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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장의 행운아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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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2,166회 작성일 20-09-1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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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신념의 산마루

5

 

대오는 계속 북으로 행군하였다.

정찰대는 사단보다 앞서 행군하면서 맞다드는 고장들에 있는 적들의 움직임을 정찰하여 무선으로 부대에 알렸다. 때로는 주력부대와 협동하여 적을 포위소멸하기도 했다.

밤낮없이 이어온 행군끝에 10월말에는 38°선부근의 김화에 이르렀다.

평강쪽에서 불어오는 하늬바람이 소슬한 추위를 몰아왔다. 산기슭을 휩쓸어온 돌개바람이 길가의 티검불이며 락엽따위들을 몰아다가 림진강의 지류에 심술궂게 쥐여뿌렸다. 락엽이 지는 산천의 풍경은 누구에게라없이 쓸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김화읍으로 들어가는 큰길을 따라가는 정찰병들의 눈초리는 날카롭게 번쩍이고있었다. 지금 그들은 부대가 지나가야 할 김화읍내의 적정을 알아낼 임무를 받고 가는 길이였다.

실개천을 가로지른 나무다리목에 설치된 검문소에 두다리를 뻗치고 서있던 두명의 헌병이 돌개바람을 피해 손을 소매깃에 쑤셔넣고 고개를 외투깃에 틀어박은채 돌아선다.

그때라고 생각한 학문은 대원들을 뒤에 달고 뻐젓이 다리를 지나 검문소로 다가갔다. 읍거리로 들어가자면 이 검문소를 통과해야만 한다. 에돌아갈 길이 없는만큼 헌병놈들이 경계심을 늦춘 짬에 바투 접근하자는것이였다.

《누구요?》

헌병 한놈이 그들을 발견하고 목을 빼들었다.

《2사단 수색중대일세.》

학문은 늘어지게 대답하며 거침없이 다가섰다.

《2사단?!》

《왜? 2사단을 모르나? 우린 사단지휘부를 찾아가는 길이야.》

장교라면 참외에 배꼽처럼 응당 붙어있기마련인 교만방자한 티가 전혀 없이 느긋하게 대해주는 소령의 각근한 말투에 호기심을 느낀 두 헌병놈은 제법 친절을 베풀려들었다.

《소령님, 수고롭게 되였습니다. 김화에는 2사단이 아니라 우리 3사단 헌병중대가 있습니다.》

《3사단 헌병중대? 2사단지휘부는 어딜 가고?》

《이미 전선쪽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렇다? 이거 랑패로군. 우리 사단지휘부를 따라가느라면 또 다리품을 놓게 됐구만. 그걸 보면 자네네 헌병이 부럽네. 헌병대는 11호차가 아니라 고무바퀴를 타고다니지 않나?》

《헤헤… 우린 미군부대들과 같은 급에서 보급받으니깐요.》

《그러게 하는 말이야. 에에, 수색대라는건 고생둥이야. 자네들 헌병이 되길 참 잘했어. 그런데 자네들의 중대장은 어떤 사람인가? 기왕지사 여기까지 왔던바엔 한번 만나서 안면이라도 익히고싶은데… 그래야 혹 길가에서 만나더라도 도움받을 일이 있을게 아닌가.》

《예, 두달전까지만 해두 중위에 불과했는데 배사단장님의 안중에 들어서 대위로 출세했구 대대장이나 련대장급에도 어깨가 처지지 않는 헌병중대장이 됐지요. 어저께 2사의 한 대위가 같은 대위라고 너나들이 하자고 드니까 깜장콩알을 먹였답니다. 그래도 아무탈이 없어요, 히히… 배사단장만이 아니라 제임스고문관님도 편역을 들어주었으니까요.》

