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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전환의 년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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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1건 조회 9,288회 작성일 20-10-10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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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녘이 되자 림성욱은 안해를 대할 걱정으로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온종일 연필을 휘두르며 설계에 정력을 쏟아부었지만 별로 이렇다 하게 일을 축내지 못한 그는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거리는 벌써 퇴근하는 사람들로 흥성거리고있었다. 림성욱은 한동안 활기에 차서 붐비며 서두르는 사람들의 물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해도 지금쯤은 어머니의 삼년제차비로 바삐 돌아갈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안해와 함께 떠날 처지가 못되고보니 그는 여간 마음이 괴롭지 않았다.

오늘 남정기가 인민대학습당설계현장의 대상책임을 내놓고 사업소로 소환되여왔다. 림성욱은 그일로 사업소안의 분위기가 어수선한데다가 륜환선거리설계안도 제 날자에 제출하지 못한채 전전긍긍하는 처지여서 어머니의 삼년제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매일같이 설계에 몰리워 들볶이는 처지에 사사일로 고향을 다녀올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량심도 허락치 않았다.

물론 안해는 안해대로 서운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적인 문제이다. 림성욱은 안해가 받아들이기 힘들어하여도 자기의 딱한 사정을 잘 납득시키는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이날저녁은 일찌기 집으로 돌아갔다.

《아니, 어떻게…》

방안에서 부지런히 떠날 준비를 하던 안해가 반가움과 의문이 뒤섞인 말을 하며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림성욱은 늘쌍 바쁜 설계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여서 어느 하루도 남들처럼 제시간에 퇴근하는 때가 없다. 어쩌다 개인적인 용무로 시간을 낼 일이 생기면 더구나 그러했다. 그런 밤이면 림성욱은 습관처럼 밤이 깊어서야 퇴근하군 했는데 오늘은 해가 떨어지기 바쁘게 집으로 돌아왔으니 안해의 의문을 살만도 하였다. 그러나 림성욱은 어딘가없이 불안스러워하는 안해의 마음을 감촉하고도 어머니의 삼년제에 못간다는 말이 차마 나가지 않아 머뭇거리며 서있었다. 이번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안해와 함께 떠나기로 철석같이 약속했던 그였다.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갓 미용을 한 안해의 부풀어오른 머리에서는 향수내가 연하게 풍겨왔다.

그 향긋한 냄새와 안해의 미소, 오늘따라 풍만한 몸매에 잘 어울리는 보라빛의 하르르한 원피스, 어쩐지 안해의 류다른 모습이 림성욱을 려행의 분위기에 끌어들이는듯 하였다. 림성욱의 머리속에는 《여보, 래년엔 당신과 꼭같이 가겠소.》라고 했던 말이 어제런듯 다시금 생생히 떠올랐다. 정말 어떻게 안해를 리해시키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안해는 기다리던 어머니제사날을 앞두고 말 한마디없이 서있는 림성욱의 얼굴에 얼핏 시선을 던졌다. 안해의 그 시선에서 몹시도 불안해하는 마음을 직감한 림성욱은 더구나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 그저 방안에 벌려놓은 제물들만 묵묵히 지켜보았다.

흰눈처럼 새하얀 설기떡이 눈에 비쳐들었다.

삼년째 어머니의 제상에 꼭꼭 놓군하는 설기떡! 그러자 불현듯 어머니에 대한 아릿한 추억이 가슴을 허비면서 되살아올랐다.

한뉘 고향을 뜨지 않고 석수동 림산마을에서 홀로 살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난 어머니… 칠흑같던 머리가 하얗게 바래고 얼굴에 얼기설기 주름살이 패인 어머니를 평양에 모셔오려고 여러번 애를 썼으나 어머니가 들어주지 않아 끝내 성사 못한 일이 가슴을 저리게 하는것이였다. 남들은 늙마에 자식한테 와서 여생을 즐겁게 보낸다는데 어머니는 아들며느리한테 부담을 주며 얹혀사는것을 조금도 달가와하지 않았다. 그바람에 안해가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는지 모른다.

