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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세계 어디로 가는가 1-7 미국의 메히꼬침략사가 우리에게 주는 력사적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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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5,549회 작성일 21-08-2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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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고 류태영 박사


1.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제국주의침략과 반미열풍

 

□ 미국의 메히꼬침략사가 우리에게 주는 력사적교훈

 

《미국의 코밑에 있는 메히꼬는 미국의 뒤마당이며 미국과 메히꼬의 관계는 편의와 복종의 관계라는데 별다른 이견이 있을수 없다.》

《북아메리카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맺어진 미국과 메히꼬의 관계는 〈주말련인의 관계〉를 벗어나지 않는 〈편의상의 결혼〉과 같은것이다.》

우에 인용한 두 문구는 바른말을 잘하여 해고된 메히꼬의 전 유엔대사 아돌포 아길라르가 한 말이다. 아길라르는 미국의 이라크침략을 맹공격하므로 미국의 《눈의 가시》와 같은 인물로 결국 관직에서 쫓겨났다. 아길라르의 이야기는 미국과 메히꼬의 관계가 어떠한가 하는것을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이다.

 

 

      메히꼬식민통치 300년

 

에스빠냐는 1521년에 메히꼬에서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최대의 속도로 령토를 확장하였다. 에스빠냐는 메히꼬 남쪽의 유까딴반도를 기점으로 하여 메히꼬본토와 북쪽으로 진격하여 현재의 미국의 텍써스, 캘리포니어와 뉴메히꼬, 애리조우너, 네바다 그리고 유타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령토를 확보하여 남아메리카(Latin America)에서 제일 크고 제일 넓은 땅을 소유한 대국이 되여 식민통치를 하면서 300년력사를 과시하고있었다.

메히꼬원주민의 력사와 에스빠냐의 메히꼬식민통치의 력사를 간략하여 되돌아보면 다음과 같다.

B. C. 3500년경부터 알라스카와 베링해협이 륙지로 련결되여있을 때 아시아의 몽골족이 메히꼬에 정착하여 강냉이농사와 조상숭배제사를 행하는 《고전기 문명시대》를 열어놓았다.

오늘의 메히꼬원주민들이 강냉이를 주식으로 삼고있는것은 아마도 그때부터 전해내려오고있는 인디안의 전통이라고 여겨진다.

올맥문명시대(B. C. 1200~900), 마야문명시대(A. D. 250~900)를 지나 그후에 메히꼬전역에 원주왕국들이 이곳저곳에 다양하게 건설되여 저들끼리의 태평시대를 대대손손 누리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1521년에 에스빠냐탐험대의 H. 코르테스를 선두로 한 무장한 침입자들이 메히꼬를 정복하였다. 도끼와 활을 가지고있는 원주민들은 화약으로 총과 대포를 만들어 사용하고있는 무법자침입군들을 도저히 막을수가 없었다.

그후부터 300년동안의 란폭한 에스빠냐식민지시대가 시작되였다.

에스빠냐정복자들은 원주민을 통치하기 위하여 무자비하게 살륙, 강탈과 함께 노예로동을 강요하였다. 식민통치자들은 자기들의 말을 고분고분히 잘 듣지 않는 인디안들을 마구 살해하였다. 그때 흘린 인디안들의 피는 강이 될 정도로 엄청난 살륙의 력사였다.

1535년에 에스빠냐국왕은 《부왕》을 메히꼬에 파견하였는데 부왕은 막대한 권한을 행사할수 있는 왕권의 대행자였다.

