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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절정에 우리 삽니다 (김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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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1,944회 작성일 21-08-01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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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절정에 우리 삽니다(1)

 

언제인가 나는 과학교류사업으로 유럽의 어느 한 나라에 간적이 있었다.

국제발명 및 새 기술전람회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금상을 받은 나에게 그 나라의 한 이름있는 기업가가 찾아와 자기 기업체의 기술고문이 되여달라고 하였다.

호화주택, 고급승용차, 최상급의 연구조건과 거액의 리윤…

이만하면 아마 내가 마다하지 않을것이라고 짐작한듯 기업가는 무척 기대어린 눈길을 나에게 보내였다.

그때 나는 단마디로 《아니, 난 내 나라가 더 좋소.》라고 말해주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돌이켜보면 가슴이 다 후련해지군 한다.

나는 남조선과 자본주의일본에서도 살아본 사람이다.

고향은 저 멀리 제주도의 서귀포, 무척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고장이였지만 나라를 빼앗겼던 해방전 그 세월의 고향에 대한 나의 어릴적 추억은 눈물겨운것이였다.

그 세월 무슨 일인들 없었겠는가.

저주로운 왜놈의 세상에서 더 살아 무엇하겠느냐고 하며 온 가족이 보가지알을 먹었던 일, 부모님들을 따라 행여나 하는 기대를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조선사람이라는 리유로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더욱 가난에 쪼들리던 일...

그러던 어느날 고향에서 할아버지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날아와 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린 자식들을 다시 현해탄너머 제주도로 떠나보냈다.

고향땅에 돌아와 아버지없이 두 자식을 키우는 어려운 속에서도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머리가 좋아 마을사람들속에서 신동이라고 불리우던 나만은 어떻게 하나 공부를 시키고싶어 학교에 보냈다.

그러나 한창 학교를 다니던 때인 1950년 6월 전쟁이 일어나 15살밖에 안되던 나는 어머니의 권고로 아버지가 있는 일본땅으로 다시 건너가게 되였다.

간난신고끝에 아버지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반가움보다 욕을 앞세웠다.

《이 철없는것아, 여긴 왜 왔느냐? 고향땅이나 이 일본땅이나 다 우리 같은 놈은 목숨도 건사하기 힘든 곳인줄 모르느냐?》

아버지를 만나면 밥술도 뜨고 그렇게 하고싶은 공부도 다시 하게 될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이 험악한 세상에 나를 낳은 어머니를 원망하기까지 하였다. 그때 보가지알을 먹고 콱 죽었더라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다 들었다.

아버지와 나는 먹고살기 위해 닥치는대로 일했다. 저주러운 세상에 도전하려는 모진 마음을 안고 고학을 시작했다.

오전수업이 끝나면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신문배달, 그것만으로는 학비를 충당할수 없어 우유배달과 심지어 전등알장사까지 하였다.

그렇게 몇해가 흘러 마침내 나에게도 어머니조국의 따스한 손길이 와닿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일본땅에서 생활상곤난으로 상급학교에 못 가는 동포학생들을 조국의 대학에 진학시켜 공부시킬데 대한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던것이다. 바로 그 은정속에 나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불리운 첫 귀국이 이루어지기 전에 제1차 조국진학생으로서 귀국의 배길에 오르게 되였다.

꿈결에도 그립던 조국의 포옹은 정말로 뜨겁고 열렬했다.

사회주의조국에 와서 나는 울보가 되여버렸다.

소학교 교원이 되는것이 희망의 전부였던 내가 돈 한푼 내지 않고 배움의 최고전당인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였을 때에도 울었고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이 어린 교복과 학용품 그리고 장학금을 받을 때에도 울었다.

과학과 기술로 내 조국을 떠받들자. 그래서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에 꼭 보답하자.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당시) 학생이 된 나는 그날부터 잠자는것을 잊어버렸다. 온 넋을 태워 나는 한계단한계단 지식의 탑을 쌓아나갔다.


김일성종합대학 첨단기술개발원 전자재료연구소 연구사 김상옥

(계속)


행복의 절정에 우리 삽니다(2)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당시 우리 나라에서 미개척분야라고 할수 있었던 전자재료연구에 뛰여들어 새 재료개발에 달라붙었다.

연구사업은 헐치 않았지만 나는 피타는 사색과 완강한 의지로 기술적인 문제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갔으며 끝내 그 전자재료연구에서 성공함으로써 어머니조국의 크나큰 믿음과 기대에 적으나마 보답할수 있었다.

그후 나는 전자재료분야에서 세계를 디디고 올라설 만만한 야심을 안고 새로 개발한 그 전자재료의 응용분야를 계속 넓혀나갔다.

그 나날 전국과학기술축전들에서 특등과 1등상장들을, 여러 국제발명 및 새 기술전람회들에도 참가하여 금상, 은상을 받았다.

어제날 길가의 조약돌보다 못한 신세였던 나를 따뜻이 품에 안아 어엿한 주체조선의 과학자로 키워준 고마운 우리 당에서는 나에게 공화국공민의 최고영예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로력영웅칭호와 인민과학자, 원사, 교수, 박사 등 줄수 있는 모든 영예와 칭호를 다 안겨주었다.

정녕 사회주의 내 조국은 나만이 아닌 이 나라 천만아들딸들의 운명도 희망도 미래도 다 맡아안아 지켜주고 꽃피워주는 위대한 어머니품이였다.

행복넘친 나의 집의 벽면을 꽉 채운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을 모시고 찍은 영광의 기념사진들과 위대한 장군님의 표창장, 김정일상, 로력영웅, 인민과학자, 원사, 교수, 박사증서들...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는것이 우리 당의 사랑과 은정이다.

우리 과학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어머니당의 사랑은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더욱 뜨거워만졌다.

2013년 10월 9일 나는 김일성종합대학 교육자살림집준공식장에 나오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 축원의 꽃다발을 삼가 올리는 더없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그날 영광의 기념사진을 찍는 자리에서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는 나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며 귀속말로 새집들이를 하여 행복한 생활을 하면서 앞으로도 후대들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정담아 말씀하시였다.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 몸소 2차례나 다녀가신 우리 집에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있다.

언제인가 어느 한 나라의 대표단이 우리 집을 방문하였을 때 한 성원은 너무 부러워 나에게 다른 나라에서 이만한 집을 얻자면 200만US$는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날 살아가기가 죽기보다 더 끔직해 어머니와 함께 보가지알을 먹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던 나를, 소학교 교원이 되는것이 희망의 전부였던 서귀포의 베잠벵이소년에게 사회주의 우리 조국은 최상의 영광을 안겨주고 행복의 절정에 세워주었다.

2016년 1월에 나는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 보내주신 은정어린 생일상을 받아안는 크나큰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그날 나는 온밤 잠들지 못했다. 꿈같은 행복이 더해질수록 돌아가신 어머니와 이제는 백발의 할머니가 되였을 누이동생생각이 간절했다.

(우리 경애하는 총비서동지께서 다녀가신 사랑의 집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복된 삶을 누리는 오늘의 내 모습을 어머니와 동생이 한번만이라도 볼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낳아준 어머니도 어쩌지 못한 불우하고 곡절많은 운명을 건져주고 지켜주고 꽃피워준 어머니 우리 당, 주체의 우리 조국, 사회주의 우리 제도를 나는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티없이 순결한 량심으로 받들어갈것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첨단기술개발원 전자재료연구소 연구사 김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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