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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비약의 나래 제5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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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914회 작성일 21-05-1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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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3

 

창유리로 흘러드는 해발이 얼굴과 어깨에 따스한 감촉을 주었다. 정금화는 그것을 느끼며 하염없이 창문을 바라보았다. 두텁게 얼어붙은 보통강반에는 스케트를 타거나 팽이를 치는 아이들로 한벌 덮였다. 겨울철에 접어들면서 한적하던 강안유보도에도 어제와 오늘은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명절옷차림을 한 청춘남녀들이 유보도를 거닐며 새해의 희망을 속삭였다. 불타오르는 사랑의 열정에 추위를 모르는듯싶었다.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던가?… 정금화는 50대에 접어든 자기의 인생을 생각했다. 여느때는 모르고 지내다가도 명절때이면 녀성의 마지막정열기를 외로이 보내는 자기의 처지가 서글펐다. 유보도에는 자식들을 거느린 중년기나 로년기의 남녀들도 오고갔다. 그들이 부러웠다. 뜻하지 않은 병환으로 남편이 돌아간지도 10년이 넘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전연에서 군사복무를 하고있었다. 그러다보니 명절이면 늘 외로움을 느끼였다. 어제 오전에는 학교에 나가서 학생들이 준비한 설맞이공연을 보았다. 그리고 오후에는 세배를 하려고 집으로 찾아오는 제자들과 즐겁게 지냈다. 그러나 오늘은 별로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고적한 방안에 홀로 있자니 시간은 지루하게 흘렀다. 쓸쓸한 고독감이 가슴에 젖어들었다. 저절로 한숨이 터졌다. 입밖으로 내불린 하얀 입김이 창유리에 서리면서 눈앞이 뽀얗게 흐려졌다.

《주인님 계십니까?》

복도에서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번거로운 상념에서 깨여났다.

그랬으나 옆집 주인을 찾는줄로 알고 응대하지 않았다.

《계십니까?》

다시 울리는 그 목소리와 함께 가볍게 출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홀로 사는 녀자의 집이라 남자손님이 찾아오는 경우란 흔치 않았는데 분명 자기 집을 찾아오는 손님이였다.

《누구십니까?》

그는 출입문을 열고 나섰다. 복도에서 팔에 우편통신원완장을 두른 나이지숙한 남자가 서있었다.

《등기편지가 왔습니다. 여기에 받았다는 수표를 하여주십시오.》

정금화는 편지를 받았다. 리과대학 수학학부에서 공부를 하는 박상수학생이 보내온 편지였다. 그는 지난해에 무시험으로 그 대학에 입학했던것이다. 방안으로 돌아온 정금화는 서둘러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는 정성을 다해 쓴 장문의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박상수는 정다운 모교와 옛 스승들에 대한 그리움을 전하였다. 글줄우에 때이르게 안경을 낀 그의 걀숨한 얼굴이 떠올랐다. 변성기에 접어든 그의 목소리도 귀가에 다정히 울려오는듯싶었다. 다함없는 정으로 가슴이 후더웠다.

《…모교를 떠날 때 선생님은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당의 은혜를 순간도 잊지 말고 공부를 잘해서 세계적인 수학자가 되라고… 작별의 순간에 저를 바라보시던 선생님의 기대어린 눈빛을 영원히 잊을수가 없습니다.…

선생님, 모교의 다른 선생님들에게도 저의 새해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정금화는 편지를 정히 접어서 봉투에 도로 넣었다. 강좌장선생부터 어서 보여주고싶었다. 편지를 본다면 그도 누구만 못지 않게 반가와할것이다. 강좌장은 지난 가을에 환갑을 맞았다. 그때 그는 모여온 교원들에게 두개의 큼직한 지함을 열어보이였다. 그안에는 교단에 서기 시작한 때로부터 그때까지 제자들에게서 받은 편지가 들어있었다. 2천 5백여통이 넘는다고 하였다.

《교단에서 흘러간 나의 한생이 이 편지들에 비껴있습니다. 여기에는 내가 찾은 인생의 보람과 행복이 다 들어있습니다.》

강좌장은 환갑상을 대신하는 편지지함을 앞에 놓고 이렇게 말했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는 누구에게서도 볼수 없는 생의 희열과 행복이 넘쳐흘렀다.

정금화는 강좌장네 집을 찾아가려고 서둘렀다. 박상수를 비롯한 옛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심란해지는 이 저녁을 보내고싶었다. 나들이옷을 갈아입고 경대앞에서 머리를 빗었다.

《계십니까?》

아까처럼 주인을 찾는 목소리가 복도에서 울리였다. 남자의 부드러운 그 목소리가 귀에 익은듯 한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그러나 딱히 누구의 목소리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반복되였다. 옷깃을 여미고 전실로 나가 출입문을 열었다. 순간 정금화는 놀라움에 숨을 훅 들이그었다. 한손에 가방을 든 고중환이 밖에 서있었다.