에스빠냐식민통치 300년동안에 메히꼬인들의 구성은 4개의 부류로 나뉘여졌다. 첫째 부류인 《물라토》는 백인과 흑인의 혼혈족이였고 둘째 부류인 《메스티소》는 백인과 인디안의 혼혈족이였으며 셋째부류인 《크리오요》는 백인혈통을 이어받은 혼혈되지 않은 순종백인들이였고 그리고 넷째 부류인 《피온》은 원주민혈통을 이어받은 혼혈되지 않은 순종인디안들이였다. 이런 부류는 라틴아메리카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류사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부왕의 통치가 오래 계속되는 동안에 부왕의 왕권은 날로 쇠약해졌으며 4개의 부류사이 불화와 갈등은 극도에 이르게 되였다. 이중에 《크리오요》의 부류에 속하는 백인들이 모든 면에서 주권행사를 하고있었다. 에스빠냐로부터 메히꼬가 독립을 쟁취할 때 앞장선것도 《크리오요》들이였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유럽에서 벌어지고있던 정치적동향이였는데 프랑스와 에스빠냐의 전쟁에서 나뽈레옹의 승리는 결정적이였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에스빠냐의 패전은 길고긴 300년동안의 식민통치의 종말을 예고하는 징표로 작용하고있었다.

메히꼬원주민들의 자랑스러운 고대문명의 터우에 에스빠냐침입자들은 십자가를 세워놓고 300년동안 잔인한 식민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에스빠냐침략자들은 력사적변천에 따라 드디여 막을 내리고 메히꼬를 떠나 에스빠냐로 쫓겨가게 되였다.

 

 

      독립과 미국ㅡ메히꼬전쟁

 

1823년에 메히꼬는 독립국으로 창설되였고 빅토리아장군이 《미국의 헌법》과 《에스빠냐의 헌법》을 혼합하여 새 헌법을 제정하고 자기자신이 5년 단임의 초대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메히꼬공화국이 창설되고 대통령이 취임하기는 하였지만 메히꼬는 창설된 그 다음날부터 내란으로 인하여 혼란과 무질서로 걷잡을수 없게 되였다.

혼란의 원인은 《보수파》와 《자유주의파》의 대립이였는데 이들이 제멋대로 정권을 탈취하고 저들의 기분에 따라 정책을 바꾸어 정국을 혼란스럽게 하였기때문이였다. 독립후 불과 10여년동안에 대통령이 4번이나 바뀌는 혼란이 계속되였다.

보수주의자 A. L. 산따 안나장군이 군부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쟁취하였는데 그는 강력한 보수주의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무능한 대통령이였다. 그가 집권하는 기간에 메히꼬는 국토의 3분의 2를 미국에게 빼앗기는 비운에 처하였다.

1836년에 석유가 무진장하게 매장되여있는 텍써스에 살고있던 메히꼬국적의 백인들은 미국의 사주를 받아 반란을 일으켜 메히꼬로부터 텍써스의 분리선을 주장하였다.

메히꼬정부는 텍써스백인들의 분리선주장을 용납할수 없으므로 수비대를 동원하여 텍써스의 알라모요새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수비대는 전멸되였다.

텍써스에 살고있는 메히꼬백인들이 메히꼬정부를 향하여 반기를 들고 분리를 주장하게 된 근본적이며 직접적인 리유는 무엇이였겠는가?

미국의 사주도 물론 큰 리유이기는 하였지만 그것보다 더 큰 리유는 《노예문제》때문이였다.

텍써스의 백인대지주들은 광활하고 넓은 땅에서 농사를 짓기 위하여 무진장한 노예들이 필요하였다. 필요한 노예들을 확보하려는 백인들의 요구에 제동을 거는것은 메히꼬정부였다. 메히꼬정부는 그때 오히려 노예해방을 위한 방향으로 정책을 구상하고있었다. 텍써스의 백인지주들은 메히꼬정부의 이런 동향을 감지하고있었던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리용하여 미국의 사주도 한몫하였던것이다. 반란을 일으켜 승리한 백인들은 곧 텍써스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1836년에 미국은 곧바로 텍써스의 독립을 승인하였다. 그후부터 미국은 만일 메히꼬군대가 텍써스를 공격하면 그것은 미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고 호통으로 협박하였다.

