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비약의 나래 제56회 > 통일게시판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통일게시판

장편소설 비약의 나래 제56회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6,759회 작성일 21-05-19 19:22

본문

20210324165530_2ce3cb6f0e35973d34b07aae3052648b_o4u8.jpg

제 6 장

5

 

한시간나마 달려온 승용차가 마침내 금속공업부에 이르렀다. 차에서 내린 강서원은 유정한 눈길로 청사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주일만에 9월제련소에서 돌아오는길이였다. 그동안 청사의 모습이 달라진듯싶었다. 봄철을 맞으며 건물의 외벽을 다시 칠하였고 울타리를 뒤덮은 담쟁이도 푸른빛을 띠였다. 떠날 때에는 담쟁이잎새들이 방금 망울을 터치고 돋아나는가싶더니 어느새 푸르러졌다.

구내를 둘러보던 그는 갑자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저게 누구인가? 틀진 체구에 봄철회색양복을 입고 청사주변을 돌아보는듯 한 유연한 걸음으로 차고쪽을 향해가는 사람의 뒤모습이 시야에 박혀왔다. 눈에 익은 모습이였다. 그 사람이 발에 걸채이는 큼직한 나무토막을 성큼 들어 차고옆에 세울 때 얼굴을 알아보았다. 황석태였다.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는가? 혹시 과학연구용금속재료를 해결하려고 온것이 아닐가? 필경 그럴것이다. 오래동안 9월제련소 당비서로 있었던 그는 금속공업부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다는것을 알게 된 과학원사람들이 또다시 그에게 자재를 부탁했을것이다.

강서원은 잠시 제자리에 굳어진채 황석태를 두고 생각했다. 이번에 9월제련소에 내려가보니 아까운 일군이 철직되여갔다는 생각이 새삼스러웠다. 제련소의 생산실태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원료와 자재, 기술설비와 생산조직의 여러 고리들에 걸린 문제들이 많았다. 그 매듭들을 풀기 위해 제련소의 행정기술일군들과 여러차례 의논을 했었다. 모임의 휴식시간에 적지 않은 일군들이 안타까이 말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황석태가 있을 때에는 계획을 못해본 일이 없다고… 강서원은 엄연한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한때는 독단을 부리며 행정을 대행한다고 못마땅하게 여겨왔지만 황석태가 없는 오늘의 제련소를 보고는 생각이 달라졌다. 작풍상의 결함이 있더라도 그는 역시 충실하고 능력있는 일군이였다.

강서원은 지난해 가을 마지막으로 그와 격렬하게 맞섰던 사실도 상기했다. 그러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화차에 실어놓은 연구용자재를 당장 부리우라고 호통을 뽑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후부터 나의 가슴속에서 얼마나 심각한 자기반성의 내부투쟁이 벌어졌는지를 그가 짐작하고있을가. 모를것이다. 다시 만난 이 기회를 빌어 그와 허심히 모든 사실을 이야기하고싶었다.

《황동무!》

목이 잠기여서 부름소리가 입밖으로 가늘게 새여나왔다. 그의 가슴에 원한이 사무쳐있을것이라는 생각이 치밀었기때문이다. 다시 찾을 용기를 잃고 그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차고옆을 돌아서던 그가 이쪽을 알아보았다.

《출장을 갔다더니 언제 돌아왔습니까?》

손을 털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황석태는 예상밖으로 반기는 낯빛이였다. 역시 그는 지난날의 다툼을 앙심으로 가슴에 꿍져드는 그런 옹졸한 사나이가 아니였다.

《방금 돌아오는길입니다.》

강서원은 굳어졌던 표정을 풀며 큼직한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웃는 얼굴로 재빨리 계속했다.

