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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장의 행운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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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374회 작성일 20-08-2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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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장

명 령

3

 

창공을 떠난 수리개마냥 어깨가 처져있던 정찰병들은 명절이나 맞은듯 했다. 부과장이 돌아오고 전선사령관으로부터 적후진출임무를 받은데다가 오늘은 구체적인 작전안을 토의하려고 이른아침에 리학문이 련합부대지휘부에 올라간 사실이 모두를 더 흥오르게 하였다.

그렇다. 당장 래일이라도 적후로 출발하게 될것이다. 정찰병들이 부대에 돌아오는 날도 명절이지만 다시 적후로 들어가게 되는 마지막날 또한 그에 못지 않은 흥분과 기쁨으로 가슴들이 들레이는 날이다. 하물며 적후에서 살다싶이 해야 할 사람들이 엉치에 썩살이 박히도록 앉아뭉개다가 드디여 명령을 받았으니 그 즐거움은 목마른 곡식이 단비를 만난것과 같았다.

이런 날이면 부대에서도 정찰병들을 위해 아끼는것이 없다.

부대후방부에서 특대물자로 정찰중대에 보내준다는 통돼지를 받으러 갔던 특무장 김기전은 공급장을 어떻게나 구슬렸는지 《증산》표 가치담배를 다섯보루씩이나 얻어가지고 와서 김동호에게 특별히 선사한다고 선언했다.

병실앞뜨락의 한쪽켠에서는 정영모의 서툰 리발솜씨에 터부룩해진 머리를 맡겼던 안창항이가 깎는게 아니라 뜯는다고 아부재기치는 모양이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는데 고양나무옆의 나무계단에 앉아있다가 단박에 헤벌쭉해진 김동호가 튕긴듯 일어서는것을 덕천이가 짜증을 내며 눌러앉힌다.

《좀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겠어요? 그림이 다 망가져도 좋나 말이예요.》

김동호는 지금 그림그리는 모델을 서고있는중이다. 편지에 넣어서 고향에 보내줄 그림이라고 언제부터 졸라서 오늘 아침부터 덕천이가 품놓고 그리기 시작했는데 한낮이 기울도록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에― 그 인형노릇두 헐치 않구먼. 아직두 안됐나? 넨장, 그림은 그림이구 담배부터 한대 피우고 보세나. 이보우, 특무장!》

벌떡 일어난 동호는 덕천의 붙잡는 손을 미련없이 뿌리치고 김기전한테로 달려가 붙어버린다.

《자, 편지요! 후방에서 보내온 편지! 동무들이 적후에 있는 기간에 온것두 다 모아놨지.》

늙수그레한 기통수가 가녁이 나슬나슬한 진밤색가방에서 한뭉테기나 되는 편지들을 꺼내들고 흔들며 회심만만한 함박웃음을 짓는다.

임무를 수행하고 부대에 돌아온 정찰병들은 적함선을 까부시고 돌아온 비행사들 부럽지 않은 특전을 누리게 되지만 제일 기쁘게 해주는것은 역시 후방에서 보내온 편지다.

《어디 보자구요. 내게 온게 있겠는데…》

김동호가 제일 덤빈다. 딸애의 새 사진을 보내올 때가 넘었다면서 언제부터 기다리던 그다. 한달전에 편지가 오고는 종무소식이라며 끙끙거리더니 기통수가 눈에 뜨일 때마다 선참 알은체 하며 극성을 부린다.

《좀 비키라구요.》

《내게 온건 없어요?》

괜한 싱갱이질이다. 기통수아바이가 차곡차곡 개인별로 뭉그려놓은때문이다.

《자, 어서 받으소. 그렇지, 여기 특무장한테 온것두 있소.》

《아니, 이게 어디 내게 온게요? 위문편진데…》

《위문편지는 뭐 편지가 아니랍데? 후방에서 온것이면 전선병사들 누구한테나 해당되는게지. 흐흐흐…》

그때 라동수중대장의 챙챙한 구령이 울렸다.

