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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비약의 나래 제5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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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822회 작성일 21-05-15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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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1

 

공식적인 틀을 갖추지 않고 아낙네들이 모여앉은 인민반회의처럼 떠들썩한 모임은 없을것이다. 국제국내정세로부터 가정의 항다반사와 식료상점의 된장맛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화제를 입에 올리고 방안이 떠나갈듯이 떠들어댔다. 거기에 보채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녀인들의 웃음소리가 엇섞이였다.

향미는 아무개 어머니, 아무개 할머니로 불리우는 녀인들속에 끼우는것이 쑥스러웠지만 하는 수가 없었다. 남의 눈길을 피하여 얌전히 고개를 떨구고 뒤전에 앉아있었다.

인민반회의에서는 다가오는 겨울철을 맞으면서 가정과 아빠트주변을 알뜰히 꾸릴데 대한 문제가 토의되였다. 향미는 모임이 끝나자 남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반장아주머니가 불렀다.

《향미야.》

향미는 방안을 나서려다말고 돌아섰다.

《좀 기다려라. 할말이 있다.》

반장아주머니의 얼굴에 의미있는 웃음이 비꼈다. 무던하고 친절한 녀인이였다. 모든 세대가 공동으로 해야 할 일이 제기되면 대체로 향미네를 고려하여주군 했다. 김장을 담그어야 하는 일과 같이 향미가 감당하기 어려운 집안일이 생기면 이웃들에서 도와주도록 하였다. 또 무엇을 도와주려고 나를 찾을가? 향미는 다른 아낙네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반장아주머니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방안이 조용해지자 반장아주머니는 향미에게 다가와서 어깨에 손을 얹었다.

《집살림을 하기가 힘들지?》

속삭이듯 다정히 물었다.

《일없어요. 곁에서들 모두 도와주시는데…》

향미는 상긋이 웃어보이였다. 그러자 반장아주머니의 얼굴에 떠올랐던 부드러운 웃음이 사라지고 측은한 빛이 비끼였다.

《향미야, 너도 이제는 철이 들었다고 생각한다.》

향미는 반장아주머니의 련민에 겨운 낯빛을 바라보며 다음말을 기다렸다. 표정과 어조로 보아 뜻깊은 말을 하여주려나싶었다. 얼른 뒤를 잇기가 난처한듯 한순간 주저하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을 탓하지 말고 명심해들어라. 아버지에게 새 어머니를 모셔오자고 권고해라. 너도 집살림을 그냥 맡아하면서 공부를 하자면 힘든 일이겠지만 너의 손에서 밥을 받아잡수시는 아버지의 불편은 더 말할게 없을게다. 열 자식 한 처권만 못하다는 말이 있단다. 너의 아버지는 고정한분이여서 그런 일을 제 혼자 성사시키지 못할게다. 네가 언니들과 의논해서 마음후한 새 어머니를 모시도록 하여라.》

《알겠어요.》

《나는 네가 얼마나 령리한지를 안다. 너는 늘 인민반일에 빠지는걸 미안해했지. 그렇다면 방금 한 말은 내가 인민반장으로 너에게 주는 가장 무거운 과업으로 여기거라. 꼭 그대로 하여라.》

향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 과업을 수행하겠다고 명랑한 어조로 대답하고싶었다. 하지만 다심한 그 타이름이 설명할길 없는 애달픈 감정을 불러왔다. 갑자기 목이 메였다. 얼른 돌아서서 반장네 집을 나섰다.

향미는 아버지의 재취문제를 두고 진작부터 생각해왔었다. 어머니가 돌아간 후 처음은 이제 계모를 맞으면 어쩌랴싶어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였다. 어머니를 대신하여 집에 들어오는 어떤 녀성도 좋게 대할수 없을것 같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생각이 달라졌다. 주부의 부담에서 벗어나고싶기도 하였고 나날이 철이 들기도 하였다. 어차피 아버지를 위해 새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언니들을 찾아가 그런 말을 비쳐보았는데 그들은 펄쩍 뛰였다.

