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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6. 백운산 역사기행 "빨찌산 투쟁에서 광양 백운산은 전남도당의 핵심기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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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댓글 0건 조회 3,806회 작성일 21-07-30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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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 칼럼] 과거를 회고한다 46. 백운산 역사기행

"빨찌산 투쟁에서 광양 백운산은 전남도당의 핵심기지다"

[민족통신 편집실]

김영승 선생 (비전향장기수, 통일운동가)



1. 서언

역사기행은 현장 답사를 통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학습장이 돼야 한다.

동시에 왜곡되고 잊혀진 현대사를 바로잡고 정상적으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해야 한다.

현장답사에서 단순히 어떤 사건들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아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 시절 그때로 돌아가 당시 펼쳐진 사건들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

그 원인을 똑바로 규명하고

그 속에서 체득해야 할 역사적 경험과 교훈이 무엇인가의 핵심을 찾아내야 한다.

역사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현장답사의 물줄기를 과거로부터 현재, 현재에서 미래에로 지향해 가는

목적의식적인 현대 정치사로 연결시켜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주체적 역사관을 옳게 확립하는데도 기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행문도 전개되는 사건들의 가감없는 진실을 밝히고

오늘의 조국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접목시켜

저마다 주어진 여건에서 당면한 과업 완수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기본 관점에서 기술하고자 하나 미흡한 점 많으리라 생각한다.


2. 피로 물든 섬진강을 가다

우리 일행에는 유복남, 박유배동지(백운산 빨찌산 출신) 들과 필자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노투사 (이성근, 안학섭, 양희철, 안희숙, 김영승, 나승하, 정관호, 전덕례, 정귀남, 윤혜자, 신평식, 손영심, 등)들 그리고 몇몇 젊은 일꾼(박지수, 김해령, 노진민 등)들이 함께 했다.

남원에서 구례를 통과하는 길에 밤재가 있다.

지금은 밤재에 산 터널을 뚫어서 가파른 고개를 넘지 않아도 직선으로 통할 수 있다.

그동안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 밤재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1951년 가을 이현상 부대가 백아산까지 와서 인원을 보충하고 지리산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당시 곡성과 구례 해방작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구례를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이 밤재 능선을 장악해야만 했다.

밤재 능선이 남원에서 구례로 넘어오는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유일한 작전지대였기 때문이다.

구례작전은 밤재와 곡성에서 들어오는 통로, 하동에서 구례로 들어오는 통로를

완전히 차단해야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 빨치산 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전투였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끝까지 사수하지 못하고

피아간의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피어린 밤재 능선을 잊을 수 없다.

일행이 구례 산동면을 지날 때는 산동면 해방작전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동면은 지리산 자락에 골짜기 하나가 한 마을을 이루고 있기에 상동, 하동, 중동이라 불렀다.

이 세 골짝 마을의 끝에 산동면 지서가 위치해 있다.

산동면을 해방시키는데 마지막 지서 함락 작전이 전개됐다.

이 작전에서 지서안의 적들은 실탄이 다 떨어져서 총을 들고 나오려고 했었는데 아군부대는 모르고 날이 새 불리하다고 생각한 결과 후퇴했었다.

이 함락 작전에서 총사 연대 중 7연대 연대장 등 지휘 간부들과 대원 동지들의 희생이 있었다.

참으로 잊을 수 없는 한편의 역사 현장이었음을 되새겨 보면서 섬진강에 이르렀다.

구례 토지면에서 섬진강변을 따라 하동읍을 향해 달려가다 보면

강변 우측은 우리의 기행 목적지인 백운산이, 그리고 좌측은 지리산이 자리잡고 있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지리산과 백운산으로 나뉘는 것이다.

토지면에서 강건너 백운산 쪽 간전면과 하동군 학예면을 가기 전

한순네골을 좌측으로 바라보면서 달리게 된다.

한순네골 가기 바로 전에는 강변 모래사장이 있다. 이곳도 잊을 수 없다.

백운산 따리봉에서 섬진강변까지 뻗어내린 능선을 중바위등 능선이라 부른다.

