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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평양은 선언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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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027회 작성일 21-05-27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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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쾌청한 날씨였다. 쏟아져내리는 해빛에 고층건물들의 창문이며 아지랑이 피여오르는 포도, 미끄러져가는 전차, 승용차들의 흐름, 인도에 굽이치는 행인들의 얼굴 얼굴… 모든것이 눈부시였다.

조국의 수도는 혁명가요의 박력있는 취주악선률로 그를 맞이하였다. 역전광장으로 로농적위대복차림의 돌격대행렬이 보무당당히 걸어지나가고 그 대오의 앞에서 선전차가 서서히 굴러가고있었다.

선전차에서 증폭되여 울려나오는 취주악소리가 거리에 메아리쳤다. 돌격대원들이 쳐든 붉은 기발이며 구호판들에서 힘찬 글발들이 언뜻거렸다. 《우리 식대로 살아나가자!》,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행인들속에서 그들에게 박수갈채를 보내거나 손을 젓는 녀인들과 처녀들도 있었다.

트렁크를 든 성희를 따라 평양역사에서 나온 류수진은 한두달이 아니라 오랜 세월 다른 세계에 갔다오기라도 한듯 수도의 떠들썩한 공기에 어리어리해져 지나가는 대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대의 락오자로 되여 돌아온듯 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러면서도 취주악소리에 가슴이 벅차올라 모두숨을 후 내쉬였다.

이윽고 역전거리의 지하도를 지나 계단을 총총히 걸어올라와 인도에 나선 류수진은 딸을 집으로 먼저 보내고는 곧장 과학원으로 향하였다.

사회과학원은 텅 비여있었다. 류수진은 그제야 오늘이 금요일이라는것을 깨달았다. 접수실에서 당직을 서고있는 고고학연구소의 젊은 연구사가 그를 반기며 전체 성원들이 광복거리2계단건설장에 나가 금요로동에 참가하고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는 하는수없이 접수실의 긴걸상에 주저앉아 젊은 연구사한테 그사이 과학원에서 있은 일들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었다. 젊은이는 그의 문제에 대하여서는 아무것도 모르는듯 눈을 반짝이며 요즘 평양주변의 건설장들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들인 마제석기와 동물골편들이 나타나 고고학연구소가 흥분하여 발굴사업을 어떻게 벌리고있는가에 대하여 잔뜩 늘어놓았다.

그는 사십분남짓 앉아있다가 집으로 가기 위해 문수행 전차정류소로 나왔다.

릉라동정류소에서 내린 수진은 아빠트모서리에서 황황히 걸어나오는 안해와 마주쳤다. 나들이옷도 갈아입지 않고 색이 바랜 면직달린옷바람에 노란 비닐소랭이를 든 하정녀는 남편을 보자 주춤 멎어섰다.

《료양을 마저 하지 왜 먼저 퇴소하우?》

《음… 갑갑해서…》 그는 얼버무렸다.

《갑갑하다구요? 장기친구라도 없습디까. 에그 속이 켕기겠지. 입이 무겁던 애가 공연한 소리를 해가지구. 할아버지만 아니면 그저…》

《아버지가 건너오셨소?》

《좀전에… 갑자기 무얼 대접해요. 과일상점에 가요. 성희하고 이야기하고있어요. 손녀하구 마주 앉으면 노상 마음이 즐거운지 안색이 훤해서… 그저 껄껄… 올라가봐요.》