안해는 해마다 석수동으로 내려가 홀로사는 어머니를 따뜻이 돌봐드리군 하였다. 떠나기 전날밤이면 의례히 설기떡을 한가마 쪄놓고 《우리 어머닌 왜 수수한 설기떡을 그렇게도 좋아할가요? 이 떡만 해드리면 천하별미라고 하시니!》 하고 명랑하게 웃던 안해의 사랑스런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기도 하였다. 어머니에게 외동딸맞잡이였던 안해의 그 갸륵한 마음을 오늘 설기떡에서 다시 보는듯 하여 림성욱은 눈시울이 젖어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명색이 아들일뿐 안해의 절반만큼이나마 어머니를 정성스레 돌봐드렸던가? 가슴을 찌르는듯 한 그 쓰라린 가책에 떠밀려 림성욱은 안해를 도와 려행용가방에 인삼술병이며 고급사탕, 과자곽, 빛갈고운 실과들을 조심조심 챙겨넣기 시작했다. 순간 혼자생각에 잠겨있던 안해가 일손을 멈추고 근심스럽게 물었다.

《여보, 무슨 일이 있었어요?》

림성욱은 불안이 깃든 안해의 눈길과 마주치자 한숨을 내쉬고 다시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여보, 미안하오. 내 이번 삼년제에도 갈것 같지 못해서 그러오.》

안해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실망으로 그늘이 진 얼굴을 돌리며 한참후에야 혼자소리처럼 시들히 말했다.

《글쎄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요.…》

안해의 눈에 물기같은것이 핑 감돌았다.

《초상엔 외국에 가있느라 못가고 돐제땐 설계가 바빠 못가고 이번엔 또?》

안해는 더 뒤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였다.

《여보, 정말 안됐소. 이젠 당신을 보기가 정말… 내가 당신을 위해서 하나도 해준게 없지. 어머니때문에 당신 혼자 고생한것밖에…》

《됐어요. 사실이야 나보다도 가지 못하는 당신마음이 더 괴로울거예요… 내가 괜히 눈물을 보였어요. 요즘 당신이 언제 제대로 잠을 잔 날이 있어요? 지난밤에도 자다가 깨여보니 밤을 새우더군요.》

림성욱은 잠시 안해의 정성이 고인 제물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있었다. 정작 안해가 위로하는 말을 들으니 그는 자기의 마음이 흔들릴것 같아 움쭉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숨을 내쉬고 자기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일찌기 침대에 누웠으나 온밤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도 조반을 몇술 뜨는둥마는둥 하고나서 집을 나서며 시간이 바빠 역에 나가 바래줄것 같지 못한데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그일은 이내 머리에서 사라지고말았다.

닷새전 김정일동지께서 대학습당형성안을 보아주신후 우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것이 급하여 여간만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있지 않았다.

그는 사업소에 소환돼 들어와서 일을 하는 남정기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라 더구나 마음이 무거웠다.

자기의 불찰로 전도유망한 설계가가 씻을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림성욱은 인민대학습당설계시안이 나왔을 때 제일 잘된것으로 인정하고 1등으로 추천했을뿐아니라 그를 축복해주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형성안의 완성을 위해 아낌없는 조언과 지도를 주었다.

그런데 불당처럼 되였으니… 그토록 암둔해진 머리와 안목을 가지고서야 어찌 시대가 절실히 요구하고 당에서 간절히 바라는 건축혁명을 선두에서 지휘할수 있겠는가? 그때문에 림성욱은 림성욱이대로 요즘 남정기만 못지 않은 번민에 시달리고있었다.

림성욱은 이날 출근하자 학습당형성안의 수정대책을 토의하기 위해 김광성을 찾아갔다. 한데 예상외로 시당비서가 회의에 참가하는 바람에 허탕만치고 되돌아섰다.

두터운 구름장이 무겁게 드리운 하늘에서는 궂은비가 지겹게 내리였다.

승용차가 만수대언덕을 넘어서자 비방울이 점차 굵어지기 시작했다. 물안개가 자욱히 낀 대동강에선 건설용자갈을 퍼내던 준첩선이 작업을 중지하고 우뚝 멎어선 모양이 희미하게 내려다보였다.