1953년 9월 15일 김선우 도당위원장을 보위한 우리 일행은 5명이었다.

권영용(체포후 총살 집행) 중대장과 연락지도원 윤석두(체포후 총살 집행) 동지가 후방을 감시하고 필자와 이선근 연락지도원이 적구 정찰 책임을 맡고 위원장과 조 보위병은 중간에 두고 섬진강을 건너는 과정이었다.

우리 적구 정찰조가 강을 무사히 건너 모래사장을 지나 도로 언덕에 다달았을 때였다.

시계는 바로 해가 서산에 지고 어둠이 캄캄하게 깔린 상태였다.

그렇게 일몰 전에 건너편 중바위능선 중턱을 돌아내려 지리산 자락 도로변을 정찰하는데

한편 건너편에서 우리 일행을 발견한 적의 잠복부대가 막 도착해서 자리를 잡는 순간에

우리 정찰조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뒤의 일행은 별 일 없으리라 생각하고 강을 한참 건너오고 있는 순간이었다.

캄캄해서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적의 말소리가 들렸다. 바로 앞에서 "이곳에서 잠복하면 된다"는 말소리가 들렸다.

일단 적이 전투태세를 갖추고 나면 대응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뒤쪽으로는 물살을 가르며 건너오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 우리 정찰조가 M1 8발을 쏘며 돌격 소리로 전진했다.

적은 당황한 나머지 한발도 쏘지 못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리 일행은 왕실봉 중터리를 단숨에 오르며 무사히 노고단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런 사연이 얽힌 강변 모래사장을 회상하면서 한순네골 강변을 달리게 됐다.

이 한순네골은 백운산에서 지리산, 지리산에서 백운산으로 오는 연락통로 중의 하나였다.

그 당시 섬진강을 건너다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었던가.

물살에 떠내려가 죽은 동지들, 강을 건너다 건너편 매복에 걸려 강물에서 싸우다 희생된 동지들, 특히 엄동설한에 물살이 가슴까지 차오르는 속에 강을 건너야만 했고

건너다 싸움이 벌어지면 물살에 전사하고 빗발치는 적의 총탄을 맞으며 넓은 모래사장을 지나 적의 매복지를 뚫고 지리산으로 이동하며 투쟁했던 섬진강은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피어린 현장이기도 했다.

지금도 강물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 한순네골에도 빼놓을 수 없는 일화가 있다.

하나만 소개한다면 1953년 8월, 제5지구당 조직위 결정으로 지구당을 해체하게 됐다.

그때 5지구당 결정서 문건을 지참하고 한순네골을 내려오던 도중

박영발 위원장 주치의였던 이행년 동지가 매복에 걸려 부상 생포당함으로써

문건을 빼앗겼던 아픔이 있는 곳이다.

부상당한 이 동지는 응급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 결국 파상풍에 걸려 죽고 말았다.

지금 그의 유골은 영광군 군서면 이 동지 선산에 묻혀 있다.

피아골 입구를 지나면서는 피아골 입구 전투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아골 입구는 1950년 9·28 후퇴 후 소위 유엔군 부대와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전적지였다.

구례에서 하동읍으로 이동하던 적들에 매복전으로 결정적 타격을 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화개 장터를 지나면서

화개골 빗점골에서 이현상 동지가 매복에 걸려 희생됐던 1953년 9월 18일을 되새기면서 악양면을 바라보며 하동읍을 달리게 됐다.

악양면은 지리산 세석평지로 이어지는 한골짜기가 한 개 면인데 1951년 동기 공세 전 이현상 부대가 일시적으로 해방시켰던 곳이며 여기에서 보급한 식량을 동기 공세로 인하여 다 소모하지도 못하고 적들에게 빼앗겼던 기억도 새롭게 되살아났다.

하동읍을 통과할 때 지나는 강변 낭떠러지 입구는 1953년 7월 하동읍 파출소를 전남부대 소조가 습격해 괴멸시킨 곳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파출소 흔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일행은 어둠이 깔린 속에 하동읍에서 광양군 진월면으로 통하는 섬진강 다리(새로 건설됨)를 건너 진월면 옥곡면을 거쳐 옥룡면 옥룡골 백운식당에 이르렀다.

