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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장의 행운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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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7,181회 작성일 20-08-15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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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jpg

제 1 장

고향길

1

 

꾸릉! 꾸르릉!

비몽사몽간에 먼 우뢰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내리려는가?!… 하긴 보리장마가 질 때지. 산판이 축축히 젖겠군.… 그래도 훈련엔 지장이 없을거야. 실전의 환경속에서 본때를 보여야지.)

잠결에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어두운 방 한구석에 홀로 놓인 널침대우에서 뒤채기던 리학문은 희읍스름한 창문의 륜곽을 알아보았다.

엊저녁 한태설련대장과 전술토의를 하고난 뒤 그에 맞는 정찰중대의 다음주 훈련계획을 짜느라 지도와 씨름하다가 이방에 잠자리를 잡은 그였다. 맨 백포를 깐 잠자리가 불편하기도 했지만 신경이 날카로와져서 삼경이 썩 지나서야 겨우 잠들었으나 새벽이 가까와서부터는 화려한 꿈나라를 헤매고있었다.

참대숲이 울창하고 하얀 파도이랑이 쉬임없이 밀려오는 섬기슭의 모래불로 새 군관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리학문이 달려간다. 바다가의 낮은 둔덕에서는 해당화가 반기는듯 활짝 피여웃고 진붉은 동백꽃이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그의 고향 남해섬이다.

저 멀리 마을에서 흰옷 입은 사람들이 달려나온다. 그립고 그립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님과 동생들이다. 그들의 발치에 하얀 강아지가 쫄랑거리며 묻어온다. 왈왈 짖어대는 소리조차 무언중 뻐근한 향토미를 불러주는것 같다.

리학문이 두팔을 한껏 펴서 내들고 목메여 부른다.

《아버지! 어머니!》

《얘야!》

《아들아!》

마주 소리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영화의 화면처럼 갑자기 확 다가온다.

꽈르릉! 꽝!

(이게 뭐야?!)

요란한 그 소리에 와뜰 놀라 선잠에서 깨여난 그는 습관적인 동작으로 와닥닥 뛰쳐일어났다. 비발을 머금은 우뢰가 아니라 불과 화염을 잉태한 화약의 울부짖음을 알아차렸던것이다. 그것은 폭음이였다.

(아니, 이런 밤중에?!… 착각한게 아냐?!)

한순간 선뜻 믿어지지가 않아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익! 오래간만에 고향에 가는 꿈을 꾸는데… 참 아쉽군.)

소슬히 갈마드는 의심을 여지없이 짓누르며 이번에는 하늘땅을 뒤흔드는 무시무시한 폭음이 련발로 터져와 창유리를 세차게 두들겼다.

꽈르릉! 콰쾅! 쾅! 꽝!

땅이 부르르 떨고 토벽짬에서 흙부스레기가 부슬부슬 떨어졌다.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

불길한 예감에 정신이 펀뜩 들었다. 창밖에서 비쳐드는 희미한 외등빛에 비추어 시계를 들여다보니 새벽 4시였다. 그러니 겨우 두시간을 잔셈이다.

이른새벽의 폭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것인가?

38°선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에서는 총포성이 별로 놀라운것이 아니지만 이 폭음은 그 어떤 괴변을 예고하는듯 가슴이 서늘해지게 하는것이였다.

병영안팎이 벌컥 뒤집혔다. 호각소리가 째지게 울리고 다급히 비상소집을 알리는 고동소리가 어뜩새벽의 하늘을 마구 찢어댔다. 고느적한 정적속에 안식이 배회하던 골짜기가 삽시에 온갖 소음으로 가득차버렸다.

여무진 구령소리, 병실문을 뛰쳐나오는 병사들의 웨침소리, 창문밖을 지나가는 부산스러운 발소리들…

본능에 가까운 동작으로 벽가의 옷걸이에서 군복을 날래게 벗겨입은 리학문은 군관혁띠고리를 더듬어꿰며 서둘러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칠흑같은 밤이였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목덜미에 치끈했다.

