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예감 663] 델씨 로드리게즈는 트럼프의 장난감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강산 작성일 26-01-26 10:11 조회 43 댓글 0본문
[개벽예감 663] 델씨 로드리게즈는 트럼프의 장난감
한호석 (정세연구소 소장)
<차례>
1. 볼리바리안 혁명의 사상적 계보
2. 좌익군사정변과 혁명전쟁을 동일시한 오류
3. 체 게바라의 실패를 되풀이한 챠베스
4.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과 평화적 정권 교체
5. 아옌데의 전철을 따라간 챠베스
6. 델씨 로드리게즈는 트럼프의 장난감
1. 볼리바리안 혁명의 사상적 계보
2026년 1월 3일 미제국의 무력 침공과 납치만행으로 베네수엘라 혁명이 좌절되었다. 1999년 1월에 시작된 베네수엘라 혁명은 27년 만에 자기의 존재를 끝마쳤다. 30년을 넘기지 못한 단명한 혁명이었다.
의문이 생긴다. 꾸바 혁명은 67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데, 베네수엘라 혁명은 왜 27년 만에 좌절한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세계혁명사의 관점에서 베네수엘라 혁명의 진행과정을 분석, 고찰할 필요가 있다.
베네수엘라 혁명은 우고 챠베스(Hugo Rafael Chavez Frias, 1954~2023)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의 영도 밑에 강화, 발전되었으며, 그의 후계자 니꼴라 마두로(Nicolas Maduro Moros)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므로 우고 챠베스의 혁명 활동을 떠나서 베네수엘라 혁명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2002년에 당시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챠베스는 마르타 하르넥커(Marta Harnecker)와 대담하면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베네수엘라 혁명의 내막을 들려주었다. 하르넥커는 꾸바 아바나에 있는 라틴 아메리카 대중기억 연구소(Center for Research on Popular Memory in Latin America) 소장이다. 챠베스와 하르넥커의 대담은 『베네수엘라 혁명의 이해(Understanding The Venezuela Revolution)』라는 제목의 책으로 2005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에스빠냐말로 진행된 대담기록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챠베스가 자신의 혁명 활동에 대해 구술한 1차 자료이므로, 베네수엘라 혁명을 분석, 고찰하는 데서 결정적인 의의를 갖는다.
혁명의 준비기에 우고 챠베스가 걸었던 행적을 살펴보자. 챠베스는 14살 어린 나이에 베네수엘라 수도 까라까스(Caracas)에 있는 베네수엘라 군사학원에 입학했다. 베네수엘라 군사학원 재학 시절에 그에게 사상적 영향을 준 인물은 에스빠냐 제국(Spanish Empire)의 식민통치를 타도한 베네수엘라의 독립영웅 씨몬 볼리바르(Simon Bolivar, 1783~1830), 씨몬 볼리바르의 정신적 스승인 베네수엘라의 철학자 씨몬 로드리게즈(Simon Rodriguez, 1769~1854), 베네수엘라 농민항쟁의 지도자 에즈퀴엘 자모라(Ezquiel Zamora, 1817~1860)였다. 챠베스에게 사상적 영향을 준 씨몬 볼리바르, 씨몬 로드리게즈, 에즈퀴엘 자모라는 좌익민족주의자들이다. 좌익민족주의(left-wing nationalism)는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자주독립을 쟁취하려는 정치이념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청소년기에 좌익민족주의를 접한 챠베스가 점차 좌익민족주의자로 성장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훗날 챠베스는 베네수엘라 혁명을 볼리바리안 혁명(Bolivarian Revolution)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베네수엘라의 독립영웅 씨몬 볼리바르의 이름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런 사정은 챠베스의 볼리바리안 혁명이 좌익민족주의에 의거한 혁명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베네수엘라 군사학원 재학 시절에 챠베스에게 사상적 영향을 준 또 다른 인물들이 있었다. 그들은 뻬루의 사회민주주의 정치인 환 벨라스꼬 알바라도(Juan Velasco Alvarado, 1910~1977), 빠나마의 사회민주주의 정치인 오마르 또리호스(Omar Torrijos, 1929~1981)였다.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자본주의 체제를 폐절시키지 않고 그 체제를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정치이념이다. 새로운 사상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10대 청소년기에 사회민주주의를 접한 챠베스가 점차 사회민주주의에 경도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위에 서술한 내용은, 볼리바리안 혁명의 사상적 계보가 좌익민족주의와 사회민주주의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챠베스는 생전에 자신은 맑스-레닌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생전에 실현하려고 했던 사회주의는 맑스-레닌주의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좌익민족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사회민주주의를 접합시킨 ‘21세기 사회주의’였다. 챠베스가 사회주의라는 용어 앞에 21세기라는 수식어를 덧붙인 까닭은 21세기 사회주의와 20세기 사회주의를 구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챠베스의 시각에서 보면, 20세기 사회주의는 맑스주의(Marxism)를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레닌주의(Leninism)를 접합시킨 사회주의이고, 21세기 사회주의는 좌익민족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사회민주주의를 접합시킨 사회주의다. 챠베스의 21세기 사회주의는 1991년 12월 소련이 무너진 후 맑스-레닌주의의 사상적 혼란기에 출현한 변이사상이다.