미국은 1836년에 텍써스의 독립을 승인하고 그후 1854년에 텍써스를 미국의 28번째 주(State)로 병합시켜 자기 땅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와 같이 이웃나라의 땅을 빼앗는 미국의 수법은 미국이 빠나마운하를 건설하기 위하여 빠나마를 꼴롬비아에서 분리시켜 독립하도록 음모를 꾸민 수법과 똑같은 수법이였다.

그뿐만아니라 미국은 조선반도를 지배하기 위하여 일본을 내세워 가쯔라ㅡ타프트밀약을 맺은 력사도 가지고있다.

그 당시 미국은 어떤 나라였는가?

미국은 에스빠냐가 메히꼬를 점령한 때보다 30년이나 먼저 북아메리카에서 영국인들을 선두로 하여 식민지점령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1776년에 메히꼬보다 47년 먼저 북아메리카에서 독립을 선포하였다.

미국은 독립을 먼저 선포하기는 하였지만 뉴잉글랜드와 뉴욕 그리고 남쪽으로 버지니아근방 등 불과 13주(State)를 기본으로 초대대통령 워싱톤을 중심으로 독립하였다. 독립을 쟁취한 미국의 령토는 불과 13개 주뿐이였으며 메히꼬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소규모의 령토였다. 그러므로 미국은 독립초창기부터 령토확장에 대한 야욕에 불탔다. 령토확장과 자원확보를 위한 미국의 욕심은 끝없이 계속되였다. 1844년에 미국대통령으로 당선된 제임스 폴크는 텍써스를 강탈한데 만족하지 않고 메히꼬에 속해있는 무진장하고 광활한 땅을 닥치는대로 탈취할 흉계를 꾸몄다.

결국 미국의 폴크대통령은 《메히꼬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이 메히꼬땅을 빼앗는것을 목적으로 하였다는것은 공개된 비밀일 정도로 로골적이였다.

1847년 8월에 미국은 의도적으로 메히꼬국경을 침범하여 국경분쟁을 유발시켰고 스코트의 지휘로 1만 2 000명의 미해병대가 메히꼬의 수도를 공격하여 강점하기에 이르렀다.

보수주의자인 싼따 안나 메히꼬대통령은 전쟁포로로 붙잡히는 수모를 당하면서 완전한 참패로 미국에 항복하였다. 패전한 메히꼬는 미국의 강압에 못이겨 《과달루베ㅡ이달고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 조약에 의하여 메히꼬는 이미 빼앗긴 텍써스를 포함하여 캘리포니어, 네바다, 뉴메히꼬, 애리조우너, 유타 그리고 콜로라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령토를 단돈 1 500만US$의 헐값으로 미국에 팔아넘겨야만 하였다.

그뿐만아니라 메히꼬는 전쟁배상금으로 오히려 325만US$를 미국에게 지불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벌어졌다.

 

 

      《과달루베ㅡ이달고평화조약》

 

《과달루베ㅡ이달고평화조약》에 의하여 미국과 메히꼬사이에 국경이 정해졌는데 현재 미국과 메히꼬사이의 국경선인 리오그란데강은 바로 그때에 정해졌던것이다.

국토의 3분의 2를 미국에게 빼앗긴 산따 안나대통령은 메히꼬의 대중봉기에 의하여 추방되여 1855년에 미국으로 망명하고말았다. 산따 안나대통령을 추방한 후에 메히꼬의 보수파와 자유파는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하여 물고뜯으며 3년동안 내전을 벌렸다. 그 결과 3년동안의 내전의 승리자는 자유파로 결판났다. 자유파 베니또 후아레스는 1861년에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후아레스대통령은 교회가 가지고있는 광활한 토지와 성직자와 군인이 소유하고있는 부당한 특권들을 몰수하고 박탈하였다. 후아레스대통령은 교회와 신부들과 그리고 지주들과 결탁한 군인들이 메히꼬의 개혁과 근대화운동에 큰 장애물이 되고있다고 판단하였다.

후아레스대통령이 추진하는 개혁정책으로 인하여 큰 타격을 입게 된 보수세력과 카톨릭교회는 강하게 반발하였다. 교회에서 몰수한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해주었지만 농민들은 감당할 재력이 없기때문에 다시 자본가들의 손으로 넘어가는 악순환이 계속되였다.