준첩선은 뒤설레는 물안개의 장막속에서 거무스레한 자태를 나타냈다 숨겼다하면서 숨박곡질을 하고있었다. 휘뿌리는 비물이 차창에 덮씌워 한결 어두워졌다.

어느덧 승용차는 학생소년궁전앞을 지나 평양제1백화점 가까이로 달리고있었다. 비물에 얼룩진 차창밖으로 전후에 그가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종합청사의 륜곽이 어슴푸레 바라보였다. 그는 갑자기 걸상등받이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장중하면서도 틀이 지게 안겨오던 종합청사가 어쩐지 침침해보였다. 이끼덮인 성벽을 련상시키는 청사의 침침한 외벽은 놀랍게도 그가 설계한 건물같지 않은감이 들었다. 이상한 변화였다. 그는 부지중 량미간을 찌프리였다. 여직껏 만족하게 여겨왔던 자기의 창조물에서 까닭모를 환멸감비슷한 느낌을 받게 된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설계한 이름있는 건축물들은 장쾌한 공간구성과 웅장함, 고전적인 조형미로 하여 마치 영원히 늙을줄 모르고 푸르청청한 그 어떤 생물체처럼 느껴졌었다.

그 거대한 생물체가 돌연히 산 유기체로서의 존재를 끝마치기라도 했단말인가? 지꿎게 내리는 비탓으로 그런 착각이 인것인가?

아니 결코 착각인것 같지 않다. 광장의 량켠에 종합청사가 일떠선지도 어언 30년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수천번이나 자연의 변덕이 있었지만 림성욱은 오늘 아침의 이 시각처럼 자기의 창조물이 불안스럽게 시야에 비쳐든적이 없었다. 림성욱은 눈정기를 모아 자욱한 비발속에 멀어지는 종합청사를 다시금 돌아다보았다. 아니다, 그 건물들은 결코 어느한 모퉁이도 달라진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방금전에는 왜 그렇게도 침침하게 보였을가.

림성욱은 그것이 건축설계가로서 그리고 설계지도일군으로서의 자기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부정과 허무감때문임을 깨달았다.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방금전에 본 종합청사의 거밋거밋한 벽체에서 미끄러져내리던 비물이 망막속에서 번뜩이였다. 그의 흉벽에서도 비물같은것이 흘러내렸다. 무거운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림성욱은 사업소에 들어서기 바쁘게 2층에 있는 자기 사무실로 다급히 올라갔다. 복도에서 두세명의 설계가들이 인사를 했지만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보이며 지나쳐버렸다. 대학습당설계가 실패한 뒤여서 사업소분위기는 침울했다. 그가 자기 사무실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바지가랭이를 장화목에 쑤셔넣은 기사장이 우산을 접어든채 그를 초조히 기다리고있었다. 작년까지 2건축실 실장으로 사업하다가 기사장으로 제발된 그는 수완도 있고 책임성도 높은 일군이였다. 그를 달고 자기 사무실에 들어선 림성욱은 가방을 책상우에 놓고 손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씻었다.

《날씨도 고약하군.》

《대동강물이 형편없이 불었습니다. 이제 하루만 비가 더 오면 유보도가 잠길것 같습니다.》

《나두 보았소. 그런데 무슨 일로 기다렸소?》

《륜환선거리설계에 착수해야질 않겠습니까.》

기사장이 그 말을 꺼내자마자 림성욱의 입에서 대뜸 볼부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괜히 그 안창화라는 사람의 장단에 춤추다간 또 큰일을 치겠소. 학습당설계를 망쳐먹은데다 륜환선거리설계까지 질질 끌면 무슨 낯으로 당앞에 나서겠소? 단꺼번에 많은 철거자들을 내면 곤난하다는 그 사람들의 말만 듣다간 언제 설계를 하게 될지 모르오. 우리두 이런저런 조건을 고려할수 없는 막다른 처지에 이르렀소. 도대체 우리가 한일이 뭐요. 이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앞에서까지 우는 소리를 하게 됐으니 나도 한심한 인간이요.》

림성욱이 여느때없이 어성을 높였다.

《옳습니다. 지금 형편에서 륜환선거리설계까지 늦잡다간 정말 제구실을 못하는 사업소로 되고말것 같습니다.》

기사장은 가뜩이나 초조한 심정인 림성욱을 부채질하고나서 말했다.

