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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장의 행운아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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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433회 작성일 20-09-15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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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영 웅

4

 

북대봉너머에서 불어온 하늬바람이 버썩 마른 수풀을 기세차게 마구 흔들어대며 못살게 굴었다. 민봉산의 산림지대는 태고연한 수림이여서 그속에서는 방향도 쉽게 잡을수 없었다. 지금까지 헤쳐온 참나무숲속에서는 그래도 앙상한 가지들사이로 희푸른 하늘을 볼수 있었으나 소나무며 이깔나무들이 빼곡이 들어차 우듬지를 솨솨 흔들며 설레이는 이 깊은 산속에 들어서니 한쪼각 하늘마저 보이지 않았다.

정찰대는 양덕읍을 에돌아 소소리높은 북대봉을 넘었고 민봉산을 타고내려 맹산에 이르렀다. 모두들 머나먼 후퇴의 길에서 땀에 삭고 나무가지에 찢길대로 찢겨진 홑군복차림이였다.

그래도 쉬임없이 걷고걸어 녕원을 지났고 어느덧 희천근방에 이르렀다.

하도 깊은 산림지대여서 맞다드는 적정은 거의나 없었다. 가끔 만나게 되는 마을들에 《치안대》도 없었다. 서부방향으로 진공하는 적들이 벌써 청천강이북까지 침입했고 동부로 공격해오는 적들은 장진호반에 가닿은 때여도 천고의 밀림이 펼쳐진 이 백두대산줄기의 산악지대에는 아직 감히 범접할념을 못한것이였다.

《저앞에 보이는게 동신읍이요.》

학문은 지도를 접으며 라동수를 돌아보았다.

《적정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요?》

《일없을거요. 그냥 들어가봅시다.》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무엇때문인지 자기 생각에 골똘했던 라동수가 갑자기 리학문을 돌아보았다.

《부과장동지, 참 이상하거던요.》

생뚱같이 꺼내드는 말에 학문은 얼떠름해졌다.

《뭐가 말이요?》

《내겐 왜 부과장동지와 같은 담이 없었을가요? 늘 그랬지요. 부과장동지가 결심을 내릴 때마다 난 반신반의하게 되구… 헌데 부과장동지가 결심한것은 언제나 훌륭히 결속되구. 그 까닭을 모르겠거던요.》

이런 때 왜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꺼내는것인지 학문은 가늠이 갔다. 일시적인 전략적후퇴의 길이 끝나게 되는 대목에 이르니 스스로 자신의 행로를 돌이켜보게 되는 모양이였다. 생각이 많을것이였다. 그에게 꼭 필요한 말을 해주고싶었다.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진정을 어떻게 표현했으면 좋을는지 인차 떠오르지 않았다.

《글쎄, 뭐라 해야겠는지…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건 최고사령부의 작전적의도를 어떤 일이 있어도 관철해야 한다는 자각에 있다고 보오. 이를테면 최고사령부와 정과 뜻을 합쳐야 한다고 할가…》

그때 읍거리로 들어가는 다리목앞에서 서성거리는 여러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쌍안경으로 확인해보니 모두 말끔한 인민군대솜옷차림이였다. 그들도 이쪽을 알아본 모양 손짓을 하며 걸어왔다.

《아군인것 같구만. 접근해봅시다. 만약을 생각해서 전투준비!》

학문의 구령에 따라 정찰병들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떳떳이 마주 걸어갔다. 서로 상대의 얼굴을 가려볼 정도로 가까와졌다.

사람의 예감이란것은 참 이상한것이다. 숨이 막히도록 긴장되는 순간이였으나 웬일인지 경계심은 점점 탕개를 늦추었다.

저쪽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인것 같았다. 이쪽을 유심히 살펴보던 사람들중에서 상좌견장을 단 고급군관이 손나팔을 해가지고 소리쳤던것이다.

《6사동무들이 아니요?》

아군의 부대대호를 알고있는것을 보니 마음이 푹 놓였다.