후아레스대통령의 강력한 개혁운동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있는 교회와 지주들과 군인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0여년후에 막을 내리고말았다.

1876년에 새로 집권한 쁘로파라오 디아스대통령은 극우보수주의자이며 전형적인 독재자였다. 그는 외국자본을 무분별하게 끌어들여와 메히꼬토지의 5분의 1을 외국인의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빠른 경제성장을 요란하게 선전하였지만 메히꼬의 철도와 석유, 광산의 95%가 외국인소유로 되여버린것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상업과 공업이 외국인의 손으로 운영되였으며 메히꼬의 경제는 순전히 미국의 《당근과 채찍》에 의하여 좌우되는 종속적체제로 전락하고말았다.

《메히꼬는 외국인에게는 어머니이고 메히꼬인에게는 계모이다.》는 비웃음이 나올 정도로 친미주의적대통령이였다.

디아스대통령은 8회에 걸쳐 대통령에 재선되면서 35년동안 무서운 독재를 하다가 1911년에 권좌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디아스대통령의 35년간에 걸친 장기집권은 교회와 미국을 비롯한 외국자본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기때문에 가능하였다. 디아스대통령의 정치는 미국문화숭배와 민족문화를 멸시하는 립장과 자세였다. 그래서 메히꼬인들은 《재선반대》를 유일한 구호로 웨치며 친미사대주의에 빠진 디아스를 규탄하였다. 바로 이 구호를 들고 투쟁한 대중들때문에 메히꼬의 다음세대에 전개된 《메히꼬혁명》이 가능하였던것으로 분석된다.

 

 

      메히꼬혁명의 공헌과 실패

 

메히꼬인들은 지긋지긋한 디아스독재자의 35년동안의 장기집권과 무능한 지도자들로 인하여 광활한 메히꼬의 국토를 미국에게 몽땅 빼앗긴 실정에 대하여 분노를 품고있었다. 이러한 거센 분노와 반발이 결국 《메히꼬혁명》의 도화선으로 이어졌다.

1910년에 혁명가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과거 독재자들에게 강제로 빼앗겼던 농지를 모두 인디안들에게 되돌려줄것을 주장해나섰다. 그리고 8차례나 재선하여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 일인독재를 한 정권에 도전하여 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투쟁한것은 오로지 근로대중이였다. 이들이 봉기의 선두에 나섰다.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혁명의 기수로서 성공하여 드디여 혁명정부의 초대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였다. 하지만 3년후 1913년에 미국이 후원하는 우에르따장군의 친미우익쿠데타로 인하여 마데로대통령은 암살당하고말았다. 그후 우익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우에르따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바람에 인민혁명의 불길은 얼마동안 멈춰서게 되였다.

친미군사독재정권이 등장한것으로 하여 메히꼬땅에는 또다시 반혁명적탄압과 암살의 공포분위기가 조성되게 되였다.

미국은 메히꼬인민들의 투쟁을 무식하고 천박한 행동이라고 비방하면서 우에르따군사정권을 로골적으로 지원하였다. 하지만 1917년에 미국이 지원하는 우에르따의 군사독재정권은 혁명군에 의하여 완전히 타도되고 메히꼬혁명의 불길은 또다시 타올랐다.

1917년에 카란사ㅡ오브레곤 두사람의 련합으로 형성된 혁명의 주체세력은 우선 외국자본이 국내경제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헌법을 개정하고 과거에 독재정권을 지원한 카톨릭교회를 개혁정부로부터 완전히 분리시켰다. 농민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하는 개혁도 과감하게 시행하였다. 또한 혁명에 과감하게 참여한 메소티소(흑인혼혈)와 인디안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졌으며 결과 흑인과 인디안의 문화가 메히꼬문화로 자리잡을수 있는 좋은 기회가 마련되였다.