아직도 새벽잠에 취해 조으는듯싶은 야외등이 희끄무레한 불빛을 한가롭게 뿌리는 병영마당은 드달려다니는 병사들로 한껏 분잡해지고 련달은 구령이며 성칼진 고함에 훌 정신이 나갈듯싶었다.

요란한 포성은 산너머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린접의 1련대와 땅크대대친구들이 법석을 놓으며 산기슭에 굴설해놓은 방공호로 대피하고있었다.

대렬지어 달려가는 병사들의 발구름소리, 보총이며 공병삽같은 철붙이들이 절그럭절그럭 부딪치는 소리, 가쁜 숨소리…

학문은 혼잡속을 달렸다. 한태설련대장과의 전술토의가 끝난 늦은 밤에라도 중대에 올라갔을걸 하는 후회가 뇌리를 건드렸다.

평양학원출신인 한태설은 얼마전에 이곳 사단으로 배속되여온 1련대의 련대장인데 그의 련대가 사단의 주력을 감당하고있기도 했지만 련대장자체가 서글서글한것이 대뜸 마음이 통해서 학문은 그와 짬만 있으면 붙어다닐만큼 친숙해졌다. 군복을 입기 전에는 철도로동자로 일했다는데 그래서 텁텁하고 호협한 성품을 가지게 된것인지 모른다.

《장가는 갔소?》

만나자마자 데설궂게 묻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던 리학문이였다.

걸걸한것이 사람이 좀 터실터실한듯 하지만 초면에도 스스럼없이 마음을 끄는 한태설이다. 무뚝뚝한 성미인 학문이여도 첫순간부터 강렬한 호기심과 친숙감을 느꼈었다.

아직 미혼이라는 대답을 듣고난 태설은 입을 쩝쩝 다시며 머리를 흔들었다.

《쯧쯧… 사람두, 아직 처녀하나 후리지 못했단 말이우? 그 나이에…》

고향이 정주 어디라는 그의 말투는 좀 뚝뚝한것 같으면서도 사근사근한 멋이 있었다. 매번 말끝을 처뜨려내리는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눙쳐주는 특이한 작용을 하는것 같았다.

학문은 도전이나 하는듯 얼굴을 쳐들고 반문했다.

《내 나이가 어드랬다구 만나자마자 흉을 보는겁니까?》

《어드랬다니, 서른은 넘겼을것 같은데?》

《하, 이거 스물일곱 숫총각을 선자리에서 령감으로 만드는군요.》

그러자 한태설은 학문의 어깨를 치면서 흐무지게 웃었다.

《어허― 그런가? 그럼 꽤 겉늙었군 그래, 허허허.…》

얼굴만 봐도 해방전에 고생을 많이 한게 알린다면서 굵직한 목소리로 곧장 우겼다.

《이랬든저랬든 사단정찰 부과장이면 사단의 한다하는 지휘관인데 아직도 짝이 없다는건 어울리지 않는 일이우. 모르긴 하겠지만 영 백수야 아닐테지?》

《그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이렇게두 눈치가 멀겋다구야. 사랑하는 체네가 정말 없는가 그 말이우.》

멋적어난 학문이 얼굴을 붉히는데 태설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아무튼 좋아! 앞으루 친하자우. 내 좋은 처녀를 소개할지도 몰라. 둘러리까지두 서줄수 있다니까.》

시큰둥한 상면이였다. 했으나 그날부터 왜서인지 친근감이 마음속에 보석처럼 자리잡게 되였다. 쉽게 풀리지 않는 고충이 생기면 그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것이 이상스러운 감정은 아니였다.

돌부리에 발이 걸채여 어푸러질번 해서야 정신을 바싹 차렸다.

(하필 이런 때 허망한 생각을…)

정찰중대의 병영은 퍼그나 떨어진 산언덕에 있었다. 정찰병들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우정 외딴 곳에 굴설했다는 반토굴인데 포병감시소가 자리잡은 뾰족산을 바로 옆에 끼고있었다. 지난 가을에 사단정찰과장 허찬이 실뚱해하는 중대원들을 이끌고 산고지에 그 병실들을 꾸렸다고 했다. 만성위장질환이 심해서 근 반년째나 후방병원에 입원해있는 허찬과장은 이런 곳에서 정찰병들이 한겨울을 난다는것이 얼마나 랭혹한것인지 타산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것이 불만스러웠다.