《차렷!》

정찰병들은 순식간에 정렬했다. 리학문이 돌아온것이였다. 그의 얼굴표정만 보고서도 임무의 중대성을 가늠해보는 모양 모두들 전례없이 엄숙해졌다. 복장을 정돈하는 소음이 순간적으로 사라진 후에도 학문은 심호흡을 하며 인차 말을 떼지 못했다. 뻐근한 흥분이 가슴속에 무드기 차올라서였다. 중대원들도 모두 격정의 파도를 걷잡을수 없는 모양 숨소리들이 높았다. 하지만 대원들의 손들에 들려있는 편지를 띠여본 리학문의 눈살은 저도 모르게 찌프러졌다. 부대에 돌아오면 누구나 여불없이 후방에서 온 편지를 찾군 하는것이나 그는 언제한번 그런 희사를 바란적이 없었다. 후방에 일가친척이 하나도 없는 그로서는 그럴만한것이였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부르짖군 했다.

(정찰병들에게 있어서 감상적인 흥분은 좋은것이 못돼. 백해무익할뿐이지. 정찰병의 특질은 그렇게 애리애리한 감정이 아니라 무쇠주먹에서 찾아야 하는거야.)

그런 눈에 비낀 중대원들의 모습은 마음싼것이 아니였다. 중대한 임무를 앞에 놓고 흥분한 대원들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심호흡을 길게 하고나서 무겁게 입을 열었다.

《모두 훈련을 잘해야겠소.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훈련이요.》

초조하게 기다리던 대원들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력연해졌다.

《훈련이라니요?!》

김동호가 어망결에 한마디 뱉다가 찔끔 움츠러들었다. 훈련을 놓고 흥정하려드는것을 제일 질색하는 리학문의 성미를 잘 알고있는때문이였다. 하지만 그도 다른 사람들도 《적후정찰을 골백번 했는데 이제 또 훈련이라뇨? 지체하지 말고 어서 임무수행에 착수합시다. 이제 훈련을 한대야 얼마나 하겠다구요.》하는 눈빛으로 줄곧 학문을 주시하고있었다.

애써 그들의 눈빛을 외면하며 그는 굳이 오금을 박았다.

《이미 적후정찰을 백번 했다 해도 훈련에 싫증나하는 사람은 정찰병자격이 없소. 정찰병과 훈련, 이것은 사람의 몸에 달린 두팔과 같이 단 한시도 떼여놓을수 없다는걸 명심하시오.》

《그럼 적후엔 안들어갑니까?》

김윤도가 도저히 리해할수 없다는 표시로 고개를 기웃하며 던진 물음이였다.

《때가 되면 명령이 있을게요. 훈련시작!》

정찰병들은 산발타는 훈련부터 하였다. 적후에서 맞다드는 절벽이면 절벽, 협곡이면 협곡… 산발을 타고 훨훨 날아야 한다.

학문은 갈구리 달린 바줄을 던져 나무그루에 걸고 그 바줄을 타고 벼랑을 극복하는 훈련과 바줄을 리용하여 골짜기를 건너가는 훈련을 진행한 다음 괴뢰군의 제식동작까지 여러번 반복훈련시켰다.

타격훈련, 매 정찰병들의 특기를 살리는 훈련…

아픈 허리를 가지고 훈련을 돌보려니 말할수 없이 힘에 부쳤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훈련장을 떠나지 않았다. 군복안에 군관혁띠를 두개나 졸라맨것을 복남이만이 알고있었다.

그들의 훈련을 멀리서 허찬정찰과장이 지켜보고있었다. 정찰사업에서 범한 그의 과오가 전선사령부에 반영되고 김책의 엄한 추궁을 받은 후 허찬에 대한 사단참모부의 검토가 있었다. 결국 그는 당분간 정찰대에 대한 지휘권을 내놓고 자체검토를 하게 되였다. 소심성, 교조적인 사고방식… 그러루한 견해가 정찰활동에 적지 않은 저애를 준 사실을 들어가며 비판되였으나 허찬의 도고한 마음에는 수박겉에 흐르는 비물이나 같았다.