메히꼬혁명을 통하여 거둔 커다란 성과는 대중들에게 《메히꼬는 백인의 국가가 아니다.》는 인식의 뿌리를 그들의 마음속에 깊이 내리게 한것이다.

사람들의 인식변화로 인하여 원주민들은 《마야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였다. 특히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있는 상황에서 과거의 부끄러운 력사적불행에 대한 민족적정체성을 밝히는데도 메히꼬의 혁명운동은 크게 기여하였다.

그후에 메히꼬의 혁명은 어떻게 진행되였는가?

혁명운동내부에 분파와 분렬의 문제가 있긴 하였으나 이 문제는 어느 정도 극복이 되였고 혁명운동의 진행은 차질없이 진행되였다고 평가할수 있다.

카란사ㅡ오브레곤 두 혁명가들이 결속된 혁명정권은 1917년부터 1927년까지 10년동안 수없이 많은 우여곡절속에서 부분적개혁을 실시하면서 혁명정권을 견지해나갔다.

1927년에 메히꼬에서뿐만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당이라고 평가받는 메히꼬의 《제도혁명당》(PRI)이 새로 창당되였다. 이 새로 창당된 《제도혁명당》은 집권여당으로서 1927년부터 2000년까지 장장 73년동안 장기집권을 하였다.

《제도혁명당》은 창당이후 73년동안 대통령선거에서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다. 지방주지사선거와 상하원선거에서도 항상 95%이상의 득표로 승리해왔다. 카르테니스대통령(1934~1940)의 정권하에서 메히꼬로동당 총련합회(CTM)가 창설되였고 전국농민총련합회(CNC)가 창립되였으며 메히꼬혁명당(PRM) 등 다양한 대중중심의 사회운동정당과 사회단체들이 창립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있어서 메히꼬의 《제도혁명당》에게 큰 시련과 난관이 대두하였다. 미국의 영향하에서 《제도혁명당》은 집권당으로서 방향을 잃고 개혁정신은 표류하기 시작하였던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당시 말레만대통령과 코르티네스대통령이 집권을 하고있었는데 이 두 정권하에서 로동운동활동가들은 《좌파운동》이라는 리유로 모두 추방을 당하였다.

놀랍게도 메히꼬《제도혁명당》이 혁명의 전통을 완전히 망각하고 친미반공정책을 더 중요시하는 우익로선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결과 미국자본에 의해 대학도시건설과 고속도로, 언제 그리고 막대한 공공투자 등 미국의 수입대체공업이 눈에 띄게 늘어나게 되였다.

메히꼬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미국이 주도하는 랭전시대하에서 반공로선에 일관하였다. 당시 메히꼬는 미국의 자본주의적지배가 로골화되고있던 1960년대에 농업생산이 한계점에 도달하였고 소득격차가 심화되는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였다.

빈곤과 실업자문제와 농촌을 떠난 도시인구의 폭발은 심각한 사회적문제로 나섰으며 그리고 장기간 계속된 독재정권에 따른 정치적부패 등으로 인하여 메히꼬는 온 나라가 통채로 혼란에 빠져드는 국면에 돌입하고있었다.

그러한 혼란중에서도 한가지 특기할것은 마테오스대통령(1957~1964)이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꾸바혁명정부와 자주외교를 통한 친교를 계속한것이였다. 이때문에 마테오스대통령은 자연히 미국과 불편한 관계에 있게 되였다.

그 당시 메히꼬인들은 무조건 반정부적이며 혁명정신을 상실한 현직대통령을 불신임하였다. 그런데 친꾸바로선을 고집하고있떤 마테오스대통령에게만은 인민들이 지지와 호의를 나타냈다. 그때 메히꼬대중의 마음은 마치도 력사의 시계바늘역할과 같았다.

그런데 1967년에 《메히꼬올림픽》이 메히꼬의 수도에서 진행하게 되였는데 메히꼬학생들과 로동자 그리고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일제히 이 올림픽대회를 반대하여 대중적인 단결단합을 시도하였다.

