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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장의 행운아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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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566회 작성일 20-09-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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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신념의 산마루

4

 

소백산줄기의 산발우에는 길아닌 길이 생겨났다. 마차도 넉근히 굴러갈수 있는 그 길은 소나무나 참나무 같은 소소리 키높이 자란 숲이 우거진 릉선을 따라 구불구불 뻗어갔다. 후퇴길에 오른 인민군병사들의 군화발에 다슬려진 길이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갔는지 그 길은 자동차길 못지 않게 탄탄했다.

정찰병들은 종대를 지어 걸었다. 누구도 말이 없었다. 다만 묵묵히 본능적으로 발을 옮겨놓을뿐이였다. 이따금 들려오는 먼 포성과 저벅저벅 발걸음소리만 아니라면 괴괴할 정도였다.

《무선수동무, 아직 감도가 없소?》

차용대의 구붓한 등어리에 얹힌 무선기를 바라보며 학문이 물었다. 그것은 무거운 무선기를 지고 걸으며 사단을 찾는 그의 헛수고가 민망스러워서 물어본것에 불과했다.

휴식하거나 숙영할 때에도 용대와 룡조는 편안하게 쉴수 없다. 남해기슭에서부터 머나먼 길을 걸어오며 아무런 소득도 없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선작업을 그들은 직심스럽게 지금도 하고있다.

사단은 분명 정찰대보다 앞서나가고있고 지금까지의 로정과 행군해온 기간을 따져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을것이다. 그런데 왜서 파장이 잡히지 않는단 말인가.

누구랄것없이 모두가 허기졌고 지쳤다.

복남이는 배낭을 동호에게 맡기고서도 라동수의 혁띠를 한손으로 붙잡고 겨우겨우 비틀걸음을 옮겨놓고있다. 배낭 두개에 자동총 두자루를 엇가로 멘 김동호도 헌걸찬체 하나 기실은 더 버틸 형편이 못되는듯 황소숨을 씩씩 내불면서 그리 높지 않은 바위턱을 넘어서기도 힘겨워했다.

《부과장동지, 좀 쉬고 갑시다,모두들 힘들어하는데…》

좀해서는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던 라동수가 앞이 확 트인 산마루에 올랐을 때 옷깃을 터쳐놓으며 참지 못하고 힘겨움을 내비쳤다.

《그렇게 합시다. 그러되 동무들이 사기를 잃지 않도록 해야겠소. 맥을 놓으면 더 힘든 법이요,식량을 대신할게 더 없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고.》

《알았습니다.》

휴식구령이 내리기 바쁘게 모두들 선자리에 주저앉았다.

라동수는 김기전이부터 붙잡고 못살게 굴었다.

《특무장부터 먹을것이 다문 얼마라도 있으면 내놓소.》

《아, 있을게 뭡니까. 심초향동무한테 다 털어준지가 언젠데…》

《그러지 말구 배낭안을 다시한번 뒤져보오. 보리쌀 한알이라도 좋으니 모두들 찾아보라구.》

중대장의 조갈든 입술을 묵묵히 쳐다보던 김기전은 군소리없이 배낭을 털었다. 털었대야 정말 보리쌀 세알이 나왔을뿐이였다. 그 모양을 건너다보던 학문은 한숨을 내쉬였다.

문득 룡조가 따온 설익은 감을 먹던 때의 생각이 들었다. 시고 떫은 맛에 이마살이 찌프러지던 그때의 일이 되새겨지며 입안에 신물이 스르르 돌았다.

(이런 때 그런거라도 있었으면… 그때 룡조가 무슨 말을 했던가?)

《김동호동무를 보니까 오늘 낮에 숲속에서 무얼 얻은듯 한데 배낭속에 잔뜩 꿍져넣고서는 모르쇠를 합니다. 제 살 궁리는 다 있는가 봅니다.》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던 말이 이런 때 불쑥 떠오른것은 기이한 일이였다. 아닌게아니라 그후에도 숲속을 뒤지며 돌아가다가 송라가 수염처럼 내돋은 소나무아래서 무엇을 얻었는지 히죽벌쭉거리며 배낭속에 쑤셔넣는 김동호를 여러번 띠여보았었다. 뭘하게 그러느냐고 물으면 《아무것두 아닙니다.》 하고 시치미를 떼군 하던 김동호였다. 딸자랑을 좋아하는 사람이 딸에게 줄 노리개라도 얻었는가부다 하는 싱거운 생각에 웃어넘겼던것이 오늘은 버럭버럭 새로운 의심을 불러일으키는것이였다. 아니, 일루의 기대를 걸어보고싶어지는것이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를 불렀다.