21세기 사회주의라는 변이사상을 창시한 사람은 하인쯔 디잇트리히(Heinz Dieterich)다. 도이췰란드 태생 사회정치학자인 그는 메히꼬(Mexico)로 이주해 활동하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이념 지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챠베스는 하인쯔 디잇트리히가 창시한 변이사상을 받아들였다. 챠베스가 주장한 21세기 사회주의를 챠비스모(Chavismo)라고 부른다. 볼리바리안 혁명의 사상적 기초는 맑스-레닌주의가 아니라 챠비스모다.
세계혁명사의 관점에서 보면, 챠비스모는 맑스-레닌주의에서 이탈한 수정주의(revisionism)다. 맑스-레닌주의는 수정주의를 배척한다. 세계혁명사에서 맑스-레닌주의 대 수정주의의 대립과 갈등은 정통과 이단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맑스-레닌주의 국가가 아니라 김일성-김정일주의 국가인데, 맑스-레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수정주의를 반대, 배격한다. 베네수엘라와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은 조선이 두 나라 관계를 동맹관계로 발전시키지 않았던 까닭이 거기에 있다.
챠베스는 1975년 베네수엘라 군사학원을 졸업하고 베네수엘라군 하급 장교로 임관되었다. 그는 1977년 베네수엘라 북동쪽 밀림지대에서 벌어진 전투에 통신장교로 참가했다. 그 전투는 붉은기당(Red Flag Party) 소속 좌익유격대와 베네수엘라군 진압부대가 충돌한 교전이었다. 붉은기당은 1970년에 창설된 좌익정당인데,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베네수엘라 우익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무장투쟁을 계속했으나, 그들의 무장투쟁은 고립상태에서 벌어진 소규모 무장투쟁이었으므로 베네수엘라 인민의 지지를 받기는커녕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 챠베스가 집권한 이후 붉은기당은 그를 ‘파시스트(fascist)’라고 맹렬히 비난하면서, 볼리바리안 혁명을 배척하였다. 베네수엘라의 맑스-레닌주의 정당들이 볼리바리안 혁명을 배척한 이유는, 그 혁명이 수정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2. 좌익군사정변과 혁명전쟁을 동일시한 오류
챠베스-하르넥커 대담에서 챠베스는 자신이 베네수엘라 군사학원 재학 시절에 중국 혁명가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저작물들을 읽었는데, 특히 인민과 혁명군의 관계에 관한 사상을 배웠다고 하면서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혁명군이 인민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이 회고담은 챠베스가 마오쩌둥의 인민전쟁론을 학습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마오쩌둥의 인민전쟁론은 지구전과 유격전을 결합시킨 혁명전쟁전략이다.
챠베스-하르넥커 대담에서 챠베스는 자신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 씨몬 볼리바르(1783~1830), 호세 안또니오 빠에즈(Jose Antonio Paez, 1790~1873), 나폴레옹 보나빠르뜨(Napoleon Bonaparte, 1769~1821), 하니발(Hannibal, 기원전 247~183)의 전쟁사와 전쟁전략에 관한 여러 서적들을 탐독했다고 말했다. 클라우제비츠는 프러시아의 전쟁사가이고, 볼리바르는 베네수엘라의 독립영웅이고, 빠에즈는 베네수엘라의 군사 전략가이고,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전쟁영웅이고, 하니발은 고대 카르티지(Ancient Carthage)의 전쟁 영웅이다.
