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 비전향장기수 박희성 선생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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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산 작성일 24-11-01 18:05 조회 192 댓글 0본문
비전향장기수 박희성 선생이 2024년 10월 27일 지병으로 서거하였다. 향년 89세. 박희성 선생은 26년 동안 감옥생활 후 출옥하여 제2차송환대상에 올라 신념의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고대하였다. 2008년부터 낙성대에서 지내면서 범민련 고문을 맡았다. 박희성 선생은 심성이 착하고 솔선수범하였고 인간관계에 사랑이 넘치는 고매한 성품을 지녀 주위 사람들이 아버치처럼 따랐다. 박희성 선생의 서거를 깊이 애도하며 비전향장기수 김영승 선생의 추모사와 추도식 사진, 황선 시인의 추모사와 추모시, 양희철 선생의 추모시를 게재한다. [민족통신 편집실]
고 박희성 선생의 생전 모습
글: 김영승
그리운 박희성선생을 추모하면서
박희성선생은 1935년 3월24일 평북 박천군에서 출생했다.
1950년 위대한 조국해방전쟁이 발생 했을 때 16세의 소년으로 인민군에 자원입대하여 양구 원산전투에 용감하게 잘 싸웠다.
그리하여 군공매달과 전사 영예훈장을 받고 18세에 화선입당하였다.
1953년에 최현군단장 산하 원산방어전투에 참가하였다가 7.27정전협정을 맞이 하여 흥남군관하교에 입학했다.
1957년에 재대후 트럭운전, 선전부 영화 이동 영사 기사로 일을 했다.
1959년에 중앙당에 소환으로 공작선 기관사로 일을 하면서 결혼도 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다.
1962년에 공작선 기관사로서 남쪽 화성에서 적들에게 체포되어 무기형을 받고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1988년 12월 21일에 양원진 강담선생들과 함께 광주감옥에서 출옥하게 되었다.
출옥 후 막노동을 하다가 제2차 송환을 신청했다. 그리고 2008년에 낙성대에 들어와 오늘에 이르렸다.
박희성선생은 낙성대에 있으면서 범민련 고문으로 있었다.
심성이 착하고 솔선수범하여 남다른 고매한 성품을 갖고 인간관계에 부드려운 사랑이 넘쳤다.
그리하여 주위 사람들로 부터 아버지처럼 존경을 받고 따랐다.
제2차송환대상에 올라 그리운 신념의 따뜻한 고향으로 송환운동을 가열치게전개했다. 이런 과정에 혈액암이란 판정을 받고 광화문 미대사관 앞에서 민중민주당 젊은 친구들과 철전지 원쑤인 저 간악한 미군철수 투쟁과 전쟁광인 윤석렬 타도 투쟁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섰다. 나이 많이 먹었다고 사진발 받는 앞줄에 서지 않고 뒷줄에 서서 미군철수 투쟁을 전개 하였다.
혈액암으로 암이 전신에 퍼져 척주가 심하게 아팠다.
몸상태는 뼈와 가죽만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운 고향의 아들이 보고파 송환을 기다리는 중에 아무도 모르게 낙성대 2층 독방에서 영원이 잠들고 말았다.
하층에 계신 양원진 선생이 거동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 지팡이를 짚고 올가서 보니 누워서 잠들고 말었다
이때가 2024년 10월 27일 오후 4시 30분 경이었다.
운명할 때 가족들이 지켜보는 것이 우리 조선의 도덕인데 오나가나 독방신세 값을 보는 안타까운 심정이다.
반드시 살아생전에 그리운 고향의 동철아들을 보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늘 말씀하신 것이 눈에 선한데 뜻을 이루지못하고 갔으니 이 원한은 조선인민의 철전지 원쑤인 미제를 몰아내는 것만이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운 박희성선생이시어!
일생에 단 한번의 호기회를 놓치면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리운 신념의 고향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후대들은 거울처럼 보기 바랍니다
이젠 모든 아픈 시름을 다 잊으시고 반미 자주투쟁의 길 위에서 영생하기 바랍니다.
빈소 서울 국립의료원 장례식장 207호
명칭 시민사회장
주체 양심수 후원회
추모식 2024년 10월 29일 오후 7시.
장지 2024년 10월 30일 백제 화장터에서 화장해서 서울 구기동 금선사
계좌 국민 206001-04-185430 김혜순
문의 김혜순 010-7339-7863. 심주이 010-3651-3272.
2024년 10월 28일 김영승 올림 .
글: 김영승
비전향 장기수인 박희성선생 신념의 고향에서 영면하소서
2024년 10월 29일 오후 7시에 국립장례예식장에서 많은 양심수후원회원들과 재야단체 인사들의 참석하에 시민사회장으로 진행되었다.
한결같이 그리운 고향의 아들 동철을 못보고 돌아가신 것을 제일 안타까워했다.
박희성선생은 단한번의 호기회를 놓친 것을 한으로 가슴에 새기면서 그래도 제 2차 송환 운동을 힘차게 벌리면서 반미반제 윤석렬 타도 분쇄하는 투쟁에 누구못지 않게 투쟁을 전개했다.
과정에 혈액암이란 진단을 받고 전신에 퍼져서 쓰러져 눈을 감을 때까지 반제 반미 자주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하다가 우리의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마는 한을 남기었다.
시민사회장 추모식장에 반미반제 자주통일과 반윤석렬 구호는 찾아볼 수 없어 한계를 들어냈나고 생각한다.
