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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평양은 선언한다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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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718회 작성일 21-07-26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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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대표단은 예정대로 숙소를 떠나 송탄으로 향하였다. 류수진과 라옙쓰끼는 도당책임비서의 차에 타고 리지야 꾸즈네쪼바와 대표단원들은 뒤차들에 앉았다.

차가 송탄으로 들어가는 산골길에 들어서자 류수진은 언제인가 자기한테 날카로운 질문을 했던 군당책임비서, 그 호남아인상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쏘련은 붕괴되였으며 자기는 그 페허에서 온 대표단을 이끌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그 책임비서가 있는 군으로 찾아간다고 생각하니 운명의 필연적인 귀결이란 이런것이 아닌가싶으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와서 그한테 편지를 썼고 회답편지도 받았지만 이제 만나면 여간 면구스럽지 않을것 같았다.…

차가 산비탈길을 달리면서 차창밖으로 이끼오른 석축이며 깍아지른듯 한 바위벼랑, 해묵은 가로수들이 날아지나가자 그런 생각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무거운 시름과 불안감이 가슴을 옥죄였다.

군당책임비서가 군을 어떻게 꾸렸으며 경제형편은 어떠하며 인민생활은 어느 정도 펴이였는가, 성과이든 부족점이든 보자는것은 다 보여줘야 하지만 감정상으로는 하나의 흠도 보이고싶지 않았다.

더우기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집요하게, 밉살스럽게 파고드는 라옙쓰끼한테는 티끌만한 허점도 보이고싶지 않았다. 운전사옆에 앉은 류수진은 뒤자석의 박윤식책임비서와 라옙쓰끼가 주고받는 말을 통역하면서도 그에 대한 걱정에서 한시도 벗어날수 없었다.

군당책임비서 차영진은 늘 입고다니던 수수한 옷차림으로 군당청사의 뜨락에 서있었다.

그는 차에서 내린 손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는 류수진박사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손을 힘있게 잡아쥐며 평양에 올라가면 한번 들리자고 했는데 이 두메산골로 먼저 내려왔다고 떠들썩하게 소리치며 기뻐하였다.

손님들을 경시하는듯 한 그의 이런 환희에 도당책임비서도 어지간히 당황해하였다.

로씨야손님들은 자기들이 뒤전으로 밀려났다고 생각하는지 시무룩해지거나 호기심어린 눈으로 두사람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그날 차영진은 로씨야손님들에게 농장밭이며 논, 다락밭, 뽕나무밭, 온실, 지방산업공장들, 리발관, 목욕탕, 학교, 병원, 유치원, 탁아소, 체육관, 살림집, 지어는 부엌과 창고, 배놀이터까지 죄다 보여주었는데 류수진은 그가 우리 생활을 너무 지나치게 열어보이면서 숱한 흠을 드러내는것 같아 불만스러웠고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그는 내내 라옙쓰끼에게 마음을 쓰게 되였다.

리지야 꾸즈네쪼바는 산간벽지에 이런 현대적이고 문화적인 소도시가 있는줄은 몰랐다고 하며 가는곳마다에서 감탄하였지만 라옙쓰끼는 내내 심각하고 침울한 얼굴로 보고 듣기만 할뿐 찬탄은 고사하고 린색한 긍정의 소리 한마디 없었다. 나가서 그 어떤 적의나 원한, 조소에 가까운 차거운 빛이 파란 눈에 어리는것 같았다.

대표단이 송탄호를 돌아보고 내려올 때 뜻밖의 일이 생겼다. 산기슭의 봉긋한 분묘앞에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는 소복단장의 녀인을 보더니 라옙쓰끼가 저 녀성을 만나야 하겠다고, 그것도 혼자서 만나고싶다고 제기하였으며 수진이 어쩔사이 없이 차영진이 그렇게 하라고 대답해버렸던것이다. 도당책임비서도 얼굴빛이 달라졌다.

수진은 황급히 조선풍속에 고인의 안식을 비는 상제를 함부로 건드리는것은 실례라고 이르고 리지야 꾸즈네쪼바까지도 그냥 내려가자고 만류하였지만 라옙쓰끼는 자기네 통역원을 불러데리고 묘쪽으로 갔다.

