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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10. 백운산 용기동골에 얽힌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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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214회 작성일 20-11-20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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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10

백운산 용기동골에 얽힌 사연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951년 12월1일 백운산의 용개산 용기동골에서 적들의 대대적인 동기공세인 제 1차공세를 15일간 겪었다.

당시 1951년 11월 28일 유치내산의 가마태고지 건너편에 제 3지구당 아지트를 쓰고 있을 때 리방휴 위원장의 추천을 받고 광양백운산에 개설된 도민청학원에 들어가 공부하기 위해서 정들었던 유치내산에서 어렵게 투쟁하고 있는 모든 동지들의 곁을 떠났었다.

백운산에 가는 통로는 화순 말봉산 모후산 백아산 통명산 또는 봉두산 등을 거쳐 백운산으로 들어가는 연락루트였었다. 그러나 막상 모후산에 도착해 보니 지리산으로 파송했던 동지들 100여명이 적들의 루트 차단으로 멈쳐 있었다 당시 모후산에는 남태준 동지 총사 기동연대인 1연대가 주둔하고 있으면서 며칠씩 쳐저 있다 보니 가지고 온 식량이 다 떨어져 무장대의 보호하에 보급문제를 해결하면서 백운산이나 지리산 통로가 뚫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단신으로 연락부원 2동지와 같이 행동을 취하고 있는데 순천 조개산 통로가 뚫렸다는 희소식을 접하고 100여명의 파송부대들과 함께 보성강을 무사히 건너 조개산에 무사히 도착해서 하루 산상대기하고 날이 어두어지자 백운산을 향해 달리다시피하면서 순천 송광사 앞을 지날 때 송광사는 불타고 있었다. 용개산 가기 전 갓거리 산에 도착했다.

갓거리산은 마침 적들이 주둔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백운산은 적들의 집중 공세 속에 있었다. 우리일행들은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밤이 되자 용기동골로 들어왔다. 들어 온 즉시 도당부에 연락을 띄웠다. 도당부의 지시는 지금 한참 적들의 공세 중이니 일차 공세가 끝나면 들어오라는 전갈이었다.

일차공세는 보름간이었다. 당시 적들은 공세를 일정기간 취하면 다시 내려가서 1주간 준비끝에 다시 올라와 발악적인 공세를 취하곤 했었다.

15일간 적들의 공세기간에 100여명 중 30여명만 살아남아 백운산 옥용골의 88도당 아지트에 도착했다.

그럼 70여명은 어떻게 해 전사 한 것일까.

우리일행은 밤에 갓거리 산에서 용기동골로 무사히 들어왔다,

백운산 능선에는 적들이 주둔해 여기저기 불빛이 요란하게 비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용기동골 골짝에 들어와 동지들이 썼던 아지트 위에 등을 붙이고 자기도 했으며 기동연대인 총사 7연대도 만나 보급사업을 해서 며칠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매일 같이 능선에서 골짝이로 수색작전을 펼치는 데는 더구나 비무장성원들이라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눈이 많이 쌓여 잠복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그리하여 아침 새벽이면 연락부 동지는 어느 골짝으로 가서 잠복 산상 대기하다가 밤이면 정해준 아지트로 집결하라고 하고서 자기들은 어디론가 사라젔다가 밤이면 선장소에 나타나 인원을 점검하곤 했다. 그런데 매일 수색작전에 몇 명이 죽고 몇 명이 생포 당하곤 한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같이 반복되니 마지막에는 전의를 상실하고 무장부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생소한 지형지세를 몰라 당황하게 되고 매일 죽고 생포당하여 인원들은 줄어들기를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날이 샐 새벽에도 산상대기하라고 권고해도 듣지 않고 아지트에 남아 있다가 저녁에 돌아와 보면 아지트에 그대로 있다 총에 맞아 죽음을 당한 시신들이 불태워져 마치 개 끌림당한 것처럼 된 참상을 보고도 매일 그대로 있다 똑같은 참상을 당하기도 했다. 산상 대기 나가면서 나가자고 하면 동무들이나 나가서 살아남으라고 하면서 우리는 여기남아서 어지트방바닥에 등부치고 있다가 죽겠다고 하면서 참상을 당하기도 했다.

