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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평양은 선언한다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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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822회 작성일 21-07-30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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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온 나라의 모든 방송들이 각이한 주파수로 평양선언의 전문을 여러차례 보도하였다. 송탄군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방송을 들었으나 자신들의 일상적인 로동과 평범한 생활이 선언의 정신을 싹틔우는데 밑거름이 되였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두메산골의 그 소박한 사람들은 세계적의의를 가지는 그 선언의 채택은 평양에서 벌어진 경사이고 자기네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는것으로 여겼다. 그저 방송원이 선언에 서명한 당대표단들을 격조높은 목소리로 렬거할 때 자기네 고장을 찾았던 대표단이름이 나오자 면목을 익힌 친구의 소식이라도 듣는듯 빙긋이 웃기도 하고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였던것이다.

그날 오후 류수진은 사무실에서 한 로씨야신문을 보다가 경악하여 벌떡 일어났다. 신문을 쥔채로… 그의 손에 들린 모스크바석간지 《웨체르나야 모스크바》신문지 자락이 바르르 떨렸다. 분과사무실의 일군들은 사람시달림에 지친데다가 자기 일들에 분망하여 어느 누구도 그한테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다. 그는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다가 황황히 방에서 나갔다. 복도에 나선 그는 어디라없이 총총히 걸음을 다그치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뇌리에 번개쳐 주춤 멎어서 창곁으로 다가갔다. 신문을 눈앞으로 바투 가져왔다. 글자들이 망막으로 날아들었다. 쓰웨뜰라나… 그 처녀를 사살하여 모스크바강에 던진 강도 두명을 체포, 시체에서 발견된 공민증에 적힌 이름은 쓰웨뜰라나… 어머니 리지야 꾸즈네쪼바… 강도들의 진술… 강에서 건진것은 쏘피야 두보바의 시체이다. 2년전 쏘피야는 돈을 벌어가지고 리가에서 날아와 엄마한테로 돌아가는 쓰웨따를 자기들에게 밀고… 사살하고 돈을 나누어가짐… 시체는 노보 제비치예공동묘지옆 수풀속에 묻어버림… 쏘피야는 쓰웨따와 용모가 비슷하여 그의 이름과 공민증으로 매춘영업… 쏘피야는 동업자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매일밤 안전대위를 곁에 붙이기때문에 사살…

그는 온몸이 얼어들었다. 얼음장처럼…

(그러니까 그때 호텔 내 방에 기여든 요녀는 그 악마였구나. 쓰웨따는 내가 모스크바에 가기전에 벌써… 리지야 꾸즈네쪼바한테 알려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아 지금도 딸을 기다리고있을 모성한테…)

그는 한석비서가 3호면담실에 나와있다는 생각이 들어 거기로 달려갔다. 한석비서는 면담실에 들어선 그의 얼굴을 흘깃 돌아보고는 무엇을 느꼈는지 일군들에게 하던 말을 인차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류수진은 그에게 다가가 신문을 내밀며 불상사가 생겼다고 하였다. 신문을 펼쳐들고 그가 가리킨 기사를 읽어본 한석은 얼굴빛이 달라졌다.

《우리한테 손님으로 와있는 그 리지야 꾸즈네쪼바가 아니요?》

《그렇습니다.》

《그의 딸이란 말이지?!》

《알려줘야 하겠는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으흠…》 그는 모두숨을 내쉬였다.

《알겠소… 기다리오.》

그는 앞탁우의 서류가방을 들고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걸어 사무실에서 나갔다.

한석은 한시간반쯤 지나서 그의 분과사무실에 나타났다. 흥분된 얼굴이였다.

《가까운 사이니까 수진동무가 이제 곧 호텔로 가서 대표단에도 알려주고 직접 만나 따뜻이 위로해주는것이 좋겠소. 그리고 오늘 저녁 8시 모스크바로 가는 우리 특별비행기가 뜨는데 그편으로 떠날수 있도록 준비시키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좌석을 배려해주셨소!》

《예?!》

《가슴아파하셨소…》

한석비서가 돌아간 다음 류수진이 서둘러 차비를 하고 복도로 나오니 어느 방에서인가 평양선언을 영어로 내보내는 라지오방송소리가 흘러나왔다.

고려호텔은 명절기분에 흥성거렸다. 호텔안의 광실에서 서성거리거나 앉아있거나 계단식승강기로 오르내리는 외국인들은 얼굴마다에 희색이 만면하고 어지간히 들뜬 기분들이였다. 어느 매대의 록음기에서인가 녀자방송원이 류창한 프랑스말로 평양선언을 읽는 소리가 힘있게 울려나왔다.

류수진이 승강기를 타고 31층에 올라가니 거기는 딴 세계처럼 고요했다. 복도에 침통한 기운이 흐르는듯 하고 적갈색주단에 피빛이 얼룩져보였다.

그가 리지야의 호실문앞으로 가서 초인종단추를 누르려는데 훤칠한 키에 밤빛머리인 로씨야사람이 다가와 침울한 얼굴로 손을 가로 저어보였다.

로씨야공산주의로동자대표단 단원이였다.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누구한테도…》

《예?》

《인차 통보해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문을 열어주지 않아 가까이에서 위로조차 해주지 못하고있습니다.》

《아니… 알고있습니까?》

《알고있습니까?》 로씨야사람은 제편에서 더 놀라 이렇게 반문하고는 크게 뜬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수진은 말없이 신문을 내밀었다. 그 사람은 신문의 기사를 읽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내쉬였다.

