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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평양은 선언한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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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882회 작성일 21-06-19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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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운전수를 따라 승용차에서 내린 류성희는 그가 차에서 꺼내주는 트렁크를 받아들고 거리풍경이며 자기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커다란 유리문앞으로 곧바로 다가갔다.

류한무로인과 류수진박사는 차안에서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고 밖으로 나섰는데 성희는 벌써 현관발판에 서서 자동유리문을 열어놓고 그들쪽을 지켜보는것이였다. 멀리로 떠나는 아버지를 배웅하려 여기 평양비행장까지 나온 딸은 어지간히 흥분되고 들떠있는것 같았다. 류수진은 근엄하고 좀 어정쩡한 얼굴로 열려진 유리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한달전 그가 류학한 모스크바공업대학에서 졸업생들의 동창회가 있으니 참가하기를 바란다는 초청장을 대외문화련락위원회를 통하여 보내여왔었다.

비행장대합실은 손님들이 많았으나 그닥 붐비는 편은 아니였다.

아버지를 먼저 들여보낸 성희는 한손에는 트렁크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할아버지의 팔목을 잡고 려행절차를 밟느라고 조용조용 오가는 사람들속을 누비며 안쪽으로 들어가 창곁 긴의자에 앉았다.

류한무로인은 손녀가 몇번이고 자리를 권하는데도 앉지 않고 장승처럼 버티고 선채 뒤짐을 지고 엄엄한 얼굴로 분주히 오락가락하는 형형색색의 외국인들을 유심히 여겨보는것이였다. 이따금 경계의 빛이 번뜩거리는 그의 눈길인 저 외국인들속에 음험한 계략을 생업으로 삼는 놈팽이는 없을텐가 하고 가늠해보는것 같기도 하였다.

성희는 할아버지의 그런 기상에 웃음이 터져올라 손이 입에 갔으나 어느덧 스스로도 마음이 긴장되여 눈살이 꼿꼿해지며 저쪽 외국인들속에 끼여 무슨 수속인가 하는 아버지만 지켜보았다.

외국려행이 처음이 아닌 류수진은 손쉽게 비행기표를 산 다음 세관검열을 받기 위한 용지에 기재사항을 적어넣고있었다. 누구인가 곁에 와서 반색을 띠며 인사하는것 같았다.

돌아보니 송아무개라는 그 청년이였다.

《어디로 가십니까?》

《어, 동무구만… 모스크바로 가오.》

《대표단으로 갑니까?》

《좀 출장갔다올 일이 있어…》

《예… 전 우리한테 왔던 타이손님을 전송하러 나왔습니다.》

《저기 우리 성희도 와있네.》

류수진은 얼결에 이런 말이 나갔다. 반기는 그 호의에 경계심으로 대할수 없었던지… 청년은 순간에 얼굴이 확 밝아져 돌아서더니 이쪽저쪽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다가 곁으로 온 키가 작달막한 아시아사람을 데리고 저쪽 창문가로 다가갔다.

성희는 자기앞에 불쑥 나타난것이 송기선이라는것을 알아보자 너무 뜻밖이여서 얼굴이 해쓱해져 몇순간 빤히 쳐다보다가 일어나 할아버지를 소개하였다. 그는 로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그리고는 외국손님에게 영어로 무엇이라고 말하니 손님은 놀란 눈으로 류한무로인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깊이 숙여 절하였다. 그다음 처녀한테는 인상좋은 미소를 보내며 머리를 끄덕여보였다.

송기선은 기쁨에 겨운듯 눈을 빛내이며 신명이 나서 말하였다.

《이 비지트선생은 우리 회사와 무역계약을 맺고 서독으로 갑니다. 서독에서 일이 잘되면 인차 본국으로 돌아간답니다. 영국 만체스터에서 대학을 우수하게 졸업하고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재계에 나선 쟁쟁한 실업가입니다.》

타이사람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 막연한 미소를 띠고 그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비지트선생은 이번 기회에 우리 나라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저를 방코크에 초청했지요. 물론 인사말이겠지만… 저의 영어가 정확하고 류창해서 려행에서 언어의 장벽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타이손님에게 자기가 한 말을 설명해주는것 같았다. 타이사람은 기쁨에 겨운듯 두손을 마주잡고 무엇이라고 섬겨대며 연신 허리를 굽석거렸다.