식량은 다 떨어졌는데 밤에 물은 끓어 먹을 수는 있었다. 적들은 야간기습을 하지 않아 한번도 당한 적이 없었다. 반해방구를 쓰고 있을 때 디딜방아를 놓고 벼 보리 등을 찧었던 방앗간 부근에는 매제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눈을 해치고 매제를 한 웅큼씩 불어서 싸래기 몇 알씩 나오는 것을 여렷이 합동해 한웅큼되면 알미늄 솥에 물을 붓고 끓여서 한모금씩 나누어 먹으면서 매일 공세를 겪고 있었다.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더 이상 먹이감이 없어 눈과 물로 허기를 채우면서 일차공세가 끝나고 한숨 돌릴 시간을 갖게 된 후 도당아지트로 갈 동지들을 점검하니 30여명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동지들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며칠동안 먹지못해 기운이 다 빠져서 꼿꼿이 서서 걸을 수도 없었다. 용기동 골짝에서 도슬봉을 오르는데 기어서 나무나 가지를 잡고 기어올랐다. 내려가는 데는 다리힘이 없어 꺼꾸러지면서 논실 당시 연병장까지 갔었다 그리하여 목적지인 88도당부 아지트에 도착해 간부부트에서 심사받고 88보초선 넘어 백암골의 민청학원에 도착해 한숨을 돌리었다.

그럼 필자는 어떻게 일차 공세를 무사히 겪었던 것인가

적들의 공세 속에 들어 간 우리 일행은 모두 비무장 각 기관단체 성원들이었다. 지형지세도 잘 몰라 어데 잠복하는 것이 적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가를 분간할 수 없었다.

단순히 연락부원 2명이 통솔할 뿐이었다. 이 때 분위기를 살펴보니 모두 어느 쪽에 가서 분산 잠복해 있다가 살아남은 동지들은 저녁에 어느 아지트에 모이라는 것 뿐이었다.

당시 연락부원 동지들은 칼빈 총을 매고 있었다. 자기들만 말 한마디 던지고 사라지는 무책임한 행동을 며칠 지켜보고서 어느 날 아침 분산잠복을 하라고 말 한마디 하고 쏜살 같이 달려가는 뒤를 따라 나도 쏜살같이 연락부원 뒤를 따라가니 일행 중 몇몇 사람이 따라 붙었다. 그 때 연락부원 동지는 난색을 표하면서 말을 듣지 않고 뒤따라오면 사살하겠다고 위협을 하니 모두가 위협을 느낀 나머지 떨어지고 말았었다.

그러나 나는 쏠테면 쏘아라 하면서 동지들만 살기위해 우리 모두는 죽어도 좋다는 것이냐고 항의 하면서 악착같이 따라붙으니 위협에 다 떨어지고 나 혼자만 남게되자 그때는 빨리 따라오라고 해서 매일 연락부원과 같이 지형지세를 잘 선택해서 무사히 일차공세를 마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적들의 공세속에서 그래도 살아남은 동지들은 그 배고픔 속에서도 투쟁의 원칙을 올곧게 지켰기에 살아남았고, 전의를 상실하고 자포자기한 사람들은 비참하게 죽어간 것을 생각할 때, 혁명가에게 혁명적인 사상 확립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변함이 없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참고@@ 순천 용계산은 조동만 당시 전남도당 정치공작대 대장이었던 동만동지 (영웅칭호받음)이름을 따서 동만산이라 불렀으며 용기동골은 백운산지구 사령관인었던 남태준(영웅칭호받음)부대가 최후까지 싸운 지역이라 남태준골이라 명명했음을 참고하세요

2020. 필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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