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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 [불멸의 향도] 장편소설 영원한 넋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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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4,488회 작성일 21-08-03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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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월말, 희미한 별빛에 어슴푸레 드러나는 교통호를 따라 군용외투차림의 세사람이 무거운 걸음을 옮기고있었다.

조금 앞서가는 두사람중 보통키의 다부진 장령은 군단정치위원 최홍훈이고 흉장우로 우뚝 솟아보이는 훤칠한 키와 날렵한 몸가짐, 탄력있는 걸음새로 하여 장령과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군관은 근위 418련대장 황명걸이였다. 짤막한 대화를 도간히 주고받으며 걷는 그 두사람 뒤를 묵묵히 따르면서 줄곧 생각에 잠겨있는 세번째 사람―혁띠를 꽉 졸라맨 군관은 련대정치위원 김윤범이였다.

련대의 여러곳을 돌아보면서 군단의 최전방 끝점이라고 할수 있는 여기 돌출부까지 오는 동안 드문히 마주치군 하던 최홍훈정치위원의 불만스러운 눈빛이 지금 김윤범의 마음속에서 떠날줄 모른다. 엊그제 있은 군단관하 련대장, 련대정치위원이상 군정회의에서 심각하게 론의된 문제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지금 우리 지휘관들의 입에서 이 사정이 어떻고 저 사정이 또 어떻고 하는 사정타령이 자주 튀여나오고 부대싸움준비완성과 군인생활향상을 위하여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들이 부대의 이 구석 저 구석에 쌓여지고있다. 그렇다면 어려운 그 사정을 풀어야 할 주인들이 누구들인가?…

지금 별빛이 어스름하게 비쳐내리는 교통호를 말없이 걷고있는 최홍훈중장이 그날 군정회의를 끝내면서 한 말이다.

앞서걷던 최홍훈이 우뚝 멈춰서는 바람에 윤범은 생각에서 깨여나 눈길을 들었다.

중장은 한동안 그렇게 서서 불빛 하나 없는 아군경계지대를 말없이 바라본다. 그러다가 등지고오던 방향으로 다시 돌아서서 적 《헌병》초소쪽을 지그시 노려본다. 림진강의 두터운 얼음장이 쩡― 하고 터갈라지는 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메아리쳐오는 골짜기너머 적진에서는 심리전용전광판의 뻘겋고 퍼렇고 누런 색등이 음탕하고 요염한 짓거리를 늘어놓고있다.

《지금까지 우린 너무도 헐하게 일해왔소.…》

장령은 적당한 말마디를 고르는지 잠간 끊었다가 계속했다.

《그러다나니 갑자기 들이닥친 곤난앞에서 모두들 당황해하고있지. 고장난 륜전기재를 그냥 세워두고 병사들의 식사질이 떨어지고 피복물자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고… 그럼 책임은 누가 지는가?…》

김윤범은 쩌릿한 심정으로 숨을 죽였다. 엊그제 강조하던 안타까운 말의 련속이였던것이다. 그런데 마음에 실려드는 무게는 엊그제와 달랐다. 그때는 조국앞에 수십키로메터에 달하는 전선을 맡은 군단지휘부라고 해도 어쨌든 적이라는 실체가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부대 군인회관이였지만 지금은 짙은 어둠속에서 이편을 겨눠든 적들의 검은 총구가 실감되는 최전방참호인 까닭인가.

최홍훈은 문득 윤범을 돌아보았다.

《동문 판문점사건이 일어났을 때 군대에 입대했던가?》

《그렇습니다.》

《지금 나이는 몇이요?》

《서른여덟입니다.》

《그때도 전쟁이 일어난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아니요.》 장령은 우선 이렇게 부정하고나서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으며 느릿한 동작으로 뒤짐을 졌다.