《이제 부장동무에게 사업보고를 하고 나올테니 반시간후에 내 방으로 오시오. 연구용자재때문에 왔을텐데 내 다 해결해주겠습니다. 동무에게 하고싶은 얘기도 많습니다.》

강서원은 빙긋이 웃고있는 황석태를 그 자리에 남겨두고 부장실로 급히 들어갔다. 출장기간의 사업보고를 구체적으로 듣고난 부장은 수고를 하였다고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부부장동무가 출장간 사이에 당비서동무가 새로 임명되여왔습니다. 비서동무를 찾아가서 인사를 하시오.》

금속공업부 당비서는 한달전에 중앙당으로 소환되여가고 그 자리가 비여있었다.

《어데 있던 사람이 새로 왔습니까.》

《과학지구건설 돌격대원으로 있던 동무요. 참, 동무도 잘 알겠구만. 그전에는 9월제련소 당비서로 있던 황석태동무요.》

강서원은 무척 놀라며 부지중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석태는 이미 마당에 없었다. 그리고보니 아까 그는 새로 부임되여와서 청사를 돌아보던 참이였던 모양이다. 무엇때문인지 돌격대원으로 있던 그가 중앙기관 당비서로 되였다는 사실이 엄청난 도약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응당 그럴수 있다고 여겨졌다. 부장실을 나와 당비서실로 걸음을 옮기는 강서원은 생각이 깊었다. 지난날에 그와 대결했던 일들이 또다시 되새겨졌다. 물론 황석태는 과거에 대한 개인적인 앙갚음을 하려고 하지는 않을것이다. 문제는 견해의 대립이 첨예했던 그 계기들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나의 그릇된 립장과 관점이 여지없이 드러났다는데 있다. 개인적인 사사로운 감정의 마찰이 아니라 사상과 견해의 충돌이였다. 앞으로 그가 나를 어떻게 대할것인가? 나의 그릇된 사상관점을 잘 알고있는 당비서를 만난것이 앞으로의 생활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올것인가? 황석태가 만일 돌격대원으로 그냥 남아있다면 자연스럽게 회포를 나눌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당비서로 된 그앞에서 어떻게 처신을 하여야 할지 얼른 결심이 서지 않았다. 잠시 문밖에서 망설이던 끝에 조심스레 당비서실의 출입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방안에서 울리는 그 목소리가 전에없이 위엄있게 들리는듯싶었다. 그는 숨을 몰아쉬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황석태의 표정을 조심히 살피며 다가갔다. 황석태는 빙긋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대로 내가 부부장동무의 방으로 가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찾아왔습니까?》

그는 헌헌한 낯빛으로 말을 건늬며 손짓으로 의자를 권하였다. 문밖에서 그의 목소리를 위엄있게 느낀것은 자기의 마음이 긴장했던 탓이라는것을 깨달았다. 강서원은 앞상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앉았다.

《마당에서는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미안하게 되였습니다.》

《금속공업부 당비서로 일하게 된것은 나로서도 전혀 뜻밖의 일입니다.》

어느새 웃음을 거둔 황석태의 얼굴에 숙연한 빛이 떠올랐다.

《함께 일하게 되여 반갑습니다.》

그렇게 말한 강서원은 황석태의 서느러운 눈빛이 똑바로 겨누어오는것을 느꼈다. 진정인가를 가늠해보는듯싶었다. 한순간의 침묵끝에 황석태는 진지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부부장동무도 잘 아다싶이 나는 작풍상의 결함도 많고 과학기술에도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엄중한 과오를 저질렀댔습니다. 과거에도 나를 비판해주었지만 앞으로도 잘 도와주기 바랍니다.》