챠베스-하르넥커 대담에서 챠베스는 클라우데 헬러(Claude Heller)가 쓴 ‘사회변화의 동인으로서의 군대(The Army as an Agent of Social Change)’라는 책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고, 하씬또 뻬레스 아르까이(Jacinto Perez Arcay, 1935~2021)의 저서를 읽으면서 전쟁전략에 관해 배웠다고 말했다. 클라우드 헬러는 메히꼬의 외교관이고, 하씬또 뻬레스 아르까이는 베네수엘라의 군사 활동가이며 역사가다.
위에 서술한 내용을 보면, 챠베스가 군사학원 재학 시절에 전쟁사와 전쟁전략을 집중적으로 학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는 그가 어떤 전쟁사와 어떤 전쟁전략을 학습했는가 하는 것이다.
세계혁명사를 보면, 맑스주의는 1871년 3월부터 5월까지 계속된 프랑스 빠리꼬뮌(Paris Commune)을 중시하고, 레닌주의는 1917년부터 1922년까지 5년 동안 계속된 로씨야 혁명전쟁을 중시하고, 마오사상(Maoism)은 1927년부터 1949년까지 22년 동안 계속된 중국 혁명전쟁을 중시하고, 주체사상(Juche Idea)은 1932년부터 1953년까지 21년 동안 계속된 조선 혁명전쟁을 중시한다. 세계혁명사는 혁명이 계급투쟁과 반제투쟁으로 전개되며, 계급투쟁과 반제투쟁의 최고 발전단계에서 혁명전쟁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입증하였다.
그런데 챠베스는 빠리꼬뮌, 로씨야 혁명전쟁사, 중국 혁명전쟁사, 조선 혁명전쟁사를 학습하지 않고, 비혁명적인 전쟁사를 학습했고, 혁명전쟁전략이 아니라 비혁명적인 전쟁전략을 학습했다. 그가 군사학원 재학시절에 학습한 혁명전쟁전략은 마오쩌둥의 인민전쟁전략이 전부였다.
군사학원 재학 시절에 비혁명적인 전쟁사와 비혁명적인 전쟁전략을 집중적으로 학습한 그가 군사정변(coup d’État)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관심 속에서 그는 혁명전쟁과 군사정변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좌익군사정변은 혁명전쟁의 구성부분으로 될 수 있지만, 좌익군사정변과 혁명전쟁을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다. 좌익군사정변과 혁명전쟁을 동일시할 수 없는 이유, 다시 말해서 좌익군사정변과 혁명전쟁의 근본적인 차이는 혁명적 당을 건설하였는가 아니면 건설하지 못했는가 하는 중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좌익군사정변은 혁명적 당을 건설하지 않고 혁명군이 단독적으로 일으킬 수 있지만, 혁명전쟁은 반드시 혁명적 당의 정치적 지도와 군사전략적 방침을 받는 혁명군에 의해 일어난다. 세계혁명사는 혁명가들이 혁명적 당을 건설하였는가 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것이 혁명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문제로 된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로 보여준다. 혁명적 당을 건설하지 못해, 혁명적 당의 정치적 지도와 군사전략적 방침을 받지 못한 혁명군은 혁명전쟁에서 패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혁명전쟁은 혁명적 당의 대중적 지지 기반 위에서 전개되는 무장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사학원 재학시절에 챠베스는 혁명적 당을 건설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혁명군을 비밀리에 조직해 무장투쟁(좌익군사정변)을 할 생각만 했다. 군사학원을 졸업하고 하급 장교로 임관된 챠베스는 좌익군사정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장병들을 규합해 베네수엘라 인민해방군이라는 명칭의 혁명군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1982년 12월 17일 챠베스는 베네수엘라 인민해방군을 혁명적 볼리바리안운동-200이라는 명칭의 혁명군으로 확대, 개편했다.