하정녀는 이렇게 말하고는 상점쪽으로 걸음을 다그쳤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그 말버릇에 기분이 언짢아져 턱을 끌어들이고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선들바람에 서리가 허옇게 내린 머리칼이 흩날리며 이마를 내리덮었다. 아득히 흘러간 청춘시절, 그때만 하여도 얼마나 마음이 어질고 순박하고 다정다감한 사람이였던가. 아버지만 아니였더라면 정녀의 운명은 달라졌을것이다. 아마 나서자란 산촌을 벗어나지 못하고 어느 드센 농군의 안해로 한생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정녀와의 결혼에는 기구한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류수진이 모스크바공업대학 기계공학부를 졸업했을 때 조국은 그를 마쟈르주재대사관 무역대표부의 3등서기관으로 파견하였다. 그자신도 자기 생로가 이렇게 그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대학 1학년에서 샨도로 뻬떼피의 시에 반하여 마쟈르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한것이 운명변화의 요인으로 되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백배로 중요한 원인이 다른데 있었다. 조국의 들끓는 복구건설장들은 매일과 같이 새라새로운 기계들을 요구하고있었는데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동란이 갓 진압된 마쟈르의 기업체들은 휴업상태를 완전히 수습하지 못하여 무역계약이 된 대상설비들을 거의 생산하지 못하고있었다. 기계에도 밝고 계급성이 투철하고 외교적능력도 좋은 새 인원들을 부다뻬슈뜨로 급히 보내야 하였다. 그 명단의 제일 마감에 류수진이란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했으나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곧바로 마쟈르로 가서 두나이강류역의 공업지구들을 쉬임없이 돌아다니며 계약된 설비들을 빨리 생산하도록 교섭하고 마쟈르기술자들을 도와 설계실과 생산현장에서 밤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무렵 사려깊은 대사는 유럽의 환경에서 독신생활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여겨 휴가를 줄테니 조국에 가서 결혼하고 오라고 권고하였다.

당시 류수진은 일에 쫓겨 여가를 낼수 없는데다가 결혼이란 개인적인 사정때문에 숱한 려비를 쓰면서 유럽의 중심에서 아시아대륙의 한끝까지 갔다온다는것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명전권대사를 비롯한 년장자들은 려비걱정은 말고 갔다오라고 권했으나 애국심에 불타는 청년은 그 려비만한 외화면 농촌의 자그마한 인민학교를 지을수도 있다, 우리 고향아이들은 교사가 없어 반토굴에서 공부하고있다고 하면서 버티였다. 왈가왈부의 론의끝에 조국에서 손색이 없는 처녀를 골라 부다뻬슈뜨에 《소포로 붙이기로》 락착이 되였다. 외무성의 동유럽담당국은 이 류다른 혼인문제를 보병련대장으로 있는 아버지에게 일임하였다. 류한무중좌는 자기나름의 결혼관으로 며느리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결혼관이란 좀 괴벽스러운데가 있는것이였다.

맏며느리감으로는 도시처녀보다 농촌처녀가 낫다, 련애하기 좋은 녀자는 가정살림살이를 못한다, 미모가 뛰여난 녀자는 인물값을 한다, 허영심이 있어 남편밖의 뭇사나이들한테서 환심을 사는것을 은근히 기뻐하며 랑군을 얕보기일쑤이기때문에… 얼굴은 과히 험상이 아니고 수수한 편이 좋다. 아는것이 너무 많고 입이 다사한것은 연주창처럼 역겨운것이다. 중학이나 전문 졸업정도가 알맞춤하다. 손이 걸어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고 아무 일이나 척척 해내고 아이낳기도 헐하게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첫째도 둘째도 건강해야 한다. 건강이 복이다. 발목뼈가 굵은 녀자라야 잡병을 모르고 튼튼하다. 처녀의 보동보동 오른 살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러루한것이였다.

류한무중좌는 이런 제나름의 척도에 맞는 처녀를 찾아보았는데 신통한 상대가 없었다. 어느날 문득 련대주둔지곁 협동조합 부기장의 딸이 어떨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처녀 정녀하고는 1년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한해전 전승기념일에 조합에서 련환모임을 조직하고 인민학교마당에서 군민련환체육경기까지 연 일이 있었다.

그때 련대장은 관리위원장과 나란히 초대석에 앉아 군민이 어울려서 하는 바줄당기기며 씨름, 배구 등의 경기를 구경하였다. 사람찾기경기가 시작되였다. 작업반들과 학교에서 선발된 여덟명의 처녀들이 달려나오다가 땅에 묻혀있는 쪽지를 찾아 펼쳐보고는 초대석이며 응원석앞으로 달려와서 쪽지에 이름이 적힌 사람들을 목청껏 불러대였다. 한 처녀가 초대석앞으로 바람처럼 달려와 발을 동동 구르고 손을 내흔들며 련대장동지를 찾았다. 류한무는 표범처럼 몸을 날려 처녀의 손목을 덥석 잡아쥐고는 냅다 달려 1등을 하였다. 시상식때 관리위원장은 련대장에게는 담배재털이, 처녀에게는 은방울꽃무늬가 아롱진 타올수건을 상으로 주었다.