《아버지가 이제는 환갑이 다되였는데 재취는 무슨 재취냐? 아버지는 그럴 생각이 없는것 같더라. 그런데 너같은 철딱서니없는게 뭘 주제넘게 나서서 아버지일에 간참이냐?》

《향미야, 네가 집살림을 맡아하자니까 힘들어서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두고봐라. 계모한테서 눈치밥을 먹는것보다는 지금이 훨씬 낫단다. 지금처럼 아버지를 모시고 단둘이 살아가는것이 행복한 일이야. 계모를 데려오면 우리도 친정집걸음이 자연 떠질게다.》

향미는 어쩐지 수긍되지 않았다. 계모라고 누구든지 전처자식들을 무작정 구박하지는 않을것이다. 몇해전에 본 어느 영화에는 전처자식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계모의 이야기가 그려져있었다. 사람나름일것이다. 아버지의 의향이 다르다는 큰언니의 말도 믿을수가 없었다. 아무렴 아버지가 자식들앞에서 재취를 하겠다고 할수야 없지 않는가. 언니들은 나이도 들고 나보다 생활체험도 많은데 왜 그걸 리해하지 못할가? 두 언니가 똑같이 반대를 하니 노상 무시할수도 없어서 여직 망설여왔다. 그러나 반장아주머니의 권고를 듣고보니 더는 망설일수 없었다.

총총히 집으로 돌아온 향미는 전실에 불이 켜있는것을 보고 퇴근을 한 아버지가 방안에 있다는것을 알았다.

《아버지!》

신발을 벗으며 소리쳐불렀다. 여적 기다리게 한것이 미안스러워서 순간이 바쁘게 자기가 돌아왔다는것을 아버지에게 알리고싶었다.

《너 어딜 갔댔니?》

그렇게 묻는 소리가 먼저 들리고 뒤따라 아버지가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인민반회의에 갔댔어요.》

《그런걸 난 또…》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다. 방금전에 과학원에서 돌아왔다.》

그렇게 대답하는 아버지는 전에없이 흥분한 기색이였다.

《오늘은 과학원에 가셨댔나요?》

《그렇다. 과학원 기계공학연구소에서 드디여 초고압유압프레스를 만들었다. 오늘 시운전을 했는데 아주 성공적이였다.》

향미는 초고압유압프레스가 어떤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지금처럼 기뻐하는걸 보면 대단한 의의를 가지는 과학기술적발명이라고 짐작했다.

《저녁 잡수셨나요?》

《안 먹었다.》

향미는 그 길로 부엌에 가서 저녁상을 차리였다. 아버지와 마주 앉아 저녁을 먹고난 다음 용기를 내여 말문을 열었다.

《난 아버지한테 꼭 말씀드릴게 있어요.》

의아한 기색으로 머리를 드는 아버지의 눈길에 부딪치자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졌다. 꼭지를 떼기는 하였으나 어쩐지 그런 말을 하기가 부끄럽게 생각되였다.

《그래, 말하고싶은게 뭐냐?》

《아버지, 새 어머니를 모셔오자요.》

벼르고별러서 번지는 말이였으나 힘겹게 입밖으로 새여나왔다. 마른침을 삼키면서 용서라도 비는듯 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반응을 기다렸다. 똑바로 마주보던 아버지의 눈길이 서서히 방바닥을 겨누었다. 외면을 하는 얼굴에는 얼핏 떠올랐던 놀라운 기색이 사라지면서 엷은 혈조가 번지였다.

아무 말도 없었다.

향미는 내친김에 품어오던 속생각을 다 터놓으려고 다시 말했다.

《난 언니들과 생각이 달라요. 새 어머니를 모셔온다고 가정불화가 생기는 일은 없을거예요. 내가 새 어머니를 친어머니이상으로 따르고 존경한다면 그도 나를 나쁘게 여길리가 없지 않나요. 이 일에 시집을 간 언니들은 아무 상관도 없어요. 새 어머니를 모셔다 우리 집에서 함께 살 사람은 아버지와 나뿐이예요.》

저절로 목소리가 떨렸다. 어른들만이 할수 있는 말을 철없이 한다는 생각으로 흥분이 앞섰던것이다. 아버지가 머리를 들었다.

《나는 너를 아직 철부지로 여기는데 어른이 다되였구나.》

뜻밖에도 감격한 목소리였다.

