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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영원한 넋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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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947회 작성일 21-08-2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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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은순이가 418련대를 다녀온지도 꼭 1년이 되는 봄이 왔다. 그러나 그동안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완전히 잊었다면 거짓말일것이다. 돌아와서는 한동안 내내 그 생각을 하였다. 그 저녁, 온통 지쳐버린 걸음으로 그것도 뒤축이 떨어져나간 구두를 끌고 간신히 들어서던 중대병영의 어느 한 사무실, 여유있고도 침착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중대장… 어쩌면 길 잃어 헤매던 무인지경 등판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그를 곧바로 찾아갈수 있었더란 말인가! 정치위원 안해의 말대로 이게 바로 피할수 없는 생활의 기이한 인연이란것일가? 아직도 귀뿌리가 활활 타오르는것은 아버지조차 손대본적 없는 자기의 구두가 생면부지의 그 중대장에 의해 수리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힘들게 찾아온 평양처녀가 련대정치위원의 집에서 그냥 평양으로 가버렸다는것을 알았을 때 그는 과연 무엇을 생각했을가? …

은순은 그 구두를 그냥 신고 다닐수 없었다. 구두를 마주할 때면 중대장의 서글서글한 눈길이 자기를 지켜보고있는듯싶어 끝내 신발장 한구석에 밀어놓고말았다.

어머니도 그 기미를 눈치챈듯싶었다.

하루는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고있는 은순의 거동을 두고 어머니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의족을 한 이 어머니와 년로한 아버지때문에 집을 떠날수 없다는 리유는 네 생각에서 지워버려라. 처녀때 이미 의족을 한 몸이였지만 아버지는 이 어머니를 선택했고 난 네 아버지시중을 착실히 해왔다.

우린 앞으로도 그렇게 서로 의지해서 살아가면 되는거다.》

은순의 눈가에는 눈물이 가랑가랑 맺혔다. 정말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걱정때문일가, 아니면 예술교육이라는 자기 직업에 대한 뗄수 없는 애착때문일가?

아버지도 한마디 했다.

《그래. 아들, 딸 등에 얹혀 사느니 우린 그게 더 편하구나. 더구나 그 중대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범상치 않은 사내가 분명하다. 나는 지금껏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오면서 숱한 기록적인 자료를 수집해왔지만 18층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무사히 받아안았다는 사실은 그 어느 나라 자료에서든 본적도 들은적도 없다.

그런 훌륭한 청년앞에서 이런저런 사정이 리유로 될수 없다.》

은순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였다. 그처럼 훌륭하다고 보았기에 마음속 고민은 큰것이였다.

이제는 1년이 지나 그 모든 일이 은순의 기억속에 희미해지는듯싶었다. 생활은 평온히 흘러 여느날과 다름없이 퇴근하여 자기 집 층계를 오르던 은순은 걸음을 멈추었다.

처녀라면 처녀로 보일 애젊은 낯선 녀인이 문앞에서 어머니의 바래움을 받고있었던것이다.

《좀더 앉았다 갈걸!》

《어머니, 괜찮아요. 지금 집에서 저를 기다리고있답니다.》

계단에서 은순이와 어기던 녀인이 무엇때문인지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크고도 시원스러운 눈매로 얼핏 은순을 스쳐보고는 다시금 계단을 내려갔다.

전실로 들어선 은순은 어머니에게 물었다.

《누구인가요?》

어머니는 왜 이제야 오는가고 무척 아쉬워하며 말했다.

《오빠네 부대에서 온 군인가족이다. 의족을 한 내 다리아픔에 좋다며 오빠가 보낸 약초를 가지고 왔다. 저녁을 함께 하고 가라는데도 집에서 기다린다고 그냥 가는구나.》

《집에서요? …》

불쑥 은순이의 머리에는 이런 예감이 비껴들었다. 집이 평양이라면 혹시 418련대 정치위원의 녀동생이 아닐가?!

은순은 잠시 선 자리에서 생각을 더듬다가 손가방을 어머니에게 넘겨주고는 다시 집을 나섰다. 등뒤에서 어머니의 묻는듯 한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대꾸할 생각마저 잃고 계단을 바삐 내려갔다.

녀인은 벌써 집현관을 벗어나 공원옆을 지나고있었다.

웬일인지 녀인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한곳을 바라보고있었다. 거기에는 야외과일매대가 있었다. 녀인은 한동안 망설이다가 매대앞으로 다가가는것이였다.

