…)

의향을 알렸으나 허찬과장의 요구는 지나칠 정도로 완강했다.

정찰병들은 하는수없이 영등포를 향해 달려갔다.

그곳은 예상했던대로 벌써 텅텅 비여있었다. 이곳에 배치되였던 괴뢰 《수도사단》과 제5사단은 어디로 도망쳤는지 행처조차 찾을수 없는 판이였다.

영등포경찰서를 수색해보았으나 경찰 한놈 남아있지 않았다.

《이놈들은 전탕 벼룩이를 볶아먹었는지 도망치는데는 선수들이란 말야. 거둬볼만 한건 다 가지구 내뺐구먼, 허…》

먹을만 한것을 찾느라고 경찰서의 여기저기를 뒤지던 김기전이 빈손을 털었다. 휴대하고 떠났던 식량이 거덜났기때문에 특무장인 그의 고충이 컸던것이다.

경찰서장방을 수색한 결과도 시원치 못했다. 가치가 있어보이는 문서는 다 소각했는지 열려진 빈 철궤들앞에 재무지만 무둑했다.

따르릉따르릉… 어디선가 전화종소리가 계속 울리기에 살펴보니 서장의 탁상우에 회색전화기가 놓여있었다. 송수화기를 들어보니 어떤 놈이 코맹맹이소리로 이곳의 정황을 묻고있었다.

《뭐야? 넌 누구야?》

《나? 나 말이요? 백골부대요. 우린 지금 룡산사관생들하구 인천에다 방어선을 쳤는데 인민군대가 어데까지 왔는지 몰라서 그러오. 공산군이 거기 오거들랑 제깍 알려주시오.》

놈들의 주력은 벌써 인천에 가있는것이다. 영등포지구의 적정은 더 알아보나마나였다.

리학문은 송화기에 대고 꿱 호통쳤다.

《야! 이 멍텅구리같은 놈아! 우린 인민군대야. 네놈들은 다 망했다. 거기서 옴짝 말구 기다려라!》

《뭐, 뭐라구?》

저쪽에서는 기절초풍할만큼 놀라 숨을 헉 들이그었다.

그는 송수화기를 던져버리고 명령했다.

《빨리 인천으로!》

영등포지구의 형편을 보고받은 지휘부에서는 이번에는 또 김포비행장의 적정을 알아낼것을 명령했다.

김포비행장은 아군비행대의 첫날타격에 녹아났다. 적의 주력이 인천항에 몰린 정황에서 곧추 인천으로 진출하여 놈들의 발목을 붙들어매야 하지 않겠는가.

정찰대의 요구에 허찬과장은 이번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하는수없이 정찰대는 김포비행장으로 향했다. 그곳의 적정을 확인하고 걸음을 앞당겨 인천항으로 진출할 결심을 내릴수밖에 없었다.

도로는 적의 자동차와 사병들로 꽉 메였다. 자동차들은 부릉부릉 숨가쁜 소리를 지르면서도 붐비는 사병들때문에 전진하지 못했다. 경적소리를 아츠럽게 울리며 조심스럽게 굴러가다가 사병을 깔게 되면 악에 받친 사병떨거지들이 와― 모다붙어 운전사를 끌어내린다.

《아이구!》, 《데이구!》 악청과 비명속에서 자동차는 략탈도난당하고 길은 또 메인다. 이런 판이니 자동차를 빼앗아탄다고 해도 소용이 없을것이다. 도무지 전진속도를 보장할수 없었다.

정찰병들은 혼잡한 큰길을 버리고 논두렁이나 밭고랑을 따라 달렸다. 그러느라니 예정했던 시간보다 두시간이나 늦어서야 김포에 들어설수 있었다.

김포비행장은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활주로에는 아군비행대의 폭격에 녹아난 비행기잔해들이 너저분하고 창고들은 불타버렸다. 아직 도망치지 못한 얼마간의 패잔병들이 비행장격납고와 병실에 숨어서 대항할뿐이였다.

정찰병들은 남아있는 놈들을 소탕하고 보급물자들을 로획했는데 대부분 비행복, 고급내의, 모포, 락하산천과 같은것들일뿐 무기전투기술기재는 별반 쓸만한것이 없었다.

인제는 한시바삐 인천항으로 진출해야 했다. 놈들이 배를 타고 빠져나가기 전에 항을 봉쇄해야 한다.

지휘부에 무선을 날리고 급히 행군을 시작했으나 인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큰 배 한척이 검은 연기를 뿜어올리며 부두가를 벗어나고있었다. 마지막배였다. 거뭇한 선체를 무겁게 기우뚱거리며 멀어져가는 배전에 버젓이 서있는 괴뢰군장교놈들의 모습이 그를 조롱하는듯싶었다.

《일제 사격!》

부두가에 무릎을 꿇고앉아 련발사격을 퍼부었으나 함선은 벌써 자동총사격권을 벗어났다. 포라도 있었으면 한방 갈기고싶었다. 아니, 비행대라도 있었으면…

《제길, 끝내 놓쳤군.》

학문은 주먹으로 무릎을 쳤다. 통분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놓쳐버렸다. 분격이 치밀어올랐다. 영등포와 김포에서 시간을 허비할것이 아니라 곧추 인천항으로 진출했어야 했다.

그는 욱하고 치미는 분격을 겨우 참았다. 하지만 그 배에 누가 타고있는지를 알았다면 그 분격을 참아낼수 없었을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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