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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1-5 시민혁명의 선두를 달리는 에꽈도르 꼬레아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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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7,031회 작성일 21-08-11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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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태영 박사


1.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반미열풍

 

□ 시민혁명의 선두를 달리는 에꽈도르 꼬레아대통령

 

에꽈도르에서는 선사시대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B. C. 3500년가량되는 옛날의 유적들과 유물들이 북서지방 해변가에서 많이 발견된다. 특히 원시토착민들의것으로 보이는 제단의 터전들과 잔재들이 여기저기에서 흔히 발견된다.

에꽈도르의 고대력사에 의하면 약 2 000~3 000년전에 에꽈도르에는 4개의 부족들이 살고있었다. Esmeralda, Manta, ancavila 등 토착원주민부족들은 서로 각각 상이한 언어를 사용하였으며 해산물과 소금을 서로 교환하면서 살았다. 이들은 주로 사냥과 농업으로 오랜 세월속에서 평화롭게 살아온 인디안토착원주민들이였다.

1463년부터 인까제국이 뻬루지방에서부터 북상하여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에꽈도르의 부족들은 힘을 합쳐 침입자들에 대항하여 싸웠지만 력부족이였다. 그 당시 인까제국은 무적의 강한 대군을 거느리고 전지역을 휩쓸고있었기때문에 에꽈도르는 인까제국에게 그만 완전히 흡수되고말았다.

인까제국이 1500년경에 에꽈도르를 완전히 점령하고 흡수한 후에 인까제국의 왕 Capac는 에꽈도르의 수도 Quito를 몹시 좋아하여 이곳을 인까제국의 제2의 수도로 정하고 이곳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Capac왕은 이곳에서 여러가지 종류의 곡식과 과일을 새로 재배하게 하고 밀림을 개간하여 인까제국을 보다 더 견고히 세웠다. 반대세력을 추방하여 멀리 이동시키고 필요한 인력을 저 멀리 Chile에서 끌어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인까제국의 Capac왕은 급성병환으로 1527년에 죽었다.

인까제국의 Capac왕이 갑자기 죽은 후에 그의 큰 아들 Atahualpa가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다. Atahualpa가 왕위에 오른지 겨우 6년이 되는 1532년에 에스빠냐침략자들의 첫 발걸음이 에꽈도르땅을 밟고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에스빠냐의 유명한 해양항해사 Pizarro가 제3차항해에 성공하여 에꽈도르에 처음 왔는데 그는 에스빠냐황제가 친히 하사한 식민지통치권과 군대지휘권을 받아가지고왔다. 에스빠냐황제의 권한을 대행하는 Pizarro는 기회를 노리고노리다가 드디여 어느날 인까제국의 Atahualpa왕을 만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능수능란한 Pizarro는 직접 나서지 않고 카톨릭교사제 Vincent신부를 대신 대표자로 조작하여 전면에 내세웠다.

《나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에스빠냐황제의 어명을 받들어 대행하고있다. 그러므로 그대는 나에게 무조건 순순히 복종하고 협조하라.》라고 명령조로 Vincent신부는 인까왕에게 말하였다.

이에 대하여 인까왕은 카톨릭교기도문책을 땅에 내던지면서 Vincent신부를 향하여 경멸의 언사로 그럴수 없다라고 대응하였다. 인까왕이 거느리고온 수천명의 인까제국의 군인들은 인까왕의 뒤에 서서 이 모든 장면을 묵묵히 지켜보고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Pizarro는 미리 준비해놓은 에스빠냐군인들과 함께 뒤에 몰래 숨어있으면서 인까왕이 Vincent신부의 명령을 거절할뿐만아니라 반항하리라는것을 미리부터 예상하면서 그 결정적인 순간을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그리고 Pizarro는 바로 결정적인 순간에 그와 함께 숨어서 기다리고있는 에스빠냐군인들에게 즉시 발포할것을 명령하였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인까왕이 거느리고온 군대는 현장에서 수천명이 몰사하였다.

이 사건은 1532년 11월 16일에 발생하였는데 력사학자인 Hubert Herring은 이 사건이 에스빠냐침략자들의 《결정적인 기만술의 전투》라고 말하였다. 에스빠냐카톨릭교회는 이와 같이 초창기부터 가면을 쓰고 타민족을 침략하고 노예화하는데 앞장에서 협력하였다. 그리고 Pizarro는 인까왕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감옥에 넣었다. 감옥에 갇혀있는 인까왕에게 Pizarro는 또 강요하기를 왕이 소유하고있는 금과 은을 몽땅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였다.