《아… 수치입니다! 손님으로 와서… 모두 주인들한테도 입밖에 내지 말자고 약속했는데… 허, 망국노들한테도 자존심은 있으니까… 그래서 침묵을 지켰는데 알았구만요. 우리는 부단장동지가 사업상용무로 모스크바에 전화를 하다가 우연히 알게 되였습니다.》

수진은 로씨야사람들한테 체질화된 슬라브적인 자존심의 손상으로 하여 더 괴로와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 가슴이 못내 저려들었다.

《우리는 동지들을 동정합니다.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녁 8시정각에 뜨는 비행기가 있는데 그편에 갈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하겠습니다.》

《예?!》 그 사람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좌석을 배려해주셨습니다. 아시고 몹시 가슴아파하셨습니다.》

로씨야사람은 수진의 팔을 잡아끌며 자기 방으로, 아니 부단장호실로 가자고, 거기에 여러 당대표동지들이 모여있다고 하였다.

응접실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한데 라옙쓰끼를 비롯한 7∼8명의 사람들이 쏘파에 앉아있기도 하고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고 벽에 기대여 서있기도 하였다. 수진을 끌고들어간 로씨야사람은 친애하는 지도자동지의 배려에 대하여 손을 내흔들며 떠들어대였다. 모두 수진에게로 달려들었다. 뜨거운 악수, 포옹,… 방안공기가 설레였다.

라옙쓰끼는 수진에게 리지야의 방과 전화로는 통한다고 하며 직접 소식을 알려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전화기곁으로 가서 송수화기를 들고 수자판의 단추들을 성급히 눌렀다. 누르고 또 눌렀다. 한참후 저쪽에서 무슨 반응이 있는지 송수화기를 넘겨주었다.

《리자웨따, 나요. 수진이요!》

《들었어요?》

《알고 왔소. 리자, 리자! 이겨내오!》 송화구에 한숨소리같은것이 울리였다.

《떠날 준비를 해야겠소. 모스크바로… 빨리 쓰웨따한테로 가야지.》

《…》

《우리 당에서는 리지야 꾸즈네쪼바동지에게 심심한… 심심한 동정을 표합니다. 나 개인적으로 말하면 무엇으로써도 당신을 위로할수 없다는걸 잘 압니다. 그러나 일어나야 합니다. 어머니가 아닙니까.》

《…》

《8시전에 비행장에 가닿을수 있도록 준비해야 되겠소. 우리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 비행기좌석을 마련해주셨소. 동무가 당한 상실을 두고 몹시… 몹시 가슴아파하시고… 또 동무가 당한 불행은 동무자신의 책임도 죄도 아니라고 하셨소.》

수화구에서 비명비슷한 소리가 울리였다. 그리고 잠잠해졌다. 침묵… 침묵… 전류라는 물리적수단은 인간의 비극적인 감정을 더이상 전할 능력이 없는듯…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이윽고 한계가 지났다는 경계신호인듯 한 붕-하는 소리…

류수진은 당황한 얼굴로 라옙쓰끼를 돌아보며 전화가 끊어졌다고 하였다. 송수화기를 놓았다. 부단장은 그에게 자리를 권하고 리지야에게 곧 떠날 준비를 시키겠으니 안심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중한 얼굴로 대표단 단장을 통하여 친애하는 김정일동지께 로씨야공산주의자들의 감사의 인사를 전하겠다고 하였다.

다음 모두 한결 가라앉은 마음으로 비행기가 래일 몇시경에 모스크바에 도착할것인가, 누가 동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의논들을 하는데 문이 조용히 열리며 그 녀자가 들어섰다.

그 녀자의 얼굴에는 비감이 흔적조차 없었다. 중병을 앓은 사람처럼 약간 부어오르고 황이 든듯한 얼굴… 바싹 마른 눈, 흰자위에 피가 새빨갛게 진것이 유표할뿐이다. 그 녀자는 여기 사람들앞에 나오기전에 세수를 하고 화장이라도 대충 한듯 은발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리지야 꾸즈네쪼바는 수진의 맞은편 의자에 단정히 앉더니 그를 곧바로 바라보며 갈린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수진동무, 당신들의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 고맙다는 이 말 한마디라도 전해줄수 없겠어요? 불행해질대로 불행해진 이 평범한 로씨야녀성에게…》 목소리가 떨렸다.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먼길을 달려온듯 단숨을 몰아쉬였다.

《나는 보살펴주는 조국이 없는 망국노… 가까운 혈육을 다 잃은 고아! 과부! 거지…》

《진정… 진정하시오. 리지야 꾸즈네쪼바!》

《그러지요… 그러지요… 김정일동지께서는 남의 불행을 자기 민족의 불행처럼 아파하는 정치가, 위대한 국제주의자예요. 래일 주석단에 나와 열병식을 사열하시겠지요? 무력의 최고사령관으로서… 가지 못하겠어요. 먼거리에서라도 그이를 봐야겠어요. 가지 않겠어요. 갈수 없어요!… 저세상에서 쓰웨따도 이 엄마를 리해하고 용서할거예요…》

로씨야사람들은 아연해지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빛나는 눈으로 그를 지켜보기도 하였다.

류수진은 뜨거운것이 가슴에 와락 안겨들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녀자도 자리에서 일어나 벗에게로 다가가서 손을 뜨겁게 잡아쥐며 모스크바의 마지막 밤 험하게 오해한것을 용서하라고 속삭이였다. 수진은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다 리해한다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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