성희는 얼굴이 빨갛게 되여 어줍게 웃어보였으나 외국인을 끌고와서 이런 희떠운 장면을 연출하고있는 그한테서 그 어떤 시위적인것이 느껴져 불쾌감도 없지 않았다. 하나 외국인에 대한 례절은 례절이여서 할아버지도 친절한 말을 몇마디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으나 류한무로인은 처음에는 호의적인 미소를 짓는것 같더니 방심한 눈길로 타이사람을 내려다보는것이였다.

그들이 물러가자 류한무는 장의자에 앉으며 손녀에게 나직이 물었다.

《저 청년이 너하구 어떤 사이냐?》

《…》

손녀의 해쓱한 얼굴과 침묵이 심상치 않은 관계를 암시하였다.

《음… 똑똑해는 보이는데… 간이 좀 모자라는게 아니야?… 피속에 간이… 소금말이다. 엉?》

그때 금속성이 섞인 안내원의 목소리가 대합실에 울려퍼졌다. 평양발 모스크바행 정기항로로 려행할 손님들은 어서 세관검열을 받으라는것이였다.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대합실의 공기가 설레였다. 사람들속을 비집고나온 류수진은 창가로 다가와 아버지와 딸에게 갔다오겠다고 인사하며 이제는 들어가보라고 하였다.

류한무로인은 전송대에 나가 비행기가 뜨는것까지 보고들어가겠다고 하며 손녀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아들의 뒤를 총총히 따랐다.

그날은 기상조건도 좋아 대형분사식려객기는 정시에 활주로를 따라 살같이 내달렸다. 승객실의 중간쯤 좌석에 앉은 류수진박사는 타원형기창을 통하여 태풍에 휩쓸려 지나가는듯 한 비행장풍경을 내다보았다. 비행역사의 전송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지만 아버지며 딸이 어디 서있으며 누가 누구인지 가려볼수조차 없었고 여겨보려고 기창에 이마를 붙이는 순간에 벌써 비행역사는 아득한 뒤로 종이집처럼 날아가버리고 산발들의 파도며 푸른 하늘이 비껴들었다. 야릇한 혼란속에 귀가 멍멍해지고 몸과 마음이 자연과 사회의 인력권에서 벗어나 무인력, 무중력의 무한대한 공간으로 날아오르는듯 모든것이 홀가분해졌다.

허나 아버지가 헤여지며 말없이 손을 으스러지게 잡아줄 때 뭉클하게 안겨든 정은 잊지 못할, 잊어서는 안될 그 무엇처럼 고공으로 날아오를수록 가슴을 뜨겁게 지지였다.

류한무로인은 집안에서 맏이나 둘째 어느 누가 외국려행을 떠나도 여태 비행장까지 나와 바래워준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공적인 대표단성원도 아니고 개인의 자격으로 그것도 정세가 심상치 않게 번져가는 나라에 중요한 사명을 띠고 가는것만큼 마음이 몹시 불안한것 같았다.

류수진이 모스크바 옛 대학의 동창회에 가게 되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집안에서 제일 언짢게 여긴것도 로인이였다. 그는 내놓고 가지 말라는 소리는 못하였지만 이러한 때 동창회는 무슨놈의 동창회냐고 퉁명스러운 소리를 몇마디 던지는가 하면 초청장을 받고 가겠다고 수락한 아들을 나무라기도 하였다.

류수진박사도 역시 가고싶은 의향이란 애초부터 꼬물만치도 없었다. 연구소와 과학원의 당위원회에도 그런 의향을 터놓고 표명하였었다. 그의 론거란 그런데 가서 얻을것도 없고 배울것도 없으며 더우기 자기한테는 옛날의 외국벗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것과 같은 사치한 생활을 즐길 시간여유도 없다는것이였다. 그러나 연구소장 서만복교수를 비롯한 몇몇 일군들의 설명을 듣고 안가겠다는 자기 론거란 단순하고 천진하기까지 한것임을 인차 깨달았다. 모처럼 차례진 이런 기회에 전문가의 안목으로 《개편》의 본질과 실상을 깊이 료해하고 견해를 정립하는것이 학술사업을 위하여서도 필요한 일이였다. 그는 이러한것을 느낄수록 사명감으로 마음이 무거워져 모스크바체류기간의 활동계획을 스스로 세우고 알심을 들여 그 준비를 하였으며 떠나기 사흘전 이번 쏘련방문이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직접적인 믿음과 배려라는것을 전달받았을 때에는 가슴이 벅차올라 한동안 말을 못하였다.