지난날의 관계를 상기시키며 그가 하는 이 부탁을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비양인가 아니면 진정인가? 지난날에 옳은 립장에서 그를 비판하였다면 아무런 가책도 없이 진정으로 받아들일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돌이켜보면 황석태와 대결했던 거의 모든 계기들에서 내가 더 심한 사상적병집을 드러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티탄합금의 압착가공설비와 관련하여 그것을 완강히 부정하던 때의 일이 더욱 그러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 설비의 제작이 참담한 실패로 끝났으니 나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할수 있다. 그 계획을 끝내 승인하지 않았던 나는 후에 금속공업부에서 찬양을 받았다. 그러나 압착가공설비를 완강히 부정해나섰던것은 양영복박사와 같이 정당한 립장에서 출발한것이 아니였다. 그때 황석태와 나사이에 누가 더 옳았는가? 황석태는 그래도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주신 과업을 하루빨리 앞당겨 수행하려고 한몸바쳐나섰다. 고도기술개발에 대한 우리 당의 뜻을 미처 몰랐으며 과학기술문제에 직권을 개입한것과 같은 심중한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주관적의도는 부인할수 없이 옳았다. 그러나 나는 본질적으로 과학기술을 홀시하는 사상과 보신적인 립장에 사로잡혀있었다.

《비서동무, 과거가 부끄럽습니다.》

깊은 회오에 잠겼던 강서원은 붉어지는 얼굴을 들며 간신히 미소를 지어보이였다.

《부부장동무는 내 부탁을 달리 리해하는것 같구만. 마당에서 만났을 때 부부장동무는 내가 당비서로 왔다는것을 모르고 과학연구용자재를 손수 해결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순간에 나는 그동안 부부장동무도 자기를 심각히 뉘우쳐왔다는것을 알았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만일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인사나 나누었을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동무와 솔직한 심정을 나누고싶습니다. 우리 다같이 새로운 출발을 하자는 의미에서 동무가 진심으로 도와줄것을 바라는것입니다.》

강서원은 자기의 우려와 경계심이 지나친것이라는것을 깨달았다. 마음의 안정을 느낀 그는 간격없이 자기 가슴을 헤쳐보이고싶었다.

《아닌게아니라 나는 그동안 자신을 랭철히 돌이켜보았습니다. 9월제련소 상하차장에서 내가 당황해하던 일이 기억납니까?》

《기억납니다.》

황석태는 석홍범부부의 말을 듣고 목대가 꺾인듯 고개를 떨구며 물러가던 강서원의 모습이 얼핏 떠올랐다.

《초고압유압프레스를 개발한 사람이 바로 내 사위입니다.》

《그렇습니까?》

황석태는 깜짝 놀라며 강서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과학원을 다녀가시면서 사위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이야기를 들은 때부터 나는 지난날을 돌이켜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미전에 들었댔습니다.》하고 강서원은 사위의 지향을 못마땅해하던 일들을 솔직히 말했다. 사위가 초고압유압프레스개발에 성공을 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는 더욱 자책의 모대김에 시달려왔다. 자식들앞에서 부모의 자격을 상실하였다는 수치감이 수시로 골수에 사무쳐왔다. 그는 보다 절절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누구만 못지 않게 대중앞에서 과학기술발전의 중요성을 부르짖군 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천행동에서는 부끄럽게 처신을 했습니다. 나는 해임되였던 당비서동무와 자기를 대비해보았습니다. 진작 철직되여야 할 사람은 나같은 사람들입니다. 비서동무의 과오는 로출되여 두드러졌기때문에 문제시되였지만 나의 사상적병집은 은페되여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과학발전에 미친 영향은 몇배로 더 크다고 할수 있습니다.》

강서원은 괴로운 마음을 헤쳐보이고나니 어느 정도 가슴이 후련해지는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진중한 낯빛으로 듣고있던 황석태는 푹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방안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는 출입문곁에 있는 전등스위치를 누르고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앉았다.

《부부장동무.》

저력있는 부름소리에 강서원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마주보는 황석태의 눈에 절절한 빛이 흘렀다.