《음, 그렇게 군세가 딩딩한 헌병중대장을 모셨다는게 얼마나 큰 영광인가. 나도 그를 알고지낸다면 정말 한생에 다시없을 영광이겠네.》

학문은 감심한듯 머리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러자 놈들의 신용은 더 커진것 같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헌병대를 악귀같다고 욕하는 놈들은 많이 보아왔어두 소령님처럼 우리를 알아주는 장교는 첨 봅니다. 그럼 한번 만나보십시오. 중대장님을 만나자면 저어기 보이는 굽인돌이길을 돌아서 김화군경찰서자리로 가면 됩니다. 거기가 중대본부이지요.》

《알겠네.》

능청스럽게 희떠운 객기를 부리는중에도 학문의 머리속에서는 여러가지의 타산이 이루어지고 결심이 내려졌다. 헌병놈들을 족치고 증명서를 빼앗으면 여러가지로 편의를 누릴수 있다. 헌병의 특권이 이만저만한것이 아니여서 헌병으로 행세하면 그 누구도 감히 거칫거릴 엄두를 내지 못할것이다.

읍거리에 들어선 정찰병들은 씩씩하게 행진하여 군경찰서건물앞에 이르렀다. 건물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였는데 현관문앞에 쌍보초가 서있었다.

학문은 정찰병들을 뜨락에 대기시켜놓고 현관앞으로 스적스적 다가갔다. 중대장놈을 끌어내자면 법석통을 일으키는것이 상책이다. 다른 부대의 놈들은 헌병대와 집적거릴 엄두도 못 내는것만큼 헌병중대장은 안심하고있을것이며 그런 판에서 갑자기 소동이 일어나도 별로 긴장해하지 않고 중대장놈이 나올것이다.

보초병에게로 다가가는 불과 몇걸음어간에 모험적이기는 해도 확고한 승산을 찾은 그는 도고한 자세로 보초병앞에 떡 벋치고 서서 도고한 자세로 위엄있게 호통쳤다.

《보초병! 중대장을 만나야겠다!》

애된 보초병놈은 그래도 헌병의 특세를 잊지 않고 제법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함부로 만날수 없습니다. 물러서십시오!》

학문은 버럭 어성을 높였다.

《물러서라고? 이것 봐라, 어째서 못 만난다는거야? 임마, 난 너네 중대장을 급히 만날 일이 있다!》

보초병놈은 여전히 록록치 않게 눈알을 굴리며 맞섰다.

《여긴 헌병중대입니다. 중대장님을 함부로 만날수 없습니다.》

《야, 이 새끼가 죽고싶어서 그래? 내가 헌병중대인줄 모르고 온줄 아는가? 장교도 몰라보는 개버릇은 대체 어디서 배웠어? 돼먹지 못하게스리… 당장 중대장을 불러내라! 버릇을 뚝 떼놓고야말테다!》

몇마디안팎에 노기가 충천하여 길길이 날뛰는 소령의 기상에 겁에 질린 보초병놈은 우거지상이 되여 사정하듯 했다.

《글쎄 만날수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헌병이면 헌병이지 수색대를 어떻게 보구 이러는거야? 이놈의 전쟁판엔 뭐 헌병만 있는줄 알아? 괘씸한 놈의 새끼들! 아무때나 헌병의 특세야? 어서 당장 중대장을 불러내지 못할가!》

거칠게 떠들어대는 소리에 군경찰서건물이 떠나갈듯 했다. 그러자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양간하게 생긴 대위 하나가 나왔는데 태도가 처음부터 건방지기짝이 없었다. 그놈을 자세히 살펴보던 학문은 약간 놀랐다. 그놈은 바로 남해안의 어느 한 농가에서 온 하루 농짝에 숨어있을 때 보았던 세놈의 장교중에서 중위놈이였다. 그때 홍성구라는 소령놈만을 처단하고말았는데 이놈은 살아나서 이렇게 맞다든것이였다.

(그러니 이놈이 대위가 되여 헌병중대장노릇을 하고있단 말이지.)

대위놈은 서둘지도 않고 군화발로 포석을 또박또박 찍으며 걸어오는데 감히 헌병대에까지 와서 복잡하게 굴어대는 무엄한 작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어디 구경이나 해보자는듯 한 자세였다.