《오늘부터 륜환선거리형성안을 본격적으로 내밀겠습니다.》

《그렇게 하오. 120명의 유력한 설계집단이 달라붙은 학습당설계도 꽝꽝 넘어지는데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소. 이번엔 실수가 없어야 하오. 주체사상탑과 개선문의 위치선정에 대해서는 설계가들과 토론해봤소?》

《아직 토론하지 못했습니다.》

림성욱은 육중한 몸을 걸상에서 천천히 일으키며 힘을 주어 말했다.

《개선문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말씀이 계셨으니 모란봉경기장앞에 위치를 잡으면 되는것이고 주체사상탑을 어디에 세우는게 좋겠는지 광범히 토론해가지고 보고드려야겠소. 학습당도 빨리 개작안을 다그쳐야겠소. 남정기동무는 비록 손을 뗐지만 그 동무가 작성했던 안을 너무 허무적으로 대하면 안되오. 그의 설계안에서 취할것은 취해야지.》

《그렇구 말구요.》

기사장이 긍정하고 조심스레 말했다.

《앞으로 학습당설계책임을 누구한테 맡길 생각입니까?》

《글쎄… 나두 잘 모르겠소.》

림성욱은 쓸쓸하게 대답했다. 남정기로 하여 괴롭던 마음이 되살아올라 그는 묵묵히 방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그건 좀더 연구해보고 확정하기로 하구 이젠 돌아가보오.》

림성욱은 가슴속이 더욱 무거워지는것을 느끼며 걸상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기사장이 방에서 나간후에도 한참이나 이마에 손을 짚고있던 그는 남정기를 만나려고 웃층의 1건축실로 천천히 올라갔다.

오늘따라 설계실안은 텅 비고 창문가의 설계탁앞에 남정기만이 혼자 앉아있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뿌옇게 비발이 후려치는 창밖을 바라보고있는 남정기는 림성욱이 방안에 들어온줄도 모른다. 그는 뒤늦게야 림성욱을 띄여보고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눈정기가 풀리고 얼굴은 부석부석했다.

《앉소, 어서 앉으라구.》

림성욱은 손으로 남정기의 어깨를 눌러앉히고 그와 마주앉았다.

《이 방은 왜 텅 비여있소?》

《방금 기사장실에 불려들 갔습니다. 륜환선거리설계포치사업때문이라고 하지만 학습당설계문제도 토의하겠지요.》

《음-》

림성욱은 뭇사람들의 관심속에서 대상책임자로 큰 일을 맡아보던 남정기가 평설계가로 나앉아가지고 손맥을 놓고있는 모습을 보자니 여간 측은하지 않았다.

남정기의 남다른 재능을 발견하고 누구보다 기뻐하신분은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건축가들이 만경대에 앉힐 건물이라고 하면 늘쌍 위엄있게만 설계해왔는데 젊은 설계가가 천석식당을 주위의 수려한 자연풍치에 어울리게 아주 장쾌하고 이채롭게 일떠세웠다고 높은 평가를 주시였다.

그때부터 남정기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남동무.》

림성욱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한테 의견이 많을테지.》

《지금 저한테 무슨 의견이 있겠습니까.》

남정기의 충혈된 눈에 차츰 번지르르하게 물기가 번져갔다.

《아니요. 동무보다 나한테 더 큰 책임이 있소. 잘못된것을 내가 제때에 발견하고 바로잡아주었더라면 그런 엄청난 일이 생겨나지 않았을게 아니요. 아마도 동무에 대한 사랑에 눈이 어두워졌던가 보오. 나는 동무를 도와주면서 요구성을 높이지 못했소. 내 안목이 비뚤어지다나니 형성안이 괜찮게 된것같아 보였소. 그래서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가르치심을 받아보자구 했지. 결국 내 잘못으로 과오를 범하게 만들었소. 나야말로 우선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요.》

《소장동지,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제가 당의 건축미학사상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기때문에 일을 망쳤지요. 이제부터는 건방지게 자기 개성만 주장하면서 남의 의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던 못된 버릇을 고치겠습니다. 하긴 뒤늦은 후회입니다.… 》

남정기의 목소리는 저으기 떨리였다. 잠시 무거운 정적이 두 사람의 가슴을 짓눌렀다. 림성욱은 후 한숨을 쉬고나서 다시 입을 열었다.