《새해를 축하합니다.》

고중환이 정중한 표정으로 먼저 새해인사를 하였다. 그제서야 정금화는 당황한 나머지 인사가 뒤바뀌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새해에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머리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를 보낸 정금화는 어리둥절한 눈길로 상대의 낯빛을 살피였다. 무슨 일로 찾아왔을가? 도무지 그 까닭을 짐작할수 없는 뜻밖의 방문이였다.

《설날이지만 혹 학교에 있을가 해서 전화를 걸었더니 집에 있다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워낙은 학교에서 공식적으로 만나려고 하였는데 하는수없이 집으로 왔다는 뜻이였다. 그 무슨 오해를 피하려는것 같았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정금화는 방석을 권하고나서 부엌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모처럼 명절에 방문한 손님을 위해 상을 차리려 했다. 그러나 그 눈치를 차린 고중환이 한사코 막아나섰다. 정금화는 할수없이 그와 마주앉았다.

고중환이 가방속에서 록화필림을 꺼냈다.

《선생이 시험관으로 나간 소학교학생들의 속셈경연을 수록한 필림입니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설기념품으로 보내주시는것입니다. 실은 어저께 전해야 하는건데 시간이 없었습니다.》

아, 이런 일이 있을줄이야! 정금화는 두손으로 정중히 록화필림을 받았다. 감사의 정이 가슴에 끓어올랐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저의 고마운 심정을 전해드려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고중환은 한순간 그 무엇을 망설이는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선생이 우리 애도 다음번 국제수학올림픽에 출전시킬 대상자후보로 지목했다는데 과연 그럴만한 실력이 그 애한테 있습니까?》

학부형으로서 자연스러운 물음이였다. 하지만 무엇때문인지 가볍게 붉어지는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힘겹게 물었다. 혹시 아버지의 배경때문에 자격이 없는 학생을 선발했다고 생각하는것이 아닐가? 정금화는 자기의 교육자적공정성이 의심을 받는듯 하여서 다소 불쾌한 생각이 치밀었다.

《향미학생을 대상자후보로 선정한것은 저 혼자의 결심이 아닙니다. 강좌에서 여러차례 시험을 쳐보고 집체적인 토의로 선발했습니다. 향미학생은 수학적두뇌가 비상합니다. 문제는 그 학생에게 가정일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공부에만 전심할수 있는 조건을 지어주는것입니다.》

정금화는 마지막말에 힘을 주었다. 가정일에서만 완전히 벗어나게 한다면 그다음 일은 학교에서 책임을 진다는 의미였다.

《나도 그 어린것에게 몇해동안 부엌일을 맡겨두는것이 애처롭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두고 좀 생각을 해왔는데…》

고중환은 말끝을 감추며 눈길을 떨구었다. 어찌하여 그렇듯 주저하며 거북해하는것일가? 정금화는 직급상으로 높은 그가 자기앞에서 지금처럼 옹색한 몸가짐을 하는걸 보니 난처한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청중앞에서도 자연스러운 자세로 론리가 명백한 연설을 하던 그가 이름없는 한 녀교원앞에서 말을 번지기 어려워한다는것을 상상할수 없었다. 어색한 그의 태도에 은연중 자기의 마음도 긴장해지는것을 느끼며 응대했다.

《부부장동지의 경우에야 그 문제를 해결하기가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인차 재취를 하십시오.》

《정금화동무.》

고중환이 볼을 쓰다듬던 손을 내리우고 눈길을 들었다. 갑자기 《선생》으로 부르던 호칭이 《동무》로 바뀌여졌다. 정금화는 순간 숨이 막히는듯 해서 그를 마주보기만 했다. 스미듯이 안겨오는 상대의 눈빛에 자극된 심장이 그 어떤 예감에 잔잔히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중환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나는 재혼문제를 두고 그 누구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도 향미의 의견을 고려했습니다. 동무도 이 점을 충분히 리해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애는 오래전부터 동무를 새 어머니로 모시고싶다고 하였습니다.》

정금화는 놀라움에 눈을 빛내이였다. 수학문제를 가르쳐줄 때마다 그윽히 바라보던 향미의 눈동자에 교원에 대한 존경심만이 아닌 그런 기대가 숨겨져있을줄이야! 그 나이로서는 보통 생각할수 없는 일이였다. 정금화는 반응을 기다리는 고중환의 시선을 피하며 입속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저로서는 너무도 뜻밖입니다.》

《그럴수 있겠지요. 사전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이런 말을 하는 나를 리해해주시오. 이미전에 제3자를 내세워서 동무의 심정을 알아볼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소문만 웃음거리로 남게 될것입니다.》

어느덧 마음을 진정한 고중환은 말을 순조롭게 번지였다. 하지만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한 정금화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부부장동지, 저같은 녀성에게 련정을 품고 찾아온 사실자체를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런 말을 하고싶었으나 어찌된셈인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두고 잠들어버렸던 이성에 대한 감정이 폭발하면서 리성이 흐려질 정도로 그의 머리속을 휘저어놓았다 . 그는 침묵했다. 녀성과의 교제에 경험이 없는 고중환은 그 침묵을 달리 리해했다.