병치료가 여의치 않은지 아직까지도 병원침대에 붙박혀있는 과장을 두고 군관들과 병사들속에서 뛰뛰한 뒤말이 돌아가는것을 리학문도 안다. 하지만 불과 두달전에 평양의 사동에 있는 제1중앙군관학교를 마치고 사단정찰 부과장으로 배치되여 허찬과장의 얼굴 한번 본적이 없는 관계여서 가타부타할것이 없었다.

(생활에 불편할뿐더러 임무수행에도 좋을게 없는 이런 산고지에 반토굴병실을 설비해야만 하는 리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도 이런 아리숭한 감정만을 품고있을뿐이였다.

그런 불만은 부대에 온 첫날부터 날이 갈수록 눈덩이 굴러가듯 커지기만 하는것이다. 이즈음 여느때없이 긴장해지는 정세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병원에서 귀대하지 않는 그 사연은 호의적으로 생각하여 그럴만한 의료상 리유가 있을것이라고 두둔할수 있겠지만 정찰중대의 전투준비에 허점들을 수다히 남긴것은 쉽게 삭일수 없는 불만이였다. 하긴 정찰병들을 감시병이나 습격조성원처럼 생각하는 지휘관들도 없지 않은것이다.

이번 장마나 지나간 뒤엔 안침진 산아래골짜기에 종합훈련장을 갖춘 병실을 새로 짓자고 마음먹고 집터까지 봐두었다. 훈련은 훈련대로 내밀면서 자체로 생활을 꾸려나가자면 많은 일을 해야 할것이다. 때문에 그는 사단지휘부가 아니라 정찰중대가 있는 이곳에 나와 살았다. 원래 사무탁앞에 앉아있기를 딱 질색하는 성미이기도 했다. 대원들과 섭쓸려 돌아가기 좋아하는 그를 정찰병들은 벌써 사단급의 간부가 아니라 중대장이나 다름없는 지휘관으로 여겼다.

이른봄에 특무장 김기전이 주관해서 심었다는 호박포기들 두리에 동그랗게 둘러놓은 회칠한 조약돌들이 어둠속에서도 어슴푸레 분간되여 길을 알아볼수 있었다.

중대에 이르렀을 때는 정찰병들이 모두 대피호에 들어간 뒤였다. 석유등빛이 비쳐나오는 굴입구에 이르니 안에서 벅적 떠들어대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제길할 놈들! 첫새벽부터 지랄이구만.》

《새벽잠만 손해본다니까.》

《이게야 전쟁이나 뭐가 달라. 38친구들한테만 맡겨두지 말고 냅다 쳐야 해!》

《자넨 전쟁이란걸 겪어본 사람처럼 말하는구먼.》

《왜놈들 망할 때 보니깐 전쟁이란게 별게 아닙데.》

《어허허…》

《미국놈들이 막 싸움을 걸어오는데 참구 넘어가서야 안되지.》

《글쎄, 개꼬리 삼년 가도 황모 못된다구 미국놈의 꼭두각시 리승만 그 늙다리는 백년 둬봐야 사람질 하긴 코집이 글러먹은 놈이야. 모가지를 비틀어놔서 버릇을 뚝 떼줘야 한다니까!》

입심들이 여간 아니다. 원래 정찰병들의 입심은 보병이나 공병들에게 비길게 아닌것이다. 누구보다 위험하고 힘겨운 고비고비를 겪어야 하는 그들이고보면 락천적인 웃음과 함께 익살스러운 입심을 떠나 적후생활을 겪어내기 어려운 법이다.

법석판속에서도 밖의 인기척을 예민하게 느낀 정찰병들은 가까이 다가온 상관을 제꺽 알아보고 입을 다셨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정렬했다.

비상대피정형을 알아보니 모두가 완전무장을 갖추고있었다.

일반구분대에 가면 보통때는 체연하다가도 이런 비상소집때 결함을 드러내는 병사들을 얼마든지 볼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누구 하나 흠잡을데가 없었다.