(많은 인원을 데리고 어떻게 민첩성과 은밀성을 보장한다고 그래. 더우기 적들이 압축될대로 압축된 적후에서… 이제 꼭 수습할수 없는 후과가 있을것이다. 그때에 가선 이 허찬의 견해와 관점을 놓고 가타부타하지 못할것이다.)

그는 소름이 끼칠만큼 끔찍한 생각까지 서슴지 않게 되는 자신을 깨닫지 못했다. 야심에 물젖으면 그처럼 비량심적인 지경에까지도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빠지게 되는 법이였다.

정찰병들은 온 하루를 훈련으로 보내고 저녁에는 김룡조의 정식입대가 비준된것을 축하하며 푸짐한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는 일찌감치 취침에 들어갔다.

전선을 넘기 전에 푹 자는것도 중요한 임무다.

보초소들을 돌아본 학문은 자기 침실에 돌아와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붙여보려고 궁싯거리던 끝에 삼경이 넘도록 종시 졸음이 오지 않아 일어나앉고말았다.

아픈 허리가 또 말썽을 부렸다.

이른새벽에는 적후로 출발해야 한다. 이번의 전투가 매우 간고한 싸움으로 되리라는 생각이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김책의 목소리가 다시 귀전에 울리는듯싶었다.

《장군님의 믿음을 잊지 마시오.》

믿음! 믿음은 사람을 분발시킨다. 믿음받은 병사는 용감해진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임무를 원만히 수행하여 믿음에 보답한다면 그보다 고귀한 생이 없을것이다.

임무를 수행하자면 그자신부터 이밤에 푹 쉬여야 했다. 그런데 왜서 이처럼 잠들수가 없는것인가.

그는 끝내 머리를 털며 밖으로 나섰다. 하늘은 별 하나 없이 흐렸다. 전방쪽에서 이따금 들려오는 총성만 아니라면 전쟁이 한창이라는 사실이 선듯 믿어지지 않을만큼 고요한 밤이다.

당장 비가 오려는지 대기가 몹시 습했다.

정찰병들이 제대로 휴식하는가를 확인해보고싶어 병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 걸어가다가 들릴락말락 수군거리는 소리를 예민한 청각으로 가려들었다. 분명 정찰병들도 마음이 설레여 잠들지 못하는것 같았다. 그것을 확인하듯 《쉿! 조용히! 직일관동지다!》 하는 나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직일병이 어둠속에서 학문의 발걸음소리를 듣고 주의를 주는것 같았다.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받은 흥분을 눅잦히기가 모두들 어려웠을것이다.

적후로 떠나기 전의 이밤을 밝히면서라도 대원들과 무슨 이야기든 마음껏 나누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을 돌려 발소리를 죽여가며 병실뜨락을 벗어나 침실에 돌아왔다. 탄약상자우에 통나무를 깐 침대에 걸터앉은 그는 작전가방을 찾아 지도를 펼쳐놓았다. 임무수행을 앞두고 필요한 지형을 속속들이 연구하는것은 어길수 없는 습관이였다.

여러가지 부호들이 못 잊을 사연을 안고 눈에 비쳐들었다. 이곳의 지형은 그에게 무척 낯익은것이였다. 어린시절에 어디라없이 돌아다니군 하던 산과 들판…

그때에야 비로소 이밤 끝내 잠들수 없게 하는것이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받은 자각과 함께 바로 그리웠던 고향에 대한 추억이였음을 깨달았다. 영예로운 임무를 안고 적후로 떠나게 된 순간 가슴이 더욱 높뛰던것은 고향에로 가는 길이 곧추 열리였다는 확신때문이였을것이다.

(그때도 이러한 여름이였지.)

어린날의 추억이 이랑이랑 물결쳐왔다.

툭 차면 넘어질 초마구리집에서 둘째아들로 태여난 그의 운명은 세상밖에 나오기 전부터 불우했다. 원체 가난뱅이가문에 태여난때문이기도 했지만 바다에 명줄을 걸고 식구들을 먹여살려오던 아버지가 그즈음부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가정의 대소사를 어머니의 가냘픈 어깨에 짊어얹어버리고 하는 일 없이 나돌아다니기 시작한것이 큰 우환이였다.