영진이 흔연한 얼굴로 그들을 안내해주고 돌아왔을 때 류수진은 난감한 얼굴로 누구의 묘이고 녀인은 고인과 어떤 관계인가고 물었다. 군당책임비서는 세멘트공장 지배인으로 있던 주상민의 묘지이고 녀인은 그의 안해인데 오늘이 제사날이라고 하면서 고인에 대하여 대충 이야기하였다.

오후에 라옙쓰끼는 군당책임비서와 두시간남짓 이야기하였다.

대표단이 송탄읍을 떠나 도소재지방향으로 나갈 때 라옙쓰끼는 들어올 때보다 얼굴빛이 더 어두웠으며 이따금 한쪽 볼편을 푸들푸들 떨며 인상이 험악해졌다.

어느덧 차들은 평양방향으로 뻗은 대도로에 나서 줄지어 달리였다. 도로의 량옆에 두줄로 늘어선 애어린 가로수들이 길손을 반기며 달려오고 흙먼지 한점 없이 깨끗하고 반듯한 포장길이 일매진 흐름을 이루어 미끄러져와 차체밑으로 사라지군하였다.

문득 라옙쓰끼가 새로 닦은 길이냐고 박윤식책임비서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이 길에는 깊은 사연이 깃들어있습니다. 좀 보고 가지 않겠습니까?》

차가 서서히 멎어섰다. 박윤식이 차에서 내리자 류수진이도 따라 내렸다. 뒤차들이 멎어서고 리지야 꾸즈네쪼바와 대표단원들이 차에서 내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진 얼굴로 다가왔다. 박윤식은 손님들에게 길을 새로 닦게 된 경위며 도로공사과정에 있었던 가슴뜨거운 사실들을 흥분한 어조로 이야기하였다.

《현지지도로정이 7만 5천여리라는건 어떻게 압니까? 자로 재여 봤습니까?》 하고 라옙쓰끼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우리 인민들이 자기네 고장에 오셔 걸어다니신 길이 얼마라는것을 다 알고있었습니다. 그것을 도적으로 종합하니 7만 5천여리… 3만여Km로 되였습니다.》

손님들은 술렁거리였다.

《도로가 유리판처림 반듯하고 아주 깨끗해요!》 하고 리지야 꾸즈네쪼바가 말했다. 그 녀자는 라옙쓰끼의 찌르는듯 한 물음에 대하여 사죄하는듯 다정다감한 눈매, 상냥스러운 목소리였다.

《예… 우리 당원들과 인민들이 수령님의 만수무강을 위해 정말 정성을 다해 닦았습니다.… 비오나 눈오나 매일 이 길을 깨끗이 쓸어놓고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로씨야에는 이런 길이 없어요.…》

《오전에 본 묘지에 누워있는 주상민동무처럼 감사의 마음을 담아 로반에 자갈을 펴고 모래를 깐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제철소 지배인의 안해 강미옥이도 오고 로병들도 오고… 그야말로 이 길에는 우리 인민들의 만수축원의 마음이 깔려있습니다.》

《주상민이 림종전에 와서 자갈을 폈다는 자리가 어딘지 우리한테 보여줄수 없습니까?》 하고 라옙스끼가 또 물었다. 박윤식은 어렵지 않게 백여메터 아래쪽에 서있는 도로표식을 가리켰다.

《저기 저 표식판앞입니다. 가봅시다.》

손님들은 도당책임비서를 따라 그쪽으로 우르르 밀려갔다. 박윤식은 표식판앞 포장도로복판으로 걸어가 길바닥을 향해 원을 크게 그려보이며 여기 바로 이자리라고 설명하였다. 로씨야사람들은 그 둘레에 모여서서 경건한 얼굴로 길바닥을 굽어보기도 하고 저희들끼리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이밑에 그가 편 자갈이, 그의 마음이 깔려있지요.》 하고 박윤식이 설명하자 리지야 꾸즈네쪼바가 앉아 두손으로 길바닥을 쓸어만져보다가 목메인 소리로 속삭이였다.