3. 체 게바라의 실패를 되풀이한 챠베스
챠베스가 베네수엘라 인민해방군을 혁명적 볼리바리안운동-200으로 확대, 개편한 때부터 약 10년이 지난 1992년 2월 4일 챠베스는 좌익군사정변을 일으켰다. 베네수엘라군 육군 10개 대대(6,000여 명)가 좌익군사정변에 참가했다. 챠베스의 혁명군은 전차와 헬기로 중무장하였다. 혁명군 주력부대는 수도 까라까스로 진격해 싼 까를로스(San Carlos) 군사 기지를 신속하게 점거했다. 다른 혁명군 부대들은 지방 도시들인 마라까이보(Maracaibo), 발렌씨아(Valencia), 마라까이(Maracay)를 점령했다. 하지만 혁명군은 대통령 관저인 미라플로레스궁(Miraflores Palace)을 점거하지 못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까를로스 안드레스 뻬레스(Carlos Andres Perez, 1922~2010)는 혁명군이 진격해온다는 소리를 듣고 황망히 피신해 체포를 면했다.
혁명군과 진압군의 전투는 4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챠베스는 베네수엘라 인민들이 좌익군사정변을 지지해줄 것으로 예상했지만, 베네수엘라 인민들은 좌익군사정변을 외면했다. 인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좌익군사정변은 정치적으로 고립된 반란으로 전락하게 된다. 좌익군사정변에 대한 베네수엘라 인민들의 냉담한 반응을 보고 실망한 챠베스는 좌익군사정변이 나흘째 되던 날 아침, 베네수엘라군 수뇌부에 투항의사를 밝혔다. 그는 반란군 괴수로 체포되었다.
챠베스의 좌익군사정변이 실패한 까닭은, 그가 혁명적 당을 건설하지 않고, 혁명군을 조직해 무장투쟁에 나섰기 때문이다. 챠베스의 실패는 라틴 아메리카의 저명한 혁명가 에르네스또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1928~1967)의 실패를 되풀이한 것이다. 체 게바라는 1966년 말 유격대원 50여 명을 이끌고 볼리비아 밀림 속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였지만, 혁명적 당을 건설하지 않고 무장투쟁을 벌인 탓에 볼리비아 농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지 못했다. 체 게바라의 좌익유격대가 인민의 외면 속에서 완전히 고립된 사정을 간파한 미제국 중앙정보국(CIA)은 군사작전지휘관 펠릭스 로드리게즈(Felix Rodriguez)를 현지에 급파했다. 로드리게즈의 지휘를 받은 볼리비아 토벌군은 체 게바라의 좌익유격대를 포위, 공격해 궤멸시켰다. 치열한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볼리비아 토벌군에 체포된 체 게바라는 현지에서 살해당했다.
체 게바라는 전사하기 6년 전인 1960년 12월 3일 평양을 방문했다. 김일성 주석은 체 게바라에게 조선인민혁명군의 항일혁명전쟁 경험을 이야기해주면서 “라틴 아메리카 혁명은 매우 중요하며, 꾸바는 그 혁명의 중심에 있다. 혁명은 인민들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실현하려고 했던 라틴 아메리카 혁명은 인민들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좌절되었다. 체 게바라의 좌익유격전은 밀림에서 고립된 탓에 좌절했고, 챠베스의 좌익군사정변은 도시에서 고립된 탓에 좌절했다.
1992년 2월 베네수엘라군 진압부대에 체포된 챠베스는 방위를 위한 인민권력부 청사로 끌려갔다. 청사 앞에서 대기하던 취재기자들이 그의 주변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챠베스는 텔레비전 생방송 카메라 앞에서 당당한 어조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내가 지금은 투항했으나, 책임을 지겠다.” 이 짤막한 발언은 좌익군사정변에 냉담했던 베네수엘라 인민의 마음을 흔들었다. 베네수엘라 인민은 챠베스의 발언을 비록 “지금은” 혁명에 실패했지만 앞으로 언젠가는 “혁명의 책임을 완수하겠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베네수엘라 인민은 실패한 혁명가의 눈동자에 희망의 빛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챠베스는 군사재판을 받고 수감되었다. 좌익군사정변에 참가한 혁명군 장병 약 300명도 체포, 수감되었다. 1992년 11월 27일 혁명적 볼리바리안운동-200을 지지하는 청년장교들이 제2차 좌익군사정변을 일으켰으나 그것도 실패했다.