아니나다를가 리학문의 코앞에 와서 딱 멈춰선 그놈의 말은 첫마디부터 되알졌다.

《이건 웬놈이 와서 소란을 피우는가?》 그놈은 여윈 어깨를 잔뜩 솟구며 상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도대체 어데서 왔소? 여기가 어떤덴지 모르지는 않겠지? 남의 집에 와서 웬 소동이요?》

대위가 소령앞에서 하는 말 치고는 참을수 없을만큼 무례한 언사였으나 학문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며 두발뒤축을 딱 소리가 나게 모두는 동시에 깍듯이 경례까지 붙였다.

《미안합니다. 전시이다보니 신경이 너무 날카로와진것 같습니다. 널리 리해해주기 바랍니다.》

리학문의 타산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중대장놈의 두눈동자가 팽그르르 돌아갔던것이다. 순식간에 공손해진 상대의 태도가 의아쩍으면서도 역시 헌병의 위세를 모르지는 않는다는 태도가 마음을 흐뭇하게 만든것이였다.

《음, 그렇다?!》

허세를 즐기는 이런 류의 작자들은 올리추어줄수록 흐물흐물해진다. 소령의 계급장을 달고서도 헌병대위에게 꼼짝 못하는것이 자못 흡족해난 그놈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피여올랐다. 제풀에 기고만장해지자 제법 훈시조로 말꼬리를 끌며 점잔을 빼려들었다.

《사병들이 보는데서 말싸움하면 장교의 체면이 뭐가 되겠소.》

《참 안되였습니다.》

《무슨 용무로 왔는지 내 방에 들어가서 말해봅시다.》

방은 어수선했다. 방 한복판에 량수책상 하나가 덜룽 놓여있는데 중대장놈은 그앞에 가앉아 상대를 치떠보면서 버주룩이 웃었다.

《그래 무슨 일로 왔소? 어느 부대의 누구인데?》

시간을 끌 필요가 없었다. 학문은 다짜고짜 권총을 빼들었다.

《어리석은 대위! 나는 조선인민군 정찰군관이다. 이제부터 내 명령에 복종하라!》

아연실색한 놈은 두손을 어깨우에 쳐들며 화닥닥 뛰쳐일어났다.

《아니, 이… 이건 뭐요? 당신은 날 놀리는거요?》

《잔꾀부릴 생각은 말아. 우린 흥정할줄 모르는 사람들이야. 내 말에 응하지 않을 때는 네 목숨이 붙어있지 못한다는걸 명심해. 어떻게 하겠나, 내 말대로 하겠는가?》

어느새 뒤따라 들어온 룡조가 놈의 몸을 수색하고 권총과 단도를 회수해버렸다.

졸병들에게 구원을 청해볼 기회가 없을가 하고 사방을 두릿거리던 그놈은 낯선 사병들이 복도와 창밖에서 어슬렁거리는것을 보고서는 끝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인민군정찰병들이 자기 방을 철저히 봉쇄한것을 알아차린것이였다. 더는 용빼는 수가 없는것을 스스로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 뭘 어떻게 하라는거요?》

《증명서를 내놔!》

공순해진 놈은 웃주머니에서 번쩍거리는 금박이 박인 헌병증명서를 꺼내놓았다.

《특별암호표식도 어서!》

백골표식을 한 패쪽이 책상우에 놓였다.

《됐다. 이젠 헌병중대전원을 앞마당에 정렬시키라!》

《그, 그건 왜 그러는거요?》

《그따위는 묻지 말라. 우린 시간이 급해!》

집합구령이 떨어지자 헌병놈들은 급급히 마당에 정렬하였다. 헌병은 헌병이였다. 일반괴뢰군들과 달리 짧은 시간내에 전원이 다 모였다. 앞가슴들을 쑥 내밀고 중대장을 향해 엄엄하게 늘어선 놈들의 꼴을 보니 우습기도 하고 화가 치밀기도 했다.