《아이, 따뜻해요… 따뜻해요.》

수진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주상민의 심정이 뜨겁게 안겨와 그 길바닥에서 눈길을 뗄수 없었다. 로씨야손님들도 왁작 떠들며 그 녀자가 쓸어만진 자리에 손바닥을 대보고 여기저기 다른데도 짚어보았다. 어느 누구도 해볕에 따뜻해져 어디나 다 같다고 까밝히지 않았으며 모두 감동된 얼굴로 박윤식을 보며 이것저것 말을 건네였다.

그러나 라옙쓰끼만은 섭쓸리지 않고 바지주머니에 두손을 찌른채 머리를 수굿하고 도로중앙선을 따라 성급히 왔다갔다 거닐었다. 바람결에 날리는 은발이 그의 이마 절반을 내리덮었다. 차겁게 번뜩이는 눈, 푸들푸들 떠는듯 한 볼편… 왜 저러는가? 저것은 주상민에 대한… 우리 인민들에 대한…이 길을 닦은 사람들의 신성한 감정, 충성심, 우리 인민들의 가치관에 대한 랭소가 아닌가. 수진은 울기와 분기가 욱 치밀어 머리속에 지끈지끈 쑤셨다.

리지야 꾸즈네쪼바가 무엇을 느꼈던지 그에게로 다가와 사죄의 표시인듯 한손을 꼭 잡아쥐며 저 독설가는 정상이 아닌데 자기도 까닭을 모르겠노라고 속삭이였다.

대표단이 그자리에서 박윤식책임비서와 헤여지려는데 라옙쓰끼가 다가와 그의 손을 힘껏 잡아쥐며 고맙다고 하였다. 의례적인 인사인것 같았다.

일행이 평양으로 떠날 때 다심한 리지야는 수진을 떠밀다싶이하여 자기 차에 태우고 라옙쓰끼의 참관소감을 취재하겠다고 하면서 앞차로 걸어나갔다.

차들은 바람소리를 울리며 살같이 내달렸다. 류수진은 내내 운전사의 어깨너머로 앞에서 해빛을 번쩍번쩍 반사하며 기운차게 달리는 라옙쓰끼의 차만 지켜보았다. 착찹한 생각에 잠겨…

앞차에서는 그 녀자가 라옙쓰끼의 심중을 알아볼수도 있고 부드러운 충고를 줄수도 있었다. 문득 참관이 끝난 다음 시간을 내여 그와 진지하게 이야기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앞차를 그냥 내다보며 이제 마주 앉으면 반드시 불꽃이 튈 론쟁을 상상해보았다.

옆으로 날아지나가는 리정표들은 벌써 중화에 거의 왔다는것을 보여주나 수진의 생각은 끝없이 날아가고 라옙쓰끼의 차는 그의 생각에 쫓기듯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수진이 앞차만 내다보는데 해빛의 조화인지 그 차의 천개우에서 불꽃들이 흩날리며 차체가 움씰거리는듯 하더니 차가 길옆으로 미끄러져나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뚝 멎어섰다. 수진은 차를 세우고 길가에 나섰다.

그때 앞차문이 벌컥 열리며 검은 옷차림의 리지야가 뛰여나와 머리칼을 날리며 그한테로 달려왔다. 그 녀자는 가슴앞에 쳐든 두손을 화들화들 떨며 소리를 질렀다.

《라옙쓰끼-가-》

《뭐요?》

《졸도… 졸도했어요!》

류수진은 몸을 날려 앞차로 뛰여갔다. 차문들을 다 열어놓은 운전사가 뒤좌석에 번듯이 누워버린 라옙쓰끼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치고있었다. 백지장처럼 새하얀 얼굴, 검푸르게 빛이 꺼진 입술, 반쯤 내리뜬 눈안에 번들거리는 물기…

수진은 곁에 온 리지야에게 차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아무일… 아무일도 없었어요. 묻는 말에 대답도 안하고 좌석등받이에 기대있었는데 갑자기 가슴을 움켜잡고 신음소리… 아, 신음소리를 내다가 쓰러졌어요.》

수진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운전사에게 중화군병원으로 가자고 다급히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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