저 녀인이 418련대 정치위원의 녀동생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은순은 그제야 눈길을 내려깔며 자기를 돌이켜보았다. 무엇때문에 저 녀인을 좇아 이리로 나왔는지 자신도 알수 없었던것이다. 전에 그 정치위원네 집에서 되돌아선것과 관련하여 무슨 죄의식이라도 생겼단 말인가? …

은순은 오빠가 극구찬양하던 수도 평양을 떠나 군관의 안해로 된 418련대 정치위원의 녀동생에 대하여 알고싶은 충동이 자기의 걸음을 이리로 이끌었다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필요가 있으랴. 이미 그때 군관의 안해로 되기를 외면한 내가 지금에 와서 저 녀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눌수 있겠는가? …

은순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슬며시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그러나 또 한가지 생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시작이 어떻든 그 정치위원 안해의 진심으로 되는 리해와 도움을 받으며 그곳을 떠나오지 않았던가. 저 녀인이 정치위원 동생이 분명하다면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어떻게 그냥 보낼수 있으랴! …

은순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있는데 등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저를 찾아오지 않았는가요?》

은순은 흠칫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어느 사이에 다가온 녀인이 구면처럼 미소를 짓고있었다.

은순은 잠시 어쩔바를 몰라하다가 짐짓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오빠네 부대에서 왔다기에… 인사라도 하고싶었습니다.

은순이라 불러주세요.》

녀인도 마주 반기였다.

《선희라고 해요. 정치위원동지한테서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번 들었어요.》

《헌데 왜 그렇게 급히 돌아섰는가요. 저도 지난해 봄에 오빠네 집에 가서 페를 많이 끼쳤는데…》

선희의 눈가에 활달하고도 정찬 웃음이 실렸다.

《페는 무슨 페겠어요. 사과를 사들고 돌아서니 계단에서 어겼던 은순동무의 모습이 눈에 띄우더군요. 어쩐지 우리 정치위원동지의 녀동생이라는 예감이 들었어요.》

은순은 대답대신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지었다.

선희는 자기 손에 들려있는 사과구럭을 약간 올려보이며 부끄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난 아기를 가졌어요. 사과를 보니 그냥 못 지나가겠더군요. 그런데 그만 은순동무가 지켜보는줄도 모르고… 호호!》

은순은 진심으로 물었다.

《결혼생활이 행복한가요?》

선희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행복해요. 도시생활하고는 다르지만요. 우리 그곳에도 자기 식의 생활이 있고 보람이 있어요. 그래서 사람마다 각이한 고장과 환경에서 제나름의 만족을 가지고 사는게 아닐가요.》

은순은 한순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오빠가 약을 보내면서 저에 대해 무슨 말은 없던가요?》

《없었답니다. …》

선희는 그 대답에 성의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였는지 웃음을 지으며 주해를 달았다.

《지나간 일이지만 오빠를 달리 생각지 말아주세요. 한뉘 군복을 입고 사는 군인들이란 대개 사랑과 결혼을 대하는 측면에서는 지내 단순한것만 같애요. 오빠도 지금은 다 리해하고있으니 더 걱정하지 말아주세요.》

은순은 속으로 놀랐다. 어쩌면 그때 418련대로 갔을 때 순정이 어머니가 하던 말과 꼭같을가? … 그러니 자기가 떠나온 후에도 그들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있었던것 같았다.

선희는 오히려 자기를 두둔하고있었다.

《은순동문 자기가 가지고있는 소질과 재능을 가지고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그런 위치에서 자기만이 꼭 할수 있는 그런 훌륭한 일을 하고있지 않아요. 그런데 오빠라고 해서 그걸 무시하고 결혼을 강요할수 있을가요?》

저도 모르게 고개가 숙어졌다. 선희의 말을 듣고보니 자기가 죄스러이 돌이켜졌다. 지금 하는 일이 진정 《자기만이 꼭 할수 있는 그런 훌륭한 일》이란 말인가? 리해심과 어울린 과분한 평가라 할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 평가를 떳떳이 받아들이기 앞서 처음 만나는 녀인에게로 쏠리는 존경심을 금할수 없었다. 그라고 어찌 수도 평양에서 포부가 없고 해야 할 일이 없었으랴! …

은순은 그 어떤 숨김도 없는 직선적인 이 녀인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싶었지만 자신을 억제하였다.

《참, 길가에서 너무 지체시켰군요. 절 그렇게 리해하여주니 오히려 더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평양산원에 다시 올수도 있을텐데 그땐 저에게도 꼭 알려주세요. 그럼 축하해주러 가겠습니다.》

선희는 밝게 웃었다.

《고마와요. 부대에 돌아가면 정치위원동지한테 동생을 만난 이야기를 하겠어요.》

선희는 은순의 손을 꼭 잡아주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은순은 한동안 말없는 눈길로 그를 바래우고나서 공원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빈 의자를 찾아 앉아 무릎우에 얹은 두팔에 턱을 고이고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군인가족들은 다 저렇게 진실한가. 그때 하루밤 묵은 중대정치지도원의 안해도 그렇고 방금 만나본 418련대 정치위원의 녀동생도 그렇고 그의 형님도 그렇고 하나같이 때묻지 않은 소박한 인간들이다. 순수 인간적면에서도 자신을 그들과 자꾸 비교해보게 됨을 어쩔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그가 아빠트계단을 올라 집 출입문을 열었을 때 방안에 켜놓은 텔레비죤에서 노래소리가 흘러나오고있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은순은 가슴이 짜릿해지고 막 울고만싶어졌다.

 

병사가 고향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총메고 떠나온 산천에 물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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