두 차례의 좌익군사정변이 모두 실패한 가운데 감방에 갇힌 챠베스는 좌익군사정변이 실패한 원인을 놓고 사색과 고민을 거듭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감방에서 계속된 사색과 고민은 그의 생각을 변화시켰다. 챠베스는 자신이 투옥된 때로부터 약 10년이 지난 후 하르넥커와 대담하면서 감방에서 자신에게 어떤 사상적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는 좌익군사정변이 실패한 이후 “무장투쟁을 계속하려는 생각을 접었다”라고 말했다. 이런 사정은 수감생활 중에 그가 자신의 혁명노선을 무장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을 말해준다.
4.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과 평화적 정권 교체
1994년 3월 26일 챠베스는 2년간의 수감생활 끝에 풀려났다. 출감한 이후 그는 부패하고 식상한 기성 정객들과는 전혀 다른 참신하고 책임적인 정치활동가의 모습으로 베네수엘라 인민 앞에 다시 나섰다. 베네수엘라 인민들, 특히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원주민을 비롯한 기층 민중은 참신하고 책임적인 정치활동가의 출현을 환영했다.
수감생활 중에 자신의 혁명노선을 무장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전환시킨 챠베스는 마땅히 혁명적 당부터 건설하는 것으로 자기의 정치활동을 시작해야 했다. 그는 혁명적 당을 건설하였을까? 출감한 후 3년 뒤에 챠베스가 건설한 것은 ‘제5공화국 운동’이라는 명칭의 진보적 대중정당이다. 그는 기존 혁명적 볼리바리안 운동-200을 기반으로 하여 1997년 10월 21일 ‘제5공화국 운동’이라는 명칭의 진보적 대중정당을 건설했다.
혁명적 당을 건설하고 그것을 중핵으로 하는 진보적 대중정당을 건설할 수도 있고, 진보적 대중정당을 먼저 건설하고 혁명적 당을 나중에 건설할 수도 있는데, 챠베스는 혁명적 당을 건설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계혁명사는 혁명적 당이 혁명을 이끌어가는 기관차라는 사실을 증언한다. 혁명적 당이라는 기관차가 없으면, 진보적 대중정당이라는 열차를 혁명의 궤도로 이끌어갈 수 없다. 혁명적 당이 존재하지 않으면, 혁명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1997년 10월 21일에 건설된 ‘제5공화국 운동’은 1998년 12월 6일에 실시될 것으로 예정되었던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의 일정에 맞춰 급조된 정당이었다. 진보적 대중정당을 제대로 건설하려면 오래 기간 정치사업과 조직사업을 전개하면서 대중적 지지기반을 축성해야 하는데, 대선 일정에 맞춰 급하게 건설하면 대중적 지지 기반을 견고하게 축성할 수 없다. ‘제5공화국 운동’은 베네수엘라 정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참신한 정치활동가 챠베스에 대한 대중의 인기를 동인으로 하여 건설된, ‘기초체력’이 부실한 정당이었다.
1998년 12월 6일 베네수엘라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제5공화국운동’의 대선후보로 출마한 우고 챠베스와 ‘베네수엘라 프로젝트’(우익선거연합당)의 대선후보로 출마한 엔리끄 쌀라스 뢰머(Henrique Salas Römer)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3,673,685표(56.20%)를 득표한 우고 챠베스는 2,613,161표(39.97%)를 득표한 엔리끄 쌀라스 뢰머를 많은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대선 승리의 요인은 ‘제5공화국 운동’의 조직역량보다도 챠베스에 대한 대중적 인기였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챠베스는 1999년부터 볼리바리안 혁명을 시작했다. 볼리바리안 혁명은 대선 승리로 시작된 혁명이다. 선거를 통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볼리바리안 혁명은 매우 불안정하게 출발하였다.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는 낡고 썩은 사회를 새롭고 자주적인 사회로 교체할 수 없다. 낡고 썩은 사회체제가 새롭고 자주적인 사회체제로 넘어가는 이행과정이 평화적으로 진전될 수 없다는 사실은 세계혁명사가 입증한 혁명의 진리다.