오르다스대통령은 농촌게릴라와 과격학생들의 시위를 몹시 우려하였다. 이때 대통령은 군대를 총동원하여 그들의 투쟁을 강압적으로 탄압하면서 올림픽을 불안속에서 겨우 치를수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메히꼬의 정치풍토는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2000년 7월 메히꼬의 《제도혁명당》은 73년의 집권력사를 마감하였다. 이 집권여당은 드디여 제일야당으로 전락하고말았다. 그 결과 대선은 중도우파로선을 주장한 폭스가 대통령이 되여 《제도혁명당》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았다.

메히꼬혁명의 실과 허는 무엇인가?

메히꼬혁명은 사람들에게 력사를 바로 알게 하는데 공헌하였다. 메히꼬국민의 대다수인 혼혈족과 원주민들은 왜 우리는 세상에 태여나서 죽을 때까지 빈곤과 억압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력사의식의 눈을 뜨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되였다.

메히꼬의 《제도혁명당》이 70여년이나 장기집권을 하면서 초심을 망각하였기때문에 실패의 늪으로 빠져들게 되였다. 다시말하면 이 정당은 《초지일관》하지 못하였다. 그 결과는 곧 실패로 나타났다.

메히꼬는 1986년에 GATT에 가입하였고 1992년에 북아메리카지역 자유무역협정(NAFTA)에 가입하였으며 이어 1996년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미국ㅡ메히꼬자유무역협정이 강대국의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사실이 로출되기 시작하였다. 메히꼬경제의 75%이상이 미국에 의존하게 되였고 종속구조화되고말았다.

이러한 구조적모순은 곧 대중의 의식을 흔들어주었다. 력사적견지에서 볼 때 오늘 메히꼬인들이 미국에 대하여 당당한 자세를 갖고 반미감정을 로출하는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수 있다.

하지만 《제도혁명당》이 완전히 망하고 폭스대통령의 정권이 극우적정권으로 완전히 돌아서면서 오늘의 메히꼬는 또다시 미국에 휘둘리는 전형적인 국가로 전락하고있는 과정에 있어 이를 바라보는 대중은 매우 허무한 생각에 잠겨있는것 같다.

 

 

      메히꼬를 망치는 자유무역협정(NAFTA)

 

《자유무역협정》이라는 말자체가 총체적으로 약소국에 대한 경제적략탈이며 인권침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메히꼬에서 《북아메리카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된지 16년이 된 오늘에 있어서 메히꼬의 경제문제와 사람들이 당하고있는 고난의 문제는 어떻게 할것인가?

이른바 나프타가 메히꼬에 끼친 해독에 대하여 세계 각계각층의 언론들과 사회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미국에 대하여 비판적발언을 쏟아내고있다. 왜냐하면 나프타는 미국의 대기업들의 리윤만을 생각하고 메히꼬사람들의 생존권따위는 아예 생각지도 않는다. 나프타로 인하여 빈익빈, 부익부현상이 가증되여 빈곤에 못이겨 농촌을 떠나 무조건 도시로 이동한 사람들의 수는 지난 10년동안에 250만이 되였다.

이들은 도시 어느곳에서든지 조금이라도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라면 로점상을 열어 생존을 유지하고있다. 그러므로 메히꼬는 가는곳마다 로점상으로 차고넘치는 기현상이 나타나고있다.

그러다가 견디지 못해 생명을 내걸고 미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경우들도 허다하다.

최근에 발표된 통계에 의하면 미국에 거주하고있는 메히꼬인불법 이민자들의 수는 헤아릴수 없이 많은것으로 추산되고있다. 또한 미국에서 강제추방되는 메히꼬사람들이 한해에 23만명가량 된다.

이런 현상으로 인하여 흑인들이 일자리를 메히꼬인들에게 빼앗길가 우려하는 인종적갈등이 미국에서 큰 사회적문제로 대두되고있다.

《나프타는 미국과 메히꼬가 협상한것이 아니라 미국과 대기업이 협상한것이다.》고 비판하는 소리들이 대중들에게 확산되고있다. 미국의 시장개방은 곧 수많은 메히꼬인들의 삶의 터전을 송두리채 잃게 만들어왔다.