오늘의 전쟁전야의 조국의 정세속에서 어떠한 장례구호이던 박희성선생이 추구하며 살아오던 미제를 몰아내는 구호는 반드시 새겨야 함을 잊지 말아주기 바란다.
30일에는 백제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서울 구기동 금선사에 우리동지들 곁으로 함께 모시게 된다
직장관계로 끝까지 함께 못한점을 미안하게 생각하면서 수고들 많이했습니다.
글: 황선
16살 나이에 미제와 싸운다고 입대하셨다고 했습니다. 최현 부대의 막내였지만, 아무도 선생님에게 반말로 명령 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랬기 때문이었을까요? 선생님은 저에게도 말을 낮추지 않으셨습니다.
돌쟁이 아들을 두고 남파 되었을 때, 죽이거나 죽자고 내려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휴전되고 채 10년이 되지 않았을 시절 휴전선은 그닥 불변의 선이거나, 범하지 못할 선이 아니었습니다. 바닷길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북에서 30년, 감옥에서 30년, 감옥은 아니지만 계속 옭아맨 남쪽 땅에서 30년을 사셨습니다.
아들의 생일에는 미 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셨습니다.
그리웠지만 그것을 핑계로 무너지지 않으셨습니다.
대나무처럼 꼿꼿했지만, 솜처럼 포근하셨습니다.
절제된 악수로 인사하셨지만, 헤어질 땐 늘 가장 오래도록 뒷모습을 지키셨습니다.
박희성 선생님의 신념과 철학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의 양심과 도덕의 높이가 어디까지 고매할 수 있는지 선생님은 삶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인간의 위대한 양심을 비열한 분단이라는 제도가 수십년 짓밟았지만,
승리자는 더 많이 사랑한 선생님이십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황선: 추모시 "사랑"
첫 돌을 갓 지났을 때였다.
보고 돌아서도 또 보고픈 것이
부모의 마음이란 걸
아비는 너를 낳고야 알았다.
그렇게 강보에 쌓인 너를 두고
바다로 나설 때에 내 심장은
높뛰었다.
열 살 나이에 철모르게 뛰던 날에도
나라를 찾은 것이 그렇게 좋더라.
너에게도 그런 행복을 주고 싶었다.
분단된 나라가 아니라
외세에 신음하는 나라가 아니라
전쟁으로 고통받는 나라가 아니라
30년 감옥을 견디게 한 것은
아버지의 이름만으로는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을 주고픈 그 마음이었다.
그 길이 이렇게 긴 이별일 줄 몰랐지만,
그 길이 영영 이별하는 길인 줄 알았어도
나는 떠났을 것이다.
그것이 너와 네 어머니를 사랑하고
고향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우리의 방법이었다.
십대에 문을 나서 80년
아직도 돌아가지 못한 집
하루하루 그리워
사향가를 부른 나날
그러나 그리움은 사랑이다.
사랑은 책임이다.
죽는 날까지 진심으로 사랑했으니
아들아,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지금,
고마운 조국 고향하늘을 날고 있다.
글: 양희철
박희성 선생님을 보내며
참 좋으신 사람
소문도 없이 몰래 떠난 사람아
동철에게 부탁의 말씀도
동철엄마 수고로이 지내셨던 어젯날
62년을 어떻게 보내셨어요.
소식 없어 그 답답 얼마였을까요, 라고
어머니당이 자애로운 포근함 있어
날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내셨다?
그러실 줄 알았노라, 하셨을
훤칠하게 큰 동철
꿈에서 자주 봤다오.
어릴 적 아장아장 걸음마 할 적
다정했던 그 옛날에 모습을
여보!
당신을 사랑해요
나의 아들 동철의 장래에 대해
조금도 염려한 적 없었다오.
한없는 사랑 베풀어 주신
어머니당이 계시옵기에
나라의 배려 두텁기에
이웃의 염려 듬북 받았을 동철이에게
여보!
우리 가족 얼마나 정스러웠오.
희열, 희선 삼촌의 사랑의 손길
할머니 석병실, 나의 어머니 계시매
즐겁고 알찬 나날이었소.
손자에 내리사랑
조카에 가르침으로 인도하신 삼촌들
여기에 어머니당의 한없는 사랑이 함께
항상 우애 넘치는 우리집
나 또한 은혜로움의 어머니당의 사랑으로
감옥의 광란스런 탄압에도
미제의 악랄한 수작에도
옥리들의 몽리 무쇠몽둥이 휘둘림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노라.
뢰옥의 27년, 나날이 고통이였으나
뿌리치며 받아 안으며
지침 없이 싸워 이겼다오, 라고 하실
박희성 선생님!
그대 장하였오.
그대 빛났었오.
제부도 전투에서 산화해 가신 동지
우울할 때 기쁜 소식 있을 때
찾아가 보고 드리고 가르침 받으시고
매친 응어리 풀릴 때까지
담소하시다 깊은 밤 이슥할 무렵
집으로 오시던 님
박희성 선생님!
당신께서 보배로이 여겼던
당신의 딸 김지영을 어여삐 여기시사
은혜로움으로 보답하소서.
베푸심을 기쁨으로 여기시는
당신의 딸 김지영의 내일의 영광되게
그리고
당신의 염원하고 팠던 달성하고 말
하나되는 조국, 자주, 자립, 자강의 바탕 세우고
민족의 얼 만방에 휘날리게 하리다. 주체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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