《뒤늦은 후회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요? 대가 세고 자기의 개성을 살리겠다는 열정이 없다면 그게 무슨 남정기겠소. 동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남정기는 없어지고 마오. 절대로 그렇게 되여서는 안되오. 난 우리가 장차 무슨 일을 하든지 당정책에 맞는가 하는것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심사숙고해서 일을 하자는 의미에서 한 말이요. 그 당적인 안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것을 나나 동무가 이번에 더욱 통절히 깨닫게 된게 아닌가.… 》

흐릿하게 고뇌의 빛이 가셔지지 않던 남정기의 눈에 한점의 희망의 불꽃이 반짝였다.

《희망을 잃지 말라구. 주저앉으면 안되네.》

《소장동지, 절 아무데라두 보내주면 다시… 》

남정기가 애원이 어린 눈길로 림성욱을 쳐다보았다.

《그것두 말이라구 하오? 가긴 어데로? 실천을 통해 과오를 씻고 다시 일어서야지. 속에 없는 말은 하지두 마오. 엇드레질을 하는걸 보니 아직두 멀었소. 멀었어.》

림성욱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흥분을 눅잦히려는듯 방안을 거닐다가 창문곁에 멈춰섰다.

《남동무, 새로 설계하게 되는 륜환선거리에 붙으면 어떻겠소? 차라리 그쪽에 돌아앉아 새로 시작하는 일에 손을 대는게 좋지 않겠소? 글씨가 잘 안될 때는 새 종이에 새로 글을 쓰는게 낫다는 말도 있잖소?》

남정기는 대답을 못하고 묵묵히 방바닥만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소장동지, 전 이제 잠간 역에 나갔다 오겠습니다. 그동안 생각해보고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역엔 왜?》

《오늘 강문혁동무의 동생이 군대로 떠나갑니다.》

림성욱은 《참, 그렇지.》 하고 남정기를 놀랍게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무슨 마음의 여유가 있어 문혁의 동생을 바래워주려고 하는가 싶었다. 바로 이것이 다른 설계가들과 구별되는 남정기의 장점인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오늘은 그가 여간 대견스럽게 구별되지 않았다.

《자넨 여전하군… 나도 역으로 나가겠네. 같이 가자구. 어제 문일이가 우리 집에 인사하러 왔더구만. 우리 애녀석보다 학년은 아래여도 같은 축구소조원이였으니까. 그래 몇시차에 떠난다오?》

《열시차라구 합니다.》

성욱이 팔목시계를 보았다. 문득 역으로 나갔을 안해생각이 떠올랐다.

안해도 역시 아침차로 떠난다고 했는데 지금쯤은 비를 맞으며 역홈에 서있을런지 모른다.

《어서 떠나자구. 늦겠소.》

림성욱은 얼른 송수화기를 들고 승용차운전사한테 출발준비를 시켰다.

남정기는 뜻밖이라는듯 얼마간 어리둥절해하는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방에서 나갔다.

이윽고 림성욱은 남정기와 나란히 승용차안에 앉아 평양역을 향해 달리였다. 돌이켜보면 언제부터였는지 그는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이 없이 그저 일속에만 파묻혀사는 사람으로 되였다. 사업소 소장이 된후에는 행정적이고 실무적인것에 포로되여 더욱 사람들과 소원해지면서 인간적으로 랭담해지지 않았던가.…

그들이 평양역에 이르렀을 때에는 신입병사들이 이미 승차를 시작하고있었다. 보슬비가 내리고있었지만 역구내는 입대하는 청년들을 전송하려고 나온 가족들과 학생들이 뒤섞이여 법석 들끓고있었다. 림성욱과 남정기는 붐비는 사람들속에서 새 군복을 입은 문일이와 배웅나온 문혁이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를 가까스로 찾아냈다.