사회분석가 Sedsol이 2005년에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나프타로 인하여 5 400만명의 메히꼬인들이 기초생활도 유지하기 어려운 절대빈곤층에 속해있다는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와 정반대로 가장 돈많은 상위층은 전체 인구의 20%이며 이들이 국가소득의 절반이상을 독차지하고있다는 진단이다.

미국의 자유무역협정은 인간을 위한 협정이 아니라 대기업의 리윤증대만을 생각하는 극히 비륜리적이며 비인간적협정이다. 이때문에 시장개방으로 인하여 미국에서 메히꼬로 류입되는 식량의 대부분이 미국시장에서 소비가 거부된 불량품들이고 가난한 메히꼬인들에게 차례지는것은 암을 유발하는 불량품을 비롯하여 공업용이나 사료용인 강냉이 등으로 파악되고있다.

메히꼬정부는 식량대량수입을 하면서 농민들에게는 꽃이나 남새를 재배하도록 장려하였다. 처음에 농촌진흥보조금을 약속하였지만 그것도 말뿐이고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였다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히꼬정부는 자유무역협정을 통한 외국자본이 국내에서 고용을 창출하며 국내기업은 품질이 좋은 제품을 생산하여 경제를 성장시킬수 있으므로 자유무역과 국제적인 경제통합이 메히꼬의 발전을 위한 유일한 길이다는 궤변을 력설하고있다.

이와 같은 궤변은 《한미자유무역협정》과 국제적경제통합을 주장하면서 세계화를 력설하고있는 리명박《정권》의 주장과 조금도 다를바 없다.

자유무역과 세계화정책으로 인하여 파괴된 농촌의 농부들은 저임금로동자가 되여 도시로 집중되고 도시의 극빈자로 전락한다. 일단 극빈자로 전락하면 일생동안에 회복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와 같은 현상은 박정희군사독재《정권》때부터 이미 시작된 《한국》의 비운과 류사하다.

메히꼬에서 나프타가 시작된 1994년 1월 1일을 기하여 원주민 사빠띠스타부족인들이 집단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메히꼬정부는 군대 5만을 동원하여 진압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원주민의 저항은 5년이나 지속되였다.

메히꼬언론은 원주민의 무장봉기를 과소평가하여 소수의 《게릴라집단》으로만 보도하였다. 하지만 메히꼬정부가 원주민들에게 평화조약을 제의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고있다.

원주민들은 자기들이 일으킨 봉기의 유일한 리유에 대하여 국가를 반대하는것이 아니라 국가를 망치는 자본주의적《나프타》같은 악법을 반대한다고 하였다. 그외에는 아무 조건이 없었다고 하였다.

2000년 7월에 집권한 폭스대통령은 6년의 임기를 끝내고 2006년 9월 1일 국회에서 고별연설을 하려고 하였으나 야당의원들의 반대로 그는 고별연설도 못하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베네수엘라의 챠베스대통령은 폭스대통령이 나프타의 열성적지지자라고 맹렬히 비난하면서 《나는 미국의 강아지하고는 안 놀아.》라고 충격적발언을 하여 남아메리카전역에 파문을 일으켰다.

챠베스대통령은 폭스대통령과 영국의 블래어수상을 가리켜 미국의 《길들여진 강아지》라고 혹평하기도 하였다.

폭스가 떠난 후에 오늘의 메히꼬는 어떠한가?

2006년 7월 2일에 메히꼬의 차기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이 진행되였는데 극우파로 알려진 칼데론이 당선되였다. 최근 칼데론대통령은 외신기자들에게 《나는 남아메리카의 좌파정부들과 협력하겠다. 또 나는 꾸바의 까스뜨로와 베네수엘라의 챠베스대통령과도 건설적대화가 필요하며 관계개선에 노력하겠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믿어지지는 않지만 하느님과는 멀고 미국과 가까운 메히꼬를 두고보아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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