《그때부터가 아니란 말이요. 정전 이듬해가 내 나이 열일곱이였소. 그때에도 미국놈의 도발로 전쟁, 전쟁 했어. 그후에도 그런 계기는 수없이 많았고… 그런데 60나이가 가까와오도록 여기 분계선상으로 아직 한대의 적땅크도 넘어서지 못했소. 이런 지속적인 정전이 나나 동무들에게 해이를 가져오지 않았는지 그게 걱정이요. 그 어느때보다 각성하여 필사의 의지를 가다듬어야 할 지금에 말이요.》

김윤범은 숙였던 고개를 들 힘이 없었다. 장령의 그 말이 절절하게 가슴을 쳤던것이다. 그 가책과 함께 련대의 여기저기를 돌아보던 일이 생각났다. 오늘따라 별스레 허전해보이던 후방부의 창고들, 여느때는 스쳐보았던 정비장과 훈련장의 불비한 개소들, 기름기가 없어보이던 취사장이며 어둑어둑한 세목장…

《누구라 할것없이 제구실을 해야 하오. 우선 나부터 말이요. 우에 밀고 아래다 몰아버리는 버릇들을 쑥 뽑아버리고 어떻게 하든지간에 해결방도를 찾아야겠소. 그렇게 못하겠으면 자리를 내놓던가.…》

초소앞마당에는 장령의 야전차가 세워져있었다.

초소장의 경례를 받으며 떠난 차는 산길을 이리저리 돌아 기슭의 중대병영앞을 가까이 하고있었다. 저녁점검이후라 병영은 어둠에 잠겨있는데 유독 한 창문에서만 불빛이 흘러나오고있었다.

최홍훈은 잠시 그 불빛을 지켜보았다. 오늘 그의 일정계획에는 중대지도가 포함되여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켜져있는 그 불빛이 몹시 마음을 끌어당겼다.

《들렸다 가기요.》

최홍훈은 중대쪽으로 운전대를 틀려는 운전사에게 여기 세워두라고 이르고 차에서 내렸다. 단잠에 든 병사들을 깨울가봐 저어한것이였다. 일행이 마당앞에 이르자 외등이 켜진 병실현관쪽에서 직일관이 급히 달려나왔다.

《쉿! 그만하오.》

금시 구령이라도 칠듯이 막 서둘러대는 그를 제지시키고난 최홍훈은 불빛이 새여나오는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책상을 마주하고있던 군관이 벌떡 일어섰다. 늘씬한 키에 동작이 민첩해보인다.

《중대장 리철, 지금 담화중입니다.》

한명의 군인이 그의 앞에 앉아있다가 함께 일어났다. 지난해 벌어진 적들과의 조우전에서 용감성을 발휘하여 련대장의 감사를 받은바 있고 정신육체적준비도 꽤 좋아 김윤범의 뇌리에 깊숙이 점찍혀있는 분대장이였다. 이름은 신금성이라던가.… 그런데 지금은 왜선지 몹시 상심한 기색이다.

《동문 나가보시오.》 중대장이 그에게 혀아래소리로 명령했다.

최홍훈은 중대지휘부를 나가는 중사의 뒤모습을 쫓다가 묻는듯 한 눈길을 중대장에게 던졌다.

리철은 얼굴을 붉히며 사연을 설명했다.

《가정사정이 제기된 동무입니다. 강계에 집을 둔 동문데 아버지는 입대전에 사망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어머니마저 앓다보니 학교에 다니는 어린 녀동생이… 좀…》

리철은 말끝을 마무리지 못했다.

《그래서?》

《정기휴가가 시작되면 1차명단에 넣자고 정치지도원동무와 합의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는 안되지. 동생이 공부하는 학교에다 편지도 쓰고… 어머니가 일하는 공장에단 아들이 군사복무를 잘하고있다는 소식도 전하라구, 알겠나?》

《알았습니다.》

갑자기 군관침실인듯싶은 옆방에서 《이겼다!》하고 나직한 환성이 튀여나왔다. 중대장이 그쪽을 피끗 돌아보고는 어쩔줄 몰라했다.