혹시나 몸값을 치르는가싶어서 왕은 금 4 850kg과 은 9 700kg을 순순히 내놓았다. 하지만 에스빠냐황제의 전권을 량손에 쥐고있는 Pizarro는 금과 은만 챙기고 인까제국의 마지막왕인 Atahualpa를 1533년 6월 29일에 교수형에 처하고말았다.

이렇게 되여 라틴아메리카토착원주민들의 유일한 마지막희망이였던 인까제국은 에꽈도르의 령토내에서 영영 사라져 없어지고말았다.

그러면 에꽈도르에 침입한 침략의 선봉자이며 또 인까왕을 직접 살해한 Pizarro는 그후에 어떻게 되였는가?

Pizarro가 에스빠냐황제로부터 에꽈도르침략을 위하여 전권대사로 임명을 받던 그날에 그와 함께 협력자로서 같이 활동을 하도록 동등한 권한을 가지는 임명장을 받은 또 다른 한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Almargo이다. 그는 11년동안 에꽈도르를 중심으로 뻬루와 남아메리카 기타 여러 침략한 지역에서 활약을 하면서 침략의 선봉자인 Pizarro와 함께 이름을 날리던 전략가였다. 이들은 모두 함께 크게 웨치고있었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저 황금의 나라를 향하여!》

하지만 이 두 침략자들이 황금의 나라에 아직 이르기도 전에 중도에서 한사람이 다른 한사람을 죽이는 저들끼리의 비극이 발생하였다. 1541년 6월에 Pizarro는 동업자 Almargo가 쏜 흉탄에 맞아죽었다. 《하느님이 허락한 저 황금의 나라》에 이르지도 못하고 11년동안이나 함께 활동하던 친구의 총에 맞아 Pizarro는 끝내 멀고먼 이국땅에서 비명에 쓰러져 죽고말았다.

 

 

      에스빠냐침략과 식민지시대

 

Pizarro가 죽은 후 1544년에 에스빠냐황제는 뻬루에 총독부를 창설하고 에꽈도르를 뻬루총독부에 소속된 한 관할지구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그후 1563년에 처음으로 에꽈도르는 뻬루의 관할지구에서부터 벗어나 단독지역으로 분리되여 에스빠냐의 직접통치를 받았다. 하지만 에스빠냐침략자들의 손길이 에꽈도르의 넓고도 광활한 원시밀림지대에까지 가히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약 100년동안 토착원주민들은 아무런 어려움이나 피해없이 저들끼리 잘살아가고있었다.

그런데 1570년에 아프리카에서 많은 노예들을 태우고 뻬루로 가던 배가 에꽈도르앞바다에서 파선되였는데 그때 많은 흑인들이 에꽈도르에 상륙하여 원주민남자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녀자들과 결혼을 하여 에꽈도르에는 그후에 흑인들이 번성하게 되였다.

1690년경 에꽈도르에 토착원주민의 수는 75만명에서 100만명정도 있었고 흑인노예의 수는 약 6만명정도였다. 하지만 유럽에서부터 전염되여온 류행성전염병인 디프테리아와 천연두 등으로 인하여 총인구의 3분의 1이 감소되는 비극도 있었다.

에스빠냐정부는 에꽈도르에 네가지 정책을 세워놓고 식민통치를 하였다.

1) 에스빠냐백인정착인들에게 땅을 분할해주고 땅과 그안에 있는 모든 자원과 인디안원주민들의 관리책임을 지게 한다.

2) 해마다 원주민의 생산에서 2분의 1을 소출하여 에스빠냐황제에게 조공을 드린다.

3) 모든 원주민들은 의무적으로 1년을 교회건축과 도로공사에 로력동원을 하게 한다.

4) 모든 원주민들을 카톨릭교로 교화시킨다.

 

에꽈도르의 원주민노예들은 주로 목화농사와 양을 먹이는 목장에서 강제로동을 하였는데 새벽부터 어두울 때까지 일하고 바로 잠자는 방으로 직행하는 동물적인 존재로 일생을 살았다. 에꽈도르의 목장에서 생산되는 양털과 목화생산으로 인하여 에스빠냐의 직물산업이 급성장하였다.