(그만하면 싸움깨나 해먹겠어. 두달동안 맹훈련을 시킨 보람이 있군.)

학문은 내심 만족했다.

이런 비상소집은 여러번 있었다. 이즈음 송악산과 은파산, 고산봉을 비롯한 38°선일대에서 놈들의 도발이 례반사인 까닭이였다. 비상소집이 있을 때마다 군복착용을 제대로 못하든가 무기장구류를 흘린다든가 별별 웃지 못할 희비극을 빚어놓는 엉뚱이들이 나타나서 사람 웃기군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드디여 완전무결한 면모를 갖춰보인것이다.

《중대장! 괜찮구만.》

리학문의 칭찬에 정찰중대장 라동수가 비죽이 웃었다. 허나 그것은 때이른 만족이였다. 흐뭇한 마음으로 라동수와 담소하고있을 때 역시 또 엉뚱이가 나타났다.

《여, 내 화구통을 못봤나? 엉, 못 봤나 말야?》

체격은 그리 크지 않아도 단단하게 생긴 김덕천이가 이 사람, 저 사람 건드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던것이다.

그림그리는 취미를 가진 그는 늘 그림도구가 들어있는 화구통을 신주모시듯 하는데 바쁜통에 찾지 못하고 그냥 나왔다면서 지금 분주탕을 놓는것이였다.

《챠, 화구통같은 소릴하오. 황아장수망신은 고불통이 시킨다더니… 분잡스럽게스리.》

누군가 시답지 않아 핀잔하는 소리에 덕천은 어지간히 골이 났다.

《내가 분잡스럽다구? 뭐, 고불통이라구?》

《정찰중대망신은 그 화구통이 시킨다 그 말이요.》

옹골찬 목소리로 보아 차용대 같았다.

《뭐? 이젠 내 화구통신셀 안 질것처럼 구누만요.》

《언제 내가 그림쟁이신셀 졌다구 그래?》

《어허! 이런 렴치라구야. 어제까지 뭐 뗌뻬라화는 싫구 유화초상을 그려달래더니…》

뗌뻬라화라는것은 수성화구로 그린 그림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에 늘 극성스러운 덕천이의 덕분으로 다른 사람들은 물론 학문이도 뗌뻬라화니, 유화니 하는 미술의 상식정도는 얼마든지 리해할만 하게쯤 된것이였다. 그러나 학문은 골살을 찌프렸다. 규정에도 없는 물건짝을 메고 돌아가는데 대해 훈련때 여러번 지적했는데도 네뚜리로 여기는지 소힘줄처럼 질기게 시정하지 못하는 덕천이였다. 시정하지 못하는게 아니라 아예 시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전에는 어디서 연막탄피를 주어다가 개조한 화구통에 멜끈까지 척 달아서는 척탄통처럼 둘러메고 나타났었다.

(오늘은 단단히 버릇을 떼놔야지.)

입을 쩝쩝 다시는 학문을 훔쳐보고 민망스러워난 라동수가 덕천에게 눈총을 쏘며 엄한 목소리로 꽥 소리질렀다.

《조용하지 못하겠소?》

그제서야 입심들이 사라졌다. 짜증기가 다분한 그의 한마디에 대원들모두가 바위돌에라도 짓눌린것 같았다.

학문은 동수의 얼굴을 흘겨보았다. 그슬음을 잔뜩 피워올리는 석유방등빛에 적동색으로 드러난 네모진 얼굴은 덕천이가 즐겨 그리군 하던 영웅상상화처럼 엄엄했다. 이런 식의 통제를 학문은 제일 싫어했다. 물론 지휘관은 엄격해야 하지만 무턱대고 강압적인 통제로 대원들을 다루려 해서는 안된다. 상관의 의도를 그들자신이 스스로 깨닫도록 만들어야 한다.

대원들의 기분이 순식간에 저기압으로 되여버리고보니 어쩐지 별렀던 마음이 문문해지면서 오히려 리학문자신이 면구스러웠다. 제 형한테서 훈시질받은 막내를 보는 부모와 같은 심정이 되여버린 그는 갑자기 우울해진 대원들의 기분을 좀 눙쳐주고싶어서 일부러 긴소리를 뽑아 특무장을 불렀다.