려객기안에는 모스크바의 서로 다른 대학 동창회에 가는 일행 세명이 타고있었는데 모두 제나름의 생각에 잠겨 좌석들에 찾아다니는 일도 오가는 말도 별로 없었다.

류수진은 뒤로 제낀 좌석등받이에 편안히 기대여 눈을 지그시 감고있었지만 감격과 흥분, 은근한 긴장으로 잠을 청할수도 없었다. 30여년만에 찾아가는 옛 대학, 강당과 교정에서 함께 꿈을 키웠던 로씨야와 동유럽, 아시아 동료들과의 상봉, 청춘의 희망,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가슴들이 부풀어 탐구의 나날을 함께 보냈던 그들모두의 운명에는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가. 이제 있게 될 30여년만의 상봉, 모두 이름이나 기억하고있을텐가. 아 떠들썩한 포옹, 눈물, 희열, 우정의 노래, 추억의 노래… 부딪치는 술잔들의 쟁그랑소리… 동창회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것인가…

려객기가 노보씨비리쓰크항공역에 내렸다가 다시 떠올라 서부씨비리의 광활한 대지우를 날 때 웬일인지 그한테는 처음으로 이 나라, 이 거칠고 바람사나운 대륙으로 떠나오던 나날이 문득 떠올랐다. 몸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날아가고있었으나 마음은 생각만 하여도 가슴저릿한 아득한 과거에로 날아갔다.

포화, 포화, 솟구치는 흙기둥, 쏟아지는 《흙비》… 류수진부소대장은 피투성이 된 소대장을 업고 포연과 화염이 광란하는 엉망진창의 참호를 따라 뛰여가며 목이 터지도록 위생병을 불렀다. 폭풍에 귀가 멘 탓인지 대답소리는 들리지 않고 위생병도 나타나지 않았다. 참호에 묻혀버렸는가, 다른 부상병한테로 뛰여갔는가… 가슴앞에 드리운 소대장의 팔이 맥없이 늘어지고 잔등에 선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황황히 소대장을 참호바닥에 내려놓았다. 숨이 졌다. 부르짖지도 오열을 터뜨리지도 못하고 피와 흙먼지 범벅이 된 가슴팍을 더듬더듬 쓸어만지며 몸부림치는데 어마어마한 지진이 이는듯 고지가 통채로 전률하고 대기가 무섭게 떨며 수천수만발의 줄포탄이 작렬하는 굉음이 휩쓸어왔다. 하늘이 허물어져내리는듯 하고 폭풍속에 든듯 군복자락이 날렸다.

우측 린접사단의 1011. 7고지! 포연이 짙은 구름처럼 뒤덮은 그 고지기슭이며 중턱 꼭대기들에서 화광이 끝없이 번개치고 수백수천갈래의 희고 검고 재빛의 초연기둥, 흙먼지기둥이 그침없이 솟구쳐오르며 대기가 우르릉… 우르릉… 전률하였다.

류수진은 엉거주춤 일어나 그쪽을 넋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며칠전 중대장의 말을 통하여 린접사단에서 류한무중좌의 175련대가 1011. 7고지계선을 방어하고있다는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 늘 그쪽에 마음을 쓰게 되였다.

미군의 주타격방향은 1011. 7고지쪽이고 보조타격은 수진이네 련대가 차지한 952고지에 지향되였다. 적은 952고지계선을 돌파하여 1011. 7고지계선 방어의 익측과 배후를 위협하며 아군의 완강한 방어를 일거에 허물려고 련일 광적으로 공격해왔다.

수진은 아버지네 련대와 린접을 형성하며 어깨겯고 싸운다는 자부심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전에 없던 걱정으로 속을 태우며 마음을 더 쓰게 되였고 방어임무수행에서는 책임감이 백배해졌다.

자기네 방어선이 뚫리면 아버지한테 어떤 위험이 닥친다는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고있는 수진은 참호와 전호를 허술히 파지 않았으며 적들이 밀려들면 불비속을 비호처럼 뛰여다니며 짐승들의 산병선에 불소나기를 퍼붓고 참호 흉장과 바닥에서 육박전투가 벌어지면 두려움을 모르고 혈투속에 뛰여들었다.