《동무가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조금도 나쁘게 생각지 않겠습니다. 결혼이란 어디까지나 평등한 두 인격의 결합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한쪽의 요구에 다른쪽이 마지못해 순응하는것과 같은 일은 절대로 있을수 없습니다.》

《아니, 그런게 아니라 갑자기 닥친 일이고보니…》

정금화는 당황한 기색으로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렇다면 후에 조용히 나한테 결심을 전해주십시오.》

두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있었다. 높아진 숨결소리만이 크지 않은 방안의 공기를 애모쁘게 뒤흔들었다. 정금화는 첫사랑의 고백을 듣던 처녀시절보다도 몇갑절 더 흥분된 감정에 휩싸이는듯 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깊이 숙이였다. 장년기녀인의 마지막정열은 때로 처녀시절보다 훨씬 더 강렬해지는가싶었다.

《그럼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고중환은 옆에 벗어놓았던 모자를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벌써 가시다니요?》

정금화는 따라일어서며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상대는 할말을 다했다고 일어서지만 자기쪽에서는 이제부터 하고싶은 말이 많은듯이 생각되였다. 그런데 마침 고중환이 이렇게 말했다.

《어데 나가려던 참인것 같은데 함께 나서지 않겠습니까?》

《네, 저도 동성동에 있는 우리 강좌장선생댁엘 가려던 참이였습니다.》

《그럼 마침 잘됐습니다. 우리 집도 그쪽에 있으니 밖에 나가 기다리겠습니다.》

고중환은 밖으로 나갔다.

정금화는 연황색솜옷을 찾아입고 은백색수건을 머리에 썼다. 박상수의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집을 나서니 어느새 밖에는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어스름속에서 두릿거리던 그는 아이들의 놀이터옆에 서있는 고중환을 발견하고 총총히 다가갔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를 밖에 세워둔 시간이 몇분이나 되였는지 알수 없었으나 무척 오래 기다리게 한것 같이 생각되였다.

《녀성들과 함께 떠나자면 기다릴줄 알아야지요. 녀성들이란 어데를 가나 떠나는 준비가 소홀하지 않지요.》

고중환의 헌헌한 응대에 정금화는 소리없이 웃었다. 그들은 골목길을 에돌아서 보통문쪽으로 뻗은 대통로의 보도에 나섰다. 거리에는 가로등이 켜지고 고층건물의 옥상들에서는 장식등이 명멸했다. 새해를 축하하는 탑들과 그림판들이 가로등의 휘황한 불빛속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틀동안 계속된 설휴식의 어느때보다도 지금은 거리에 오가는 사람들이 적었다. 대체로 이 저녁에는 래일의 새해 첫 출근을 위해 휴식을 하였다.

정금화는 고중환과 나란히 걸으면서 설휴식이 아쉽게 끝나가고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마음은 비로소 설분위기에 잠기는듯싶은데 이미 많은 시간이 고독하게 흘러가버리고 지금은 마지막 몇시간을 남기고있었다.

어느새 보통교를 건너서 보통문을 가까이하고있었다. 그들은 침묵속에 걸었다. 정금화는 자기의 심정을 실토하고싶었지만 여전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눈이 다져진 보도우에 굽높은 구두가 미끄러졌다. 비틀거리는 몸이 고중환의 어깨에 부딪쳤다. 고중환이 얼른 손을 뻗쳐서 그의 팔굽을 잡아주었다.

《조심하시오. 길이 미끄럽습니다.》

잡았던 팔굽에서 손을 떼며 고중환이 하는 말이였다. 정금화는 웬일인지 심장의 박동이 높아지는것을 의식했다. 얼핏 시선을 들어 고중환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곧바로 앞을 바라보는 그의 낯빛은 덤덤한듯 한 기색이였다.

청혼을 하였던 사실을 영원히 되살릴수 없는 과거로 치부해버리는것이 아닌지… 이제 그의 집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네거리교차점에 이르면 고중환의 집으로 꺾어드는 갈림길이 나타난다. 거기서 헤여져야 하는것이다. 서로의 심정을 숨김없이 나누기 위해 그 거리를 아득히 먼곳까지 연장하고싶었다. 하지만 한본새로 내여짚는 발걸음은 얼마 남지 않은 그 거리를 사정없이 줄여가고있었다. 자기의 의사에 따라서가 아니라 어떤 타률적인 힘에 의하여 헤여지는 순간을 앞당겨오는듯 하였다.