《옳습니다. 우린 6사 정찰이요!》

라동수가 반기며 손나팔로 화답했다.

이쪽의 응대에 몇몇 사람들이 발이 땅에 닿지 않으리만큼 날렵한 걸음새로 달려왔다.

《왔구만, 드디여 왔어!》

꽤 날렵해보이는 상좌는 리학문을 부둥켜안고 볼을 비비며 목갈린 소리로 웨쳤다.

《정말 반갑소, 반갑소. 나는 최고사령부 련락군관 최인덕이요. 동무들!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동무들을 마중하라고 몸소 우리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말은 꿈속에서처럼 들렸다. 언제나 바라마지않아온 소원이였건만 정작 그런 행운을 받아안고보니 꿈을 꾸지 않나 하는 의심까지 드는것이였다.

리학문은 두눈을 꾹 감았다. 남해안에서부터 걸어온 즐펀한 길들이 확 눈앞에 안겨들었다.

얼마나 험난한 길을 왔던가. 최고사령부에 꼭 가야 한다는 신념과 의지로 사선의 고비를 수없이 헤쳐왔건만 과연 반드시 살아서 이렇게 끝까지 올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가. 죽어서라도 가고싶었던 우리의 최고사령부!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 계시는 곳에 정말 이렇게 와닿았단 말인가!

그의 눈귀로 더운것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련락군관이 의미있는 미소를 지었다.

너도나도 두팔을 허공에 추켜들며 목메여 만세를 불렀다.

《우리의 최고사령관 김일성장군님 만세!》

《만세!》

《만세― 에!―》

그들이 부르는 만세의 함성은 마가을의 청신한 대기를 가르며 멀리, 멀리로 메아리쳐갔다.

동신에서 사단과 합류한 정찰대는 련락군관의 안내를 받으며 강계에 도착했고 새로운 반격전의 준비에 들어갔다. 최고사령부의 전략적의도에 따라 벌써 새로운 후비부대들이 조직되여있었고 후퇴해온 부대들도 새롭게 편성되고있었다.

분망한 나날이 흘렀다.

일부 부대들이 적후 제2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떠나갔고 장진호반전투와 청천강반전투를 위한 타격집단들이 속속 구성되는 속에서 제6사단은 제5군단에 편입되였다.

상급참모부의 명령에 의하여 리학문은 군단정찰부부장으로 조동되면서 중좌의 군사칭호를 수여받았다.

총참모부에서 온 일군이 랑독하는 명령서를 들으며 어깨우에 늘어난 또 하나의 별이 왜 그리도 무겁고 마음뿌듯한지 알수가 없었다.

《축하합니다, 부과장동지. 아니, 부부장동지.》

《우리 정찰대의 자랑입니다. 헌데 우릴 버리고 가지는 않겠지요?》

《이젠 군단부부장동지이니까 적후에 들어갈수 있겠습니까? 큰 간부인데…》

정찰병들은 모두들 눈물이 글썽해서 리학문을 에워싸고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댔다.

《내가 동무들을 떠나서 어떻게 살겠소. 또 적후에 들어 안 가면 무슨 정찰병이구.》

학문도 두눈을 슴뻑거리였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어깨를 툭 치는것이였다. 군단부참모장으로 임명받은 한태설이였다. 그는 억센 손아귀로 학문의 손을 틀어잡으며 의미있게 웃었다.

《축하하우, 부부장동무. 그동안 수고가 많았는데 손잡고 함께 더 잘 싸워보기우.》

《고맙습니다, 부참모장동지도 축하를 받으십시오.》

한태설은 진촌에서 헤여진 후 사단의 행적을 찾아 련대를 이끌고오던중 최현부대를 만나 성과적으로 적의 포위를 뚫고나왔다고 했다. 그는 틀어잡은 리학문의 손을 놓지 않고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이끌어갔다.