《나야말로 당과 국가앞에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입니까.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그저께 저를 이리로 보내시면서 감회깊이 말씀하시였습니다. 9월제련소에 내려오셔서 저를 준절히 비판하시고 돌아가신 날 저녁에 잠 못드시고 〈동지애의 노래〉를 마음속으로 부르며 아픈 가슴을 달래였다고 하셨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혁명앞에 다진 맹세를 제가 잊지 않기를 바라시면서 말입니다. 앞으로의 사업과 관련된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고 헤여지실 때 그이께서는 그 노래가 담긴 록음카세트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황석태는 북받쳐오르는 자기의 감정을 걷잡지 못하며 느닷없이 강서원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부부장동무, 우리가 어떤분의 품속에서 일하고있는가를 한시도 잊지 맙시다. 한번 그이의 품에 안긴 이상에는 설사 사업과 생활에서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우리의 운명이 달리될수 없습니다.》

강서원은 황석태의 감정이 그대로 자기에게로 파도쳐오는것을 느끼였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전화종이 울리였다.

황석태는 어느새 젖어든 눈시울을 닦고 송수화기를 들었다.

《금속공업부 당비서실입니다.》

무심히 응대를 하던 그는 튕겨나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몸가짐을 가다듬었다.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서 걸어오신 전화였다.

《황동무, 인젠 새 직무에 자리를 잡았습니까?》

《아직 실태를 료해하는중입니다.》

《지금 사업인계를 받던중입니까?》

황석태는 강서원쪽에 피끗 시선을 주고나서 정중히 대답을 올리였다.

《강서원부부장동무와 이야기를 나누던중입니다.》

《한가지 기쁜 소식을 알려주겠습니다.》

김정일동지의 흥분된 목소리가 울리여왔다. 황석태는 수화기를 바싹 귀에 눌렀다.

《우리의 초고압유압프레스가 라이쁘찌히국제시장에서 금상을 받았습니다! 우리 과학자들이 유압공학분야에서 세계를 따라앞섰습니다!》

《그렇습니까?》

황석태는 기쁨에 넘쳐 가볍게 부르짖었다.

《방금 과학원동무들에게 그 소식을 알렸는데 동무도 그 프레스제작에 필요한 금속자재를 해결해주느라고 수고가 많았다는 생각이 나서 전화를 겁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기쁜 소식을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황석태는 목메여 말씀드리며 생각했다. 그이께서 초고압유압프레스제작에 필요한 유색금속자재를 보장해주었다는 하찮은 사실만을 념두에 두고 친히 전화를 걸어주신것이 결코 아니다. 보다는 깊은 뜻이 있다. 새로운 발명으로 세계를 경탄시킨 라이쁘찌히소식이 누구보다도 나에게 사상적으로 큰 자극을 주리라고 생각하셨을것이다.

수화기에서 그이의 친근하신 음성이 다시 울리여왔다.

《황동무, 오늘은 유압공학분야에서 세계를 경탄시켰다면 래일은 티탄합금가공분야에서 세계를 압도해야 합니다. 나는 금속공업부가 양영복박사네 연구사업을 잘 도와주기 바랍니다. 우리는 금속가공분야에서 초소성가공법을 남먼저 실현해야 합니다.》

《말씀의 뜻을 명심하겠습니다!》

황석태는 힘주어 대답을 올리였다. 신심과 의욕이 가슴속에 강렬히 솟아오르는것을 의식하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랬을 때 경건한 몸가짐으로 서있는 강서원이 시야에 안겨왔다. 한순간 망각했던 그의 존재를 비로소 발견한듯싶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알고보니 석홍범동무가 우리 강서원부부장의 사위입니다.》

《참 그렇지.》

그이께서는 언젠가 들으신 기억을 되살리는듯 하더니 그를 바꾸어달라고 하시였다.

황석태는 강서원에게 송수화기를 넘겨주었다. 강서원은 어리둥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조심스레 두손으로 송수화기를 받았다. 걷잡을수없이 손이 떨리였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 강서원이 전화받습니다.》

목소리도 떨렸다.