식솔의 운명을 떠멘 가장의 태공은 더더욱 무서운 굶주림과 불행을 몰아왔다. 불쌍한 어머니가 삯빨래, 품팔이방아질로 마흔전에 허리굽고 열살잡이 맏이와 일곱살짜리 둘째가 바다가에 나가 미역이며 곤포따위 해초를 뜯어오느라 해풍에 흑인처럼 되여버려도 타락한 아버지는 자신을 다잡지 못했다. 바다에 나가 일하는 날보다 어디론가 떠돌아다니다가 돈 한푼 없는 빈털터리로 이따금씩 집에 돌아와 묵군 했는데 불쌍한 어머니와 연약한 아들들이 비럭질해들인 보잘것없는 수확물로 렴치없이 끼때를 채우는 판이였다.

어머니의 말은 3.1봉기때 진주에 건너가 만세 몇번 부르고 감옥맛을 보더니 세상만사가 귀찮아 그런게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호구지책할 아무런 마련도 없는 아버지가 학문은 미웠다.

할아버지가 심었다는 배나무가 집뜨락에 서있어서 배나무집이라는 무척 정서적인 이름으로 불리웠지만 배나무가지에 이악스레 열린 배알들이 굶주린 아이들의 탐식에 익어볼념을 못할만큼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집이 학문이네 집이였다.

설날조차 밥 한그릇 배불리 먹어볼수 없는 살림살이를 두고 맏이로서의 의무를 자각했음인지 아니면 자식들에 대한 관심이 조금도 없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였는지 맏형은 열다섯살 잡히던 해에 돈벌이 간다고 집을 뛰쳐나갔는데 그후 감감무소식이였다. 들리는 말은 일본으로 가다가 배가 뒤집혀 죽었다고도 하고 왜놈망나니들한테 잡혀 남방의 어디론가 끌려갔다고도 하는데 정확한것은 지금까지도 알길 없었다.

당장 굶어죽게 된 자식들을 두고 용빼는 수가 없게 된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열두살밖에 안되는 학문이를 지주인 배덕구네 집 꼴머슴으로 들여보냈다.

배덕구네는 남해섬의 땅 거의 전부를 독차지하고 여러척의 고기배를 가진 지주 겸 선주였다. 그러나 꼴머슴에게 주는것은 꽁보리밥 한줌이 고작이여서 늘 배가 고팠다. 게다가 여름에는 꼴을 베들이고 겨울에는 땔나무를 하느라 눈코뜰새없이 돌아가야 했다.

일이 고된것보다 참을수 없는것은 주인집식구들의 행악질이였다. 피둥피둥한 마누라년은 쩍하면 트집걸어 매질을 일삼았고 학문이와 동갑이인 아들 배달환이는 자기보다 힘이 센 꼴머슴에게 시샘나서 몸살을 앓았다.

언제인가 한번은 달환이가 해당화뿌리뽑는 내기를 하자고 해서 바다가에 나가 힘을 겨루었는데 학문이가 이겼다. 이래저래 속이 아파난 그 자식은 손에 가시가 박혔다고 엉엉 울었다. 자기가 울면 어른들이 달려와 편역들어준다는것을 잘 알기때문이였다. 아니나다를가 어부들이 잡은 물고기를 걷어들이려고 바다가에 나왔던 배덕구와 마누라년이 그 꼴을 보고 달려왔다.

《이 머슴놈의 새끼! 감히 도련님을 울려?》

아들놈의 손을 잡고 눈꼬리를 쳐든 마누라년은 해당화가지로 어린 학문의 어깨를 마구 내리쳤다.

이름도 곱고 여름이면 어여쁜 꽃송이들을 활짝 피우는 해당화나무가지가 그날엔 왜 그리도 밉던지… 빽빽한 해당화나무가시가 매섭게 살가죽을 찔렀다. 뱀이 지나간 자리처럼 검붉은 상처가 온몸에 돋았어도 년은 매질을 그치지 않았다.

《내가 잘못한게 뭐야요? 난 잘못한게 없어요!》

참다못해 고개를 쳐들고 쏘아대는 학문의 오돌찬 대답에 더욱 화가 오른 년은 시악을 부리며 덤벼들었다.