이곳 민박에서 일박하면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각자 소개와 하고싶은 말 한 마디씩을 남겼다.


3. 한재를 오르다

한재는 해발 868고지이다.

한재 너머 구례군 간전면(지리산 문수골로 통함) 좌측을 오르면 따리봉, 우측으로 오르면 상봉을 향하는 원능선이다. 옥룡골은 도로와 민박들이 들어서서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침 7시에 출발한 일행은 연병장을 통과하게 됐다.

이곳은 9·28 후퇴 후 해방구를 갖고 있을 때 빨치산 부대들이 훈련 등 각종 행사를 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개발되어 도로가 나고 새로 심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옛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이 연병장은 도당 지도부가 있던 88골짜기에서 연병장을 통해 도슬봉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그래서 1951년 동기 공세 때부터 이곳을 지나다 적의 매복에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되고 생포되기도 했던 곳이다.

이곳 근처에서 생포됐던 한 여성 동지는 지금 살아 생존하고 있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었지만.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하며 한재를 향해 올랐다.

원래 88능선에서 추모행사를 진행하려 했으나 사정상 변경하여 한재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러나 일행 중 노투사들의 건강이 허락지 않아 일부만 한재까지 오르고 나머지는 중도에 처지는 상태였다.

그래서 한재골의 소골짜기인 용지선 골과 한재로 가는 갈림길 골짝 물가에서 상봉을 바라보며 동지들을 추모하는 자리를 가졌다.

준비해 간 과일과 술을 따르고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먼저 산화하여 간 동지들을 기리면서 엄숙한 마음으로 묵념을 했다.

일행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먼저간 동지들의 희생정신을 본받아 6·15 공동선언 고수이행으로 남은 생을 다 바쳐나갈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 손과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한재는 동기 공세 전 백운산 부대가 거점으로 쓰던 곳으로 여기에서 각종 문화행사도 했다.

동기 공세 때는 적아간의 전투장이 되어 많은 희생자를 냈던 한재 전적지이기도 하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 한재는 잣나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당시 속된 말로 한재잣이 이승만의 진상에 오르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그만큼 한재잣이 유명했다는 것이다.

참고****지금 한재에는 우리 선생들 4분이 묻혀있다


4. 용지선골 학독터를 가다

백운산은 큰산이라 눈도 제법 많이 와서 눈을 밟으며 학독터를 찾아 오른다.

옛날에 밟았던 길이고 고리수를 받기 위해 비닐 파이프를 설치하느라 민간인들이 다녔던 길이기는 하나 눈에 덮여 제길을 찾아가기 쉽지 않아 숲과 너덜강 바위를 넘나들며 한참 헤맨 끝에 드디어 학독터를 찾아냈다. 용지선골에는 도당 연락부가 터를 쓰고 있었다.

이 학독은 넓다란 바위 한복판에 징으로 쪼아 만든 것이다. 이 작업은 당시 연락부원 형(이름 미상)이 목수였기에 며칠간의 작업 끝에 파서 디딜방아를 만들어 양쪽에서 발로 디디며 한 사람은 학독에 넣은 곡식을 밀어넣고 찧었던 곳으로 1951년에 만들었던 곳이다.

지금 살아있는 생존자로서 당시 방아를 찧었던 정관우 선생과 정덕례 여성 동지가 살아 있다. 현장을 답사한 감회와 추억이 새롭게 되살아나기도 했다.

이 학독에서 벼나 겉보리 등을 찧었는데 이 학독을 거쳐간 동지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 유일하게 이 두 동지만 남아 있는 상태다.

토벌대는 방앗고는 없앴어도 학독만은 파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말없는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

그때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고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새로운 다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백운산에서 유일한 전적지의 생생한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일행은 여기에서 간단한 추모의 뜻을 표하고 사진촬영도 했다.

