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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평양은 선언한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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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856회 작성일 21-05-28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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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소에 부친을 존경하면서도 은근히 두려워한 류수진은 마음이 여느때없이 긴장되여 문을 조용히 열고 전실에 들어섰다. 어찌된 영문인지 집안이 쥐죽은듯 고요한데 《사향가》의 은은한 선률이 실안개처럼 흐르고있었다.

그는 어리둥절해서 두리번거렸다. 전실은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것 같았다. 원탁우의 도자기꽃병에 들국화가 두 세송이 꽂혀있고 큰 경대의 웃쪽구석에는 요새 인기있는 성악녀배우의 사진을 오려붙였고 한쪽벽에는 처음 보는 풍경화가 걸렸다. 어쩐지 그것이 딸의 소행이 아니라 가정정서를 밝게 해보려는 안해의 시도로 여겨졌다.

선률은 분명히 자기 방에서 흘러나오고있었다. 손녀와 같이 음악감상을 하시는가?… 감상음악치고는 소리가 너무 낮다. 예상치 않았던 집안의 고요가 뢰성벽력전의 정적으로 느껴져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가 구석쪽 옷걸이에 양복저고리를 벗어거는데 부엌문이 사뿐 열리며 성희가 나왔다.

《네가 있었구나!》

딸은 곧추 세운 둘째손가락을 입술에 대였다.

《쉿…》 그리고는 아빠의 팔을 끌었다. 그는 영문을 몰라 어리벙벙해진채로 딸에게 끌려 부엌으로 들어갔다.

《베란다에 나가 엄마가 오나 봤어요.》

《할아버지는?…》

《아버지 방에…》

《왜 이렇게 조용하니?》

《잠이 들었어요.》

가스곤로우의 차주전자가 달랑달랑 소리를 내며 끓고 주전자아구리에서는 김이 몰몰 피여올랐다. 벌써 향긋한 차냄새가 떠돌았다.

《어째 이렇게 빨리 와요?》

《과학원이 텅 비였더라. 오늘은 금요일이야…》

《어마- 나도 깜빡…》

《잠이 드신지 오래니?》

《좀전에… 한참 이야기하는데 베개를 달라지 않겠어요. 제깍 요를 펴고 눕혀드리니 <사향가>를 들려달라지요… 록음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자 눈을 감았어요… 그런데 이상해요. 깊은 잠에 드시는것같더니 눈을 슬며시 뜨지 않겠어요. 이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눈을 뜨고 주무셔요. 아이…》

성희는 할아버지한테 느닷없이 생긴 신기한 변화가 불길한 징조로 느껴지는지 맑은 눈동자가 꼿꼿이 굳어졌다.

《이건 래력이야… 증조할아버지도 장수하셨는데 말년에 그랬다.…》

그는 딸의 걱정을 가라앉히려고 이렇게 꾸며댔지만 은근히 불안스러워 전실로 나가 방문가로 다가서 귀를 기울이였다. 딸도 따라나와 곁에 섰다. 괴괴하던 방안에서 문득 거치른 숨소리가 나고 누구하고 말하는듯 웅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성희가 아버지를 쳐다보며 한숨을 호- 내쉬였다. 류수진은 순간에 조심성을 잃고 방문을 열었다.

거구의 로인은 두활개를 쩍 벌린채 요우에 번듯이 누워있었는데 닫아놓은 창가림짬으로 새여드는 한가닥 해빛에 귀밑머리가 서리꽃처럼 반짝이였다. 수진이 조심조심 다가가 아버지의 자는 모습을 굽어보는데 로인이 눈을 번쩍 떴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버지는 부리부리한 눈을 슴벅이더니 맏이를 인차 알아보았다.

《어- 너냐…》

그리고는 한손으로 자리바닥을 짚고 끙 힘을 주더니 벌떡 일어나 앉아 록음기를 끄고 두손으로 눈을 비비적거렸다.

《그래 몸은 충실해졌나?》

아들은 한쪽무릎을 꿇고 쭈그리고 앉으며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예…》

《게 편안히 앉거라.》

이때 성희가 차잔을 들고 날렵하게 다가와 할아버지에게 권했다.

류한무는 그것을 받아 후후 불며 차물을 쭉 들이키고는 주먹으로 어깨를 뚝뚝 두드렸다.

《너는 내가 구새먹은 고목처럼 다 기울어졌다고 생각하지… 엉?》

《무슨 말씀을 그렇게…》 수진은 한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어줍게 웃어보였다.

《헌데 이자는 왜 겁먹은 얼굴로 내려다봤니? 아니라구? 너희네 인테리겐챠들은 귀맛이 좋은 소리를 할줄 안단말이야. 헛허허…》

류한무는 혈기가 살아오르는듯 얼굴이 벌개지며 껄껄 웃어대였다.

《이제 봐라. 내가 너보다 더 오래 사는걸. 얘 성희야, 그렇지? 엉?》

차잔을 접시에 올려놓던 성희가 얼굴이 확 밝아지며 대답하였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다 오래 앉아계셨으면 좋겠어요.》

《똑똑하다, 똑똑해. 우리 손녀가 제일이야. 아버지가 먼저 죽는게 싫다는게지 엉? 헛허허… 얘 성희야!》

《예?》 손녀는 할아버지를 어리광스럽게 돌아보았다.