《저기선 뭣들 하오?》

최홍훈이 뚜벅뚜벅 다가가 침실문을 열었다. 순간 희색이 만면해서 만세라도 부르듯 두손을 번쩍 쳐들었던 키큰 소위와 어이없는듯 입을 쩝쩝 다시던 몸매 다부진 중위가 동시에 돌아보다가 눈들이 퀭해서 벌떡벌떡 일어났다. 팔씨름을 하던것 같았다.

최홍훈이 침실을 휘둘러보고나서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이겼소? 동무요?》

키큰 소위가 히죽 웃으며 가슴을 쑥 내밀었다.

《그렇습니다. 소대장 박창길!》

《아아… 아닙니다.》

몸매 다부진 중위가 황황히 손을 내저었다.

《사실은 제가 매번 이기기가 미안해서 오늘 한번 져준건데…》

《그럼 내앞에서 다시 해보겠소?》

《하겠습니다.》

중위가 사기나서 대답하는데 소위가 히죽 웃으며 반죽좋게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오늘 경기는 3 대 2로 제가 부중대장동지를 이겼는데 승부는 명백하며 절대로 상소할수 없습니다.》

《하하하!》

최홍훈은 마침내 큰소리로 웃으며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걸작들이요. 마음에 들어.…》

최홍훈은 이젠 밤이 깊었는데 쉬라면서 더 시간을 끌지 않고 중대지휘부를 나섰다. 뒤따라 나오는 군관들과 직일관에게 어서 들어가라고 손을 내젓고는 야전차가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달리는 차안에서 군단정치위원은 갑자기 껄껄 웃었다.

《어딜 가나 최전연군관들이 마음에 들거던. 침실정돈해놓은것만 좀 보오.… 얼마나 규모있는가. 참, 거 중대장 말이요. 눈이 억실억실하고 얼굴선이 명백한게 미남이로구만, 처녀들이 반할만 하겠는데?!…》

군단정치위원의 그 웃음에 지금껏 배회하던 긴장한 분위기가 순간에 날려가는듯싶었다.

김윤범이 군단정치위원의 웃음을 따랐다.

《하지만… 중대정치지도원의 말에 의하면 장가갈 생각은 애초에 잊은것 같답니다.》

《그렇다?!…》 최홍훈장령은 고개를 기웃거렸다. 《사연이 있는게로구만. 그건 정치위원몫이 아니요?》

《관심을 돌리겠습니다.》

전조등앞으로는 완만한 구릉지대가운데로 뻗어간 도로가 마주 달려오고있었다. 굽이를 돌 때마다 전조등은 앙상한 소나무가 군데군데 서있는 등판을 휘둘러 눈덮인 진펄가의 갈대숲이며 그너머 드넓게 이어진 새초숲을 비쳤다.

김윤범은 문득 최전방참호에서 군단정치위원과 오간 말이 생각났다. 판문점사건! 그때 어떻게 되여 군복을 입었던가.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던 그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의 첫발을 들여놓은 곳은 사로청중앙위원회(당시)가 주관하고있던 청년돌격대였다.학교사로청조직이 추천했다. 전국의 학교들에서 모범적인 사로청초급단체위원장(당시)들을 선발하여 조직한 돌격대의 사명은 어버이수령님과 항일혁명선렬들의 불멸의 자욱이 어려있는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건설이였다.

장차 아들을 군인으로 키우리라 결심했던 아버지에게 있어서도 뜻밖이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 추천에 동의했다. 해방후 경위중대시절부터 어버이수령님과 김정숙어머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속에 백두의 혁명정신과 더불어 성장해온 아버지로서는 혁명전적지, 혁명사적지건설에 아들을 보내는것이 옳은 처사라고 생각하였던것이다.

그가 북부건설장으로 떠나간 때로부터 2년후 조국앞에 극적인 정세가 조성되였다. 판문점사건이 일어났던것이다.