5. 아옌데의 전철을 따라간 챠베스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한 챠베스는 칠레의 저명한 사회주의 정치활동가 쌀바도르 아옌데(Salvador Guillemo Allende Gossens, 1908~1973)의 전철을 따라갔다. 아옌데는 1970년 9월 4일에 실시된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1,070,334표(36.1%)를 얻어 1,031,159표(35.2%)를 얻은 경쟁후보를 아슬아슬하게 따돌리고 신승했다. 아옌데 정권은 ‘사회주의를 향한 칠레의 길(Chilean Path to Socialism)’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사회주의적 정책을 정력적으로 추진했으나, 1973년 9월 11일 미제국의 사주를 받은, 당시 칠레군 합참의장 아우구스또 삐노체(Augusto Pinochet, 1915~2006)가 일으킨 우익군사정변으로 맥없이 무너졌다. 삐노체의 반란군이 칠레 싼티아고에 있는 대통령궁을 포위했을 때 아옌데 대통령은 라디오 생방송을 통해 칠레 인민에게 마지막으로 고별연설을 하였다. 고별연설을 마친 그는 대통령궁 2층에서 반란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반란군의 흉탄을 맞고 쓰러진 그의 피 묻은 손에는 꾸바 혁명가 피델 가스뜨로(Fidel Alejandro Castro Ruz, 1926~2016)에게서 선물로 받은 AK-47 자동보총이 들려있었다. 아옌데가 최후의 순간에 쓰고 있었던 검은 뿔테 안경은 안경알이 깨진 채 부러진 반쪽만 남아 오늘도 칠레 혁명의 뼈아픈 좌절 경험은 말해주고 있다.
아옌데는 전사하기 4년 전인 1969년 5월 평양을 방문하였다. 당시 그는 칠레 사회주의당 대표이며 상원의원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아옌데를 “미제국주의를 반대하여 한 전호에서 함께 싸우는 전우”라고 부르면서 반제투쟁은 종국적으로 무장투쟁으로 전개되므로 군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옌데는 선거로 집권한 후 자신의 정치활동을 칠레군의 자주의식화 사업에 집중시키지 못했다. 백악관의 사주를 받은 칠레군은 아옌데가 열어놓은 “사회주의로 향한 칠레의 길”을 무참히 짓밟았다.
혁명은 선거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혁명이 민중항쟁과 혁명전쟁의 통합에 의해 일어난다는 세계혁명사의 교훈은 전 세계 혁명가들 공인한 혁명의 과학적 진리이며, 혁명의 고유한 발전법칙이다.
챠베스 집권기에 ‘제5공화국 운동’은 볼리바리안 혁명을 지지하는 여러 정치세력들과 사회단체들을 결집해 당세를 확장했다. 그렇게 되어 챠베스는 2008년 3월 14일 ‘제5공화국 운동’을 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United Socialist Party of Venezuela)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챠베스가 영도한 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은 스스로를 “혁명적 과정의 정치적 전위대(political vanguard of the revolutionary process)”로 자처하였다.
챠베스 집권기에 베네수엘라에서 사회주의적 정책들이 실시되었고, 사회주의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자유롭게 사용되었다. 그래서 진보적 대중정당의 당명을 통합사회주의당으로 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 정당 활동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는 한국에서 사회주의당이라는 명칭을 가진 진보적 대중정당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6. 델씨 로드리게즈는 트럼프의 장난감
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 당원은 2024년을 기준으로 약 424만 명이고, 베네수엘라 인구는 2025년을 기준으로 약 2,851만 명이다. 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 당원은 베네수엘라 총 인구의 약 15%를 차지한다. 이런 사정을 보면, 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이 대중적 지지 기반을 견고하게 축성한 것처럼 생각된다.