정찰병들은 놈들의 무장을 쉽게 해제하고 모두 포로해버렸다.

놈들에게서 회수한 헌병복장이 무둑하게 쌓였다.

《가만, 이게야 어디 입겠나. 두루마기 한가지구만.》

차용대가 후렁한 군복저고리를 걸치고 너풀거리면서 골을 내저었다.

《미국놈들의걸 그냥 받아입은거니 그럴밖에… 그래두 작은걸루 골라잡아보게나.》

김기전이 이것저것 뒤적거리다가 맞춤해보이는 군복을 던져주었다.

놈들을 사단으로 호송하고 헌병중대로 가장한 정찰병들은 읍거리에 주둔한 미군과 괴뢰군의 병력배치상태를 말끔히 정찰하여 무선으로 사단에 보고했다.

정찰결과를 보고받은 사단에서 무전이 왔다.

 

참매앞

금일 새벽에 김화를 공격하겠다. 정찰대는 김화―평강간도로를 차단하여 퇴각하는 적들을 소멸할것.

멸악산

 

정찰대는 읍거리를 유유히 빠져나와 김화―평강간의 도로를 차단했다.

이른새벽 김화에 대한 부대의 공격이 개시되였다. 검푸른 하늘을 희끗희끗 들어올리며 화광이 충천하는 속에서 수백정의 저격무기들과 기관총들이 맹렬하게 울부짖었다.

오래지 않아 패잔병놈들을 콩나물처럼 가득 실은 군용자동차들이 정찰대의 매복구역으로 부르릉거리며 달려왔다.

《사격!》

미식브로닝경기가 뚜루룩, 뚜루룩 기세좋게 불을 뿜었다. 수류탄들이 날아가고 카빈총들이 따쿵거렸다. 달려오던 선두자동차가 수류탄벼락을 맞고 불길에 휘감기자 아우성치며 뛰여내린 사병놈들이 길섶에 나딩굴며 대응사격을 해댔다.

《공산군은 몇놈 안된다! 공격하라!》

중둥이 부러진 가로수뒤에 숨은 장교놈이 머리만 내밀고 악에 받쳐 소리질렀다.

《개자식!》

김동호가 벌떡 몸을 솟구고 수류탄을 던졌다. 폭음이 울리고 가로수가 서있던 곳에는 웅뎅이만 남았다.

그 순간 《앗!》하며 동호가 다리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적탄이 허벅지를 관통한것이였다.

《젠장, 요진통을 맞았군! 정찰병에겐 다리가 목숨이나 같은데 말야.》

선혈이 흐르는데도 자동총을 쏘아대며 그는 두덜거렸다.

김화읍거리를 해방한 보병들이 진격해오자 전투는 간단히 끝났다. 정찰대에 의해 퇴로를 차단당한 적들은 말끔히 소멸되였다. 적의 자동차들은 대부분 불타버렸으나 몇대는 성한채로 남아있었다.

학문은 김동호를 로획한 차에 올려태웠다.

《빨리 부대군의소로!》

동호는 완강히 뻗대며 우기였다.

《난 죽어도 못 가겠습니다. 남아서 싸우게 해주십시오.》

《안돼! 정찰병이 다리를 못 쓰고야 무슨 정찰병구실을 한다고 그래. 치료받고 다 나은 담에 만나자구.》

성이 난것처럼 퉁명스레 잘라매며 카빈총을 한자루 던져주었다.

총을 한손으로 받아든 동호의 얼굴에는 괴로움이 한껏 어리였다. 학문은 외면해버리고말았다. 무른 인정의 한끄트머리라도 보이면 지꿎은 동호의 기질앞에 지고말것이였다.

《출발!》

정찰병들은 붉어진 눈언저리를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수그리고 걸음을 떼였다. 다시한번 더 돌아보면 마음이 물러질것만 같아 먼저 발을 옮겨놓던 학문은 등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들을 가려들었다.