《아버지―》

그들은 동시에 와뜰 놀라며 소리나는쪽으로 머리를 돌리였다. 지하건늠길입구에 향미가 서있었다.

고중환은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향미도 아버지곁에 선 정금화를 발견하고는 일순 거북해하는 눈치였다. 빨간 장갑을 낀 손으로 입술언저리를 가리우며 두눈을 올롱하니 떴다. 지하도에서 빠져나오는 걸음으로 아버지만을 띄여보고 반겨 불렀던것이다. 아버지가 정금화와 함께 걷는줄 알았다면 자리를 피하였을것이다.

《너 어데 갔댔느냐?》

훗훗해오는 덜미를 문지르며 다가간 고중환은 애써 범상한 어조로 물었다.

《학급동무들과 함께 연극구경을 갔댔어요.》

건성 대답을 한 향미는 이런 정황에 부딪친 자기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깨달은듯 아래입술을 깨물더니 조금 떨어져있는 정금화에게로 달려갔다.

《선생님, 새해를 축하합니다.》

공손히 머리숙여 설인사를 하고난 그는 무작정 정금화의 팔을 잡았다.

《우리 집으로 가시자요.》

《고마와요. 그러나 난 지금 강좌장선생님네 집으로 가는 걸음이예요.》

《전 선생님을 그냥 보내지 않겠습니다. 설날인데 잠시라도 우리 집에 들렸다 가십시오!》

향미는 두손으로 힘껏 정금화의 팔을 이끌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결심이 얼굴에 비끼였다. 정금화는 고중환의 눈치를 살피였다.

《우리 집에 들렸다 가시지요.》

인사치레로 건늬는 말처럼 억양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주보는 눈빛에는 은근한 기대가 숨겨져있었다. 정금화는 녀성의 예민한 감각으로 그것을 포착했다.

《선생님, 어서 가시자요!》

향미가 애원했다. 정금화는 마지못해 이끌리듯 몸을 뒤로 약간 젖히고 지칫거리며 첫 자국을 떼였다. 그러나 다시 내딛는 발걸음은 땅에 닿지 않는듯 한 느낌이였다.

세사람은 중앙당청사쪽으로 뻗은 도로옆 보도를 걸었다. 정금화와 그의 손목을 잡은 향미가 한걸음 앞섰다.

그들은 집에 이르렀다.

향미는 서둘러 부엌으로 나가더니 저녁상을 들여왔다. 크지 않은 두리반에 설음식들이 올랐다. 향미는 명랑한 기색으로 옆방에 있는 아버지를 불러오고 정금화의 손목을 이끌어 두리반옆에 앉히였다. 그리고는 두개의 유리잔에 빨간 포도주를 따라서 그중 하나를 집어들고 일어섰다. 그 술잔이 자기에게로 향해지자 정금화는 당황했다.

《아니, 아버지부터 드려야지.》

《아버지한테는 설축배잔을 어제 아침에 드렸습니다. 선생님, 어서 받으십시오.》

정금화는 하는수없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선생님, 저는…》

말끝을 감추는 향미의 동실한 얼굴에 애절한 빛이 흘렀다.

똑바로 마주보는 두눈은 물기를 머금고 삼박거렸다. 뒤말을 잇지 못한 입술은 차마 터놓을수 없는 마음속의 애원을 뇌이는듯 연신 방싯거렸다. 정금화는 귀로써가 아니라 심장으로 언어를 초월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설명할길 없는 감정으로 온몸이 후덥게 달아올랐다. 향미의 떨리는 손에 떠받들린 술잔이 턱밑으로 다가왔다. 말없이 받아서 옆으로 목을 돌리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가느다란 손잡이에 원형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투명한 축배잔은 어지간히 크기도 하였고 거기에 담긴 포도주도 도수가 높았다. 평생 그렇게 많은 술을 처음으로 다 마시였다. 어느덧 머리가 핑 도는 가운데 향미를 쓸어안고 모성의 애무를 퍼붓고싶은 욕망이 가슴에 북받쳐올랐다. 하지만 자신을 억제하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세사람은 저녁식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왜서인지 서로 바라보기가 서슴어져서 누구도 머리를 들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수저를 놀릴뿐이였다.…

그로부터 10여일이 지난 일요일 저녁에 고중환과 정금화는 간소한 결혼식을 가지였다.

틈을 내여 참석하신 김정일동지께서 그들의 행복을 축하해주시였다. 그러신 다음 향미의 어깨를 두드려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내가 오래동안 마음을 써오면서도 풀지 못했던 문제를 네가 풀어주었구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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