《김동호동무!》

동호가 늘어진 성격 그대로 배낭을 한쪽어깨에 걸어멘채 스적스적 걸어왔다.

《찾았습니까?》

《그렇소. 내 봄상엔 동호동무 배낭이 보물배낭인것 같은데 뭘 좀 내놓을게 없겠소?》

《아니, 부과장동지, 보물배낭이라뇨? 다른 동무들하구 조금치도 다름없는 빈털터리인데요.》

동호는 펄쩍 뛰였다. 거동은 여느때처럼 스스럼이 없어보이지만 왜그런지 무척 당황해하는것이였다. 배낭아구리를 탈아쥔 손이 약간 떨리는것을 학문의 시선은 놓치지 않았다.

촉기빠른 김기전이도 그것을 놓치지 않고 눈총을 쏘아박았다. 이런 때 특무장의 욕심이 제일 크기도 하지만 정찰대에서 동호와는 누구보다도 허물없는 그여서 무작정 김동호의 배낭을 부여잡고 끌어당겼다.

《이 친구 혼자 먹을걸 가지고있는 모양입니다.》

《놓으라구요, 젠장! 아, 이걸 놓으라는데!》

힘내기가 벌어졌다. 뚝심에서는 김기전도 동호도 짝지지 않아서 한참동안이나 밀고당기며 싱갱이를 벌렸다.

리학문은 이마살을 찌프렸다.

《그만하시오. 아이들처럼 그게 뭐요? 꺼낼것이 없으면 그만인게고… 조금이라도 있다면 동지들을 위해서 어서 꺼내시오.》

만만치 않게 뻗치고있던 동호의 손아귀가 그 말 한마디에 저절로 풀렸다. 설레설레 고개를 젓고난 그는 열심히 배낭속을 뒤지는 김기전을 락심한 눈길로 바라만 보았다. 김기전의 손에 끌려나온것은 무명천으로 꽁꽁 싸매고 삼베끈으로 칭칭 동여맨 자그마한 꾸레미였다.

《이건 무슨 보물꾸레민가, 동호? 주인이 풀라구.》

꾸레미를 넘겨받은 김동호는 억이 막힌듯 헉 숨을 들이긋더니 학문을 힐끗 쳐다보았다. 애절한 기대와 간청이 어린 눈길이였다. 그러나 다음순간 마음을 도슬러먹었는지 제잡담 와락와락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이건 뭐요? 엉?》

검은밤색의 말린 버섯이 드러났다. 깔때기모양으로 우무러든 버섯갓은 특이한 향기를 풍겼다.

《버섯이구만! 이런 희한한 일이라구야. 능구렝이같은 친구 언제 이 많은 버섯을 건사했어?》

김기전이 입을 딱 벌렸다. 특무장인 자기를 찜쪄먹을 살림군이라며 잔뜩 춰올리기도 했다. 김동호는 서글프게 씩 웃었다.

《이걸 내가 혼자 먹자구 메고다니는줄 압니까. 부과장동지, 이건 능이버섯이라는건데 우리네 고향에선 대단한 귀물로 친답니다. 우리 할아버지의 말이 옛날엔 임금한테 진상품으로 바치던거랍니다. 저 마산―진동에서부터 소나무숲속에 이따금 보이길래 하나하나 따서 건사한건데… 이걸 잘게 찢어서 기름에 볶으면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른답니다. 사실 전쟁이 끝나고 전승열병식에 참가하는 날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께 드리고싶었습니다. 이제 최고사령부에 새 전투임무를 받으러 가게 되겠는데… 그렁하니까 그때에라도 삼가 드릴수 있지 않겠습니까.》

《뭐라구?》

학문은 더 말을 이을수 없었다. 가슴을 몽둥이로 후려맞은듯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배집이 큰 김동호, 동작이 남보다 굼뜨다고 민망하게 생각할 때도 없지 않았던 그에게서 그처럼 웅심깊은 진정을 발견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였다. 그래서… 숙영할 때도 배낭을 꼭 그러안고 잠들었던가.