또한 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은 베네수엘라 의회 285석 중에서 219석을 차지했고, 베네수엘라 주지사 23석 중에서 22석을 차지했고, 베네수엘라 시장 335석 중에서 285석을 차지했다. 이런 사정을 보면, 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이 집권당으로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한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수치들은 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진면목은 수치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 알 수 있는 법이다. 미제침략군이 베네수엘라를 무력 침공하고, 마두로 대통령과 영부인을 체포, 납치하는 만행을 저지른 직후, 베네수엘라 통합사회주의당의 당원 400만 명은 전국적 범위에서 거리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 미제국을 규탄하는 격렬한 반미투쟁을 벌였어야 정상인데, 뜻밖에도 잠잠했다. 미제국의 무력 침공과 납치 만행을 뻔히 보고서도 반미투쟁을 하지 못하는 당원이 400만 명이 아니라 4,000만 명이 있다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2026년 1월 22일 영국 언론매체 ‘가디언’에 충격적인 보도기사가 실렸다. 보도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베네수엘라 부통령이었던 델씨 로드리게즈(Delcy Rodriguez)는 마두로 대통령이 뉴욕으로 납치된 직후 베네수엘라 임시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그의 친오빠인 호르헤 로드리게즈(Jorge Rodriguez)는 현직 베네수엘라 국회의장이다. 그런데 그 두 남매는 2025년 10월부터 중동 국가 카타르(Gatar)의 왕족을 중재자로 하여 백악관과 비밀연락을 계속해왔다.
2) 베네수엘라 내무-법무-평화부 장관인 디오스다도 까베요(Diosdado Cabello)도 미제침략군이 마두로 대통령과 영부인을 체포, 납치하기 몇 달 전부터 백악관과 비밀연락을 계속해왔다.
3) 베네수엘라 국가 수뇌부와 백악관 사이에서 비밀연락을 자임한 카타르 왕족은 트럼프에게 4억 달러(약 5,600억 원)짜리 초호화 항공기 보잉 747-8을 선물로 상납한 종미인사인데, 델씨 로드리게즈는 그런 종미인사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4) 델씨 로드리게즈는 오래 전부터 미제국의 석유재벌 총수들과 잘 알고 지낸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델씨 로드리게즈는 에이모스 글로벌 에너지(Amos Global Energy) 최고경영자 알리 모쉬리(Ali Moshiri)와 셰브론(Chevron) 최고경영자 마이크 월스(Michael K. Wirth)와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5) 2025년 10월 델씨 로드리게즈는 마두로 대통령이 하야하면 자신이 임시정부 대통령에 취임하는 문제를 카타르 왕족을 통해 백악관에 제안하려고 시도했다.
6) 2025년 12월 델씨 로드리게즈는 비밀연락을 통해 “나는 준비되었다. 마두로는 물러나야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나는 (미제국에) 협력하겠다”라는 자신의 의사를 백악관에 전했다.
7) 미제침략군이 베네수엘라에 쳐들어가 마두로 대통령과 영부인을 체포, 납치하였을 때, 델씨 로드리게즈는 베네수엘라의 휴양지 마르가리타섬(Margarita Island)에서 때 아닌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8) 트럼프는 2026년 1월 24일 ‘뉴욕포스트’가 단독 보도한 대담기사에서 “우리는 (베네수엘라의) 신임 대통령과 아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 여성은 아주 멋졌다(She’s been terrific)”라고 말했다.
위에 서술한 충격적인 보도내용을 보면, 미제국이 2025년 9월 방대한 규모의 침공 무력을 베네수엘라 인근 까리브해에 전전 배치해놓고 폭격훈련과 상륙훈련으르 감행하면서 겁박하자 죽음의 공포를 느낀 베네수엘라 부통령, 국회의장, 내무-법무-평화부 장관은 자기들의 구차한 목숨을 건져보려고 미제국에 투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볼리바리안 혁명의 수뇌부를 차지한 겁쟁이들, 배신자들, 투항주의자들은 볼리바리안 혁명을 지켜야 할 위기상황에서 조국과 혁명을 배반했고, 베네수엘라 인민을 기만, 농락했다. 그들은 트럼프의 장난감이다. 반제투쟁으로 조국과 혁명을 수호해야 할 볼리바리안 혁명의 수뇌부가 미제국의 무력침공 위협 앞에서 굴복, 투항한 것은 볼리바리안 혁명이 왜 좌절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해준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