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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평양은 선언한다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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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912회 작성일 21-07-19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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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나 중앙통신사처럼 국제문제연구소의 창문들에도 밤깊도록 불빛이 꺼질줄 몰랐다.

12월 25일, 저녁 7시 35분 크레믈리에서 사회주의련맹국가의 상징인 마치와 낫이 그려진 붉은기가 내리워진것, 20세기가 저물어가고 21세기가 가까이에 바라보이는 인류사의 그 언덕에서 70여년간 존재한 《사회주의초대강국》이 물먹은 담벽처럼 맥없이 허물어진것은 세계를 진감시킨 충격적인 사변이 아닐수 없었다.

하여 평양의 국제문제연구소도 련일 낮에 밤을 이어 세기말의 이 사변과 관련된 자료들을 종합분석하고 예측되는 정세발전추이에 대한 견해까지 첨가하여 당중앙위원회에 거듭 보고하였다.

한석비서가 그이의 집무실에 가있던 바로 그 시각에도 류수진박사는 자료속에 묻혀있었다.

밤이 깊어 아래일군들은 거의다 퇴근하고 연구소안에는 괴괴한 정적이 깃들어있었다. 이따금 복도에서 다급한 발자욱소리가 들리고 문들이 여닫기는 소리가 날뿐…

류수진은 통신자료들이 더미로 쌓여있는 책상에 마주앉아 밤이 깊어가도록 일어설줄 몰랐다. 그는 내용별로 골라낸 통신자료들을 한장한장 번져가며 정신없이 읽어나갔던것이다.

에이피, 유피아이, 로이터, 신화, 이따르-따스, 교또, 라띠나 쁘렌싸를 비롯한 세계 권위있는 통신사들이 사회주의가 좌절된 나라들의 사회상을 보도하고 론평한 자료들이였다.

…사회주의제도가 전복되자 수백수천만 민중의 가슴속에서는 사회주의리념에 대한 신념이 다 허물어졌다.

의탁할데가 없어 정신적방황을 하는 사람들은 앞날에 대한 불안감, 공포감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종교와 미신을 믿기 시작했다. 종교와 미신은 《정신적인 안식처》로 되고있다.

그리하여 종교와 미신을 믿는 사람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어느 한 나라에는 지금 8천여개의 종교단체가 있다.

사상적인 타락, 물질생활의 궁핍으로 인한 절망감으로부터 자살자들이 급격히 늘어나고있다. 어느 한 나라의 자살건수는 10만명당 26명으로서 미국의 2배이상, 영국의 3배나 된다. 미성년들의 자살건수는 4~5년사이에 4배, 5배이상으로 늘어나고있다.

사회주의시기 사람들은 앞날에 대한 희망을 안고 락천적으로 살아왔으며 자살에 대하여는 사회와 집단에 대한 배반으로,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행위로 여겨왔다.

그러나 오늘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행위를 고통을 면하고, 사회와 집단, 혈육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생을 깨끗이 마무리하는 선행으로 간주한다.

지난날 마약이라는 말조차 모르던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복귀되자 마약에 취해 넉없이 돌아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온갖 범죄를 다 저지르고있다. 그들은 마약을 인생의 고뇌를 잊고 한순간의 《행복》과 《향락》을 한껏 맛볼수 있게 하는 환상적인 명약으로 생각한다.

어느 나라에나 마약사용자들이 수백만에 이르고있다.

《검은 사회의 유령》이라고 하는 범죄집단이 사회의 모든 부문에 마수를 뻗쳐 매일과 같이 무시무시한 범죄사건들이 일어나고있다.

이 범죄집단들은 인사문제로부터 정보수집에 이르기까지 자체의 정연한 체계와 행동질서를 가지고 경찰이며 검찰기관은 물론 국회와 정부까지 끼고 활동한다.

《검은 사회의 유령》들은 개인기업, 국영기업, 합영기업들을 통제하고있다.

무장강도단들이 도처에 활동하고있다. 어느 한 나라에서는 이런 범죄집단들이 가지고있는 무기가 150만정이다.

사회주의가 죄절된 모든 나라들에서 매춘영업이 성행하여 수도로부터 지방들에 이르기까지 어디에나 유곽들이 생겨났다.