향미는 자기가 아버지를 기쁘게 하여드렸다는것을 알았다.

《아버지, 나를 위해서 더는 미룰수 없어요. 학교를 다니면서 여전히 집살림을 할수는 없어요. 나도 집에 와서 공부할 시간을 얻어야 하겠어요.》

그 조건을 들이대는것이 자연스럽기도 하고 아버지를 꼼짝 못하게 할수도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일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질수 없는거란다. 나같이 나이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경우와 다르다.》

아버지는 느슨한 미소를 그리였다.

《뭘 나이가 많다고 하세요. 60청춘, 90환갑이라는데… 아버지는 어느새 그 몹쓸 로쇠병에 걸리셨나봐.》

향미는 곱게 눈을 할기며 탓했다.

《자기 나이를 자각하는것과 로쇠병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함부로 이 아버지를 걸고들지 말아라.》

아버지의 입에서 좀처럼 듣기 어려운 롱말이 흘러나왔다.

《남들이 그러는데 아버지만 결심하신다면 우리 집에 들어오려는 녀성들은 줄을 설거라고 해요.》

《웬걸 그렇겠니. 설사 나서는 녀성들이 있다 하더라도 정작 찾으려는 사람은 흔치 않을수 있다.》

《아버지는 어떤 녀성을 맞았으면 하시나요?》

《무엇보다 너를 친딸처럼 사랑해줄수 있는 나이지숙한 녀성이여야지. 나에게야 그밖에 더 바랄것이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아버지, 제 생각에는…》

향미는 말끝을 감추고 새물새물 눈웃음을 지으며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였다.

《그래, 네 생각에는 어떻단 말이냐?》

《정금화선생님이 있지 않나요?》

《정금화?》

아버지는 그 이름을 급히 받아외웠다. 내처 미소가 흐르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너 혹시 그 선생이 자기를 1중학교에 편입시켜주었다고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한게 아니냐?》

《아버진 아직 저를 철부지로 아세요?… 선생님에 대한 고마운 감정과 어머니로 모시고싶은 심정은 전혀 다른거예요. 훨씬 그 이전부터였어요. 그 선생님을 만날 때마다 우리 집에 이런 어머니가 들어왔으면 하는 생각을 했어요.》

《뭐?》

《그래요. 그 선생님이라면 우리가 앞으로 화목하게 살거예요.》

《허허허…》

아버지는 어이가 없는지 허구픈 웃음을 웃었다. 그러나 눈치를 보니 아버지도 정금화선생님에게 좋은 감정을 품고있는것 같았다. 향미는 활기를 띠고 말했다.

《일전에 정금화선생님이 우리 집에 가정방문을 오셨댔어요. 그날 나는 이불을 꾸미댔는데 선생님은 서툰 내 일손을 도와주면서 홀로 지내는 아버지를 무척 동정하시더군요.》

아버지의 얼굴에 그윽한 빛이 떠올랐다. 그러한 표정을 딸애한테 엿보이는것이 어색했던지 움쭉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방으로 건너갔다.

향미는 숙제를 하려고 책상에 마주앉았다. 그러나 공부에 정신을 모을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고 머리속을 맴돌았다. 두손으로 턱을 고이였다. 달아오른 볼편의 따스한 열기를 손끝에 느끼며 물끄러미 시선을 들었다. 책꽂이앞에 세워놓은 자그마한 사진액틀이 눈앞에 안겨왔다. 사진속의 어머니는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자애에 넘치는 눈길로 마주보고있었다.

향미는 어머니와 마음속의 말을 주고받았다.

―어머니, 나는 오늘 저녁 새 어머니를 모셔오자고 아버지에게 졸랐어요. 그것이 돌아가신 어머니한테 죄스러운 일로 될가요?

―네 생각이 옳다. 나는 땅속에서도 너의 아버지와 네가 무한히 행복하기를 바란다.

―새 어머니를 모셔오면 나는 가정일에서 풀려나 공부를 더 잘할수 있어요. 우리 학교에서는 벌써부터 래년 국제수학올림픽에 출전할 준비를 다그치고있어요. 어머니, 나는 박상수학생처럼 국제수학올림픽에서 기어이 조국의 영예를 떨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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