《이제 방금 하는 말들을 들었어. 부부장동무는 늘 적후에 들어가 살다싶이 했는데… 이젠 큰 부대의 책임일군이 되였으니 군단지휘부에서 지휘만 해도 되지 않겠나? 물론 동무의 건강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지만.》

진주에서 다친 허리를 두고 하는 말이였다.

《괜찮습니다. 부참모장동지. 나야 부참모장동지가 잘 아시다싶이 적후에 들어가 싸워야 마음이 편해하는 성미가 아닙니까. 이제 당장이라도 최고사령부의 명령이 내려 재진격이 시작되면 또 적후로 날아가겠습니다. 적의 심장을 겨눈 비수처럼.》

《허허, 표현이 멋지군 그래. 아무튼 좋아. 이제부터는 군단정찰대를 새롭게 꾸려야겠는데 동무가 맡아서 잘해보우. 쉬운 일이 아니지. 6사 정찰대동무들은 모두 동무를 닮아서 끌끌해도 군단정찰대는 새로 조직되기때문에 모든것을 다시 시작해야 할테니 부부장동무가 할일이 참 많우.》

한태설의 말에는 여러가지 뜻이 깃들어있었다. 물론 학문은 그것을 충분히 리해하고있었다. 군단이 조직되면서도 사단은 사단대로 편제를 가지고있으니만큼 남진과 일시적인 전략적후퇴의 간고한 싸움속에서 단련된 정찰병들을 다 소환할수는 없는것이였다. 군단정찰대에 망라될 정찰병들은 새로 모집된 신병들속에서 골라 키워내야만 하였다.

사선을 함께 넘은 전우들과 헤여져야 한다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라동수, 김기전, 차용대, 김덕천, 하복남… 이들과 헤여질 날이 있으리라고 과연 언제 생각이나 해보았던가. 아직 전쟁도 끝나지 않았는데…

한태설을 부여잡고 그들을 모두 데리고가게 해달라고 통사정이라도 하고싶었다. 그러나 참았다. 군단부참모장으로서 한태설도 괴로운 점이 없지 않다. 그도 정든 련대의 전우들과 작별해야만 하는것이다. 군단을 위해 알쭌한 사람들을 다 끌어올리면 산하 전투구분대들의 전투력은 대단히 약화될것이다. 승낙할수 없는것을 허용해달라고 강짜를 부릴 리학문이 아니였다.

(그래도 기회를 보아 다문 몇사람만이래도 보내달라고 부탁해야지.)

 

×

 

아침이였다. 귀틀집밖에는 어제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있었다. 때일찍 첫눈을 선보인 이해 겨울은 무척도 많은 눈을 퍼붓는다. 소리없이 내린 눈송이들은 동기와지붕을 두툼하게 덮고 산과 들에 눈부신 백설의 세계를 펼쳐놓았다.

군단정찰대를 새로 조직할 문제를 놓고 궁리를 더듬던 리학문은 군단참모부로 급히 올라오라는 명령을 전달받았다.

《자동차가 도착했습니다.》

직일관이 들어와 귀띔해주었다. 한태설부참모장이 보내준 찌프차가 도착한것이였다. 오늘따라 각근한 친절을 보이는 한태설에 대해 새삼스러운 고마움을 느끼였을뿐 별다른 생각은 없이 차에 올라탔다.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는 모양입니다. 온 군단이 흥성흥성합니다.》

코마루가 상큼한 운전사가 하는 말도 리학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루빨리 정찰대를 조직해가지고 적후로 들어갈 궁리에만 빠져있는 그인것이다.

군단지휘부에 도착하니 눈을 말끔히 쓸어낸 앞마당에 전사, 하사관들로부터 군관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원들이 모여들었다. 언제 왔는지 6사의 낯익은 정찰병들의 얼굴도 보였다.

《아, 왔구만. 어서 앞으로 나오라구.》

기다렸던듯 한태설이 반기며 대렬앞의 한복판에 그가 앉을 자리를 정해주었다.

백포를 정갈하게 드리운 정면에는 김일성장군님의 초상화가 정히 모셔져있고 그앞에는 통나무를 켜서 무은 책상이 3개 놓여있어 주석단을 대신했는데 책상우에는 새 군용모포가 펴있었다.