176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에서 발생한 계몽주의사상이 에꽈도르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독립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사상이 에꽈도르의 어디에서나 사람들의 생각속에 싹트기 시작하였다.

1765년에 처음으로 백인과 인디안간의 혼혈후손들의 집단(cholo)이 에스빠냐정부의 부당한 세금제도에 반기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후에 인디안토착원주민들도 집단적으로 반항을 하면서 에스빠냐침략자들의 백인을 위주로 한 정치적야욕과 불공정한 사회제도에 반기를 들고일어났다.

량심적이며 지성적인 백인의사인 Eugenoi는 주장하기를 에스빠냐의 기나긴 침략통치를 이제는 그만 끝내고 에꽈도르가 자유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하였다. 하지만 에스빠냐정부는 의사 Eugenoi를 감옥에 가두어놓고 탄압을 하였는데 그는 1795년에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에꽈도르인들은 오늘도 그를 《Ecuadorian Independence영웅》으로 기억하고있다.

 

 

      식민지통치에서의 에꽈도르독립

 

에꽈도르의 독립운동은 유럽에서 나뽈레옹이 에스빠냐를 침략한 1808년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유럽에 있는 에스빠냐본국은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에스빠냐황제가 페위를 당하고 그의 동생이 왕위를 계승하는 혼란에 빠졌다. 이와 같은 어지러운 정세속에서 라틴아메리카에 있는 많은 에스빠냐식민지나라들은 본국의 혼란스러운 기회를 틈타서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였던것이다.

특히 베네수엘라의 남아메리카해방운동의 영웅 볼리바르장군이 주도하는 독립운동선풍에 의하여 뻬루, 꼴롬비아, 볼리비아 그리고 베네수엘라 등 많은 여러 이웃나라들이 서로서로 련대하여 협력하면서 에스빠냐주둔군을 련쇄적으로 파멸시키고 모두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독립을 쟁취하였다.

에꽈도르는 볼리바르장군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반대하는 에스빠냐주둔군을 물리치고 1822년 5월 24일에 드디여 에스빠냐침략통치의 300년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독립을 쟁취하였다.

에꽈도르 초대대통령 Marshal Sucre대통령이 에꽈도르의 독립을 선포하였다.

에스빠냐식민통치 300년만에 에꽈도르가 독립을 쟁취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독립후에 앞으로 다가오는 100년의 력사는 과거 식민지치하에서 지내던 300년의 력사 못지 않게 혼돈이 여전히 계속되였다.

토착원주민들에 대한 계속되는 학대와 착취와 독재, 백인기득권자들끼리 서로 싸우는 권력쟁탈전 그리고 에스빠냐가 물러간 후에 그 자리에 새로 등장한 미제국주의의 새로운 경제침략 등으로 이루 말로 다 표현할수 없는 문제와 혼란이 그치지 않고 그대로 계속되고있었다.

 

 

      독립후 암흑과 풍란의 한세기

 

1822년에 에꽈도르가 독립한 후 8년이 되는 1830년에 유명한 두사람이 동시에 사망하였다. 한사람은 베네수엘라의 영웅 볼리바르장군이 병으로 사망하였다. 다음은 에꽈도르의 초대대통령 Sucre대통령이 사망하였다. Sucre대통령의 친구이며 동업자인 Flores장군이 권력투쟁으로 Sucre대통령을 암살하였다.

Flores는 친구이자 정적인 Sucre대통령을 암살하여 죽이고 에꽈도르의 제2대대통령이 되였다. 그리고 그는 무서운 독재자가 되여 집권을 하다가 1845년에 절대다수의 거센 반대에 못이겨 15년의 독재를 끝내고 외국으로 추방되였다.

1851년에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우비나대통령은 비록 쿠데타로 정권을 잡기는 하였지만 에꽈도르력사에 있어서 반드시 기록에 남길 유명한 두가지 큰일을 하였다.

첫째는 노예제도의 영구적페지를 하였다.

둘째는 에스빠냐황제에게 해마다 바쳐야 하는 조공제도를 페지하였다.

그후에 1859년부터 1875년까지 16년동안 카톨릭교사제인 모레노신부가 에꽈도르의 대통령이 되였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모레노신부대통령은 에꽈도르를 하나의 카톨릭교회의 교구로 삼아 로마 교황청과 《정교협약》을 맺기까지 하였다.