점심시간에 성찬이 있었다. 류한무는 어느 음식보다도 시원한 오이랭국이 좋아 누구 솜씨냐고 물으며 한그릇을 더 청하였다. 아까 경기에서 짝이 되였던 처녀가 오이랭국사발을 들고들어와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여 절을 하고는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관리위원장은 대견하게 웃으며 얘가 교원대학을 졸업한 자격교원이지만 엄마솜씨를 닮아 오이랭국 만드는데서도 으뜸이라고 자랑하였다. 처녀는 너무 수집어 목을 외로 틀며 한손으로 입을 가리웠다.

술기운에 거나해진 보병련대장은 처녀한테 노래를 청하였다. 처녀는 얼굴이 빨갛게 익어 갑자르기만 하다가 방안이 떠나가게 터져오르는 박수에 못이겨 《노들강변》을 불렀는데 목소리 또한 고왔다. 수수한 얼굴에 단단하게 생긴 처녀였다. 부기장의 딸 정녀, 정확히는 하정녀였다.

련대장은 이따금 군마를 타고 산촌길을 지나가다가 정녀를 만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처녀는 길옆에 비켜서서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류한무는 여러모로 타산하고 재고 또 재본끝에 관리위원장을 조용히 만나 의논한 다음 외진 시내가 버드나무밑에서 정녀를 비밀리에 만났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가을밤이였다. 그는 처녀의 대학공부며 같은 또래들과의 우정, 교원생활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으면서 오래동안 이야기해보고는 마음이 흡족해져 흘끔흘끔 발목을 여겨보았다.

처녀는 무릎아래까지 감싼 치마자락을 슬며시 끌어내려 발목을 가리우며 고개를 다소곳이 숙였다. 발목뼈는 실해보였다.

류한무는 처녀의 동실한 어깨에 손을 얹으며 능청스럽게도 어수룩한 농군의 말투로 달래였다.

《이것아, 노여워말어. 제 식솔로 만들고싶어 이런다…》

아버지가 항공우편으로 보낸 처녀의 사진을 받아본 류수진은 부친님의 분부를 따르겠다는 회답전보를 쳤고 얼마후 인차 신부가 간다는 외무성의 무전이 날아오고 사흘뒤에는 모스크바대사관에서 국제전화로 신부가 모스크바발 부다뻬슈뜨행 급행렬차로 떠났다, 모스크바까지는 외무성출장원이 데리고 려객기편으로 날아왔지만 마쟈르로 가는 손님이 없어 기다리다가 혼자 보냈다, 신부가 비행기멀미를 몹시 하여 기차편을 리용했으니 량해하라고 하며 렬차좌석번호를 알려주었다.

류수진은 급행렬차가 역에 도착하자 차칸으로 뛰여올라가 벌써 일어나 붐비는 손님들속을 누비며 처녀의 좌석번호를 정신없이 찾았다. 제일 뒤쪽자리… 깜장머리와 산뜻한 옥당목저고리… 조국의 향취를 발산하는 그 빛갈이 해빛처럼 눈에 날아들었다. 달려갔다. 피기가 가신 해쓱한 얼굴로 나른하게 앉아있던 처녀는 자기옆에 나타난 사람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눈에 눈물이 가랑거렸다. 바르르 떠는 파란 입술에서 한숨같은 속삭임이 새여나왔다.

《조선사람인가요?》

《나요… 수진이요.》

그다음에는 무슨 말을 했던지… 사람들도, 말소리도, 음식도, 물맛도, 자연도 낯선 이역의 대륙을 지나오며 고독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탓인지 얼굴을 싸쥐고 설음에 겨워 울던 일… 먼 려로에서 발등이 통통 부어올라 좌석밑에 벗어놓은 구두가 발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류수진이 쭈그리고 앉아 신는것을 도와주며 여겨보니 발등띠가 달린 구두는 낡은것이였다. 누군가 그 흠을 감춰주자고 검은 약칠을 진하게 해놓았다.