그는 지금 1011. 7고지에 쏟아지는 광란적인 포화가 대공세의 포병준비사격이라는것을 직감하고 서둘러서 소대장을 둘쳐업으려는데 련락병이 뛰여와 중대장이 찾는다고 소리쳤다. 달려온 전사들에게 소대장을 맡기고 중대부로 갔다.

중대장은 반나마 허물어진 참호의 흉장에 엎드려 깨여진 자동총 총탁판을 통신줄로 동이면서 대대에서 정치부대대장이 민청사업때문인지 동무를 찾는데 빨리 올라갔다오라고 하였다. 그는 소대장이 희생되였다고 하자 어서 가라고 손을 획 내젓고는 참호를 따라 아래쪽으로 정신없이 뛰여갔다. 대대로 올라가는 교통호에서 특무장을 만났다. 마음씨 무던한 특무장은 공급소대에서 고등어를 보내주어 저녁식사때 고등어국을 푸짐하게 끓이겠는데 식기전에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저 벙긋 웃어보이며 그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이것이 어떤 작별로 되겠는지 모르고, 이 무던한 특무장하고는 영별로 되리라는것을 상상도 못하고,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나지 못할 화선전우들 그 누구하고도 포옹도 악수도 없이 떠났다. 저녁에 돌아와 고등어국을 함께 먹을수 있으리라고만 생각하고…

정치부대대장은 그를 반겨맞아 아마 좋은 일이 있는것 같다면서 련대대렬참모한테 올라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곁에 서있는 공급소대탄약분대장한테 무기를 바치고 떠났다가 다시 내려오게 되면 찾으라고 하였다. 심상치 않았다. 어디로인가 소환명령이 떨어진것이 분명하였다.

련대를 걸쳐 사단지휘부로 들어가는 령길을 걸으며 총포성이 끓어번지는 1011. 7고지방향을 자꾸 돌아보게 되였다. 그쪽 산악들에는 대화재의 불바다가 넘실대는듯 시꺼먼 연기가 뭉개쳐오르고 해마저 진흙빛으로 흐려졌다. 포화의 광란속에서 련대를 이끌며 힘겨운 싸움에 부대끼고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걸음마다 불길한 예감과 착잡한 불안감, 아리숭한 가책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단대렬과에 도착하니 다른 련대에서 올라온 두명의 하사관이 기다리고있었다. 셋은 대렬과장의 지시에 따라 하나의 조로 편성되여 군단사령부로 향하였다. 벌써 날이 어두워졌다. 두개 사단이 공동으로 쓰고있는 대도로에 나서니 전조등을 끈 후방차와 포차며 마차들이 앞을 다투어 포성이 울부짖는쪽으로 내달리고 그쪽으로부터는 삶과 죽음이 판가리하는 화선의 처절한 공기를 풍기며 담가행렬이 밀려들고있었다. 담가병들한테 어디서 오는 부상병이냐고 물으면 거의 다 1011. 7고지계선에서 온다고 대답하였다. 수진은 동행자와 함께 그런 담가를 받아메고 가락맞게 발걸음을 옮기며 담가병에게 그곳 전투정황이며 방어형편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었다. 나이 지숙한 담가병아바이는 땀내를 물씬물씬 풍기며 하루에도 십여차례씩 거듭되는 적들의 발광적인 공격이며 전대미문의 포사격, 드문히 벌어지는 육박전에 대하여 이야기하던끝에 류한무련대장이 군기를 들고 참호에 나타나 전사들을 고무했으며 전사들과 어깨겯고 반돌격에 참가했다고 말했다.

셋이 군단사령부에 도착한것은 새벽녘이였다. 키가 구척같은 대렬부장이 사단들에서 올라온 아홉명의 하전사들을 대렬부 토굴로 불러들여 동무들은 장군님의 배려로 이전 쏘련의 대학들에 파견되여 공부를 하게 된다, 오늘저녁 평양으로 떠나는 차편으로 최고사령부 대렬보충국에 올라가 차후지시를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얼굴빛이 부드러워지며 무슨 말인가 더 하려는데 대렬부의 서기인듯 한 하사관처녀가 들어와 부장에게 175련대장으로 임명된 누가 떠난다고 알렸다. 대렬부장은 바래주고 인차 온다고 하며 밖으로 뛰여나갔다.