교육과 문화 모든 행정을 온통 카톨릭교식교화차원에서 정책을 세움으로 인하여 자연히 사람들에게 무조건적복종만을 강요할뿐 오히려 정부와 교권의 부패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립장을 취하였다. 결과적으로 세속적인 지성인들의 거센 반발과 대중의 불복종에 부딪쳤다. 역시 또 하나의 무서운 독재자라는 불명예로 16년동안의 집권끝에 모레노대통령은 악한의 칼에 찔려 비참하게 죽었다.

1875년부터 1895년사이에 에꽈도르에는 5명의 대통령이 차례차례 등장하여 보수와 진보 량진영이 서로 대결하는 다양한 정치적색채가 20년동안 계속되였다. 한가지 분명한것은 독재를 반대하는 자유화의 물결과 충돌이 계속되였고 그 물결을 무엇으로도 막을수 없었다.

1895년에 에꽈도르력사에 있어서 최초로 반종교적좌파성향의 대통령이 등장하였다. 알프라로대통령은 유명한 카톨릭교반대주의자로서 무엇이든지 카톨릭교라면 뿌리를 뽑는 극단적인 반종교정책을 썼다. 모든 학교에서 카톨릭교교재사용을 금지시키고 결혼식이나 기타 모든 례식이나 행사에 있어서 종교와 정치를 혼돈하지 않도록 법적질서를 세웠다.

이로 인하여 카톨릭교의 전면적반발과 항쟁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나 시민전쟁으로까지 번질 위기에 이르렀다. 피흘리는 충돌이 그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계속 일어났다.

드디여 1912년에 플라자장군이 주도하는 우익군부의 반정부운동이 일어났다. 우익에 몰려서 집권 16년만에 알프라로대통령은 퇴진하게 됐다. 그는 성난 카톨릭교군중들의 종교재판모양의 보복적인 반격을 받아 비참한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그후에 에꽈도르에서 4명의 대통령이 줄줄이 교대로 대통령에 취임을 하였는데 서로 상반되고 대립되는 정책으로 인하여 카톨릭교회와 시민사회단체사이에 분쟁은 계속되였다. 그로 인하여 사회적불안이 나날이 심화되였다.

에꽈도르는 독재와 쿠데타의 악순환속에서 어두운 한세기를 살아왔다. 하지만 세계력사는 어느때, 어느곳에서나 근로대중의 웨침을 영원히 고립시키거나 묵살하지 않는다. 에꽈도르사람들이 외세와 결탁한 우익군부독재정권과 피흘리면서 투쟁을 한세기동안 줄곧 벌리고있는 한맺힌 이야기는 오늘 전세계에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있다.

 

 

      대혼란속에서 군부 및 외세와 싸우는 근로대중의 투쟁

 

에꽈도르의 대혼란은 쿠데타로 인한 혼란이였다. 쿠데타는 주로 군인들이 좌경을 막기 위하여 일으키는것이 상식이다. 하지만 에꽈도르의 쿠데타는 전부 다 그런것은 아니다. 에꽈도르에서는 오히려 외세의존적인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시민들의 그룹》이 주동이 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대중항쟁이 오히려 군부의 쿠데타를 물리치고 정권을 교체시켰다.

에꽈도르에는 《오또기대통령》이 있었다. Velasco대통령은 다섯번 집권하고 또 다섯번 축출을 당하는 특이한 기록을 남겼다.(1934~1935, 1944~1947, 1952~1955, 1960~1961, 1968~1972)

Velasco대통령은 기회주의적명수였다. 좌경과 우경을, 친미와 반미를, 위민과 반민 등의 경계선을 수시로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34년동안 기회주의적권력을 누렸는데 사실은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가슴에 멍이 들었다.

다음으로 1900년대에 들어와 에꽈도르의 대혼란속에서 대중투쟁의 력사적발자취를 대략 살펴봄으로써 꼬레아대통령이 근로대중을 위한 《시민혁명의 대통령》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을 리해할수 있다.

1984년후부터 정치적혼란은 극도에 달하였다. 10년사이에 8명의 대통령들이 등장하였다. 모두가 다 하나같이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친미예속대통령들이였으며 외채로 인하여 나라의 운명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중 3명의 대통령은 부정부패로 쫓겨났다. 꼬레아대통령은 이와 같은 험난한 시기에 등장하여 고난에 빠진 근로대중을 해방시키고 자주와 인권을 옹호할 목표로 시민혁명을 주도하여 대통령이 된것이다.