이윽고 군단지휘관들이 나와 자리를 차지하자 최고사령부에서 파견되여온 장령이 최고사령부축하문을 전달하였다.

축하문에는 부대의 장병들이 남진의 길에서 발휘한 대중적영웅주의와 무비의 위훈 그리고 일시적인 전략적후퇴의 나날에 보여준 강의한 신념과 헌신성에 대한 높은 평가와 치하가 담겨있었다.

축하문랑독이 끝나자 우뢰와 같은 만세의 함성이 하늘가 멀리로 메아리쳐갔다.

이어 주석단에 나선 한태설부참모장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랑독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방금전의 그 장령이 다시 연단에 나섰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함에 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미제를 격멸하는 성스러운 조국해방전쟁에서 무비의 헌신성과 희생성을 발휘하여…》

방금전에 전달받은 최고사령부의 축하문에서 받은 감격이 용암끓듯 하는 마음을 겨우 누르며 학문은 장령의 입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리학문이라는 이름이 튀여나오는 바람에 꿈틀 놀랐다. 자기의 귀를 의심하였다.

(나와 이름같은 사람이 있는게지?!)

《영웅칭호와 금별메달 및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한다.…》

흠흠해서 앉아있던 그는 좌중의 모든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는것을 감촉했다. 정령발표가 끝나고 열광적인 박수가 터졌다. 누군지 옆에서 그를 툭툭 쳤다.

《리학문동무! 어서 나오시오.》

한태설이 불렀을 때에야 그는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쪽을 지켜보던 장령도 어서 나오라고 손짓했다.

(그러니 내가 영웅?!)

본능적인 동작으로 힘있는 정보를 내짚어 주석단앞에 나간 그는 영웅증서와 금별메달, 훈장을 수여받고 김일성장군님의 초상화를 우러르며 《조국을 위하여 복무함!》하고 크게 웨쳤다.

박수소리는 더욱 높아갔다.

(내가 정말 영웅이 되였단 말인가?!)

눈앞이 흐려왔다. 꿈도 아니고 착각도 아닌것을 깨달았을 때 헉 하는 흐느낌소리와 함께 뜨거운것이 두볼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영웅이 되리라고 언제 한번 생각해본적이 없는 그였다. 준엄한 싸움길을 헤쳐온것은 결코 영웅이 되려는 욕망때문이 아니였다.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을 위하여,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나서자란 고향을 해방하기 위하여 죽음도 겁내지 않고 싸워온 그였다. 아직 고향땅도 해방하지 못한 전사에게 최고사령관동지께서는 금별메달을 달아주신것이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 자꾸만 흐느끼였다.

《리학문동무, 진정하오. 이런 좋은 날에 울긴 왜 울겠소. 웃으시오. 전우들이 다 보고 온 나라, 온 세상이 다 보게 밝게 웃으란 말이요.》

보다못해 장령이 한 말이였다.

《알겠습니다. 이 한몸 다 바쳐 최고사령관동지의 사랑과 믿음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리고 인츰 준비를 하시오. 경애하는 최고사령관동지께서 동무를 부르시였소.》

《장령동지, 최고사령관동지께서 저를 불러주셨단 말입니까. 어떻게 꿈같은 이런 영광이, 이런 행운이 저에게…》

장령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행운이지. 행운이구말구. 그이의 전사된 우리모두가 다 타고난 행운아들이야. 자, 보라구. 동무네 정찰병들의 가슴에 번쩍이는 훈장들을 말이요.》

라동수도, 차용대도, 김기전이도, 하복남이의 가슴팍에도 높은 급의 훈장들이 번쩍이고있었다. 그들은 영광의 절정에 서있었다.

전우들의 모습을 죽― 둘러보는 학문의 눈앞에는 심초향과 하사, 허찬의 얼굴이 엇갈려 지나갔다. 그들도 함께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것인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찌르르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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