《이 궂은날에 소장선생님까지 나오시다니… 정말 고맙습니다.》

강로인은 몹시 감복하여 림성욱에게 반백의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아들이 이렇게 름름하게 자라서 군대에 나가게 되여 얼마나 대견하시겠습니까.》

림성욱은 문일의 실팍한 잔등을 어루쓸며 말했다. 늙은 구두수리공은 대뜸 눈굽이 젖은듯 말을 떠듬거렸다.

《당의… 은덕입지요.… 우리 당이 아니면 어느 누가 글쎄… 구두쟁이네 자식에게 대학공부도 시켜주구 나라를 지키는 영광스러운 초소에 세워주겠습니까. 정말 당은 어머니이지요.》

로인은 소매로 눈굽을 닦고나서 투박한 손으로 문일의 구겨진 군복을 쓸어만지였다.

《아버지, 됐어요.》

문일은 쑥스러운지 옆으로 비켜섰다.

《녀석두… 가만 섰거라. 벌써 바지주름이랑 이게 뭐냐.》

신입병사들에게 어서 렬차에 오르라고 독촉하는 구령소리들이 울렸다. 작별을 앞둔 문일이가 남긴 당부는 좀 류다른것이였다.

《소장선생님,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남선생님께도.》

《뭔데?》

림성욱이 물었다.

《우리 집에 형수가 있으면 전 마음놓고 가겠어요. 우리 아버지도 덜 고생하고 또 형도 새로 맡은 중요한 사업을 잘하게 될게 아니예요.》

주부가 없이 남성 셋만 살아온 집안이였던것만큼 문일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림성욱은 마음속이 따뜻해져 절로 웃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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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님의 댓글

강산 작성일

(위에서 계속)

림성욱은 마음속이 따뜻해져 절로 웃음이 났다.

《허허 녀석두, 네가 진짜 어른이 다됐구나. 속에 구렝이가 들어앉은걸보니. 그건 걱정말구 가서 군사복무나 잘해라.》

림성욱의 대답이였다. 잠시후 차례로 아버지와 형의 품에 안겼다 떨어진 문일은 림성욱과 남정기에게 《꼭 부탁합니다.》 하고 소리쳤다. 이어 렬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꽃물결의 설레임과 더욱더 높아가는 소음속에서 《소장선생님, 남선생님, 안녕히 계십시오!》 하는 문일이의 웨침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렬차가 멀리 사라지고 련이어 다른 렬차의 개표가 시작되였을 때 림성욱은 문득 안해의 목소리를 들었다.

《여보!》

량손에 려행용쟈크가방을 하나씩 든 안해가 기뻐하며 급히 다가왔다.

《아니? 당신이구만.》

림성욱이도 안해를 혼자 떠나보내며 가슴이 알찌근하던차에 마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온지 오랬어요?》

《좀전에.》

림성욱을 바라보는 안해의 눈길은 (역으로 나올것 같지 못하다더니…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따뜻이 속삭이는듯 했다. 림성욱은 슬그머니 눈길을 돌리였다. 문혁의 동생만이 아니라 안해를 바래주기 위해서 이 비내리는 역두에 서있었다면 남편으로서, 세대주로서 얼마나 떳떳하였을것인가.

《여보, 옷이 젖겠소. 가방을 인주고 어서 차에 오르오.》

림성욱은 어망결에 안해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됐어요. 바쁘신데…》

안해가 사양하며 한걸음 물러섰다.

《내 걱정말고 들어가요.》

《음… 그럼 숙모님한테랑 내가 갈만 한 처지가 못된다는걸 잘 이야기해주오.》

《알겠어요.》

《조심해 다녀오우.》

그 순간 림성욱은 가슴속이 짜릿해났다. 안해의 머리칼에 성깃성깃 섞여있는 흰빛을 본것이였다. 안해의 머리에도 이렇게 서리가 내렸는가? 이런 안해를 오늘도 혼자 머나먼 고향으로 떠나보내다니… 림성욱은 못볼것을 본 사람처럼 얼른 돌아서 개찰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몇발자욱 옮기지 못하고 되돌아섰다. 출발을 알리는 렬차의 기적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의 눈앞으로 반쯤 열려진 차창들이 어느새 서서히 흘러가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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