 

 

      꼬레아대통령은 누구인가?

 

꼬레아(Rafael Correa)대통령의 Correa라는 이름의 뜻은 《허리띠》라는 뜻이다. 그는 선거공약으로 《데일 꼬레아》를 웨쳤는데 그 뜻은 《그들에게 허리띠를》이라는 뜻이다. 부패한 정치인들에게는 채찍의 허리띠를 주고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허리띠를 주겠다는 공약이였다.

꼬레아는 대통령선거전에서 《바나나재벌》 노보아후보자와 대결하여 싸웠다. 노보아후보는 막대한 재산과 경력을 과시하면서 선거운동중에서 시종 《돈 돈 예수 예수》를 선거전략으로 삼으면서 민심을 사려고 애썼다. 하지만 허리띠를 공약으로 내세운 꼬레아후보자는 돈도 없고 예수를 크게 웨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선거전은 놀라운 결과로 나타났다. 1 340만명의 인구중에서 절대다수가 카톨릭교인인 에꽈도르에서 31% 대 68%라는 압도적차이로 노보아후보자를 물리치고 꼬레아후보자는 승리를 거두었다.

꼬레아대통령은 미국 Illinois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은 학자출신이며 대학교수의 경력을 가지고있다. 그는 《미국이 1980년부터 에꽈도르 전임대통령들에게 자유시장개방정책을 강제로 뒤집어씌웠기때문에 부패와 수백억US$의 채무를 걸머지게 되였다.》라고 분명하게 폭로하였다.

꼬레아대통령은 에꽈도르가 당장 감당하기 힘든 외채상환에 대해서는 국제적심판청문회를 열어서 지불연기를 위한 재협상방법으로 외채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면서 외채보다 더 시급한것은 빈곤층을 도와주기 위한 정책이라고 주장한다. 빈곤층을 위한 긴급구호후에 남는 돈으로 외채를 갚겠다고 당당히 주장한다.

꼬레아대통령은 에꽈도르의 잘못된 사회구조의 개혁을 시급한 과제로 인식하고있다. 에꽈도르사회는 5개의 계급으로 나누어져있다.

1. 에스빠냐와 기타 유럽에서 출생한 백인들

2. 에꽈도르에서 출생한 백인들의 2, 3세 및 모든 백인후손들

3. 백인과 원주민혼혈로 부모중에서 한사람만 백인인 후손들(mestizos)

4. 량부모가 다 혼혈의 피를 가진 혈통의 후손들(cholos)

5. 원주민혈통을 100% 이어받은 인디안원주민들의 후손들

이와 같은 다섯 계급중에서 1, 2, 3에 속하는 그룹을 중산층이라 하며 전체 인구의 15~20%정도이다. 이중에서 1과 2에 속하는 사람들을 특권층이라고 하는데 정치와 산업과 토지의 소유권을 몽땅 장악하고있으며 외세와 결탁되여있다. 중산층안에서도 3에 속하는 계층은 그중에서 또다시 차별을 받고있다. 중산층사람들의 직종은 각종 전문직, 국가공무원, 사업가, 사무직, 군장교, 교원 등인데 이들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특권을 누리는 기득권자들이다.

꼬레아대통령이 내건 선거공약은 무엇인가?

그의 웨침은 신자유주의반대, 대기업의 민영화반대, 에네르기의 국유화정책추진, 토지개혁추진, IMF반대, 시급한 문맹퇴치운동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것은 인종주의적사회적계층해소 등이다. 이와 같은 공약은 15~20%에 해당하는 중산층사람들에게는 듣기 싫은 공약들이다.

꼬레아대통령은 1차투표에서 2위로 처졌다가 2차투표에서 인디안원주민들의 표를 대거 얻으므로 당선되였다. 꼬레아대통령은 학생시절에 원주민동리를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였는데 그것이 선거승리로 이어진것이다.

꼬레아대통령은 당선된 후 한 연설에서 《지금까지 중산층에게만 유리하도록 제정된 모든 법과 제도는 이제는 반드시 제거되고 시정돼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꼬레아대통령은 과거의 력사는 식민지에서의 독립이였지만 마찬가지로 오늘과 앞으로의 력사는 《미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여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꼬레아대통령의 개혁정책

 

꼬레아대통령의 취임식이 성대히 거행되였다. 베네수엘라의 챠베스대통령을 비롯해 남아메리카의 반미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하였을뿐만아니라 멀리 이란대통령을 비롯하여 108명의 외교축하사절들이 왔다.