각종 신문들과 라지오, 텔레비죤방송으로 매일 《녀성봉사》광고를 내여 사람들을 타락의 길로 떠민다. 한 나라 수도에서는 매춘부들을 나이와 용모에 따라 국제매춘부, 고급매춘부, 정거장매춘부, 거리매춘부로 구분하는데 정거장과 거리 매춘부들속에는 늙은이들도 있다. 13살짜리 소녀도 있다.

식인종들까지 나타나고있다.

류수진은 자료를 읽다가 몸서리를 치며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였다.

(아!…)

괴괴한 정적이 흐르는 밤 어느 구석 어스름속으로부터인가 파충류의 랭기가 스며드는듯 싶었다.

박사는 책상곁 쏘파에 옮겨앉아 피기가 가신 얼굴로 담배를 피웠다.

그는 담배연기를 깊이 들어켰다가 한숨과 함께 조용히 내불며 저 범죄사건들이 사회변혁과 동란의 혼란속에 있기마련인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부패하고 극악무도한것이라고 생각했다.

(저 범죄의 창궐과 포악성에 자본세계의 본성이 전혀 반영되여있지 않다고 누구나 말하기가 어려울것이다.… 저것들이 파충류의 포악성과 과연 무엇이 다른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문이 열리며 한석비서가 들어왔다.

그는 박사와 인사를 나누고 사업정형을 몇가지 료해한 다음 지도자동지의 말씀을 전달하였다. 그리고는 격정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한테도 책임이 있지만… 연구소가 당중앙의 의도에 맞게 사업하지 못했소…》

류수진은 순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사업방향을 180°도로 돌려야 하겠소!》

한석비서는 한시간남짓 더 앉아있으며 새로운 연구방향에 따르는 대책문제를 토론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진은 밖에까지 따라나가 그를 바래우고는 흩날리는 눈발속에 넋없이 서있었다. 엄습해드는 자책감이 가슴을 저미였다. 그렇다. 과연 그렇다. 오늘에 와서 저 타락상이나 종합분석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내 충실성이란 얼마나 허황한것인가. 나는 그이뜻을 몰랐다. 김정일, 그이를 몰랐다. 그래서 과오를 범했다.…

박사는 그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새로운 방향에서 통신자료들을 모조리 뒤져보았다.

이튿날, 그 이튿날도…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이렇다할 움직임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연구소의 의뢰를 받은 재외대표부들에서도 소식이 감감하였다.

새 소식을 기다리고계실 그이를 생각하면 가슴에서 불이 이는듯 했다.

그는 직접 국제전화로 재외대표부들에 알아도 보고 라지오앞에 앉아 주파수를 조절하며 여러 나라의 방송보도에도 귀를 기울였다.

모든것이 허사였다.

어느 나라 방송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움직임에 대하여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절망에 빠졌다.

어느날 밤, 자정이 썩 지나 퇴근길에 나선 그는 전차를 기다리지 않고 인적이 없는 길을 걸어가며 괴로움에 모대기였다. 문득 아무런 소식도 없는것이 비감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슴을 쳤다. 비감…

그렇다. 비감때문이다.

사회주의가 좌절된 모든 나라 공산주의자들의 비감…

홍수처럼 범람하는 비감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이고있지 않는가.

그 트레트레 흐린 비감의 격류가 사람들의 의지와 신념을 휩쓸어버리고있다.

옥류교에 들어선 그는 한손으로 란간을 잡고 강바람에 외투자락을 날리며 주체사상탑쪽을 바라보다가 흠칫 놀랐다.

탑의 앞쪽에서 한분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고있었던것이다.

저만치 떨어진데 서있는 승용차, 그 뒤에 그린듯이 서있는 호위부관이나 보좌성원인듯 한 사람… 분명히 그이이시였다.

온 누리가 잠든 이밤 무슨 시름에 겨워 저리도 끝없이 거닐고계시는가…

그는 김정일동지를 알아본 순간 자기네가 드려야 할 자료보고를 기다리다가 밖으로 나오신것 같아 가슴이 저려들었다. 탑앞에서 거니시는 그이를 바라볼수록 못견디게 괴로와 쇠란간우에 고개를 숙이며 몸부림쳤다.