《동호동무! 용서하라구. 그런것두 모르고 난…》

김기전이 눈을 슴벅거렸다.

학문은 무명천보자기를 차곡차곡 다시 싸기 시작했다. 정성들여 귀퉁이를 여미고 삼베끈을 다시 꽁꽁 둘러감았다.

《김동호동무! 고맙소. 이걸 정히 간수했다가 최고사령부를 찾아가는 그날 우리의 최고사령관동지께 꼭 올리자구.》

《알겠습니다.》

동호는 훈장이나 받은 사람처럼 가슴을 쑥 내밀면서 좋아했다.

《그런데 이 많은걸 언제 따서 어떻게 말리웠나? 버섯이란건 마른건 얼마 되여보이지 않아도 원체 부피물건인데…》

《거야 뭐, 킨지대에서 행동할 때는 무더울 때니까 제꺽제꺽 마르더군요. 흐린 날엔 하나하나 품속에 넣고다녔습니다. 그렁하니까 상하지 않고 잘 마르구요.》

《음, 딴은 그랬댔군.》

모두들 걷잡을수 없는 흥분과 격정에 사로잡혀 눈들을 슴벅거렸다. 최고사령부에 대한 숭엄한 그리움이 마음과 마음들속에서 물결치는것이였다. 지금은 비록 사단과의 련계가 끊어져 고립무원한 상태에 있어도 이제 꼭 부대와 만나게 되고 김동호가 바라는대로 최고사령부에 도착할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그리움의 파도를 일으키는것이다.

그때였다.

《부과장동지! 사단입니다!》

《동무들! 사단지휘부 무선입니다!》

앞이 탁 트인 북쪽켠 수풀속에서 무선기와 씨름하던 차용대와 룡조가 환성을 올리며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뭐요?》

《사단이라구?!》

솔포기를 걷어차며 그들에게로 허겁지겁 달려간 학문은 헤덤비며 송수화기를 받아들었다. 가슴속에 전류가 흐르는것처럼 찌르르한 파동이 지나갔다.

사단지휘부에서는 각 련대들에 행군명령을 하달하는중이였다.

《멸악산, 멸악산, 나 참매, 나 참매다!…》

무선망에 불시로 뛰여든 새로운 가입자를 두고 잠시 얼떠름해졌던 저쪽에서 환성을 올렸다.

《참매?! 정찰대인가?》

《그렇다! 그렇다!》

무선이 비로소 결속되였다.

《야! 우리 사단이다!》

정찰병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돌아갔다.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같지 않았다.

사단에서는 행군을 일시 멈추고 정찰대를 기다려주었다.

지휘부는 태백산이 바라보이는 선달산마루에 있었다. 그곳에 이른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뒤였다. 천막에서 달려나온 참모장이 정찰병들을 얼싸안았다.

(이렇게 꼭 만나게 되는것을 허찬은?!… 아, 그날의 산마루, 그것이 바로 신념과 의지의 산마루였구나.)

《살아서 돌아왔구만, 끝내 왔어! 엉?》

《참모장동지!…》 거수경례를 하던 학문은 헉 흐느끼고야말았다. 《이렇게 왔습니다.》

《장하오, 장해!》

참모장의 두눈언저리도 불깃해졌다. 말로는 표현할길 없는 뜨거운 감정이 사나이들의 마음에 소용돌이치고있었다.

그 순간 학문은 어떤 방법을 다 써서라도 심초향과 하사를 데리고왔어야 했으리라는 심한 후회감에 잠겼다. 사단을 만난 기쁨이 컸지만 후회와 자책으로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무거웠다.

(신념! 그게 중요해. 그러고보면 나의 신념과 의지속에도 티가 없다고는 말할수 없구나.)

붉게 타는 노을이 한폭의 수채화처럼 서쪽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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