《요놈의 새끼가 입만 살아서! 내 집 밥먹고 주인에게 감히 대답질을 해? 어디 죽어봐라, 죽어봐! 요놈! 요놈!…》

마누라년이 휘두르는 해당화나무가지를 와락 빼앗아 내던져버린 학문은 울면서 집으로 도망쳤다.

《조 배라먹을 놈의 머슴새끼! 우리 집에 다시 발길질했단 봐라!》

학문이네 궁상맞은 형편을 너무도 잘 알고 줴친 소리였다. 아닌게아니라 어머니는 부지깽이를 집어들고 아들을 때렸다.

《왜 왔니? 이 녀석아, 그렇게 도망쳐오면 어떡한단 말이냐. 그래도 그 집에서 먹여주는데… 때린대서 도망쳐오면 어떡해? 매를 맞아도 밥을 굶어도 그 집에 있고 죽는다 해두 그 집에서 죽어야 해. 널 보내고 사는 에미맘은 편한줄 아느냐?》

《씨, 그따위 집엔 안 갈래!》

학문은 주먹으로 눈언저리를 문대며 마주 소리쳤다.

《안가면 누가 먹여줘? 누가? 가자, 가서 주인집에 용서를 빌자!》

어머니의 얼굴은 온통 눈물에 젖어있었다.

《안 갈래요!》

학문은 뻗대였다. 하지만 종내는 어머니의 손에 끌려 배덕구네 집대문을 넘어서야만 했다. 어머니가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면서 용서를 빌었어도 배덕구와 마누라년은 도리머리를 했다.

《그 집 아들이 우리 달환이한테 잘못을 빌기 전엔 용서를 못하겠네.》

어머니의 강요로 학문은 거드름을 피우는 달환이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없었다. 매맞은 상처보다도 마음의 상처가 더 아팠다.

《앞으루 그런 일이 다시 있으면 아무리 철부지래두 용설 못해! 목을 매달든지 영창에 넣든지… 알겠나?》

이런 다짐을 두고서야 배덕구는 학문이를 받아주었다.

그날부터 어린 머슴에 대한 학대는 점점 더 심해갔다. 그래도 학문은 집으로 도망치지 않았다. 집으로 간대야 그를 감싸주고 편역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믿을수 없었다. 그는 집으로가 아니라 헤염을 쳐서 뭍으로 도망쳤다.

진주땅의 산속을 쏘다니며 여러날째 더덕이며 칡뿌리 같은것을 캐여먹었다. 산속에 뚝막을 짓고 숨어서 부대기농사를 짓는 사람들한테 신세를 지기도 했다.

어느 하루는 가정일에 통 관심이 없던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왔다. 쑥골의 초막에서 피골이 상접한 아들을 찾아낸 아버지는 우― 우― 짐승소리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이 불쌍한것아! 가자!》

줌안에도 차지 않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산을 내릴 때는 머금었던 눈물이 어느새 다 말라버렸는지 건드러진 타령을 불렀다.

 

배덕구야 배덕구야

돈자랑 말아

무산혁명 오며는

너 어디 보자

 

배덕구야 배덕구야

땅자랑 말아

무산혁명 오며는

네놈은 떨꺽

 

《아버지, 무산혁명이라는게 뭐야요?》

호기심이 부쩍 동한 학문은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아들을 꺼벅꺼벅 내려다보았다. 어린 아들에게 리해시켜줄 자신이 없는지 아니면 그자신도 잘 모르는 때문인지 도리머리를 했다.

《글쎄 말이다. 잘사는 놈들 못살게 하고 못사는 사람은 잘살게 하는게라구들 말하더라만… 이노지 돈야!》

새풀처럼 돋아나던 기대는 무참히 무질러졌다.

원망스러운 아버지였다. 부지런히 일하느라면 땅마지기라도 얻을수 있고 제땅이 있으면 어머니를 고생시키지도 않으며 집안식구가 모여 농사를 짓던지 배를 빌려서 고기잡이라도 나가던지 또 그러느라면 배를 곯지 않아도 될것 같은데 아버지의 머리속엔 가정에 대한 책임감도 애정도 없는것 같았다. 온 집안식구가 서리맞은 락엽처럼 뿔뿔이 흩어져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것도 아버지가 일하지 않는탓이라고만 생각되였다.