《동호, 이 배낭걱정은 말라구. 치룔 받군 인차 따라설텐데 뭐.》

《특무장동무, 부탁하오.》

김기전이 능이버섯꾸레미가 들어있는 동호의 배낭을 넘겨맡은 모양이였다.

헌병대로 가장한 정찰대는 평강으로 가는 큰길로 보무당당히 행군해갔다. 맞다드는 놈들이 미군이든 괴뢰군이든 꺼릴것이 없었다. 대오는 주저없이 행군해갔고 적들도 의심하는 놈들이 없었다.

평강에 거의 다달았을 때 또다시 부릉부르릉 차소리가 나더니 점점 커지면서 련천쪽도로에서 십여대의 차대렬이 불쑥 나타났다. 미군을 태운 자동차였다.

정찰병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행군해갔다. 놈들의 차가 옆을 지나갈 때 학문은 손을 쳐들어 흔들었다. 그를 따라 정찰병들도 함께 손을 흔들어주자 차우에 올라앉은 미국놈들은 우쭐해서 껌을 질근질근 씹으며 제법 손들어 답례까지 하며 지나갔다.

《하하… 눈뜬 장님들 같으니! 인민군대를 코앞에 보면서두 그냥 지나가는구만.》

《눈깔에 콩깍지를 씌운 모양이지.》

《하하하…》

《아하하…》

웃음소리가 잦아들기도 전에 또 자동차소리가 들리며 빵빵 경적까지 요란하게 울렸다.

(이번엔 또 무슨 차야? 시끄럽게…)

뒤를 돌아본 학문은 어마지두 놀랐다. 군의소로 후송했던 김동호가 운전대를 쥐고 따라온것이였다.

《동호! 이건 무슨 자유주의야?》

《부과장동지! 동무들!》 간절한 그 무엇이 그의 눈가에 끓고있었다. 《동지들을 떠나선 정말… 부과장동지, 절대로 짐이 되지 않겠으니 같이 가게 해주십시오.》

학문은 뜨거운것을 꿀꺽 삼켰다.

《사람두…》

함께 간다면 치료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총상이 제때에 아물지 않으면 큰일이다. 지금은 큰길을 따라가도 급한 정황이 조성되면 험한 산발을 타야 할것이다.

하지만 적들이 무시로 쏘다니는 속에 김동호를 사단군의소로 다시 돌려보낼수도 없었다. 적아가 뒤엉켜돌아가는 정황에서 사단과 정찰대의 사이에 어떤 적들이 끼여들었을는지 모를 일이다.

학문은 머리를 내저었다.

《하는수 없군. 같이 가기요.》

무선기와 기관총만 자동차에 싣고 정찰병들은 당당한 위세를 보이며 행군을 계속해갔다. 차림새를 보나 씩씩하게 행진하는 기세로 보나 미군조차 숙보기 어려운 《헌병대》였다. 가끔 맞다드는 괴뢰군이나 《치안대》들은 주눅이 들어 비켜서며 경례를 붙였고 달려오던 적자동차들도 함부로 경적을 울리지 못했다.

검문소에서도 군말없이 차단봉을 올렸다.

평강에 이를 때까지 거칫거리는 놈들이 없었다. 평강비행장이 가까왔을 때에야 정문보초병들이 총대를 내들고 막아섰다.

맨앞에서 걸어가던 리학문은 대뜸 눈을 부라렸다.

《야, 눈깔이 멀었어? 헌병도 몰라봐!》

보초병들은 주춤주춤 뒤걸음치면서 자신없이 중얼거렸을뿐이였다.

《중대장님이 그 누구도 들여놓지 말라 했십니더.》

《이자식이? 총구를 내리워! 그리구 당장 중대장을 불러와!》

《알겠십니더.》

보초병 한놈이 서리맞은 배추잎처럼 후줄근해져서 지싯지싯 중대장을 찾으러 갔다.

잠시 기다리며 둘러보니 비행기는 한대도 보이지 않는데 한개 중대가량의 사병들이 활주로에 쌓인 오물을 쳐내고있었다.