취임식장 정면에는 화려하고 의미있는 에꽈도르의 전통을 상징하는 장식들로 가득하였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것은 단상왼쪽에 미국CIA마크를 걸어놓은것이였다. 라틴아메리카를 괴롭히는 미국을 비웃는 수치와 경멸의 뜻으로 걸어놓았다.

국회의사당에서 공식취임식을 맞이한 이후 꼬레아대통령은 민족의 상징인 《적도탑》에서 자기의 지지자들을 위한 축하행사를 다시 마련하였는데 이 행사는 단순히 축하행사가 아니라 자신의 개혁약속에 대한 채찍성행사로서 국민들과 호흡을 함께 하는 큰뜻의 행사였다.

다음은 이날 《적도탑》에서 발언한 약속들과 그외 여러곳에서 발표한 공약들을 간추려서 공약의 뜻과 의지를 살펴본다.

1. 1963년생인 꼬레아대통령의 《적도탑》약속의 첫번째 약속은 대통령봉급 50%삭감이다.

2. 친미예속적인 전임대통령들이 마약강도단소탕이라는 명목으로 에꽈도르령토내의 만타공군기지를 무료로 사용하는것을 허락하였는데 앞으로는 계약을 끝내고 계약만기인 2009년에 재계약을 거부한다.

3. 의회해산과 헌법제정위원회(130명)가 《헌법 다시 쓰기》를 하도록 4월 15일에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4. 에꽈도르에서 력사적으로 가장 소외된 80%에 가까운 인디안들에 대한 각종 사회보장제도를 약속한다.

5. 라틴아메리카통합을 목표로 하는 《볼리바르정신》지지와 동시에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결사반대한다.

6. 미국과의 FTA를 반대한다.

7. 에꽈도르의 석유사업권을 되찾도록 외국대기업들과 재협상을 반드시 실시하여 달성한다. 지난 1992년에 탈퇴한 OPEC에 다시 재가입한다.

8. 에네르기의 국유화를 반드시 실시한다.

9. 아마존원시림보존을 위하여 무질서한 외국자본들의 파괴적탐험행위를 금지시킨다.

10. 에꽈도르에 현재 와있는 기존의 외국석유회사나 다른 기업들이 본래에 맺은 계약조건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어길 때는 가차없이 계약을 취소한다. 특히 국토와 자연환경에 대한 파괴행위에 적극 대응하겠다.

11. 에꽈도르정부는 미국의 간섭이나 눈치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중국이나 유럽과 중동의 나라들과 친교와 교역을 시도한다.

12. 외국자본들이 취하고있는 리득과 그들이 에꽈도르정부에 내고있는 세금의 비률이 일방적으로 엄청나게 불공정하다. 과거의 불공정한 세금비률을 정당하게 시정할것을 천명한다.

지난 한세기동안 에꽈도르를 지배한 미국의 권력은 차츰차츰 그 위세를 잃어가고있다. 특히 과거 20년동안의 신자유주의는 오히려 반미좌파민족주의성향의 꼬레아대통령을 에꽈도르의 정상에 오르도록 하였다.

전화위복이라고나 할가? 어쨌든 오늘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세계 어느곳에서든지 배척과 역효과를 나타내고있다. 꼬레아대통령의 정치적동지인 베네수엘라의 챠베스대통령, 볼리비아의 모랄레스대통령 그리고 니까라과의 오르떼가대통령 등은 라틴아메리카의 정치, 경제에 있어서 새로운 지형을 형성하여 미국에 있어서 간단하지 않은 위협이 되고있다.

꼬레아대통령의 승리로 인하여 남아메리카좌파정권 지도자들이 《인민무역협정》을 체결하여 남아메리카에 새로운 자유무역지대가 형성될것이다. 또한 막대한 석유자본을 가지고있는 남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남아메리카공동시장인 《메르코수르》를 강화하여 미국의 남아메리카정책에 큰 타격을 줄것이다.

최근 10년동안 9번째 대통령이 된 꼬레아대통령이 인구 1 340만명가운데 3분의 2가 빈곤에 허덕이고있는 에꽈도르의 근로대중을 위하여 사회개혁을 추진, 성공함으로 에꽈도르에 평화와 번영이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좌파시대를 열어나가는데 련이은 승리가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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