《특무장, 오늘이 일요일인데 특식조직은 틀림없겠지?》

풍만한 몸집을 가진 김기전이 대원들을 헤집고나서며 두손가락을 탈아보였다.

《부과장동지, 걱정마십시오. 떡도 있구 이런 꽈배기도 있습니다.》

《좋소, 포격이 멎은 담에 인차 식사하자구.》

그러나 오늘의 정황은 여느날과 달랐다. 들려오는 포성이 어마어마하게 큰데다가 무척 오래동안 지속되였다. 새벽야음을 타고 벌어진 대대적인 이 포사격이 신생공화국에 참혹한 살륙과 파괴를 몰아오는 전쟁의 시작이라는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그리 많지 못했다.

지루하게 부슬부슬 내리던 비발은 려명전야에 이르러 억수로 변하였다. 창살같은 비줄기가 쏟아져 대피호입구에 큰 도랑을 이루어놓았다. 그래도 포성은 멎을줄을 모른다.

아침이 훤히 밝도록 대피호안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 진저리가 쳐질 때에야 사단에서 호출신호가 왔다.

한태설련대장과 함께 풍차를 타고 사단지휘부에 갔던 리학문이 다시 중대에 돌아왔을 때는 정찰병들의 신경이 한껏 조인 가야금줄처럼 팽팽해진 뒤였다.

《부과장동지,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있어야 합니까?》

소문난 늦잠꾸러기인 김동호마저 화가 올라 말을 더듬거리며 급하게 굴었다.

진창을 저벅저벅 걸어와 대피호안에 들어선 리학문은 대원들앞에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긴장된 시선들이 그의 비물흐르는 얼굴에 모여들었다. 손바닥으로 얼굴의 비물을 쓱 훔쳐버린 다음에도 그는 마음속에 들끓는 흥분을 삭이느라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밖에서 비살치는 소리만 들려올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동안이 지나서야 학문은 물목을 터치듯 웅글진 소리를 쏟아놓았다.

《폭풍! 전쟁이요!》

순간 쩌릿한 그 무엇이 모두의 가슴을 지지며 지나갔다. 짤막한 그의 말 한마디가 주변의 움직이던 모든것을 정지시켜버린듯 했다. 소란스레 내리던 비소리도 뚝 멎고 거불거리던 등불도 훅 불어드는 비바람에 꺼져버렸다. 떡 굳어진 정찰병들은 불가사의한 소식을 안고온 자기들의 상관을 멀거니 바라보기만 했다.

학문은 흠칠 몸을 떨었다.

평화와 전쟁,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두 세계가 갑작스럽게 뒤바뀌는 환경은 사람들을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그자신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것인지 분명히 기억할수가 없었다. 사단지휘부에서 돌아오면서 수십번도 더 반복하여 외워본 말마디들을 그저 기계적으로 옮겨놓게 되는것이였다.

《동무들!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 리승만괴뢰군은 오늘 새벽 선전포고도 없이 38°선 전지역에 걸쳐 전면공격을 개시했소. 명령이 내렸소. 우리 정찰대는 곧 개성방향으로 진출해야 하오.》

그 다음엔 모두가 기계처럼 움직였다.

정찰중대를 전선까지 신속히 수송할데 대한 사단참모부의 명령을 받은 땅크중대가 4대의 땅크를 끌고 배속되여오자 정찰병들은 괴뢰군군복으로 위장하고 땅크들에 올라 출발했다.

동작들은 민첩했지만 모두들 말이 없었다. 방금전까지도 적들에게 된맛을 보여야 한다며 윽윽대던 사람들이 막상 출전길에 오르니 생각이 깊어지는 모양이였다. 지휘관들조차 아침밥생각을 가뭇없이 잊어버렸다. 특무장 김기전이 떡과 꽈배기를 배낭에 지고오르지 않았더라면 온 중대가 틀림없이 아침을 그냥 번지고말았을것이다.