잠시후 키가 꺽두룩한 대위가 겅중겅중 뛰여왔다.

《중대장 한주백입니다.》

이번에도 리학문은 호통부터 쳤다.

《임마, 시국이 긴박한데 싸울 궁리는 안하고 텅빈 비행장만 지키고있어?》

《상급의 지십니다. 곧 미군비행대가 착륙하게 되니 정리작업을 선행하라는…》

《이자식이 무슨 잔말이 많아? 헌병이 그래 그 정도도 모르고 다니는줄 알어? 군단의 새 지시를 전할게 있으니 보초병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집합시키라! 겸사해서 시국강연도 해주겠다.》

《시국강연을요? 아― 알겠습니다.》

중대장놈은 시국강연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트이는 모양이였다. 하기는 《유엔군》이 북쪽으로 진공한다고는 하지만 인민군대를 추격하는지 인민군대한테 유인소멸당하고있는지 도무지 종잡을수 없는 판국에 돌아가는 세상물정을 알려주겠다니 반갑지 않을수 없는것이였다.

《집합! 작업 중지하고―모두 집―합!》

비행장활주로곁에 커다란 휴계실이 있었는데 륙칠십명정도 잘되는 사병놈들이 그안에 몰켜들었다. 학문은 안창항에게 임무를 주어 그들속에 슬그머니 끼여들게 하였다.

《다 모였습니다, 헤헤…》

겁석겁석하며 중대장놈이 여쭈어서야 학문은 위엄스럽게 어험! 군기침을 깇으며 연단쪽으로 걸어갔다. 이전에 격납고로 쓰이던 건물을 휴계실로 꾸리며 대충 만들어놓은 연단은 통나무를 깔아놓은것이여서 몹시 울퉁불퉁했다. 화물차적재함을 서너개 모아놓은것만큼한 연단 오른쪽에 투박한 연탁이 놓여있었다.

학문은 권총을 꺼내여 연탁에 올려놓고나서 장내를 한번 쭉 둘러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가 해서 벌써 손을 귀박죽에 가져다붙이는 놈이 있는가 하면 침이 흐르는것도 모르고 입을 헤 벌린채 쳐다보는 얼간이사병도 있다. 한켠에서는 뭣때문인지 서로 쥐여박을내기를 하며 술렁거렸다.

《조용들 하라!》

학문은 꽥 소래기를 지르며 좌중을 쏘아보고나서 두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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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두팔로 연탁을 내짚었다.

《어험, 에―제군들! 지금 현황은 〈유엔군〉과 우리 〈국군〉의 대공세에 의하야…》

그때 땅! 한방의 총소리가 울렸다. 맨 뒤구석에 자리잡고앉았던 안창항이가 천정에 대고 갈긴것이였다.

와뜰 놀란 장내가 술렁거렸다. 그때를 기다렸던 학문은 중대장놈을 험상궂게 쏘아보았다. 눈화살을 맞은 그놈은 마른 벼락을 당한것처럼 아연실색하여 비실비실 뒤걸음질쳤다.

《중대장! 이속에 나쁜 놈이 있다. 어느 놈이냐? 당장 썩 나서라!》

술렁거리던 사병놈들은 서슬이 딩딩한 소령을 쳐다보며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다. 권총을 내흔들며 연단우를 오락가락하는 리학문의 기상은 날승냥이라도 씹어삼킬것 같았다.

《안되겠다 , 안되겠어! 우선 나쁜 놈부터 잡아내고 시국강연을 마저 하겠다. 한명한명 밖으로 나가면서 무기검사부터 받으라! 어느 놈이 총을 쐈는지 밝혀내고야말테다!》

헌병완장을 낀 정찰병들이 들어와 한놈한놈 잡아일궈서는 줄을 세워 나들문으로 내보냈다. 밖에서는 나오는 족족 무장을 해제하고 인원들은 곧장 다른 건물안으로 쓸어넣었다.