조국앞에 조성된 준엄한 정세는 김윤범에게 군복을 입게 해주었다.

그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다. 넌 결국 남들보다 2년 늦게 군복을 입는다. 그러나 우리 수령님의 발자취가 어린 혁명전적지, 혁명사적지를 비롯하여 백두산에까지 올라본 그 나날들이 너의 성장에 반드시 좋은 밑거름이 될거다.

군단참모장을 하던 그 아버지는 현재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공로강사로 사업하고있다.

앞좌석에 앉은 최홍훈군단정치위원이 그의 생각을 깨쳤다.

《정치위원, 요즘 적들의 심리전에서 주목되는건 뭔가?》

김윤범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대답했다.

《사회주의〈붕괴설〉입니다. 〈전체주의〉, 〈병영식〉으로서의 사회주의가 드디여 마지막숨을 몰아쉰다는겁니다. 공장들과 발전소들은 이미 멎어서다못해 기계와 설비들이 누렇게 녹이 쓸었고 농촌들은 황페화되여 사람들이 고콜불밑에서 죽지 못해 살아간다는겁니다. 뭐 기아에 숨진 사람들의 시체가 사태처럼 산에 오르고 부모잃은 아이들이 거리마다에 홍수처럼 밀려다닌다는 등 듣기 역겨운 개수작질뿐입니다.》

최홍훈은 잠시 아무 말 없다가 다시 물었다.

《병사들의 동향은?…》

김윤범의 대답은 짧고도 단호했다. 《믿지 않습니다.》

《아무렴, 그런 개나발에 넘어갈 우리 병사들이 아니지.》

장령은 금방 떠나온 고지쪽을 돌아보다가 말을 계속했다.

《당의 품속에서 지금껏 고생이란걸 모르고 자라온 우리 병사들이니까. 하지만 명심해야 할건 오늘의 현실은 사실로 엄혹해지고있다는거요. 앞으로 더 엄혹할수도 있는것이고… 우린 이에 대처해야 하오.》

지금껏 잠자코 듣기만 하던 련대장 황명걸이 입을 열었다.

《한가지 알고싶은건… 올해 사관, 병사들의 정기휴가문제입니다. 중지된다고 하던데 군단정치부에서 정식 론의되였는지 그걸 알고싶습니다.》

최홍훈은 웬일인지 대답을 주저하는듯싶었다.

그 침묵속에서 피끗 김윤범의 눈앞에는 며칠전 련대로 내려왔던 군단부참모장 안강조의 모습이 떠올랐다. 윤범의 중대정치지도원시절 대대장이였던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병사들의 심리를 동무와 같은 정치일군들만이 다 안다고야 생각지 않겠지?! 지금 후방의 실태는 사실 어렵소. 병사들이 초소로 떠나올 때의 후방이 아니요. 이런 조건에서 동무는 정기휴가가 병사들의 정신상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그걸 생각해봤소? 이건 심중한 문제요. 그래서 난 이 문제를 정식 정치부에 제기했소. 내 이름으로 상급당조직에 반영해달라고 말이요.》…

《일부 일군들이 그렇게 제기해오고있소.…》

최홍훈은 불편스럽게 몸을 움직이더니 뒤말을 이었다.

《의견들이 하도 강경하여 이 문제는 총정치국에도 보고되였소.》

《그렇다면…》 황명걸은 말끝을 흐렸다.

최홍훈은 그 심정이 리해되는듯 리유를 설명해주었다.

《후방의 현실이 병사들의 심리에 영향을 줄수 있다는건 사실이요.》

김윤범의 머리속으로는 착잡한 생각이 갈마들었다. 그렇게까지?… 하는 후방의 현실에 대한 의혹이 솟구쳤던것이다.

최홍훈중장의 말이 재차 김윤범의 귀가에 무겁게 들려왔다.

《그만큼 현실은… 준엄하오! 그러나…》

야전승용차는 어느덧 련대지휘부정문을 가까이 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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