그다음 닳아진 뒤축에 다이야쪼박을 오려붙인것이 눈에 띄였다. 그는 전쟁의 재더미를 털고 일어서며 조국이 이겨내고있는 가난과 어려움이 마쳐와 가슴이 못견디게 저려났다. 그날 수진은 거리의 백화점앞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달려들어가 살색의 고운 녀자구두를 사안고 달려나왔다. 이걸 갈아신고 그건 버리자고 일렀다. 정녀는 구두를 안고 쓸어만져보더니 아버님이 힘들게 구해준것인데 어떻게 버리겠는가고, 련대피복수리소의 제화공출신 아바이병사가 정성들여 수리했고 아버님이 윤을 내느라고 밤새워 닦고 또 닦아준것인데 버리면 되겠느냐고 했다. 그 마음이 기특하고 고마와 작은 손을 말없이 뜨겁게 잡아주었다.

대사관식당에서 있은 소박하나 떠들썩한 결혼식, 단꿈같이 흘러간 신혼생활… 부다뻬슈뜨의 공기는 시골태생의 젊은 안해를 하루하루 달라지게 하였다. 차차 감스름한 얼굴이 환해졌다. 식욕이 왕성해지며 많이 먹었다. 잠도 많이 잤다. 끼니때가 된줄도 모르고 달게 잘 때도 있었다. 그는 정녀가 배를 곯으며 일을 극성스럽게 한 그 피로가 지금 한꺼번에 몰켜와 정신없이 자는것이라고 측은하게 여기면서 팔을 걷고 끼니를 지은 일도 여러번 있었다. 정녀는 비누도 냄새를 맡아보고 골라샀으며 향수도 쏘피아의 장미향수나 빠리의 죠르즈, 쌍드향수만 쓰려고 하였다. 어렵게 살아왔는데 유럽의 물질문명을 한껏 누려보라고 새로 생긴 취미에 개의치 않았다.

부다뻬슈뜨의 그 시절 기업소 지배인이나 부지배인으로 있는 로당원들, 루카치의 국제려단에서 에스빠냐공민전쟁에 참가했던 로병들과도 친숙해졌는데 그들과의 친교과정에 국제혁명사에 대한 흥미가 생겨 그 분야의 서적들을 구입하여 밤새워 탐독하였다. 정녀는 달게 자다가도 깨여나 잠내 풍기는 얼굴로 눈살을 찌프리며 밤잠까지 다 빼앗는 고놈 책이 미워죽겠다고 칭얼댔다. 이런 책을 읽어야 이 나라 로간부들과의 사업이랑 능숙하게 할수 있다고 말했으며 안해는 말이 끝나기도전에 돌아누워버렸다. 두해가 지난 어느날 쓰레기통에 아버지가 신겨보낸 구두가 곰팽이가 허옇게 쓴채 구겨박혀있는것을 띄여보고는 다시 닦아서 신발장에 넣어주었다.

그때만 하여도 자기의 눈먼 사랑이 20년이나 30년이 지난후 어떤 고민을 안겨줄것인가 생각도 못했었다.

신병이 들어 조국에 돌아와 병치료를 받은 다음 그가 기후조건과 여러가지 생태환경이 다른 해외에서의 공작에 적합치 않다는 진단이 내리고 그에 따라 대학교원으로 배치되였을 때 안해는 얼굴이 해쓱해져 며칠동안 말을 안했다. 그리고 성미가 이그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기계공학이 아니라 전과하여 국제로동운동사 교원이 되였다.

당시 세계여론을 뒤흔든 체스꼬사변과 뽈스까사태, 윁남전쟁을 비롯한 정치정세와 동란들로 설설 끓는 그의 가슴에 국제문제에 대한 탐구열이 불을 지펴 전과를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류수진은 인적이 드문 밥공장 그늘밑에 가 담배를 피웠다. 옛날을 생각하나 오늘을 생각하나 아버지앞에 면목이 없었다. 아버지의 저력이 풍기는 웅글은 핀잔소리가 귀전에 들려오는듯싶었다. 얼마후 그는 아빠트앞으로 걸어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현관안으로 들어섰다. 인민반의 생활냄새가 확 풍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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