(지도자동지, 아무 소식도 없습니다!)

그는 어떻게 옥류교에서 내려와 그이쪽을 향해 달려가게 되였는지 알지 못했다.

한 젊은이가 앞을 막아섰다.

《돌아가주십시오.…》

류수진은 황황히 자기 신분을 밝히고 그이께 말씀드릴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래일 말씀드리면 되지 않습니까. 미안하지만… 사색을 방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수진이 그제야 자신의 경솔성을 느껴 돌아서는데 김정일동지께서 그를 알아보시였다.

《부소장동무!》

류수진은 그이께로 달려가 인사를 올리고는 가슴에서 끓어번지는 괴로운 심정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사회주의가 좌절된 저 나라들에서 견결한 공산주의자들까지 모두 비감에 빠진것 같습니다. 주목할만 한 움직임이란 없습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신중한 안색으로 들으시고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그들이 어떤 비극을 체험했습니까. 20세기 최대의 비극이라고도 할수 있지요. 지금은 절망감, 비감에 잠겨있지만 이제 일어설것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습니까?》

수진은 퇴근하는 길에 여기 계시는것을 보았다고 말씀드리였다.

그이께서는 학자의 팔목을 부드럽게 잡으며 피곤하지 않으면 좀 걸으면서 이야기하지 않겠느냐고 하시였다. 눈이 얇게 깔린 화강석바닥을 따라 가락맞게 옮겨지는 발자욱소리… 장명등의 환한 불빛… 그이께서 나직히 물으시였다. 자본주의가 복귀된 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재건운동이 일어날것 같은가, 일어난다면 언제쯤에 가서 그 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질것인가고…

《사회주의리념이 진리이기때문에 반드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제국주의자들은 쏘련의 붕괴가 사회주의에 완전한 종말이 왔다는것을 론박할 여지없이 증명한다고 떠들고있지만 반드시 재건운동이 일어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그거야 그렇지요.》

《그런데… 자본주의가 복귀된 저 나라들에서 대중이 자본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다시 새롭게 깨닫자면 일정한 력사적기간이 필요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일정한 력사적기간이라… 그러니까 세월이 퍽 지나가야 재건운동이 일어날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반드시 그런것은 아니지만… 한두해의 체험으로는 기만당한 인민대중이 철저히 각성할수 있겠는가 해서…》

나란히 걸어가며 허심탄의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령도자와 학자의 머리우로 눈송이들이 반짝이며 날아내렸다.

이튿날 김정일동지께서는 통일거리 건설장을 현지지도하며 큰 충격을 받아 돌아오시는 길에서도 사색에 사색을 이어가시였다.

그이께서는 자부심에 넘쳐 마음속으로 웨치시였다.

(보라! 우리 인민은 남들이면 십년은 걸려야 하는, 한개 도시 맞잡이인 저 통일거리를 불과 2, 3년만에 일떠세웠다! 우리 나라에서는 남들이 수백년이 걸렸다는 공업화의 과제도 14년동안에 해제꼈다! 사회주의재건운동도 혁명의 주체인 인민대중을 어떻게 각성시키고 조직동원하는가에 달려있다. 오늘 사회주의가 좌절된 나라 공산주의자들과 인민대중은 좌절감, 절망감에 빠져있다. 신념을 잃었다. 동유럽뿐아니라 쏘련에서까지 사회주의가 전복되고 자본주의가 복귀된 사실… 그것도 거의 평화적으로 전복되고 평화적으로 복귀된 사실이 사회주의리념이 비과학적인 망상이라는것을 웅변으로 증명해주는것 같기때문이다. 때문에 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된 근본원인을 똑바로 밝혀주어 사회주의사상에 대한 신념부터 되살려야 한다. 바로… 바로 이것이 급선무의 과제이다!)

승용차는 흩날리는 눈발속을 살같이 내달렸다.

묵은해의 마지막날 밤과 새해의 설명절날밤에도 그이의 집무실과 서재에서 불빛이 꺼질줄 몰랐다. 당중앙위원회에서 그 까닭을 아는 사람은 한석비서와 강태혁비서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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