모든것이 삽시에 변해버렸다. 하늘도 땅도 사람들의 얼굴빛도 준엄한 환경에 굴절된듯 무거운 빛갈을 띠였다.

비는 멎었으나 아직도 음울한 하늘아래 산과 들은 시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묵묵히 누워있다. 벌써 수많은 포차며 땅크들이 산기슭을 가로질러 뻗어간 큰길을 따라 요란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구을러가는데 질척거리는 길바닥이 무한궤도와 병사들의 군화발에 짓이겨졌다.

땅크우에 묵묵히 앉아있는 정찰병들의 얼굴은 침침하기까지 했다.

우르릉, 우르릉, 쾅! 쾅!

포성이 점점 더 사납게 울부짖고 이제는 자지러지는 기관총소리도 들려왔다.

얼마쯤 더 가면 38°선이다. 38경비대가 필사적으로 적을 견제하고있을 거기서 련합부대는 곧 전투에 진입하게 될것이다. 정찰중대는 련합부대의 촉수가 되여 한걸음 먼저 파견된것이였다.

무선수 차용대와 련락병 복남이를 데리고 선두땅크우에 올라앉은 학문은 뒤따르는 땅크들을 힐끗 돌아다보았다.

진탕이 되여버린 길바닥을 무한궤도로 사정없이 물어뜯으며 바투 따라선 두번째 땅크에는 정찰중대장 라동수가 앉아있다. 왜정때부터 토목로동자로 잔뼈가 굵었다는 그는 두해전에 입대하여 단기 군관학교를 나왔는데 포병부대에 배치받게 되였던것을 허찬정찰과장이 뽑아왔다고 한다. 좀 과격한데가 있어도 체격이 듬직하고 힘이 좋은데다 말수더구가 적은것이 마음에 든다.

남달리 각이 진 얼굴에 꾹 다문 입, 부리부리한 눈… 지금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있을가?

다음땅크는 1조장인 안창항이가 책임졌다. 어려서부터 씨름군들을 따라다니며 황소를 상으로 탄적도 있다는 사나이인데 정찰병이 된 후부터는 씨름보다 격술이 더 쓸모가 있다면서 격술동작들을 익혔다지만 아직 원만하지는 못하다. 완력이 있고 성미도 성칼스러운데 대원들은 그를 무척 따른다.

네번째 땅크에 앉아서 흘러가는 산발을 묵묵히 바라보는 사람은 3조장 정영모이다. 매사에 꼼꼼하고 성실한 성품이다. 차분하고 맞다드는 일들을 조심스럽게 해제끼군 하는데 과단성이 좀 부족해서 실망을 주기도 한다.

정찰병들은 모두가 개성적인 사나이들이다.

뚝심이 있고 보기 드문 배짱가이면서 언제나 태평스러운 김동호, 늘 늦장을 부리는게 탈인데 힘이 장사인, 그만큼 먹기도 잘하는 대식가다. 큼직한 배집을 두드리면서 아이까지 있는 좌상이랍시고 비위를 부릴 때면 취사원이나 특무장도 업혀넘어가지 않을수 없는노릇이여서 그의 주머니안에는 배려받은 누룽지같은것이 늘 들어차있다. 딸애는 3살에 잡혔다는데 중대에 유일한 아이아버지이다. 아바이로 불리우면서도 형편없이 셈평이 좋은데다가 천진란만하기까지 해서 언제 한번 아바이대접을 받지 못한다. 어제 아침 기상시간에는 안창항이가 엉치를 두들겨대도록 잠꼬대까지 했다고 한다.

세상이 다 굶어도 정찰중대만은 먹여살린다는 특무장 김기전, 군대에서 제대되면 꼭 화가가 되겠다는 김덕천, 중학교선생을 하는것이 소원이였으나 뜻대로 안됐다고 아쉬워하는 2조장 김윤도, 안장코에 중대적으로 나이가 제일 어리기도 하지만 엉치가 가벼워서 막냉이로 사랑을 받는 련락병 하복남이…

22명 정찰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아보던 학문은 어느새 혼자생각에 빠져버렸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였다. 사단지휘부로부터 받은 명령은 명확하다. 개성에 있는 적들의 형편과 기도를 알아내여 보고한 뒤 영등포와 김포방향으로 진출하여 도망치는 적들의 퇴로를 앞질러 차단해야 했다.