어정쩡해하는 중대장이 의심을 품지 못하게 하려고 학문은 뜨락에서 이런저런 한담을 늘어놓고있었다.

《중대장, 임자는 알아야 하네. 우리가 왜 이런 수고를 하는가. 인민군대가 쫓겨가면서 숱한 공작원들을 떨궈놨다는 정보야. 그자들이 아군의 내부에 잠입해들어왔기때문에 헌병사령부에서 특별대책을 세운거란 말야. 이자 방금 총을 쏜 놈은 그런 놈들중의 한놈이 분명해. 가만, 저기 저 건물은 뭐야?》

비행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우진각지붕의 단층건물로 흰 위생복을 입은 놈들이 들락날락하는것을 띠여본 학문이 물었다. 얼떠름해서 헌병장교의 장광설을 듣던 중대장놈은 손을 눈두덩에 오그라붙이고 학문이 가리키는쪽을 한참 바라보더니 슬그머니 손을 사리며 말했다.

《국군 2군단 3사 야전병원입니다.》

《그래? 저것들이 언제 여기까지 왔어? 저것들도 좀 검열해봐야겠군.》

야전병원은 새로 조직된것인데 아직 부상병들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당장 부상병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느라 군의관들과 간호부 수십명이 보급물자들을 들고 오락가락했다.

헌병장교가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황급히 달려온 원장은 이마전에 지렁이같은 피줄이 일어선 늙다리 안경쟁이소령이였다.

《헌병장교님! 우리 야전병원은…》

그놈의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학문은 욕설부터 퍼부었다.

《야, 이 네눈깔놈아, 네놈들은 부상병들을 다 어디다 내팽가치고 계집년들을 끼고 수작질만 하고있는기야? 쌍 건달군새끼들!》

원장놈은 병밑굽처럼 두터운 도수안경을 추스르며 신설된 병원실태를 구구히 설명하느라 진땀을 뽑아야 했다. 이제 당장 더 보급받아야 할 물자들의 명세를 지루할 정도로 줄줄이 꼽아가는것은 자기들의 처지를 고려해달라는 뜻 같았다.

입을 실룩거리며 그의 넉두리를 듣던 학문은 충분히 알만하다는듯 머리를 끄덕거리고 말허리를 툭 잘라버렸다.

《늬네 수고를 모르는바 아니다. 그러나 신설이라면 더욱 그렇지 뭐야. 지금 전선에선 〈국군〉용사들이 피를 흘리면서도 포대기 하나 덮지 못하고 옥도정기 하나 없어서 처치를 못 받는데 부상병도 없는 이 야전병원에 당장 이 많은 후방물자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말야. 당장 급한것은 일선장병들이다. 그러니 여기것을 다 걷어가야겠다.》

《저, 그건… 저로서도 결심할수 없는…》

《음?》

사나운 눈초리가 홱 돌아갔다. 당장 일을 칠 기세였다. 조금만 더 늦잡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안경쟁이원장은 허리를 굽석했다.

《예, 예, 그럼 그렇게 합시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여 번들거리는 목덜미를 닦았다.

《그러면 그렇겠지. 암, 그래야 하구말구.》 리학문은 격려해주듯 놈의 어깨를 툭툭 치며 뒤를 달았다. 《그리고 원장, 우리한테 부상자가 한명 있는데 제일가는 유능자를 불러다가 처치해!》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호랑이앞의 토끼처럼 겁에 질려있던 안경쟁이원장은 다행스러운 생각에 내심 기뻐하며 모포와 의약품들을 요구대로 내주도록 분부하고 제가 직접 김동호를 처치하기 시작했다.

동호가 몰고온 자동차에 모포와 의약품을 그득히 싣고나서 군의관과 간호부들을 모두 포로해버렸다. 김동호가 응급처치를 받고나니 마음이 좀 놓였다.

포로한 년놈들을 로획물자와 함께 사단에 넘겨준 후 정찰대는 다시 행군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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