《너희네 요술같은 의학에서는 꿈이라는걸 어떻게 보니?》

《할아버지, 그건 왜?》 어느덧 성희는 애교덩이 손녀의 말투로 묻게 되였다.

《비과학이라고 하겠지… 과학이야.》

류수진은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하였다.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오?》

아들이 대답을 피하는 눈치이자 류한무는 더 승기가 살아오르는듯 열이 올라 주장하였다.

《과학이야. 과학이구말구. 성희야, 아까 잠꼬대소리를 들었지?》

《누구하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것 같았어요.》

《옳다. 우리 련대정찰참모가 찾아왔더란 말이야. 그 친구 제대된후 지질탐사대를 지휘하다가 갔는데 30여년전처럼 새파란 대위야. 군사예술잡지에 난 내 글을 읽었는데 자기대신에 정찰중대장의 이름을 냈으면 좋았겠다고 의견을 말하거든… 정찰중대장의 공로가 더 크다고 하면서… 우리 50년대 로병들은 죽어서도 다 이래! 내가 글을 쓸 생각을 하면서 정찰참모를 내세울 잡도리를 하니까 그 친구가 꿈에 찾아왔거든. 이게 과학이 아니야?》

류수진은 론문소리까지 듣고는 아버지가 실성한것이 아닌가싶어 묵묵히 지켜보았다.

《아버지, 무슨 론문말입니까?》

《참, 너는 모르겠구나. 네가 없는사이에 하루는 구역동원부에서 찾아서 가니 나이지긋한 중좌가 반갑게 인사하며 군사예술잡지 편집원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더구나. 중좌는 우리가 51년도에 진행한 현리포위전에 대해 깊이 캐여묻더니 이제야 유명한 포위전의 증견자를 찾았노라고 기뻐했다. 포위전참가자가 직접 경험을 쓰면 더 진실하고 실감이 난다면서 자기 전투경험 <론문>을 한번 써보라는거야. 예비역상좌 군사칭호를 붙여서 내 이름을 내겠단다…》

《아버님, 이거 정말 경사입니다!》 류수진은 기뻐서 어쩔바를 몰랐다.

《허, 잘 써야 경사지. 박사선생도 좀 도와달라구. 자료는 나한테 다 있으니 문장만 다듬어주면 돼.》

《그야 물론이지요. 돕지 않구요.》

《중좌는 편집부에서 가필하겠으니 자료만 구체적으로 써내라는거야. 고맙지만… 우리 집안에서 흠잡을데 없이 써내자꾸나. 성희는 정서하고… 그 고운 글씨를 뒀다 어디다 쓰겠니.》

성희는 아름찬 희열에 두손을 마주잡으며 《할아버지!》 하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방안공기까지 설레였다.

가슴이 한껏 부풀어오른 성희가 휘파람같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이, 엄마도 들었으면…》

《어딜 갔냐? 숨지 않았나…》 하고 로인은 서리가 내린 숱진 눈섭을 익살스럽게 치켜올렸다.

이때 문소리가 나고 정녀의 기척이 들렸다. 성희가 반사적으로 일어나 전실로 얼른 나갔다. 뒤따라 부엌쪽에서 그릇소리들이 나고 칼도마소리가 가락맞게 울려왔다. 할아버지를 크게 대접할 잡도리인것 같았다.

류수진은 아버지와 단둘이 남자 부엌쪽의 칼도마장단소리를 뚝한 얼굴로 듣고있는 로인을 조심스럽게 훔쳐보며 침통한 얼굴로 말하였다.

《그새 얼마나 걱정하셨습니까. 제가 말밥에도 오르고…》

《그 문제는 후에 말해보자…》 하고 류한무는 엄엄한 얼굴로 담배를 피워 물었는데 료양소에서 돌아오자마자 싫은 소리부터 하겠느냐는 표정이였다. 그러나 수진은 언제인가는 터질 의분인데 이자리에서 꾸중이든 무엇이든 다 받자고 말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제가 부실해서 그렇게 되였습니다… 사실은 이렇게 됐습니다…》 하고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류한무는 전혀 여겨듣지 않고 뿌옇게 흐려진 눈으로 창문쪽만 잠자코 내다보다가 순간에 목이 멘듯 석쉼하게 갈린 소리로 나직이 일렀다.

《저 문을 걸어라.》

어릴적부터 지내봐서 수진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소리인지 잘 알고있었다. 자식이 문을 걸고 돌아와 앉자 류한무는 우들우들 떨며 불을 뿜는듯 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목에 바줄같은 피줄이 살아올랐다.

