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3. 빨찌산 투쟁시기 옷과 신발은 어떻게 해결했는가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3. 빨찌산 투쟁시기 옷과 신발은 어떻게 해결했는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181회 작성일 21-02-26 08:13

본문

[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33.

빨찌산 투쟁시기 옷과 신발은 어떻게 해결했는가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입산을 전후하여 나의 경우를 말한다면 옷과 신발은 아주 험했다.

가난 때문에 새옷은 1950년 중학 입학 때까지는 남들이 입는 새옷 한 벌을 입어본 적이없다. 그만큼 옷은 험난했다. 나는 큰형님이 입은 옷을 형수님이 줄여서 바느질 해 놓은 옷을 여름과 겨울 두 번에 걸쳐 입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전쟁 때 나의 누이동생이 13세와 11세였는데 팬티도 없이 검은 통치마를 일년 12개월 입고 살았으니 말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이나 했겠는가?

중학교 입학 때 무명베로 만든 남방샤스에 검은 바지를 입은 것이 난생 처음 입어보는 새옷이었다. 신발은 짚신을 삼아서 신고 일본말로 와라지를 삼아서 신든가 맨발로 10리길을 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중학교 들어가서야 고무신 한컬레를 신고 다니다가 그대로 중학생 복장에 고무신을 신고 입산했다.

1950년 11월까지 무명베 남방샤스를 그대로 입었고 신발은 짚신을 신고 한 컬레는 허리에 차고 다녔으며 적들의 침공 때 산상대기할 때는 짚토매를 짊어지고 있다가 숲속에서 짚신을 삼기도 해서 항상 여분의 짚신을 소지하고 있었다.

눈 속에서 걷는 것은 좋은데 눈이 녹고 질퍽질퍽할 때는 신은 버선이 다 젖어 곤란을 느끼기도 했다. 이는 입산초기의 고향 장한산 태청산 불갑산으로 이동하였던 12월 초순까지다.

내의도 없이 반소매에 팬티도 없이 검은 무명베 바지 하나를 입고 산생활을 하면서도 춥기는 하였지만 춥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산생활을 했다.

불갑산에 있을 때 12월에 가서야 긴 소매 하나 입었을 뿐이다.

어려서부터 고무신 창만 있으면 윗 부분은 무명베로 농구화를 만들어 신는데 나 스스로 해결했기 때문에 바느질은 잘한 폭이었다. 그래서 입산해서도 신발 꿰매는 큰바늘 하나와 실은 항상 필수품으로 지니고 다녔다.

1951년부터는 적들의 보급창고를 기습하던가 보급을 해서 적들의 복장과 같은 옷을 입고 투쟁했다. 나는 1954년 체포 될 때까지 적군복장과 똑 같이 입고 투쟁했다.

때로는 지하족을 신어도 한 달이면 다 떨어져 수선하지 않고는 신을 수도 입을 수도 없었다. 백운산 진상골 리봉산 아지트에 있을 때도 신발이 다 떨어져서 고무신 창이나 지하족 창을 보급해서 무명베로 눈이 들어가지 않게 농구화를 만들어 신고 투쟁했다. 항상 부대의 선두에서 길을 뚫고 가시밭길을 헤쳐가기 때문에 무릎부분이 갈래갈래 찢어져서 산상대기 할 때나 행군 중 잠깐 쉴 때 바느질을 해서 꿰매곤 했다.

1953년 백운산 진상골 잣나무아지트인 리봉삼부대트 진지에 있을 때는 특히 겨울 옷은 메리야스 한 벌에 전투복 한겹을 입고 겨울을 나기도 했다. 다른 동지들은 두터운 솜잠바 까지 입고 있었으나 나는 항상 움직이는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옷이 두터우면 몸동작의 민첩성을 보장하는데 장애요소가 되어 여름이나 겨울 의복이 같았다.

한군데 오래 있으면 추운감을 많이 느낀다. 그래도 그 때는 10대 말이었기 때문에 혹독하게 추위를 느끼지는 않았다.

입산후 반해방구를 쓰고 있을 때는 후방과에 재봉틀 돌리는 동무들도 있어 옷 수선이나 전투복을 무명베에 물감을 들여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그때는 불타버린 마을 집터위에 움막을 치고 생활 할 때나 산골짝에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쓸 때였었다. 이것도 적들의 침공이 잦을 때였기에 사용한 재봉틀을 비장하고 또 꺼내 사용하는 것도 잠시였다. 그래서 적들의 침공에 따라 점점 마을에서 산속으로 들어가 투쟁하게 되었고 결국 바느질이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당시엔 투쟁하는 무장부대나 단체성원들의 입은 옷을 보고 잘 싸우고 보급도 원활하게 하고 있구나를 평하기도 했다.

우리 전남부대는 1953년 여름부터는 적의 복장과 똑 같은 옷을 입고 계급장도 달고 있어 소조투쟁 나갈 때는 적으로 가장하는데 손색이 없었다.

요즈음 유튜브에 나오는 남부군 영상을 보면 꼭 거지보다 더 남루한 옷을 입고 투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장을 해도 너무 지나치게 과장한 장면임을 확인했다. 남부군 영화는 소위 반공영화나 다름없다.

적들과 전투나 포위속에서 후퇴할 때 가시 덤불에 걸리어 무릎 부위가 많이 찢어지게 되거나 윗옷이 온통 살이 나올 정도로 찢어지곤 했다.  그럴 때면 휴식 때 바느실로 꿰매어 입지 그대로 헐렁벌렁 생활하는 모습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독자들은 알기 바란다.

양말은 한 컬레 신으면 거의 일년 열두 달을 신는다. 물에 언제 비누칠 해서 세탁할 시간도 갖지 못한다. 그래서 발싸개라고 하는 베조각을 발등에 감고 신을 신고 다니다 여유의 시간이 있을 때 풀어서 물에 적시었다가 말려 신는 데 여간 편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년 열두달 개울물에 들어가 멱 한번 감아본 적이 없다. 얼굴 세수는 별로 한 적이 없으나 어쩌다 한 번씩 맹물로 세수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생활해도 불편한 감을 느껴 본적이 없었다.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침략한 미제를 비롯한 16개 침략군들을 물리치는데 자나깨나 투쟁하는 생각뿐이었기 때문이었다.

2021. 2월 24일 필자 올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