아버지의 진속을 알게 된것은 학문이가 집을 떠나던 스물한살때였다. 뻘건 징병령장을 들고온 면장놈과 왜놈경찰의 총칼에 몰려가던 날 아버지는 삼천포나루까지 따라왔다. 나루배를 타기 전에 아버지는 왜놈호송관들의 눈을 피해가며 아들을 외딴 곳으로 불렀다.

《얘야, 너를 왜놈의 개노릇 시키고싶지는 않다. 허나 할수 없구나. 아마 일본 아니면 동남아시아전선으로 끌려가겠지. 왜놈들은 꼭 망한다. 만일 네가 동북쪽에 가게 되면 어떻게 해서든 도망쳐라. 동북엔 왜놈들과 싸우는 김일성장군부대가 있다누나.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시는 김일성장군님이 계시는 백두산쪽으로 가야 산다. 맘을 든든히 먹어라. 이젠 조선사람들이 믿을데가 생겼다. 믿을데가 있으면 무서울게 없지.》

학문은 아버지를 난생처음 보는듯 덤덤히 바라보았다.

《기차에서 뛰여내릴 땐 꼭 기차가 달리는쪽으로 몸을 숙여라. 알겠냐?》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늘 보아오던 무맥한 모습이 아니였다.

《아버지, 무산혁명이란게 뭐예요?》

《음, 그건 김일성장군님이 하시는 일이라더라. 조선사람들모두를 잘살게 하는 성업이지. 너 이제 북쪽으로 가거들랑…》

그때 대렬을 점검하던 일본헌병 오장놈이 호각을 불어대며 달려왔다.

《칙쇼! 허락도 없이?!》

놈은 학문의 멱살을 잡고 끌어갔다. 성난 아버지는 거쿨진 손으로 오장의 팔을 붙잡았다.

《이노지 돈야!》

이를 갈며 내뱉는 아버지의 고함소리에 오장놈은 주춤했다.

《빠가야로!》

일본도를 절컥거리는 오장놈앞에 나선 아버지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험악해졌다.

《죽음판에 가는 아들을 애비도 만날수 없단 말이냐? 이게 너희들 이노지 돈야의 계률이야?》

그때에야 아버지가 버릇처럼 하는 《이노지 돈야》라는 말이 왜놈들을 욕하는 소리인것을 학문은 알았다.

다행히도 헌병오장놈은 조선말을 잘 몰랐다. 아버지의 말을 몇마디만 알아들었는지 그놈은 《응, 애비?》하며 뜯개말로 씨벌였다.

《애비라니까 용서한다. 황국신민으로서 가는 영광의 길을 감히 막아서면 안된다.》

학문은 헌병들의 엄격한 감시하에 목선에 올랐다. 부두가에 점도록 서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작별이였다.

이제 마산―진동지역을 해방하면 곧 삼천포나루에 가닿을수 있다.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고있을가? 어머니는?…)

고향의 섬마을을 떠나 타향에서 그리웁던 부모님들, 왜놈들의 대포밥으로 이국의 죽음터에 끌려가 천대와 멸시를 받으면서도 꿈결에도 밟아보던 귀향길이였다.

그는 군복웃주머니를 어루쓸어보았다. 고향에 보내려고 쓴 편지가 만져졌다. 아직도 인편을 만날수 없어 보내지 못한 편지였다.

(그래,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기에 조선사람들이 믿을데가 생겼다. 그이께서 베풀어주시는 믿음속에서 미력한 이 리학문이도 미국놈들이 무서워하는 인민군정찰병으로 자랐다. 전사들은 장군님을 믿고 그이께선 우리 전사들을 믿고… 원쑤놈들을 깡그리 쓸어버리고 내 이제 고향으로 떳떳이 돌아가게 될것이다. 아버지, 어머니! 이 아들을 기다려주십시오.)

이런 생각에 마음이 든든해지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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