학문은 정찰대가 련합부대의 촉수로만 되는것이 아니라 비수가 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있었다.

전쟁이다. 밀보리가 푸르고 산천이 신록을 떨치는 자연의 이 신생계절에 적아간에 무자비하게 부시고 불태우고 쓰러뜨리는 피어린 싸움이 시작된것이다.

문득 해방을 맞아 다섯해째 사람답게 잘 살아보았다고 자랑하던 김동호의 구수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재령나무리벌에 해방된 첫해부터 어이 그리도 농사가 잘되던지 두해만에 소 사매고 기와집에 재봉침까지 갖춰놓을수 있었노라 했었지. 그래, 해방덕에 모두들 참다운 행복을 맛보았다. 그 행복을 빼앗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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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그 행복을 빼앗으려고 원쑤들이 덤벼들었다. 하여 평화롭던 생활은 이 아침에 끝났다. 미국놈들과 그놈들의 비루한 앞잡이들이 감히 그것을 깨뜨려버렸다.)

하염없는 생각에 빠졌던 학문은 소스라쳐 놀랐다.

(끝났다고? 깨여졌다고? 아니다, 평화롭고 행복한 그 생활을 지키자고 인민군대가 있는것 아닌가. 우리는 평화와 행복을 교살하려는 원쑤들을 족쳐버리고 소중한 그 모든것을 지켜낼것이다. 무엇을 지켜낸다고? 나에게서 지켜낼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목숨걸고 지켜내야 할 나서자란 고향과 화목한 가정, 남들처럼 누려본 복된 생활은 리학문과 거리가 좀 멀었다.

중국인민해방전쟁에 참가하였던 리학문이 조국에 돌아온것은 불과 열달전이였다.

왜놈들의 징병에 걸려 다도해의 남해섬에 있는 고향마을을 떠났던 그는 거치른 이국의 산설고 물설은 산천을 발닳게 돌아다니다가 김일성장군님께서 중국인민을 피로써 돕기 위해 파견하신 항일투사들을 만나서 진정한 조선군대가 되였고 장개석국민당을 동북땅에서 몰아낸 후에야 그립고그립던 조국땅을 밟을수 있었다. 그러나 조국땅은 이미 둘로 갈라져있었고 북반부에는 일가친척 하나 없었다. 남녘땅에 고향을 둔 그는 줄곧 군대병영에서 생활하면서 남들처럼 달콤한 가정생활의 진맛을 겪어볼수 없었다.

중앙군관학교에서의 생활과 실습기간의 훈련, 전연부대에서의 복무, 그가 누릴수 있은 행복, 새생활로 약동하는 세월은 도무지 열달! 너무나도 짧았다. 허나 그 나날에 꿈결에도 그려보던 영광을 지니였으니 그것은 김일성장군님을 몸가까이 만나뵈온것이였다.

조국에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던 그때 동북전장에서 돌아온 전사들을 만나주신 장군님께서는 이웃나라 혁명을 도와주느라 수고가 많았다고, 이제는 새 조선을 위해 힘과 마음을 합쳐 투쟁하자고 하시며 격려해주시였다.

힘과 정기가 넘치는 백두령장의 모습을 뵈오며 그이의 전사된 행복과 자부를 가슴뿌듯하게 받아안았고 그이의 품속에 안겨야만 남해섬 고향의 식구들과 마을사람들도 세상에 부럼없는 생활을 누릴수 있다는것을 신념으로 받아안았던 그였다.

그랬다. 인민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김일성장군님의 은혜로운 품속에 남녘땅 고향사람들도 모두다 안겨살수 있게 하기 위해 그는 지금 정찰병들을 이끌고 전선으로 출동한것이였다.

적들의 침공을 물리치고 반공격! 남진의 길은 리학문에게 있어서 다름아닌 그리운 고향으로 가는 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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