《동무는 참으로 훌륭한 사위를 두었습니다! 석홍범동무는 이번에 김일성민족의 과학적지혜를 세상에 유감없이 과시했습니다. 지금까지 라이쁘찌히국제시장에서 기계제품은 선진공업국들에서만 입선시킬수 있는것으로 공인되여왔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초고압유압프레스가 최우수제품으로 평가되였단 말입니다. 이것은 온 나라의 경사이고 부부장동무네 가정의 경사이기도 합니다.》

환희와 열정에 넘치신 그이의 음성이 수화기의 진동판을 울리였다. 강서원은 그이의 목소리가 심장을 쿵쿵 울려주는듯싶었다.

《그 사람을 오늘의 성공에로 이끌어주신분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이십니다. 저는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그 사람의 연구사업을 저는…》

형언 못할 수치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 기회를 놓치면 그이께 자기반성의 심정을 영원히 터놓지 못할것만 같은 절박감에 휩싸이며 《저는…》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랬으나 북받치는 감정으로 목이 메였다. 과학원으로 진출하는 사위의 앞길을 은근히 막아나섰던 일이며 그에게 무역회사출장소에 갈것을 권고하던 일들이 눈앞에 떠오르며 자책의 모진 아픔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부부장동무, 동무가 지난날에 그릇된 관점에 사로잡혀있었다는것을 나도 알고있습니다. 오늘은 기쁜 날입니다. 새삼스레 자신을 뉘우치며 괴로워하지 마시오. 라이쁘찌히에 있는 사위에게 축하의 전보나 쳐주시오. 여러 나라에서 우리의 초고압유압프레스를 사겠다고 신청해왔답니다. 그 계약때문에 석홍범동무네는 인차 귀국하지 못합니다.》

전화가 끝났다. 그랬으나 전화기옆에 서있는 두사람은 움직일줄 몰랐다. 그이의 음성이 계속되는것만 같은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숙연한 침묵이 흐르는 방안에는 세차게 뛰는 두 일군의 심장의 박동소리만이 높아졌다.

《부부장동무, 전보를 쳐야지요.》

잠시후에 황석태가 깨우쳤다. 강서원은 그제서야 현실적인 생각으로 되돌아왔다.

《전보를 비서동무와 함께 련명으로 칩시다.》

황석태는 기꺼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둘러 금속공업부청사를 나섰다. 국제통신국은 멀지 않았다. 승용차를 탈것도 없이 나란히 걸었다.

밤거리에 부실부실 봄비가 내리고있었다. 청사를 나설 때에는 비가 온다는것을 몰랐다. 거리를 오가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우산을 받고있었지만 그들은 흔연히 비발속에 몸을 내맡기였다. 되돌아가서 우산을 가져오자고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곁을 지나는 사람들이 때로 의아한 눈길을 그들에게 보냈다. 엄숙한 낯빛으로 찬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나란히 걷고있는 풍채좋은 두사람이 길손들의 눈에는 이상스레 비꼈을것이다. 그들은 한껏 달아오른 얼굴에 뿌려지는 비발을 즐기며 머리를 곧추 들었다. 가로등빛에 드러나는 비발속을 응시하며 걸음을 맞추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서로가 공통된 하나의 감정에 휩싸여있다는것을 알았기때문에 어느쪽이나 서뿔리 입을 열지 않았다. 이따금 눈길을 마주칠뿐이였다. 그 시선이 심장의 약속을 나누고있었다. 얼마쯤 걸었을 때 황석태는 옷주머니에 손을 넣어 줌안에 드는 소형록음기의 단추를 눌렀다. 김정일동지께서 주신 록음카세트가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록음에 맞추어 마음속으로 따라불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야 할 혁명의 길에

다진 맹세 변치 말자

한별을 우러러보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서비스이용약관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상단으로


Copyright © 2010 - 2023 www.hanseattle1.co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