수진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175련대장이라니? 아버지가 거기 련대장인데 누구를 임명한단 말인가?…

깔끔하게 생긴 처녀에게 물었다.

《동무, 이자 175련대라고 하지 않았소?》

《왜요?》

《이전 련대장이 어떻게 됐는데 새 련대장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제 전사했다는 말을 들은것 같은데요…》 하고 머리를 바로 쓸어만져내렸다. 녀자가 아니면 한대 쥐여박고싶었다. 정신없이 밖으로 뛰여나갔다.

저쪽 새벽어스름속에서 떠들썩한 말소리와 함께 발동소리를 부르릉 울리며 차가 떠나가고 얼마후 대렬부장의 그림자가 이쪽으로 천천히 움직여왔다. 그에게로 달려갔다.

《175련대… 류한무련대장이 전사했습니까?》

《누가 그랬소?》

대렬부장은 벌컥 소리쳤다.

《서기동무한테서 다 들었습니다.》

《고것… 맹꽁이!》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전 그의 아들입니다.》

《알아!》 하고 그는 거칠게 소리치며 부르짖었다.

《류한무는 갈대가 아니야! 호락호락 쓰러지는… 무쇠기둥이란 말이야! 바위, 바위란 말이야!》

수진은 설음같은것이 울컥 북받쳐올랐다. 대렬부장은 평양학원시절 아버지의 분대장이였다. 그의 이야기를 통하여 아버지가 전신에 치명상을 입고 가까운 야전병원에 실려왔다는것, 상처들이 중하고 출혈을 심하게 하여 사흘낮, 사흘밤 빈사상태에 빠져있는데 심장이 하도 강하여 미동으로라도 뛰여 생을 연장시키고있음을 알게 되였다.

그는 류학을 갈수 없다고, 아버지의 련대나 자기 부대로 도로 내려보내달라고 간청하며 눈물을 쏟았다. 대렬부장은 성급히 담배를 빨며 그의 말을 듣다가 류학은 임자 부친이 전화로 동의해온 문제인데 이제 와서 그 뜻을 거역하면 되겠느냐고 하였다.

이튿날 아침 부장은 그를 차에 태우고 야전병원으로 갔다. 《쑈크실》이라는 어둑시그레한 좁은 방 침상에 머리며 가슴, 다리에 온통 붕대가 칭칭 감긴 시신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누워있었다. 아버지였다. 높이 매달린 약병으로부터 가느다란 고무관을 따라 팔이나 다리에 점적액이 한방울 또 한방울 흘러들고있었다.

수진이 터져오르는 비분을 누를길 없어 절통하게 아버지를 찾자 환자는 간신히 눈을 뜨고 그를 지켜보았는데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한것 같았다. 아들이 거듭 아버지를 불렀을 때 홀연 눈이 커지며 또릿하게 영글어진 동자에서 새파란 빛살 같은것이 뿜어나왔다. 수진은 그 눈빛에서 아버지의 심혼에서 울려나오는 웨침을 듣는것만 같았다. 가라! 가서 선진기술을 배워라. 우리가 피를 동이로 쏟은 이 땅에 강국을 세워야 한다…

철령과 마식령을 넘어 평양으로 들어오고 평양에서 의주의 류학생강습소로 가는 먼길에서 조국땅이 성한 집 한채 없는 완전페허로 되였다는것을 알았다. 조국을 떠나는 밤, 무개차에 실려 압록강다리를 건늘 때 야간폭격의 불소나기가 쏟아지는 신의주쪽 상공을 바라보며 울었던 일… 한주일의 대륙횡단려행끝에 모스크바 야로슬랍쓰끼역에 도착하니 수백명의 남녀 이전 쏘련대학생들이 홈에 나와 싸우는 조선에서 온 류학생들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그것은 40년전 일이였다.

려객기는 정시보다 좀 늦어 모스크바교외의 쉐레메쩨보-2국제항공역에 내려 활주로로 미끄러져갔다.

류수진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기창으로 밖에서 흘러지나가는 대형려객기들의 류선형동체며 느릿느릿 굴러가는 구내뻐스, 사방으로 뻗은 거무틱틱한 활주로들과 려객들의 무질서하면서도 활기있는 움직임을 내다보았다. 이국의 낯선 정서가 페부에 휩쓸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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