보충-++++ 근례에 금속탐지기를 이용해 선지골에서 새로운 동굴을 발견하고 유품도 많이 수습했다. 특히 인민군 훈장도 나와 전사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여기에서 원능선에 오를 선생들만 남고 나머지 일행은 옆 능선 너머 도당 지도부가 있던 88터를 답사하고 하산하여 집결지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리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가파른 경사, 우거진 숲과 바위를 넘나들며 나무와 풀잎을 잡고 미끄러지고 또 오르면서 드디어 원능선에 도달했다.

오르는 과정에 지난 폭우 때 산사태가 나서 자연환경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이를 치유할 손길은 미처 뻗치지 못하고 있음도 실감했다. 일행 중에 젊은 한 친구 때문에 오르는 속도가 느리기도 했다.

"노장 선생들은 잘 오르는데 왜 젊은 친구가 그렇게 더디냐"고 가벼운 재촉도 했다.

그런데 뒤늦게 몸이 아픈 상태에서 역사기행을 취재하겠다는 일념으로 아픔을 참고 함께 올랐던 것임을 알고서 젊은 친구의 불편함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기도 했다.

다시금 지면을 통해 죄송함과 이해를 구한다.

추운 눈얼음 속에서도 진땀을 흘리며 원능선을 올랐을 때 그동안 막혔던 숨통이 확 트인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반세기 전 빨찌산 동지들이 생사를 걸고 단숨에 오르고 내리던 길을

단시간이나마 체험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값있는 경험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드디어 고 김선우 위원장 유골이 묻혔던 능선고지에 다다랐다.

이 가묘에서 상봉을 향해 간단히 추모의 뜻을 표하고 백운산을 한눈으로 내려다보며 동서남북 방면 지형지세를 관찰했다.

선우 동지가 이곳에 묻히게 된 동기는 이러하다.

선우 동지는 전남 보성 출신으로 고매한 성품을 가진 지도자로서 매사에 다정다감하고 하부 일꾼들의 의사를 존중하고 절대로 반말이나 '해라'를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부 일꾼들이 항상 그를 우러러 받들었다.

진월면 폐장 금굴에 잠복해 있다가 적들에게 발각돼 함께 있던 유상기 책임지도원 동지와 보위병 동지는 위원장 동지 구출 작전에서 희생되고 선우 동지만 다리 허벅지 관통상을 입고 단신으로 백운산에 들어왔다가 적들의 포위망에 걸려 최후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적들은 선우 동지의 인품과 인격, 그리고 지도자상을 받들어 시신을 이곳 능선에 묻게 했던 것이다.

그후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늦게나마 살아있는 노장들이 기억을 더듬어

유골이라도 찾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몇 차례의 지형 답사 탐사 작업을 통해

지형지세 탐색에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류락진 선생(암으로 작고했다)과 이복순동지가 유골지를 발견했다(복순여사는 당시 선우위원장 기요원인 동시에 비서로 사업했다).

골격과 옷, 그리고 묻힌 지점을 종합해서 선우 동지임을 여러 노장들과 함께 확인하고

선산인 보성군 웅치면에 안치했다. 그후 매년 참배를 하고 있다.


5. 한눈으로 바라보는 백운산의 지형지세와 역사적 의미

백운산은 역사적으로 임진 조국전쟁, 갑오농민전쟁, 일제 강점하 의병투쟁, 항일투쟁, 해방공간시의 유격투쟁, 조국전쟁 시기의 치열한 전투장이었다. 이 모두가 이땅에서 외세를 몰아내기 위한 민족자주와 조국해방투쟁의 산 전적지 중의 하나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백운산은 1227고지로 상봉, 따리봉, 도슬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3대 봉우리로 둘러싸인 안쪽을 내각이라 하고 그 반대 바깥쪽을 외각이라 불렀다.

내각은 제일 큰 옥룡골이라 부르고 상봉 너머는 진상골, 다합골, 서골, 독새바위골이라 부르고

따리봉에서 섬진강변까지 뻗어내린 능선은 중바위등 능선이라 부른다.

도슬봉에서 옥룡골 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은 봉강능선이라 부르고 그 골짝을 봉강골이라 한다.

그리고 도슬봉에서 순천 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에 용개산이 있고 용기동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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