《아버지…》

《네가 <개편>을 지지했단 말이냐, 공감했단 말이냐?》

《그건 과장된 반영입니다.》

《과장이라구? 과장이라… 박사선생님, 대단하오. 가문의 수치야. 나도 알아볼대로 알아봤다. 수치다! 내 이 늙다리는 그렇다치고 제 당동생이… 수명이가 중앙당에 있는데 무슨 꼴이냐. 과장이라구. 무어가 과장이야?》

《과장입니다. 저는 저… 저는 그런게 아니라 질문이 제기돼서 설명해줬는데… 저 사람들은 사회주의적민주주의를 보장하기 위해 그런다고, 설마한들 사회주의제도야 무너지겠는가고 두고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고본다는게 무슨 소리냐, 엉?》

류한무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쳤다.

《그게 문제란 말이다. 풍긴게! 사람들은 풍기는걸 느꼈다. 우리 사람들의 정치적감각이… 신경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모르니? 쏘련당이 30년이나 수정주의를 해오며 우리한테 해를 줬기때문에 더하단말이다. 너를 친 그 군당책임비서가 똑똑하다. 철저하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키우신 당일군들은 다 그래… 네가 한 말에서 풍기는 사상감정때문에 문제가 생긴거라고 생각한다…》

류수진은 눈을 지그시 내리뜨고 단숨만 몰아쉬였다. 어깨가 조용히 오르내렸다.

《예전에는 이러루한 문제로 말밥에 오르던 일이 없더니 쏘련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귀가 항아리만해지거든. 류학을 갔다온지 어느 고망년이야. 30년이나 씻어냈는데도 로씨야물이 아직도 채 빠지지 않았나? 박사라… 간판이 좋지. 박사라는게 이게 뭐야. 그 두개골속에 아직도 무엇인가 남아있어. 쌍스럽게 말하면… 그 머리가 수박이라면 쩍 짜개서 잔벌레들을 털어내지 않겠나. 정말 속상한 노릇이다…》

류한무는 이렇게 한바탕 꾸짖고도 가슴이 내려가지 않았는지 담배를 피워 물었다가 꺼버리고는 계속하여 당의 신임과 배려에 대하여 내리꼽으며 철저하지 못하다고 비난하였다.

수진은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내밴 식은땀을 찍어내며 아버지의 말이 그르지 않지만 지나치다고 생각하면서도 끔쩍 못하고 듣기만 하였다.

그들 형제는 오십이 지나서도 아버지의 숙어들줄 모르는 자부심과 기상에 눌려 아이취급을 당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언제인가 안해는 같은 가내작업반에 있는 한 아주머니의 시아버지는 오래동안 부상으로 지낸분인데도 가정사에서 세대주를 내세우고 자식들의 말에 고분고분 따른다고 하며 부러워하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 집안에 저런 로인이 있으면 야단이라고 하면서 언제한번 제마음대로 해보겠느냐고 불평을 부렸다. 그때 수진은 안해를 꾸짖으며 아버지는 늙어서도 군사칭호를 가진 예비역군관이며 무관이 아닌가, 부상과는 다르다고 타일렀지만 지금은 그 하소연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 저한테도 분별이라는게 좀 있습니다. 우리 당에서는 아직도 쏘련당의 <개편>에 대하여 평가를 내린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의적으로 이렇다저렇다 해서 되겠습니까. 그래서 객관적으로…》

《객관적이라구? 수정주의를 해도 어떻다는건 무슨 소리야. 나한테도 심상치 않게 여겨지는데 너한테는 어째서 호기심이 동했니. 대국의 큰당에 대한 환상이 있기때문이 아니냐? 내 너보다 아는것은 적고 늙었지만 원칙은 시퍼렇게 살아있다. 더 생각해보는게 좋겠다. 그만하자. 오래간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저애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문을 열어라.》

수진이 문을 여니 언제부터 문밖에 와 서있었는지 성희가 근심어린 얼굴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가 무엇을 차렸는가고 입속말로 물으니 딸은 눈을 끔쩍해보였다. 류한무는 훤한 얼굴로 손녀를 내다보며 시원하게 일렀다. 《다 들어오너라. 엄마는 어째 부엌에만 배겨있느냐?》

손녀는 어리광스럽게 웃어보이며 《할아버지, 오래간만에 오셔서 좀 차리느라고… 모두 금요로동을 하지만…》 하고 말했다.

《네가 셈이 들었구나. 허허… 차린거야 어떻게 하겠니. 들여오너라.》

성희가 맥주병이며 땅콩접시, 수박 등이 놓인 작은 상을 들고 들어와 할아버지앞에 놓았다. 할아버지는 행주치마밑에 손을 감추고 문지방에 조심스럽게 서있는 며느리한테 고맙다고 하고는 내 혼자 먹겠는가고, 모두 가까이에 와앉으라고 일렀다. 아버지와 엄마가 상가까이 앉자 성희는 꿇어앉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리잔에 맥주를 부었다. 류한무는 거품이 이는 맥주잔을 들더니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다정하게 뇌이였다.

《이렇게 모여앉기도 쉽지 않구나. 성희야, 무엇을 위해 들가… 아버지건강이 회복된게 우리 가문에서 제일 기쁜 일이지… 축하해서… 자, 들자!》

그리고는 시원한 맥주를 쭉 들이켰다. 수진이도 약간 돌아앉아 따라 들었는데 그의 눈꼬리에 이슬방울 같은것이 맺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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